92화
"여기, 꽃이 놓였던 테이블 자리에 뭔가 새겨져 있어!"
"무슨 그림인데?"
"음.... 글씨 같은데.. 아, 밑 에 이름이 쓰여 있다! '흰 브리오니 아'?"
'흰 브리오니아'라니. 대체 무슨
의미지?
"그렇다면…… 수성이네요."
차준이 작게 중얼거렸다.
"수성?"
"네. 몇몇 식물들은 신화적, 기능 적, 기호적 체계에 따라 특정 행성 과 연관성이 있다고 보기도 하거든 요. 흰 브리오니아는 수성에 속하는 식물이에요."
"요즘 아카데미에선 그런 것도 배 우나?"
나는 황망한 어조로 물었다. 요즘 은 이런 게 필수 상식인가?
"에이, 그럴 리가요. 이 책에 쓰여 있었어요."
그러면서 책을 가리키길래 들여다 보았지만, 내가 보기엔 여전히 알 수 없는 문자들뿐이었다.
"이 책에 힌트가 적힌 게 맞는 것 같은데. 나도 읽을 수가 없군."
우리의 대화를 뒤에서 듣던 전청 운이 거들었다. 그도 책의 내용이 보이지 않는 모양이다.
"흰 브리오니아와 관련된 내용이 이 책에 있었다면, 나머지도 힌트가 있겠지."
"유수야, 유라야! 거기 뭐 더 적혀 있는 건 없어?"
내 외침에 테이블을 살피던 쌍둥 이들이 휘휘 고개를 저었다. 차준이 책을 뒤지다 말을 덧붙였다.
"구리는... 아! 여기 적혀있네요. 금성과 상응하는 금속이라고."
"수성에 금성이라……. 천문학과 연관된 문제인가?"
수성에 금성이면 나머지 힌트도 각기 다른 행성을 뜻하는 걸지도 몰랐다.
우리는 남은 동상을 살피기 시작
했다.
하나는 성인 남성의 모양을 하고 있는 동상이었다. 갑옷을 걸치고, 허리춤에는 칼집을 달고 있었다.
특이하게도, 투구만큼은 온전한 황 금색이 었다.
"황금투구……. 이건 혹시, 아레스 인가?"
전청운이 의견을 냈다. 그리스 로 마 신화의 그 아레스를 뜻하는 것 같다고 말이다.
'황금투구의 아레스. 그런 별명이 있기도 했지.'
확실히. 투구만 금빛으로 강조한 데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으음……. 잠시만요. 비슷한 내용 을 본 것 같은데……
차준은 팔랑팔랑 책장을 넘겼다. 한참을 찾은 다음에야 발견할 수 있었다.
"아! 찾았어요! 화성과 연관된 것 같네요. 화성을 상징하는 신은 마르 스, 아레스 그리고 호루스거든요."
차준이 뒷내용까지 유추하자 힌트 는 모두 모였다.
수성의 흰 브리오니아, 금성의 구
리, 화성의 아레스까지.
'행성들과 방탈출이라……?'
[알림: 제한 시간이 10분 남았습 니다.]
알림이 살벌하게 울렸다.
다른 힌트가 없을까 싶어 눈을 감 고 스킬을 끌어올렸다.
'공간 간섭'
그러자 방 구석구석 모든 것이 지 나치게 선명하게 느껴지는 가운 데…… 기이한 것을 발견했다.
"유라야."
"응?"
"비켜봐!"
탕! 탕!
안유라가 황급히 피한 벽 뒤로 총 알이 닿았다.
"뭐 하는 거야, 언니? 벽을 부숴서 나가고 싶은 마음은 우리도 굴뚝같 지만 그렇게는……. 응?"
파스스.....
무너진 벽면 뒤에, 새로운 벽이 나 타났다. 단단한 금속으로 되어 흠집 조차 나지 않은 채로.
"저건......
그 벽에 양각으로 새겨진 문양이 꽤 낯익었다. 동그라미에 뿔이 달린 것처럼 반원이 겹쳐있었다.
황소자리.
별자리를 상징하는 문양이었다.
이제야 알겠다.
동그란 원형에, 두 발자국 거리를 두고 떨어진 채 그려져 있는 선. 그리고 정확히 12등분으로 나누어 진 빗금.
벽에 새겨진 별자리 문양까지.
'조디악……. 그러니까 황도대다.'
황도대.
황도 12궁. 태양이 지나가는 길. 여러 가지 명칭이 있지만, 연금술의 근간이 되는 개념이었다.
차준도 그것을 눈치챘는지 눈을 밝게 빛냈다.
"그 꽃 들고 저쪽 칸에 서 주세 요."
차준이 침착하게 지시했다. 쌍둥이 중 안유수가 흰 브리오니아를 들고 차준이 가리키는 곳에 가 섰다.
