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6화
알 수 없는 원리였다. 한발 앞선 발명품이 왜 이렇게 구식의 형상을 하고 있는 건지.
찜찜한 마음을 억누르고 사용법부 터 물어봤다.
"어떻게 써야 하는 거야?"
"간단하다! 수화기를 들고, 버튼을
누르면 된다! 버튼으로 공간 좌표 를 설정하는 거지."
그렇군. 다만 문제가 있다면, 내가 톨룩의 공간 좌표를 전혀 모른다는 점이었다.
"상대가 어디 있는지 모르는데 쓸 수 있어?"
"그야! 그럴 순 없지."
음. 기술의 한계인가.
"사람을 대상으로 쓸 수 있었다면 내가 왜 그 오랜 시간을 방 안에서 만 허비했겠느냐. 혼자 있는 사람을 찾아가 말을 걸었겠지."
그것도 맞는 말이다.
"방법이 아예 없는 건 아니다. 이 수화기를 들고 좌표를 입력하면 네 형상을 한 작은 투사체가 톨룩에 생기게 될 거다."
작은 투사체라. 테오도르가 손가락 만 했던 시절이 떠오르는군.
"투사체로 직접 만난 사람의 인물 좌표는 알 수 있으니, 그걸 이용하 면 그 사람을 따라 움직일 수 있 지."
"한번 만나기 전에는 안 된단 소 리네."
"그렇다!"
이것 참. 불쑥 사용하기도 어렵다.
'테오도르가 그 방에서 선뜻 움직 이지 못한 거랑 같은 이치지. 섣불 리 움직였다가 여러 사람들이 있는 곳 한복판에 떨어지기라도 한다 면……
그거 생각만으로도 끔찍하다. 투사 체니까 무슨 일이 생기진 않겠지만, 경계는 한층 강화될 것이다.
"그럼 지금 당장 사용하긴 어렵잖 아."
"이 몸에게 방법이 다 있지!"
자신만만한 표정이다.
"지구는 내가 알지 못하는 곳이니 그랬던 거고. 톨룩은 내 고향 아니 더냐. 전부는 아니어도 특징적인 곳 의 공간 좌표는 외우고 있느니라."
흐음. 그치만 그 정도로는 좀 부족 하다.
"물론 특정 인물과 단둘이 만나려 면 그 인물의 저택, 그것도 가장 안쪽 침실에서 만나는 게 적당하겠 지."
"너 사람들의 침실 좌표도 알아?"
그건 좀 변태스러운데.
"그럴 리가!"
테오도르가 힘껏 부정했다.
"대신 특정좌표를 이리저리 움직 이며 몇 번 실험을 해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아하……
노가다 작업이 필요하단 소리였다.
'이거…… 테오의 방에서 자필로 톨룩 자료들 해석본 쓰던 게 생각 나는데.'
그때도 어마어마한 양의 자료에 거의 깔려 살다시피 했었다. 대낮에 공방에서 이걸 돌릴 순 없을 테고.
'밤마다 와서 좌표를 찾아야 한단 말인가.'
정신이 살짝 아득해졌다.
딸깍, 수화기를 잠깐 들었다 내려 놨다. 어렴풋한 광경이 눈에 어리기 직전에 연결을 끊어낸다.
" 좌표는?"
"아직 좀 먼 것 같은데."
젠장. 그럼 다시 하는 수밖에.
"z좌표를 살짝 높이고 X좌표는 옆 으로 틀어보지."
"넵. 입력했습니다!"
차준의 외침과 동시에 한 번 더 수화기를 들었다.
그러나 곧장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어땠느냐?"
"흙 먹었어."
퉤퉤, 진짜로 들어온 건 아니지만 찝찝한 감각에 인상을 팍 찌푸렸다.
"그럼 y좌표를 한 번 더 수정해 서……
하아. 한숨이 절로 나왔다.
"돼, 됐다!"
매일 밤을 새우다시피 하면서 단 순 노동을 반복한 끝에, 우리는 겨 우 좌표를 손에 넣을 수 있었다.
"이사벨라 쪽 좌표뿐이지만…… 일단 어떻게든 찾아냈네."
"그렇느니라."
테오도르도 며칠 밤을 새운 탓에
눈 밑이 퀭했다. 차준도 비실비실한 게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았다.
나도 건강 상태가 좋진 않았지만 며칠 밤을 새우는 일은 잠입에서도 흔한 일이라 참을 만했다.
"좋아……. 그럼 바로 시도해볼 까."
"흐음……. 이제 와서 말하는 것도 웃기다만. 나는 정말로 추천하지 않 는다네."
테오도르가 마지막 경고를 뱉었다.
"성격만 고약하고 머리가 좋은 편 도 아니야. 사교계에서 몇 번 만난 적이 있어 알지. 그때마다 패악만
부렸어."
"겉으로 보이는 모습만 그럴 수도 있잖아."
"겉으로 보이는 모습 외에 무엇으 로 그 사람을 평가한단 말이냐?"
