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5화
"윤강백 길드장은?"
"윤강백 길드장님께선 상태가 위 중하셔서 바로 병원으로 이송됐습 니다. 긴급 수술 중입니다. 현재 길 드 내규에 따라, 윤강백 길드장 님 의대리는……
어둠이 깔린 붉은빛.
버건디라고 불러야 좋을까. 핏물처 럼 어두운 망토 자락이 휘날렸다.
"전청운 헌터가 맡게 됐습니다."
막 회의실에 전청운이 들어왔다. 게이트에서 나오자마자 곧장 달려 온 모양이었다.
전청운이 모두의 앞에 서서 작게 묵례했다.
홍염을 떠안은 젊은 청년의 모습 이었다.
'……피비린내가 나.'
전청운 본인도 부상이 상당하다는 뜻이다.
그 피 내음을 베테랑 헌터들이 눈 치채지 못했을 리 없지만, 아무도 언급하지 않았다.
"홍염의 길드장 대리를 맡게 된 전청운입니다. 상황이 긴박하니 게 이트 안에서 무엇을 봤는지 바로 설명 드리겠습니다."
그의 목소리가 잔뜩 갈라져 있었 다. 목소리를 내는 것만으로도 고통 스러울 것이 뻔하다.
"저 안은 화산 지대입니다. 마그마 가 바닥 사이로 끓고 실수로라도 닿으면 치명적인 부상으로 이어집 니다."
화산지대라. 까다롭기 그지없다.
"출현하는 몬스터들은 마족. 그 수 가 많지 않습니다. 그리고 저희가 마지막까지 싸웠던 자는……
이게 가장 중요한 대목이었다. 과 연 천하의 윤강백을 죽음 직전까지 몰아넣고, 3천5백 명가량의 헌터들 을 학살한 이가 누구인가?
"……전에 본 적 있는 몬스터였습 니다."
전청운이 사람들 틈바구니에 있는 날 응시했다.
"벨제부브."
제발 아니길 바랐던 이름이 불렸 다.
"연화도 게이트의 보스 몬스터였 던. 그 벨제부브입니다."
나는 철렁, 심장이 내려앉는 것 같 았다.
'결국, 그자가……
붉은 눈동자가 당장 눈앞에 있는 것처럼 선명했다.
"하지만 연화도 게이트를 클리어 하면서 죽이지 않았습니까!"
"그때 죽인 것은 투사체입니다. 전 쟁 게이트와 달리 기존 게이트에
나왔던 보스 몬스터들은 투사체였 으니까요."
누군가 목소리를 높이며 묻자 정 부 인사가 대답했다.
"투사체……라면?"
"일종의 분신 같은 겁니다. 본체보 다 훨씬 약한."
그 말에 잠시 침묵이 내려앉았다.
본신보다 약한 그 벨제부브에게도 쩔쩔매 연화도 게이트 클리어가 늦 어진 것 아니었던가.
'그때 벨제부브의 투사체를 죽일 때 함께했던 사람은 총 네 명. 나,
전청운, 김기택 그리고…… 순하 랑.'
전청운의 뒤편에 있는 순하랑도 안색이 좋지 않았다. 저 애에게도 끔찍한 기억으로 남아있겠지.
'불길한 예감이 맞았어.'
벨제부브가 등장한 것이다.
'날 찾으려고!'
회귀 전에 그가 전쟁에 관심 없던 것을 생각해보면 더욱 명확했다.
"2차 원정대를 꾸려야 합니다."
"하지만, 어떻게 말입니까? 윤강백 헌터도 당했는데 대체 누가……
"그럼 그냥 두고 봅니까? 하필이 면 위치도 서울과 멀지 않습니다."
"지금 다시 헌터들을 보내는 건 다 같이 죽자는 얘기밖에 더 됩니 까? 마침 연금술사 공방이 증원됐 으니 연구 결과를 좀 더 기다리는 게……
"하나의 전쟁 게이트라도 클리어 되지 않으면 적들의 본거지 역할을 할 겁니다!"
이런저런 의견들이 겹쳤다.
당장 빼앗긴 영토를 되찾아야 한 다고 주장하는 사람들과 좀 더 기 다려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팽팽하게 맞서 싸웠다.
' 벌써부터……
이렇게 분쟁이 생기다니. 머리가 아프다.
"우선은 사망자 명단을 파악하고 유가족들에게 사망 소식을 전하는 게 먼저입니다."
결국 내가 나서서 사태를 수습했 다.
"빠른 시일 내에 대책회의를 다시 열도록 하죠."
나는 전청운 쪽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홍염 길드장의 주도 하에요."
홍염의 길드장. 이제 그 직책이 전 청운을 나타내고 있었다.
