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3화
5황자를 따라가자 그는 궁 안쪽으 로 나를 데려갔다. 전시라고 믿기지 않을 정도로 휘황찬란한 궁이었다.
'패악을 부렸다고 하더니…… 군자 금도 마음대로 썼나.'
그야말로 당장 내쫓기고 싶어 안 달이 난 장군의 자세다.
"이리 앉거라."
"제가 어찌……
" 괜찮다."
5황자가 접대실로 데려와 앉으라 권한다. 겸양을 떨며 자리에 앉자 시종을 시켜 차를 내오게 했다.
"그래. 이름이 뭐지?"
이름이라. 톨룩 식으로 가명을 하 나 지어야 하나.
고민은 짧았다.
"리트입니다."
내 이름은 아니지만, 아주 잠깐 내
가 빌렸던 이름. 리트 스칼렛.
그녀의 이름을 한 번 더 빌리기로 했다.
" 옆은?"
"저는 라임입니다!"
다행히 류라임의 이름은 좀 특이 하긴 해도 크게 위화감은 없었다.
"좋아. 방 하나를 내어주지. 이 성 에서 먹고 자면서 날 도와줬으면 해."
"저희가 말입니까?"
일개 병사인 우리에게 시킬 일이 뭐란 말인가.
그러나 5황자는 뜻을 번복할 생각 이 없어 보였다.
"그래. 너희만 해줄 수 있는 일이 있다. 우선……
5황자가 호위 기사에게 눈짓하자 그가 류라임을 거칠게 끌어내렸다.
탁!
"이게 무슨……!"
몸을 사려야 하는데, 나도 모르게 류라임을 내 쪽으로 당기며 으르렁 거렸다.
"놀라지 말거라. 방으로 안내해주 는 것뿐이니. 너도 좀 조심하거라."
5황자가 성의 없이 호위 기사에게 핀잔을 줬다. 그러자 기사는 황급히 한쪽 무릎을 꿇으며 죄송하다고 읊 조렸다.
"어, 어? 저는 서……
"먼저 가 있어, 라임아."
류라임이 내 이름을 뱉으려는 찰 나 내가 선수를 쳤다.
동생한테 존대를 쓰는 것도 웃긴 노릇이니, 우선 주어진 역할대로 다 정하게 말을 건넸다.
"라, 라임이요? 히히, 네에!"
류라임은 뭐가 그렇게 좋은지 신
이 나서 헤실헤실 웃었다.
둘이 퇴장하자 나는 5황자와 단둘 이 남았다.
'진짜 단둘이는 아니겠지. 숨겨진 호위가 더 있을 거야.'
목숨이 아깝다면, 정확한 정체도 모를 평민과 단둘이 남진 않겠지.
짤그락, 찻잔이 받침과 부딪히며 작게 소음을 냈다.
"보아하니 머리가 꽤나 쓸 만한 것 같은데."
"과찬이십니다."
"아니다. 나는 너 같은 자가 필요
했거든. 뒷배 없고, 뒤탈도 없고 그 러면서 머리는 좀 쓸 만한."
칭찬인가?
이걸 칭찬으로 들어야 할지, 날 죽 이겠다는 선언으로 받아들여야 할 지 고민되는 순간이었다.
"아까 말했던 것처럼 난 전쟁이 싫다."
보통 전쟁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 지.
"그런데 되지도 않는 의무 타령에 이렇게 끌려나와 있는 거거든. 끔찍 한 일이지. 그런데 황제 폐하께선 내 의사를 들어줄 생각도 없고 협
박이나 보내오니, 기분이 심히 좋지 않아."
200명의 신병은 격려와 협박 중 후자에 가까웠나 보다.
"……그래서 말인데."
5황자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이제부터가 본론이다.
"어떻게 하면 이 전쟁에서 처참하 게 지면서 가까스로 내가 살아남은 것처럼 보이게 할 수 있겠나?"
그것 참…… 지구 입장에선 고마 운 생각이다.
"전쟁에서 일부러 지고 싶다는 말
씀이십니까?"
"단순히 진다고 끝날 일이 아니 야!"
그럼 대체 뭐가 더 필요하다고. 5 황자는 꽤나 오랜 시간 고심이라도 했는지 잔뜩 흥분해있었다.
"두 번 다시 이 녀석을 전쟁터에 기용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 로, 처참하게 져야 한단 말이다! 고 의라는 생각은 안 들게끔!"
5황자는 신이 나서 이것저것 떠들 어댔다. 그러면 황제 폐하께서도 자 길 예전처럼 그냥 놀게 내버려두지 않겠냐면서 말이다.
'쓰레기 같군.'
자신의 안위를 위해 이 수많은 병 사들의 목숨을 앗아가겠다는 생각 인가.
