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4화
"그래도 교육자의 생각은 자연스 럽게 그 안에 배어나오기 마련이지 않나. 내 생각이 앞으로 이 훈련소 의 기초가 될 테니……
"그럼 그 마음을 주춧돌로 삼으세 요."
그의 말을 끊어내고 말을 잇자, 무 슨 뜻이냐는 듯 날 응시한다.
"프로 헌터는 결국 자기 자신만의 답을 찾을 수밖에 없죠."
씁쓸하게도, 최우도가 지금 무슨 마음으로 그들을 교육하든지 간에 그들은 결국 자신의 답을 찾아낼 것이다.
"그러니 그 길을 닦는다고 생각해 보세요. 그걸로 충분할 테니까요."
"자네 말도 일리가 있어."
최우도는 의외로 순순히 동의를 표했다.
"결국 나는 거쳐 가는 관문에 불 과하네."
"새로운 헌터들의 시작점이기도 하고요."
"말이라도 고맙군."
빈말이 아니다.
앞으로 헌터의 공급이 중요하기 때문에 그 핵심 기관이라 할 수 있 는 훈련소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
"친동생 같은 아이가 이번에 입학 한다고?"
"네. 그렇게 됐네요."
"쉽지 않은 선택이었겠어."
그 한마디에 담긴 뜻이 많았다.
아무리 게이트가 판을 치는 세상 이라지만, 제 친족이 헌터가 되는 건 반대하는 이들도 많았다.
사망률도 높고 그만큼 고생을 많 이 하니까.
"본인 의지가 워낙 강경해서요."
"얼마 전에 고해윤이와도 만났었 네."
오랜만에 듣는 이름이었다. 민첩이 높아 초창기에 잠깐 함께했던 사람 이다.
'게이트가 끝나고 본래 하던 일로 돌아갔다고 들은 것 같은데.'
-사실 전 그때 일을 더 이상 떠올 리고 싶진 않거든요.
그렇게 말하던 것이 선한데, 따로 최우도를 만났다니. 그건 그것대로 놀라운 일이었다.
"잘 지내고 있대요? 저도 못 본 지 꽤 됐거든요."
"뭐, 사는 게 다 똑같지."
최우도는 너털웃음을 지었다.
"적어도 그 애에게 게이트는 끔찍 한 악몽으로 남은 것 같지만 말일
세."
"보통 그렇겠죠."
수많은 일반인들에게 '어쩌다 한 번' 일어난 게이트는 최악의 경험 으로 남는다.
"이번 신입생 중에도 한국대학교 게이트 생존자가 있던데."
표연원을 이르는 말이었다. 나는 잠시 멈칫하고 최우도를 응시했다.
"강인한 아이더군."
그의 눈빛을 보니, 역시 그는 모든 내막을 알고 있는 듯했다.
표연원이 내 친동생 같은 아이인
것도, 그 애가 게이트에 휘말린 일 반인 출신이란 것도 말이다.
"어떻게 아셨어요?"
"수석이니까 더 눈여겨보기도 했 지만 아니어도 금방 알았을 걸세."
아니, 대체 어떻게?
표연원과 나는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았기 때문에 닮은 구석이 전혀 없었다.
"그러게……. 왜일까."
"놀리지 마시고요."
"놀리는 게 아니야. 그 애를 보자 마자 네가 생각났거든."
내가? 그건 좀 놀라운 일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연화도 게이트에 서 처음 봤던 자네가 말이야."
회귀한 직후의 나라니. 더 이해하 기 어려운 말이었다.
"어린 나이에 짊어진 것이 많은 이들은 태가 나기 마련이지. 안타깝 게도."
홀짝, 커피를 한 모금 더 목 너머 로 넘긴다.
여러모로 의미심장한 말이었지만 최우도는 더 설명해줄 마음이 없는 것 같았다.
"전에 하셨던 제안은 유효한가 요?"
"아직 기억하고 있을 줄은 몰랐구 만."
"잊을 리가 있나요."
최우도는 일전에 내게 연락해서 잠시나마 강사로 일할 생각이 없냐 물었었다.
"하지만 자네는 거절하지 않았나. 그대로 잊은 줄 알았네."
"그땐 그랬죠."
"지금은 달라졌나?"
사실 나도 많은 시간을 내긴 어렵
다. 가뜩이나 해야 할 일들이 쌓여 있었다.
'이사벨라랑 다니엘에게도 다시 연 락을 취해야 하고. 5차 게이트도 대비해야 하지.'
이운우도 뭔가 낌새를 눈치챘는지 따로 한번 보자고 성화였다.
'어디 애 좀 태워보라지.'
아직 저번의 설움을 잊지 않았거 든.
"잠깐은 시간 낼 수 있죠. 곧 전우 가 될 사람들이니까요."
