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시작이 게이트라곤 안 했잖아요-97화 (97/361)

97화

열광하는 사람들 틈바구니에서 나 홀로 이질감을 느끼고 있었다.

'세상이 타락하고 오염……. 이건 톨룩에 의해 생긴 오염을 말하는 건가?'

그렇다면 뒤에 따라오는 말은 가 히 충격적이었다.

'시간의 수레바퀴를 거꾸로 행하 라……

시간을 되돌리란 소리 같은데.

그건 마치…… 나를 가리키는 말 같지 않은가.

'내가 시간을 거슬러 온 이유 가…… 오염을 되돌리기 위해서라 고?'

하지만 내게 그런 힘이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당장 지금도 속수무책 으로 오염이 쌓이기만 하고 있는 데!

'대체, 왜 저런 소릴……

저 석판은 대체 어디서 난 것인데 저런 소리가 적혀있단 말인가.

아니, 저 석판부터가 이 사이비종 교에서 자체적으로 조작한 것은 아 닐까?

'그럴듯한 말로 사람들을 속이려는 거야!'

그래. 차라리 그 편이 훨씬 말이 된다. 저 정체 모를 석판이 날 암 시하고 있다는 것보단 말이다.

"저기, 학생."

그때 내 옆에서 누군가 말을 걸었 다. 순박한 인상의 노인이었다.

"학생. 얼굴이 창백한데. 몸이 좀 안 좋나?"

"아. 예. 좀 어지러워서요."

"나가서 좀 쉬고 오는 게 낫겠네."

사이비종교 집회에 있는 사람이라 고 믿기 어려울 정도로 정상적인 대화였다.

"네. 좀 쉬어야겠어요."

실제로 머리가 지끈거리고 있었다. 나는 사람들 사이를 헤치고 나가 밖으로 향했다. 복도엔 이 종교 관 계자 몇 명 빼곤 아무도 없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화장실이 어디인가요?"

"저쪽 복도로 쭉 가시면 나옵니 다."

건물 밖으로 새지 못하도록 감시 하는 건가? 자연스럽게 화장실을 물으면서 주변을 살폈다.

화장실 안에 들어가 문을 잠근 다 음, 눈을 감았다 뜬다.

'공간 간섭!'

순식간의 건물 내부가 파악되기 시작했다. 1층, 2층, 3층…….

'신도들이 모인 1층을 제외해도 생 각보다 내부에 사람들이 많아.'

하지만 내가 원했던 건 보이지 않 았다.

'이 내부에 헌터들을 가두는 시설 이 하나쯤은 있을 줄 알았는데.'

그런 시설로 추정되는 곳은 없었 다. 일단 일반 신자들도 오가는 곳 이라 조심하는 건가?

'중요 문서를 보관할 만한 곳은 어 디 일까……

몰래 들어가서 내용만 확인할 수 있다면, 큰 수확일 텐데 말이다.

머릿속으로 구조를 떠올리며 가장 그럴듯한 장소를 몇 군데 꼽았다.

'첫 번째는, 제일 꼭대기 충의 안 쪽 방.'

사람이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 고 이동한다.

다음 순간 눈을 떴을 때, 나는 그 곳에 서 있었다.

'고풍스러운 취향이네.'

오래된 중세의 교회처럼 꾸며놓은 내부가 꽤 가중스럽다.

누군지 몰라도 중요한 인물이 업 무를 보는 곳인지 고급스러운 책상 이 하나 놓여 있었다.

'서랍은…… 잠겨 있고.'

박살낼까, 말까. 고민이 됐다. 이걸 박살내면 누군가 침입했단 사실을 바로 알아차릴 텐데.

'그냥 가기엔 아쉽고.'

하지만 섣불리 행동할 순 없었다. 일단 다른 곳들도 마저 둘러본 다 음 결정하기로 마음먹었다.

'다른 빈방도 아마 비슷하겠지. 중 요한 문서를 찾아보긴 어려울 테 고.'

그렇다면…… 고위 관계자들 안면 이라도 알아두는 편이 나을 것 같 았다.

'아까부터 여러 사람들이 뭉쳐있는 곳이 있지.'

무슨 회의라도 하는 것처럼 말이 다. 그들이 하는 말이라도 훔쳐 들 으면 빈방을 터는 것보다 더 좋은 정보를 얻을 수 있을지도 몰랐다.

'그렇다면. 그 방에서 나누는 훔쳐 들을 수 있는 곳이 없을까……

용의주도하게도, 환풍구도 뭣도 없 는 방이었다.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뿐이다.

바닥에 쓰러지는 신도가 머리를 부딪치지 않게 살짝 붙잡았다.