그것도 맞는 말이었다.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고 하는데, 어찌 그 사 람의 심성을 눈치껏 알아챌 수 있 을까.
" 연결한다."
"준아."
"헛! 네, 네……!"
테오도르가 차준의 이름을 부르자 잠시 꾸벅 졸던 차준이 벌떡 일어 났다.
"자. 첫 번째 톨룩 여행이 되겠구 나."
좌표를 찾기 위해 반복했던 이전 실험은 사람들의 이목을 피하기 위 해 아주 짧게 진행됐으니까.
'주변을 둘러볼 시간은 없었지.'
그러니 정확히 따지자면 이번 연 결을 첫 방문이라 해야 맞을 것이 다.
"즐거운 여행이 되길 바라마."
수화기를 들고 서자 정신이 점점 흐려졌다.
감각이 아득히 멀어지는 가운데 테오도르의 인사말이 또렷하게 남 았다.
"여행객에게 친절한 곳은 못 되지 만 말이야."
눈을 떴을 때 나는 처음 보는 곳 에 서 있었다.
'……침대 위인가?'
광활한 흰색 천이 바닥에 깔려 있 었다. 몸이 작아진 탓인지, 침대가 큰 탓인지. 그 끝이 아득히 멀리 보일 정도였다.
주인이 없는 침실은 조용했다.
'밤이 늦었는데. 아직 침실에 들어 오지 않은 건가?'
백작부인이 이 시간까지 바깥에 있는 일은 흔치 않을 것이다.
귀족답지 못하다고 수 없이 입방 아에 오르내릴 테니까.
'물론 평범한 귀부인이 아니니까 회유하러 온 거지만.'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즈음, 갑자 기 창문의 커튼이 흔들렸다. 거센 바람에 커튼 자락이 좌르륵 휘날린 직후.
스륵.
"넌 누구지?'
목덜미에 날붙이가 들이밀어졌다.
'아차......
투사체는 본체보다 약하고 둔하다. 그 법칙이 이제 내게도 적용된다는 걸 깜빡 잊었다.
'원래 몸이었다면 바로 눈치챘겠지 만.'
이 투사체의 몸으로는 불가능했던 모양이다.
"처음 보는데, 이런 건. 요정인가? 아니면 마족?"
"이사벨라. 당신을 만나러 왔습니 다."
"말도 하네?"
곱슬곱슬한 붉은 머리카락이 흘러 내렸다. 내 뒤에 서 있어서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여기까지 무단 침입이라....... 기 사들을 바꿔야겠어. 허술해서, 원."
내 말을 듣는 체도 하지 않았다.
어쩔 수 없지.
" 비욘드."
나른하게 중얼거리던 이사벨라의 움직임이 멈췄다.
"그 틈새에 대한 얘길 하러 온 겁 니다."
"너, 누구야?"
기색이 무섭다. 이사벨라는 한 손 으로 날 움켜쥐고 허공에 들어올렸 다.
정면으로 마주 보게 된 이사벨라 는 잔뜩 굳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붉은색 곱슬머리에 진녹색 눈동자.
화려한 드레스로 치장했지만 그 속 의 독기까지 감추진 못했다.
"날 어떻게 알고 찾아온 거야. 어 디서 정보가 새어 나간 거지?"
"잠, 잠깐. 진정하시죠."
"진정하게 생겼어?"
그야 그러지 못하겠지. 그래도 공 중에 들려서 이리저리 휘둘리는 게 썩 기분 좋은 감각은 아니라서.
'비욘드. 오염의 틈새.'
톨룩의 땅을 오염이 좀먹기 시작 하면서 생겨난 기현상, 비욘드.
오염이 땅 위가 아니라 지하를 파
먹으면 이런 형상이 생겨난다.
땅이 어느 날 갑자기 갈라지면서 깊은 골짜기가 형성되는 거다.
'그 골짜기 사이로 칠혹 같은 오염 이 도사리고 있지.'
그러나 그 틈새에서 살아가는 이 들이 있었으니. 스스로를 비욘드라 고 칭하는 사람들이었다.
'대부분 과한 세금에 자취를 감춘 평민들이나 가혹한 노동을 견디지 못하고 도망친 노예들이었지.'
혹은 범죄자들이 숨어들 때도 있 었다.
'제국이 접근하지 못하는 금지. 그 야말로 무법지대.'
처음에는 갈 곳 없는 이들이 모여 생활하던 것이 어느 순간 하나의 목적을 갖기 시작했으니…….
그들 중 하나가 바로, 눈앞의 이 백작부인이다.
'이사벨라 멜몬드. 아니 본명 은…… 이사벨라 비욘드.'
음지의 일족이 어떻게 양지의 백 작부인이 됐냐면……. 그것 참, 눈 물 없이 못 들을 대서사시다.
"걱정 마시죠. 정보가 톨룩에서 새
어 나간 건 아니니까요."
"……무슨……
"저는 지구에서 왔습니다."
내 말에 이사벨라가 입을 딱 벌렸 다. 이내 풉, 하고 비웃기 시작했 다.
"푸하하하하! 아니, 변명을 해도 말이 되는 소릴 해야지."