응급실 앞에 기자들이 잔뜩 깔려 있었다. 관계자 외 출입을 금지했는 데, 어디서 냄새를 맡고 온 것인지.
" 수술은요?"
"아직 진행 중이다."
전청운이 수술실 앞을 지키고 있
었다. 순하랑과 함께였다.
'익숙한 조합이네.'
김기택이 없는 것만 빼면.
내 옆의 혜원 언니까지 합해서 연 화도 게이트 안에서 계속 붙어 다 녔으니 말이다.
"……많이 다쳤어?"
혜원 언니가 잔뜩 굳은 얼굴로 물 었다. 아까 회의 때부터 안색이 나 빴다.
전청운은 대답 없이 고개를 끄덕 였다. 절망 어린 얼굴이었다.
늘 무신경한 낯을 하던 전청운이
저런 표정을 하는 건 처음 봤다.
더불어, 언제나 굳건할 줄 알았던 윤강백이 무너진 것도 너무나 의외 였다.
'회귀 전 윤강백은 홍염의 길드장 자리는 유지했지만 대외적인 활동 은 대부분 전청운이 도맡아 했어.'
혹시 이번에도 비슷한 수순으로 흘러가는 걸까? 이대로 윤강백이 일어나지 못한다면…….
"전서호. 그 녀석에겐 연락했어?"
"둘은 사이가 좋지 않은 줄 알았 는데."
"사이가 좋은 건 아니지만, 그렇다 고 이 녀석이 쓰러지길 원하진 않 았을 거야."
혜원 언니의 말에 전청운이 알겠 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전부터 궁금했지만, 이 셋은 무슨 관계인 걸까.
'혜원 언니, 윤강백, 거기다 전서호 라……. 알 수 없는 조합인데.'
단순히 길드장끼리의 친분이라기 엔 간혹 전서호나 윤강백이나 묘한 타이밍에 혜원 언니를 언급할 때가 있었다.
전청운은 잠시 침묵했다.
전서호가 그에게 저지른 잘못이 뭔진 모르겠지만, 전서호와 마주치 기만 하면 잔뜩 얼었던 모습을 생 각해보면 좋은 기억은 아닐 듯했다.
"연락해도 소용없을 겁니다. 완전 히 자취를 감추셨거든요."
복도 저 너머에서 답변이 들렸다. 매끄러운 목소리.
"이운우."
그였다. 청사의 길드장이 된 이후 사적으로 만날 시간이 도통 없었는 데.
"확실히 하고 싶으셨는지, 길드 사 람들 연락도 전혀 받지 않으세요."
"청사의 길드장이 여긴 어쩐 일이 지."
청사의 길드장과 홍염의 길드장 대리가 나란히 섰다.
기묘한 광경이었다.
'한쪽은 전서호와 혈연 관계가 아 니지만 그가 아들처럼 키워냈고.'
시선이 이운우에게서 전청운 쪽으 로 향했다.
'한쪽은 핏줄이 이어진 조카지만 남보다 못한 사이라.'
그 둘이 나란히 서서 상대를 마주 하고 있으니 묘한 기분이 들었다.
이 둘을 마주 보게 해선 안 될 것 같은데, 명확히 꼬집어 마주 보지 말라고 할 수도 없는. 그런 답답한 상황이었다.
"제가 못 올 곳이라도 왔나요? 저 는 그저 윤강백 길드장님의 건강도 살피고, 또……
이운우가 뱀처럼 웃었다.
"워낙 그분께서 맡으신 일이 많았 던지라, 대책 회의를 열기 위해 길 드장님 대리이신 분께 양해를 구하 러 왔습니다."
이건 좀 불길했다. 오랜 세월 그와 함께했던 내가 장담하건대.
지금 이운우는, 악의에 차 있다.
'상대를 상처 입히고 싶어 하는 말 투.'
전청운과 이운우가 공식적으로 마 주한 적이 얼마나 된다고 이런 적 의를 품는가.
"무슨 양해."
"이번 대책 회의를 열 수 있는 권 한을 제게 양도해주시죠."
그건 선전포고에 가까웠다.
전략 회의가 윤강백을 중심으로
흘러가는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으 니, 주인이 없는 틈을 타 주도권을 빼앗겠다는 도전장 말이다.
아니나 다를까, 전청운의 무표정한 낯이 살짝 깨졌다.
"그럴 수 없다."
"지금 전청운 헌터께선 대책 회의 를 이끌어나갈 여력이 없으시지 않 습니까."
"아니. 해낼 수 있다."
"과욕은 화를 부르는 법입니다."
둘이 팽팽하게 맞섰다.
'그야 청사의 입장에선 둘도 없을
기회겠지.'