'잠깐 빌리겠습니다.'

속으로 그렇게 말하면서 신도의 겉옷을 벗겨냈다.

이 종교에 깊이 관계된 사람은 이 신부복 비슷한 것을 입고 있었으니. 이걸 입고 고개를 숙여 얼굴을 가 리면 감쪽같을 거다.

고작해야 커피 심부름하는 신도를 주의 깊게 살피는 사람은 없을 테지.

겉옷을 걸치고 쓰러진 신도는 대 충 캐비닛 안에 구겨 넣었다.

잠깐 커피 심부름만 하고 온 뒤 옷을 도로 입혀주면 무슨 일이 있 었는지 모를 거다. 자기가 갑자기 쓰러진 줄 알지도 모른다.

가볍게 노크하고 트레이를 끌고 들어간다. 고개를 숙여 얼굴을 가리 고, 커피를 한 명 한 명에게 내려 놓는다.

"이번에 실험 결과가 나쁘지 않은

개체가 둘 있습니다."

"하지만 아직 한참 멀었습니다. 질 좋은 개체의 공급이 지속적으로 필 요한데……

귀를 쫑긋 세우며 무슨 얘기들을 나누는지 엿듣기 시작했다. 나를 투 명인간 취급하는 것처럼, 그들은 이 런저런 얘길 꺼내고 있었다.

길게 늘어진 테이블. 문에서 가까 운 자리부터 커피를 놓으며 움직이 자, 어느새 맨 끝에 닿았다.

제일 상석이다.

이 종교의 고위 관계자일 거다. 얼 굴이라도 봐두면 좋을 텐데.

커피를 놓자, 상석에 앉은 남자가 입을 열었다.

"내부 보안을 더 강화하는 편이 좋겠어요."

흠칫 놀란 티를 내지 않으려 애를 써야 했다.

'뭐지? 갑자기?'

게다가.

목소리가 귀에 익었다.

'이 목소리는……

장난기를 뺀 목소리였으나, 내겐

무척 익숙했다.

나는 떨리는 손을 뒤로 감추며 살 짝 고개를 들었다.

노랗게 탈색한 머리. 귀에 여럿 달 린 피어싱.

거기다 삐뚜름히 웃는 얼굴까지.

'이찬송.'

그래. 그 이찬송이었다.

내가 아는. 그 이찬송 말이다!

너무도 당황스러운 나머지, 이번엔 흠칫 굳을 수밖에 없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테이블에 앉은 남자 중 하나가 말 끝을 흐리자, 이찬송은 날 똑똑히 바라보면서 말을 이었다.

"말 그대로요. 내부 보안이 아주 형편없는 것 같아서요."

"죄, 죄송합니다."

영문도 모른 채 받는 타박에 다들 당황스러운 어조였다. 오직 나만이, 그 속내를 알았다.

이 방 안에 나와 그밖에 남지 않 은 것 같았다. 내가 아는 이찬송이 맞는 걸까?

흰 티셔츠에 찢어진 청바지를 입

고 껄렁한 말투를 구사하던 그는 어디로 가고.

내 앞에 앉아 있는 이 남자는 성 직자의 옷을 정갈하게 차려입고 오 만한 분위기를 뽐내고 있었다.

"뭐. 됐습니다."

이찬송이 커피잔을 집어 들고, 가 볍게 한 모금 넘긴다. 나는 그때까 지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

"커피 향이 좋네요."

달칵, 잔을 내려놓으며 그렇게 덧 붙인다.

그 말에 퍼뜩 정신이 들었다. 나는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트레이를 밀고 다음 사람에게 향했다.

그렇게 한 명, 한 명. 다시 커피잔 을 내려놓는 동안, 나는 떨리는 손 끝 때문에 커피를 쏟지 않도록 애 써야 했다.

겨우 서빙을 끝내고 탕비실로 돌 아왔을 때.

나는 혼란스러운 마음을 감출 수 가 없었다.

'왜 이찬송이 여기에?'

-찬송이는 가업을 잇는다 그랬던

거 같고. 사실 찬송이는 연락이 잘 안 되네.

다정 언니가 연수원에서 했던 말 이 머릿속을 스쳤다.

- 나도 잘 지내는 편. 가업 때문에 바쁘긴 하지만.

- 어떤 가업임까? 뭐 회사라도 물 려받는 검까?

- 그건 기업비밀〜.

뒤이어 이찬송과 김태병이 장난스 럽게 주고받았던 말들도 떠올랐다.

'물려받는다고 했던 가업이…… 이 거였나?'