"이미 교육 과정은 다 정해져서
정규 시간을 빼서 줄 순 없네. 그 렇다 보니 모든 학생들이 듣게 강 제할 수도 없고."
"상관없어요."
가르침을 청한 학생만 볼 수 있다 면야.
"그럼 따로 날짜를 잡아보도록 하 지."
이 정도면 원하던 대로 성취한 셈 이었다. 나는 간만에 최우도의 손을 맞잡았다.
"다시 잘 부탁드려요."
이번에는 내가 최우도를 많이 도
왔지만, 회귀 전에는 내가 그의 도 음을 받은 적도 많았다.
"잘 부락하네."
실내 체육관에서의 일이 새록새록 떠오르면서 낯간지러운 기분이 들 었다.
'회귀 전엔 두 번 다시 못 볼 사람 이었는데.'
이렇게 살아 숨 쉬는 것 자체가 얼마나 기적 같은 일인지, 당신은 알까.
게이트 연구소에서 4차 게이트의 신호가 모두 사라졌다고 공식적으 로 발표했다.
4차 게이트를 대비하던 회의가 이 제는 그 원인을 규명하는 회의로 뒤바뀌었다.
나는 갖은 추측을 더하는 이들의 뒤에 서서 침묵할 뿐이었다.
마력통로가 완전히 안정화되어 거 즈까지 떼어낸 이운우가 회의를 진 행하고 있었다.
"지나간 4차에 대해서 떠드는 건
무의미한 일이에요."
"하지만 그 원인을 알면 다음 게 이트 신호가 잡혔을 때 그대로 와 해할 수도 있습니다."
"당장 검은 화산 게이트도 아직 놈들 손아귀에 있으니 그것부터 해 결해야 합니다. 4차 게이트가 문제 가 아니라고요!"
갖가지 의견들이 뒤섞였다.
그때, 쾅! 회의실 문이 벌컥 열렸 다.
"이곳은 항상 좁군. 문을 더 크게 만드는 편이 좋겠어."
호쾌한 목소리. 회색빛 머리카락. 기골이 장대한 사람이 불쑥 안으로 들어왔다.
"진성연 길드장님."
이운우가 그 이름을 불렀다.
'적멸'의 길드장. 그녀였다.
"간만에 귀국했는데 다들 꼴이 그 대로야!"
"진성연 길드장님께서 오신다는 말은 못 들었는데요."
"그렇겠지. 오늘 새벽에 비행기를 타 방금 도착했거든."
이운우가 웃으며 웅대했지만 말투
엔 '당신이 왜 거기서 나와?'라는 생각이 배어나왔다.
"미리 말씀을 주셨으면 자리도 미 리 준비했을 텐데. 다음부터는
"보아하니 전쟁 게이트에 대한 회 의 중이었나 봐. 척 봐도 알 만해."
진성연이 갑자기 등장한 이유가 뭐란 말인가.
'적멸. 그들이 왜 이 시기에?'
세상을 떠돌아다니는 용병 길드. 이런 시기에 그들이 귀국한 건 전 력으로 따지면 희소식이지만…….
'이미 군사적인 권력이 분배된 지 금은 반드시 혼란을 야기하겠지.'
그것까지 희소식이라 할 수 있을 까.
긴장된 분위기가 감돌았다. 갑자기 나타난 생태계 교란종을 보는 눈빛 이다.
"윤강백, 전서호. 그 녀석들은 어 디 가고 웬 애송이가 이 자리에 있 지?"
이런. 소식을 듣지 못한 모양이다. 진성연의 말에 분위기가 싸하게 가 라앉았다.
"지금은 제가 청사의 주인입니다."
이운우의 말에 좌우로 늘어서 있 던 청사의 헌터들이 그를 보호하듯 이 앞으로 한 발자국 나왔다.
이운우가 명령하면 금방이라도 진 성연과 맞붙기라도 할 기세였다.
"윤강백은?"
"병원에 입원 중이십니다."
"에잉, 쯧. 허약해서, 원."
윤강백을 그렇게 칭할 수 있는 사 람은 진성연뿐일 거다.
"갑자기 귀국하신 이유가 뭡니 까?"
내가 묻자 진성연의 시선이 이쪽 으로 꽂혔다.
"왜 귀국했냐. 그래, 좋은 질문이 지!"
모두가 궁금해하던 내용이었다. 진 성연의 매서운 눈빛이 꼭 먹잇감을 노리는 맹수의 것과 닮아 있었다.
"다들 알겠지만 우리 '적멸'은 다 국적 길드라, 여러 곳을 돌아다니는 일이 잦지. 그런데 최근에 아주 미 심쩍은 일들을 봤거든."
용병 길드의 특성상 뒤가 구린 의 뢰를 받는 일이 많을 터였다.
'그런 진성연이 미심쩍다고 표현하 는 일이라. 대체 뭐지?'
침묵은 잠깐이었다. 진성연이 폭탄 선언을 했다.