그 다음 순서대로 구리는 안유라 가 들고, 동상은 전청운이 든 채로차준이 말하는 곳에 섰다.
그러나 잠긴 문은 열리지 않았다.
"이상하다……. 알 수 있는 건 이 게 전부인데."
"뭔가 부족한 거지?"
[알림: 제한 시간이 5분 남았습니 다.]
이런. 서둘러야 했다.
"뭔가 더 생각나는 거 없어? 책에 더 적혀있는 건?"
"그, 그게……. 여기 적혀있는 걸 다 이해할 순 없지만…… 최대한 비슷하게 생각해보면…… 지금은 황도 12궁 중 전갈자리에 해당하는 날이고, 전갈자리는 화성에 상응하 는 별자리예요. 저기가 황소자리라 면 그걸 기준으로 나오는 몇 가지 경우의 수 중에서, 행성 상응성을 이용해서 여섯 번째 하우스의 지배 행성과 반대되는 속성을 사용하 면……
"알아듣게 얘기해봐!"
"태양을 상징하는 게 필요해요! 그 것만 있으면 황도대에 전부 나타낼 수 있어요!"
바짝 얼어서 외친다. 그렇단 말이 지.
다시 한번 흩어져 뭔가 우리가 놓 친 게 없나 살폈지만, 텅 빈 방 안 은 아무 것도 없이 휑하기만 했다.
[알림: 제한 시간이 3분 남았습니 다.]
"책! 책은! 책은 뭐 없어?"
"자, 잠깐만요. 여기 좀 더 적혀 있는데……
"시간이 얼마나 필요한데!"
안유라가 차준에게 거의 매달리다 시피 하면서 물었다.
"그게 어 여기는 한글이 랑 이상한 글자가 뒤섞여 있어 서……
"서둘러!"
이번에 우리가 클리어에 실패하면, 황금의 서는 영영 날아갈 수 있다.
'연금술사는 게이트 내에서 유효한 화학무기를 생산할 수 있는 유일한 직종이야.'
이번 기회를 놓치면 언제 다시 황 금의 서를 볼 수 있을지 모른다.
반드시 성공해야 한다!
"차라리 벽을 뚫는 게 더 빠르겠 군."
전청운이 검신에서 푸른 불꽃을 피워냈다.
"진심이야?"
"와, 진심인가 봐."
안 씨 쌍둥이들의 비아냥거림이 섞인 감탄을 뒤로하고, 전청운이 정 말 벽을 향해 칼질을 하기 시작했 다.
쿠구궁!
촤악! 키기기기긱!
벽이 긁히면서 살벌한 소리를 냈 다. 아주 약간 홈은 나지만 완전히 뚫긴 역부족이었다.
[알림: 제한 시간이 2분 남았습니 다.]
"차준. 태양을 상징하는 것들은 뭐 가 있지?"
"네? 어, 어어어……. 그러니까, 상 웅금속으로는 금이 있고, 천궁도로 는 사자자리고 그 외에도 창포나 목향, 포도 같은 식물들이……
별로 도움이 되는 정보는 아니었 다. 이 방 안에 그런 건 없었으니.
"태양이 어디 위치해야 하는데?"
"네? 그러니까 월요일 자정, 달, 불꽃의 힘이 강성한......
"알아들을 수 있게!"
"그, 그러니까……!"
차준이 허둥대며 말을 더듬고 있 었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압박감 때문에 그런 것 같았다.
"침착하게 얘기해봐. 괜찮아. 우린 전부 프로 헌터야. 좀 늦게 말해도 다 해낼 수 있어."
"네, 넵!"
그를 위로하자 그나마 좀 나아졌 는지 숨을 크게 들이쉬더니 말을 이었다.
"그, 그러니까 두 번째 다음은 여 섯 번째고 서로 상반되니까……. 어 어……. 저기요! 저쪽에 태양이 위 치하는 게 맞아요! 황도대에서 태 양이 사자자리 위를 지나야 사자자 리가 힘을 받고 그에 따라......
뒤에 덧붙이는 설명은 한 귀로 흘 려보냈다.
그래. 저기에 위치하면 된단 말이 지.
나는 아까부터 신경 쓰이던 게 있 었거든.
"다들 알아서 피해!"
내 외침에 다들 빠르게 방어 태세 를 갖췄다. 아까 안유라의 사태를 본 덕분에 신속함이 더욱 빛이 났 다.
[알림: 제한 시간이 1분 남았습니 다.]
탓, 발돋움을 하자.
다음 순간 나는 천장 근처를 날고
있었다.
샹들리에를 고정하는 뼈대와, 투명 한 실들이 보였다.
'과연. 이게 태양이었나.'
역시나. 이 샹들리에가 태양을 상 징하는 역할이었나 보다. 샹들리에 뒤편에 해바라기가 새겨져 있었다.