사이비종교에서 고위직이 가업이 라니. 대체 뭐 하는 집이길래 그런 단 말인가.

아무리 헌터 업계가 어제의 적이 내일의 동료고, 어제의 동료가 내일 의 적이라지만.

적어도 톨룩의 침입 이후엔 해당 사항이 없는 말이었다.

이운우만 해도 으르렁거리는 사이 였으나 결국은 한 편이었고, 그건 변하지 않는 진리였다.

저번 주까지만 해도 함께 웃고 떠 들던 이찬송이, 지금까지 쫓아온 사 이비종교에서 한자리 해 먹고 있단 사실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이찬송……. 싸한 구석이 있긴 해 도, 나쁜 녀석은 아니라 생각했는 데.'

내 사람 보는 눈은 영 꽝인 모양 이다. 새삼 회의감이 몰려왔다.

'새하나교는 비인간적인 일을 자행 하고 있다는 의심을 받고 있어. 실 제로 나도 목격했고.'

절뚝거리며 멍하니 걸어가던 박현 종의 모습이 아직도 선명했다.

'내가 안일했던 거지.'

이런 대규모 사이비종교인데, 내 주변에도 한 명쯤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해보지 못하다니.

'왜 나를 알아보고도 그냥 보내줬 는지 모르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가 우릴 배신했 단 사실이 변하진 않았다.

'다음에 마주칠 땐, 적으로 보겠구 나.'

한동안 멍하게 지냈더니 주변인들 의 걱정을 샀다. 아니라고 말하며 웃어도, 평소와 다른 내 모습에 다 들 안절부절못했다.

결국 혜원 언니가 다른 이들에게 까지 연락을 돌린 모양이었다.

"가자!"

"가자, 가자!"

내 앞에서 갖은 아양을 떠는 쌍둥 이들도 그 소식을 듣고 온 거겠지.

"너희 인터뷰하는데 내가 왜 가. 됐어."

"그래도! 와서 언니가 우리 봐주

"우린 힘도 나고 좋을 것 같은 데

아마 저건 핑계고, 그냥 내가 바깥 바람을 쐬며 기분전환이나 하길 바 라는 듯했다.

'어쩔 수 없네. 대충 맞춰줄까.'

날 걱정해서 이러는 건데, 매정하 게 거절하기도 좀 그랬다. 그리 고…….

'회귀 전의 이 애들을 아니까. 적 어도 이 둘은 새하나교랑 연관이 없겠지.'

내가 아는 한 쌍둥이들은 여러 번 인성 논란으로 기사가 났어도, 사이 비 논란은 없었다.

그나마 인성 논란도 연화도 게이 트에서 있었던 체육관 내분 탓에 크게 삐뚤어져 그랬던 거니까, 지금 은 그런 것도 없지 않을까?

"그래. 가자."

내가 별수 없이 항복하자 쌍둥이 들은 그렇게도 좋은지 '아싸!', '좋 아!' 하며 외쳤다.

나는 인터뷰나 화보 촬영을 일절 거절해온 터라, 이런 환경은 아주 낯설었다.

마스크로 대충 얼굴을 가리고 매 니저인 척 인터뷰 현장에 따라 들 어갔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청사의 마스코트로 떠오르고 있 는 분들이죠! 어렵게 모셨네요."

첫 시작은 아주 무난했다. 헌터들 인터뷰도 자주 실리는, 꽤나 이름이 있는 잡지사였다.

별것 아닌 내용들이 오고 갔다. 게 이트에 들어가지 않는 날엔 뭘 하 며 지내냐는 질문부터, 게이트에 들어갈 때 특별히 다짐하는 것이 있 는지 등등 말이다.

"두 분은 연화도 게이트에서 각성 해 활약하기 시작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요. 당시 17살이었던 두 분 이 이제 19살이고, 곧 성인이 되네 요."

인터뷰하는 사람의 말을 들으니 새삼스러워졌다.

'17살에서 18살로 넘어가던 때에 같이 게이트에 있었는데.'

이제는 어엿한 헌터가 되어 인터 뷰도 능숙하게 하는 모습을 보니, 어쩐지 뿌듯해졌다. 내가 키운 건아니지만 누군가의 성장을 옆에서 지켜보는 건 언제나 즐거운 일이니 까.

그 마음도 잠시.

"당시 양궁을 하셨다고 했죠?"

"네. 그랬죠!"

"그때는 국대도 아니었고, 양궁에 서 특별히 두각을 드러낸 적은 없 는데. 어떻게 레인저가 될 생각을 하셨어요?"

이것 봐라?

'말투가 좀 비꼬는 것 같은데.'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