전서호에서 이운우로 길드장이 교 체되면서 청사는 꽤 많은 힘을 잃 었다.
'전쟁이 아무래도 경험이 더 많은 윤강백 위주로 돌아가면서 더더욱.'
이운우도 티는 안 냈지만 속으로 화를 많이 삼켰을 것이다.
'하지만 좀 더 정중한 방법도 있었 을 텐데. 이렇게 상대방의 적대감을 부추기는 건 이운우의 방식이라기 엔 거칠어.'
한마디로 그답지 않은 행동이었다.
"둘 다 그만."
혜원 언니가 중재했다. 그러나 둘 은 들은 체도 하지 않고, 여전히 으르렁거리고 있었다.
어쩔 수 없지.
"수술 결과가 나온 모양이야."
내 말에 다들 고개를 휙 돌렸다. 나는 두 눈을 떠 눈동자 안에 감도 는 푸른빛을 보여줬다.
공간 간섭.
수술실 안쪽에서부터 이곳으로 걸 어 나오는 의사가 느껴졌다.
"곧 의사가 나올 거야."
슈우욱.
말이 끝나자마자 수술실 문이 열 렸다.
피곤한 기색이 역력한 의사가 수 술 결과를 알렸다.
"수술은 무사히 끝났습니다."
"감사합니다……!"
혜원 언니가 눈물을 머금고 감사 인사를 했다.
'홍염은 성배의 지분율이 크니까. 수술이 실패할 일은 거의 없을 거 라 생각하긴 했지.'
그래도 결과를 직접 들으니 한층
더 안심이 됐다.
"마취가 끝나면 깨어나실 겁니다."
"다행이군요."
이운우도 윤강백의 죽음을 바란 건 아니었는지 진심 어린 어조로 말을 얹었다.
전청운은 말없이 서 있었다.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처럼 위태롭 게.
"감사합니다."
그는 한참 뒤에야, 그렇게 말하고 뒤돌아섰다. 그러곤 이운우에게 작 게 말을 걸었다.
"……대책 회의가 열리는 시점까 지 길드장님께서 깨어나지 않으시 면, 회의는 청사 쪽에 맡기도록 하 겠다."
"그 말씀은?"
"권한 양도가 아니다. 회의를 여는 건 홍염이 하되, 그 진행만 청사 측에서 맡는 거다."
이운우도 그 정도면 만족스러운 거래였는지 웃으며 수긍했다.
'한계를 느낀 모양이지.'
전청운 스스로 실감한 것이다.
윤강백이 완전히 치료되기 전까지,
그가 온전히 회의에 집중할 수 없 음을.
'융통성이 없는 사람이니까.'
권력 유지를 위해서 인류의 미래 가 달린 회의를 그런 식으로 낭비 해선 안 된다고 생각했겠지.
"자세한 얘기는 따로 나누시죠."
전청운이 고개를 끄덕이고 두 사 람은 자리를 떴다.
이 다음은 저 둘이 알아서 합의를 보겠지.
"언니. 우리도 돌아가죠."
"……그래야지."
혜원 언니가 좀처럼 떨어지지 않 는 걸음을 떼었다. 그러나 우리도 돌아가야 했다. 지금은 전쟁 중이 고, 우리는 각자 맡은 바가 있었으 니까.
슬픔에 빠져있을 시간이 없었다.
그래. 나도 오늘밤 가야 할 곳이 있었다.
' 테오도르.'
톨룩의 배신자를 낚기 좋은 밤이 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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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터님! 이제 오셨네요."
차준이 날 맞이했다. 테오도르랑 단둘이 만나는 줄 알았는데?
차마 차준 앞에서 묻진 못하고 떨 떠름한 표정을 짓자 테오도르가 걱 정 말라며 웃었다.
"이렇게 빨리 개발할 수 있었던 데에는 저 애의 도움이 컸다. 역시 그 자질을 내가 알아봤다니까."
"벼, 별거 아닌걸요. 헤헤."
나름 사제지간이라고, 둘이 쿵짝이 잘 맞는 모양이다.
"그래서. 연구 결과물은?"
"여기 있지!"
테오도르가 가리킨 곳을 바라보니, 꽤나 낯익은 기계장치가 있었다.
"……전화기?"
"그래! 예전엔 그렇게 불렸다지?"
요즘 쓰는 휴대폰이 아니라 예전 에 집집마다 있었다는 구식 전화기 다.
'휴대폰 어플 모양의 그 전화기잖 아.'
번호를 누르는 본체가 있고 거기 에 돌돌 말린 선으로 수화기가 연결된 유선 전화기 말이다. 딱 그렇 게 생겼다.
'……너무 오버테크놀로지라서 오 히려 로우테크놀로지처럼 보이게 된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