Sun flower. 그 이름대로 말이다.
차준이 말한 식물 중에 해바라기 의 이름은 없었으나, 그가 말하지 않았던가.
-몇몇 식물들은 신화적, 기능적,
기호적 체계에 따라 특정 행성과 연관성이 있다고 보기도 하거든요.
현대사회에서 해바라기만큼 기호 적으로 태양을 잘 나타내는 식물도 드물 테니.
"누나!"
누군가의 감탄을 배경음 삼아, 나 는 허공에 총구를 겨누었다.
"고개 돌려!"
탕!
'쏟아지는 불꽃!'
저 수많은 실들을 하나하나 잘라
낼 시간이 없었다. 샹들리에가 망가 져도 어쩔 수 없지!
콰과과광!
총알비가 좁은 방 안을 때렸다. 차 준은 안유수가 안아들고 재빨리 대 피했다.
"제정신인가!"
전청운이 큰소리로 외쳤다. 그야, 나도 이 좁은 곳에서 이런 범위 공 격을 쓸 줄은 몰랐지만.
별수 없었다.
쿠우우웅!
샹들리에가 힘없이 떨어지고 있었
다. 그대로 바닥에 닿게 할 순 없 지.
나는 몸을 날려 샹들리에를 붙잡 았다. 날카로운 쇠와 유리조각들이 손아귀를 파고들었지만 신경 쓸 겨 를이 없었다.
'공간 간섭!'
무생물은, 내가 간섭할 수 있는 범 위 안에 있다!
쿠웅!
샹들리에가 목표했던 지점으로 나 와 함께 이동했다. 그 육중한 무게 가 바닥에 닿으면서 거대한 굉음을 낸다.
그리고 동시에.
[알림: 제한 시간이 0분 남았습니 다.]
[알림: 제한 시간 안에 조건을 모 두 완수했습니다. 판정에 들어갑니 다.]
"허억, 허억……
차준이 창백한 얼굴로 숨을 몰아 쉬었다.
"이, 이게 헌터구나……
"아냐. 서하 누나랑은 비교하지 않 는 게 나을걸."
"그, 그렇군요."
다행히 다친 덴 없는 것 같았다. 차준을 감싼 안유수도 두어 군데 총알이 스친 것 말곤 멀쩡해 보였 다.
"죽는 줄 알았네!"
"피할 거라 믿은 거야."
내가 아는 저들이라면, 고작 이 정 도로 죽을 리가 없으니까.
[알림: 판정 결과가 나왔습니다.]
꿀꺽. 침을 삼켰다.
조건은 모두 완수했으나, 우리는 열린 문으로 나가진 못했다.
퀘스트에 쓰인 내용은 어디까지나 이 방을 '탈출'할 것이었으니. 논란 의 여지가 다분했기에 시스템도 판 정에 들어간 것이었다.
[알림: 판정 결과 방에서 '탈출'하 지 못했으나 황금의 서가 원했던 가치인 '지혜', '협력', '감응'을 모 두 만족했기 때문에. 클리어 처리되었습니다.]
[알림: 기여도순 2명을 산출합니 다.]
[알림: 산출 완료되었습니다.]
클리어의 기쁨을 누리기도 전에, 눈을 뜨자 나는 또 새로운 곳에 서 있었다.
" 여긴……
당연하게도 내 옆엔 차준이 서 있 었다.
그런데, 차준은 멍한 눈빛으로 앞 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시선을 따라가자…….
'석판?'
거대한 석판이 보였다. 은은한 불 빛이 석판을 비추고 있었고, 석판에 나는 알 수 없는 글자로 뭔가 빼곡 하게 적혀 있었다.
'저 애한텐 뭔가 보이나?'
뭔 뜻인지 몰라 심드렁한 나와 달 리 차준은 거의 턱이 빠질 것처럼 입을 벌리고 있었다.
"이, 이건……
"무슨 내용인데?"
"저게 안 보여요?"
보일 리가. 고개를 젓자 차준은 다 시 고개를 돌려 석판을 바라봤다.
"뭐라 설명해야 좋을지 모르겠지 만……
홀린 듯이 걸어 나가 석판 앞에 선다. 조심스러운 손길로 쓰다듬는 다.
"뭔가…… 뭔가, 절 끌어당기는 것 처럼……
이제 내 말은 들리지 않는 것처럼 차준은 멍하니 자기만의 세계로 빠 져들었다.
"훌륭한 인재구만."
"응. 연금술사가 되기엔……. 뭐?"
대꾸하다 보니 퍼뜩 정신이 들었 다.
" 테오도르……
애써 목소리를 죽여 외쳤다. 익숙 한 얼굴이 내 어깨 위에 떠 있는 게 아닌가!
태연한 얼굴의 테오도르였다. 물론 아주 작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