"전쟁 게이트. 내가 그걸 알고 있 는 이유가 뭐겠나."
" 설마......
"다른 나라에도 우후죽순으로 생 기고 있어."
이럴 수가.
'이렇게 빨리?'
그야 '지구'에 나라가 한국만 있는 건 아니니, 다른 나라에게도 그 마수가 닿는 건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이렇게 이를 줄은 몰랐다.
'회귀 전과 전개가 달라지는 일이 한두 번은 아니지만, 톨룩 내부적으 로 달라진 점은…… 아!'
나는 문득 톨룩 내에 있을, 지구의 배신자가 떠올랐다. 권성민.
톨룩 내부적인 변수라면 그 사내 하나뿐일 터였다.
"정확히 어디에 생겼는지 아시는 게 있습니까?"
"내가 주워들은 것만 다섯 군데 야."
"숨기고 있는 다른 나라들이 더 많을 수 있단 뜻이군요."
"그렇지! 애송이지만 말은 잘 통하 는군."
진성연이 만족스럽게 웃었다. 이운 우가 꽤 마음에 든 눈치다.
'우리나라는 톨룩의 존재를 가장 먼저 발견했지만 외부에 알리지 않 았어.'
언젠가는 밝혀질 일이지만 적어도 지금은 아니어야 하니까.
그런데, 다른 나라도 비슷하게 생 각하고 있던 거다.
'우리나라가 잘 막아내니까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린 건가.'
황제가 약이 올라 더 맞부딪쳐 올 거라 생각했는데!
"그래서 돌아왔지. 나는 한번 내뱉 은 말은 지키는 사람이거든."
-우리 적멸은 언제나 그랬던 것처 럼, 정당한 보수를 제시하는 자들의 편에 서겠네.
아주 맨 처음, 톨룩의 존재를 알리 는 회의 때 그녀는 이렇게 말했었지.
자신에게 정당한 보수를 주는 이 의 옆에 서겠다고. 이후 그녀는 예 정된 일들을 수행하러 외국으로 떠 났고, 이제야 돌아왔다.
"정부와 협상을 하고 싶군. 얼마를 주고 우릴 고용할 것인지, 제안할 생각이 있다면 우선권을 주고 싶 군."
일단은 고국이니까, 하고 진성연이 덧붙였다.
'다른 나라에서도 분명 돈은 얼마 든지 줄 테니 있어달라고 부탁했을 텐데.'
상황이 바뀌었다.
이제 톨룩과의 전쟁은 우리들만의 일이 아니다. 전 세계가 몰래 참여 하고 있었던 거다.
'그렇게 된 이상 고급 용병 집단인 적멸의 몸값은 훨씬 높아졌다고 봐 야지.'
그런 상황에서 우리나라를 먼저 찾은 건 나름대로 의리 있는 행동 이었다.
"……다른 나라들도 전쟁에 참여 중이었다면 상황은 달라지죠."
더 이상 우리끼리 꽁꽁 숨길 이유
가 없었다.
'침략받는 나라가 우리뿐이었으면 약점을 잡히는 꼴이니 선뜻 밝히기 어려웠겠지. 하지만 이젠 공공의 적 이 나타난 셈이야.'
톨룩이 우리만 공격하고 있었다면 그 틈을 타 다른 나라에서 우리를 홀라당 잡아먹으려 들었을지도 모 르니까.
일이 국제적으로 커졌다.
"다른 나라와 협조하는 방안도 고 려 해봐야겠습니다."
이운우도 나와 같은 생각을 하는 것 같았다.
이제야 좀 실감이 나려나. 톨룩이 '지구'를 노리고 있다는 사실이.
'우린 가장 먼저 깃발을 꽂는 곳이 었을 뿐이지. 결국엔 모두가 함께 맞서야 해.'
물론 각 국가마다 보유한 헌터가 있으니 자력으로 막을 수 있는 곳 은 상관이 없다.
'문제는 헌터 수가 적거나, 실력이 떨어지는 나라들이야.'
싹이 보이는 헌터들은 선진국에서 데려다 양성하는 경우가 많다.
때문에 그 외의 국가들이 보유한
헌터는 상대적으로 약한 편이다.
'더 이상은 선진국들이 모르쇠로 일관할 수 없겠지.'
국제연합 휘하에 있는 '국경없는헌 터회'에서 약소국들이 게이트에 잡 아먹히지 않도록 활동하고 있고, 자 원봉사 하는 헌터들도 많지만 그걸 로 전쟁을 감당할 순 없다.
톨룩에 영토를 빼앗기는 건 이제 그 나라만의 문제가 아니다. 전 세 계적인 이슈가 된 거다.
'약소국엔 헌터를 파견해야 하고, 우리도 난도 높은 전쟁 게이트가 열리면 다른 나라에 협조를 구할
수도 있겠지.'
앞으로 훨씬 바빠질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