"진짜입니다."
"헛소리하지 말고."
"정말입니다."
시종일관 진지하게 대답하자, 이사 벨라도 내가 농담하는 게 아니란걸 눈치챘다.
"말이 돼? 제국민들도 모르는 걸, 다른 세계인 지구에서 훔쳐듣고 왔 다는 게."
"제가 여기 있지 않습니까."
"애초에 지구에서 여길 어떻
게……
"꼴이 좀 우습지만, 작은 몸으로나 마 이곳으로 넘어올 수 있었죠. 당 신을 만나기 위해서 온 겁니다."
이제야 좀 믿는 눈치였다. 이야기 가 좀 진척되기 시작했다.
"......날 왜?"
"당신의 협조를 구하기 위해서입 니다."
"내 협조라……?"
"제국을 망하게 하고 싶지 않습니 까?"
내 질문에 이사벨라는 침묵했다. 굳이 따지자면 'yes'에 가깝겠지. 하지만…….
'제국이 망한다 해도 지구를 정복 하지 않으면 오염으로 다들 죽을 운명인 건 똑같아.'
그래서 현 제국에 불만을 품은 수 많은 사람들이 일단은 연합군으로행동을 같이하고 있는 것이다.
'불만으로 따지자면 이종족들이 훨 씬 크겠지만, 그들도 오염된 땅에서 말라 죽고 싶진 않을 테니까.'
그러나, 비욘드는 다르다.
개중에서 특히 이사벨라는 더더욱!
'죽을 때 죽더라도 황족이 잘되는 꼴은 못 본다는 마인드. 아주 훌륭 하지.'
아니었으면 차라리 이종족들을 찾 아가 협상을 했을 거다.
"……그래서?"
"저 역시 제국이 망했으면 하거든
요. 우리의 의견이 좀 일치하는 것 같지 않습니까?"
특히나 비욘드는 오랜 시간 제국 을 향한 증오심에 물밑 작업을 열 심히 해뒀기 때문에 우리에게 유용 하다.
'이런 정보를 어떻게 아냐고?'
그야 전쟁 통에 제국이 정신없는 틈을 타서 비욘드가,
'혁명을 일으켰거든!'
레볼루션! 그래. 하극상 말이다!
지구로 따지면 프랑스 대혁명에 해당하는 그런 급진적인 개혁이, 비욘드의 주도 하에 발발했었다.
'그 선봉에 섰던 게 바로 이 사람, 이사벨라 비욘드였어.'
지금은 백작부인이 됐지만 본래 그녀는 길바닥을 전전하던 평민이 었다.
'아무도 감히 귀족 나리의 출신 성 분을 의심하지 못했지만, 실상은 그 러했지.'
그 때문에 멜몬드 백작부인은 언 제나 사치를 부린다는 오명을 벗지 못했던 것이다.
'비욘드의 활동 자금을 이사벨라가 주로 대고 있을 테니까.'
게다가 귀족 사회에 섞이기엔, 이 사벨라에게선 숨길 수 없는 이물질 의 내음이 났다.
'그게 귀족의 껍데기를 뒤집어쓰니 색다른 매력으로 바뀌었지만 말이 야.'
우스운 일이다. 그녀의 신분이 평 민이란 걸 알았으면 그렇게 반응하 지 않았겠지.
'어쨌든 이건 이사벨라의 치명적인 약점이야.'
감히 평민이 귀족 행세를 했다는 것. 그 진실이 밝혀지면 당장 목이 잘리고도 남는다.
"서로 목적이 같지 않습니까. 저희 와 손을 잡으시죠."
"……얄밉게 구네. 너랑 손잡으면 우린 전부 개죽음일 텐데?"
"손을 잡지 않아도 귀족들 외엔 전부 개죽음으로 끝날 겁니다."
이 전쟁이 장기화되고 물량공세전 으로 뒤바뀌면 징집되는 평민이 없 겠는가.
"죽더라도 천한 죽음이 아니어야 죠. 모두 공평한 목숨 아닙니까."
내 말에 이사벨라의 속눈썹이 파 르르 떨렸다. 감정의 동요 끝에 그녀가 겨우 답했다.
"나 혼자 결정할 수 있는 게 아니 야. 동료들과 상의를 해야겠어."
"일주일 뒤에 다시 찾아뵙도록 하 겠습니다."
이 정도면 충분히 긍정적인 대답 이었다.
'비욘드의 사람들은 지금도 충분히 궁지에 몰렸지.'
이번에 집권하는 황제가 평민들을 더욱 강하게 압박하면서, 비욘드의 사람들은 점점 늘어나고 있었다.
'음식은 변변치 않은데 먹을 입이
늘어났으니. 유일한 돈줄인 이사벨 라만 닦달할 수밖에.'
그나마도 이사벨라가 사치를 부린 다는 오명을 쓰면서 움직일 수 있 는 자금이 줄어들었으니 슬슬 한계 일 것이다.
'뭐라도 잡고 싶은 심정일 테니 까.'
나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띠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