'단순히 전쟁터에서 고생하는 게 싫어서……?'
나는 표정이 무너지지 않게 주의 해야 했다. 나도 모르게 혐오스러운 걸 보듯 바라볼 것 같았다.
철컥.
"오, 돌아왔군. 잘 데려다줬나?"
"예. 방에 들어가는 것까지 보고 돌아왔습니다."
호위 기사가 돌아와 5황자 옆에 섰다.
제 주군에게 보고를 하면서도 날 힐끗 보는 걸 잊지 않았다.
눈빛은 꼭 '내가 없는 동안 허튼 수작질을 부린 건 아니겠지?' 하는 느낌이었다.
'5황자가 어린애도 아니고 왜 저렇 게 과보호하는 거야.'
눈빛이 아주 뜨겁다, 뜨거워.
'어쨌든 5황자가 굳이 날 데려온 이유도 알겠네.'
귀족한테 이런 얘길 털어놓을 순
없겠지. 의도는 단순해도, 어찌 보 면 반역에 속하는 죄목이니까.
'죽여도 뒤탈 없는 날 데려다 쓰고 마지막에 쓱싹 입막음까지 하시겠 다?'
원하는 걸 쉽게 얻으려고만 하면 이런 함정에 빠지는 거다.
나 같은 불청객이 끼어들어서 길 을 완전히 틀어버리거든.
'처참하게 패배하는 거? 좋지.'
그런데, 두 번 다시 전쟁터에 서고 싶지 않다?
'그건 안 되지.'
5황자야말로 살아있는 승리의 징 표 같은 것 아닌가.
'지구의 승리 말이야.'
나는 희희낙락 웃는 5황자를 보며 속으로 다른 계획을 세웠다.
'패배하되, 5황자가 의외로 쓸 만 한 놈이라는 인상을 심어주는 거 야.'
황제는 그럼 5황자를 다른 곳에도 기용하겠지.
다니엘에게 말해 5황자가 파견된 곳을 미리 듣고, 그곳은 또 미묘하 게 5황자가 괜찮은 장군인 것처럼조작을 하는 거다.
'그렇게 업적을 쌓다 보면 높은 자 리에 오를 것이고, 가장 중요한 전 투를 떠맡았을 때.'
그때가 비로소, 5황자가 전쟁터를 떠날 수 있는 날일 거다.
'죽어서.'
죽은 자는 전쟁터에 서 있다고 할 수 없지. 영혼이라도 벗어나는 게 어딘가.
"그런데 왜 탈영하는 녀석들이 하 나도 없는지 모르겠단 말이지. 밥을 너무 배불리 먹이는 탓인가."
"배식을 하루 2회에서 1회로 줄이 겠습니다."
"그게 좋겠구나."
둘의 대화를 듣고 있자니 동정심 마저 사그라들었다.
"자, 그러면 리트."
5황자가 오만하게 웃었다.
"좋은 수를 찾아내거라. 내가 네 목을 치기 전에 말이야……
섬뜩한 협박이었지만 내게는 가소 롭기만 했다.
"예, 알겠습니다."
고개를 조아리면서 나는 다른 부 대원들과 연락할 계획을 세웠다.
* * *
"5황자 저하는 좋은 분이신 거 같 아요!"
류라임이 해맑게 웃었다. 글쎄다.
수틀리면 병사를 마구잡이로 죽이 는 5황자를 그렇게 평가하는 건 이 안에서 류라임뿐일 거다.
"왜 그렇게 생각하는데?"
"그야, 저희한테 이렇게 좋은 방도 내어주시고, 맛있는 밥도 주시고 이 런저런 잡일을 해주는 시종도 붙여 주시잖아요!"
"그렇긴 한데……
나는 고개를 돌렸다. 방금 막 5황 자가 눈에 거슬린다며 죽인 병사의 시신이 겨우 수습되고 있었다.
주변의 시선이 따갑다.
제대로 먹지도 쉬지도 못하는 이 들에게 호화로운 생활을 하는 우리 는 거의 악의 무리다.
"……혀를 잘 놀려서……
"글쎄, 자기 동생을……
그러니 이런 수군거림도 이해는 된다.
'5황자한테 빌붙은 간신. 그런 평 판인가.'
이 가운데서 자기한테 잘해주니 좋은 사람이라고 해맑게 주장하는 류라임도 정상은 아니다.
"여기 있었군."
그림자가 드리웠다. 잘 차려입은 갑옷에 못마땅한 눈매. 이제는 익숙 한 얼굴이다.
"세드릭 님."
"5황자 저하께서 찾으신다."
"네, 알겠습니다. 라임아, 먼저 방 에 들어가 있을래?"
"그럴게요!"
류라임을 눈치껏 떼어내고 5황자 의 호위 기사, 그러니까 세드릭을 따라 걸었다.
'5황자는 날 제법 마음에 들어 하 는 것 같은데. 이 사람은 꾸준히 싫어한단 말이지.'
이유는 알 수 없다. 그는 처음부터 날 싫어했으니.
'뭐, 평민 신분으로 기사한테 뭐라
할 수 있는 위치는 아니니. 그냥 눈치만 볼 수밖에.'
내가 보기엔 5황자도 정상이 아니 지만, 거기에 장단을 맞춰주는 이 남자도 이해가 안 간다.
'5황자는 곱게 자라서 머리가 좀 한 바퀴 돈 것 같은데, 이 사람은 멀쩡해 보인단 말이야.'
실제로 세드릭은 5황자가 없을 때 다른 병사들을 대하는 태도는 지극 히 정상적이다.
옆에 5황자만 있으면 정신을 잃고 그 짓거리에 손뼉만 치고 있는 게 문제지.
저벅, 저벅. 긴 복도를 걷던 도중, 세드릭이 갑자기 멈춰 섰다.
"……세드릭 님?"
의아하게 그를 부르자, 세드릭이 뒤돌았다.
"너희 둘을 빼낸 채로 신병을 조 사했을 때, 숫자는 정확히 197명이 었다."
차가운 눈빛으로 나를 훑는다.
"개중 1명은 무단이탈, 2명은 오는 도중에 사망한 이들이었지."
그렇겠지. 그 명단에 나와 류라임 의 이름은 없었을 테니.
우리를 빼고 200명이 맞는 숫자 다.
"너희 둘의 이름은 발견되지 않았 어."
"……그랬군요."
나는 태연하게 웃었다. 이운우가 가식적으로 짓는 미소를 떠올리면 서, 최대한 흉내를 냈다.
'효과가 있나 본데.'
세드릭의 얼굴이 더 일그러진 걸 보니 잘 따라한 모양이다.
"어디서 보냈지?"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습니다."
"3황자? 아니면, 1황녀?"
"죄송하지만, 저는 그런 높으신 분 들은 잘 모릅니다."
내가 모르쇠로 일관하자 세드릭이 검을 뽑았다.
스릉.
그가 매끄럽게 검을 뽑아 내 목 옆에 들이밀었다.
"똑바로 대답하는 게 좋을 거다."
나는 검을 힐끗 바라봤다. 유려한 검면에 사방이 반사되어 보였다.
옆으로 흘렸던 시선을 원래대로 돌리고 세드릭을 정면으로 응시했다.
"제 목을 치실 수 있겠습니까?"
"못할 것도 없지."
"그게 5황자 저하의 뜻이었나요?" 내 말에 그는 선뜻 답하지 못했다. '아니겠지. 그 망나니가 난동을 부 렸으면 당장 날 지하감옥에 처박아 넣고 온갖 고문을 했을걸?'
이렇게 두 발로 멀쩡히 복도를 걸 을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세드릭이 날 해칠 수 없다는 중거다.
"……황자 저하께선, 마음이 여리 셔서…… 네게 정이 들어 잠깐 그
러시는 거다. 그 총애를 믿고 함부 로 행동했다간 큰 화를 입을 것이 야."
마음이 여려서 사람 목을 그렇게 댕강댕강 썰고 다니나? 웃기지도 않는군.
하지만 겉으로는 미소 지으며 화 답했다.
"걱정 마시지요. 제가 말씀드린 대 로만 일이 흘러가면 이 게이트가 열리자마자 황궁으로 돌아가실 수 있을 겁니다."
내 말에 세드릭은 의심스러운 눈 초리를 보내더니 검을 거두었다.
스릉, 검이 다시 검집으로 돌아가 고 세드릭은 성큼성큼 앞장서 걸었 다.
"왔구나, 리트! 네 말대로 했더니 벌써 30명이나 군을 이탈했다! 신 기록이야!"
"잘하셨습니다, 황자 저하."
"전부 네 덕이다. 원하는 것이 있 으면 말해보거라. 무엇이든 들어주 지."
"아닙니다. 저는 그저 몇 가지 의 견을 드렸을 뿐인걸요."
"겸손하기까지 하군! 내 너를 황궁
으로 돌아갈 때 함께 데려가 그 공 을 치하할 것이다."
말은 번지르르하게 하는군. 그때 목이나 안 잘리면 다행이게.
나는 속으로 투덜거렸지만 겉으론 감사하다며 고개를 숙였다.
그날 저녁, 기다리던 연락이 왔다.
-대장! 말한 대로 탈영병들을 모 으고 있어요!
-그쪽은 아직인가?
정로운과 신도아의 연락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