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0화
나는 표연원을 뒤따라갔다. 멀지 않은 곳에서 원우태와 표연원이 대 화를 나누고 있었다.
"너답지 않게 왜 그랬어."
"형은 모르잖아. 그 누나가 얼마 나……!"
"그분이 혼자 많은 걸 떠안으려
해서 네가 불안한 줄은 알겠는데, 그게 그분 잘못은 아니잖아. 오히려 그렇게 만든 이 상황이 잘못된 거 아니야?"
원우태의 말에 표연원은 대답하지 못했다.
하아, 한숨을 내쉬고는 가볍게 얼 굴을 쓸어내린다.
"내가 너무 과민반응 했나 봐."
"스킬 발동 조건이 그런 건데 뭘 어떡하겠어. 네가 죄송하다고 사과 드려. 너도 나쁜 마음에서 그런 게 아니잖아."
우리 앞에선 늘 성숙하게만 보이
려고 애쓰던 표연원인데. 원우태 앞 에선 순순히 속마음을 털어놓는다.
'하지만 더 훔쳐 듣기도 뭣하니
까.'
부스럭.
일부러 잔디 밟는 소리를 냈다.
둘이 곧장 뒤를 돌아본다.
"서하 누나……
"연원아. 얘기 좀 하자."
원우태는 눈치를 살피더니 먼저 들어가 보겠다며 자리를 떴다.
우리는 근처 벤치에 살짝 거리를 두고 어색하게 앉았다.
굳은 낯을 하고 있는 표연원에게 살짝 웃으며 말을 걸었다.
"이제 진정 좀 됐지?"
"네. 죄송해요……. 얼마나 성장했 는지 보여주겠다고 했는데, 이런 꼴 이나 보이고."
그게 못내 부끄러운지 내 눈을 자 꾸 피한다.
스스로 애처럼 굴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아냐. 너 실력 많이 늘었더라. 좀 만 더 가다듬으면 현장에서 크게 활약할 수 있겠던데."
무엇보다 범위 공격을 할 수 있다 는 게 큰 장점이다.
"누나처럼 되고 싶은데 어렵네요."
씁쓸하게 웃는다. 그야, 겉보기엔 1살 차이여도 내겐 전생에 쌓인 경 험이 있으니까.
"네 또래에 비하면 훨씬 잘하고 있을걸?"
"누나도 제 또래잖아요."
"난 빼고."
나도 거기 끼워주면 고맙긴 한데 좀 우습지.
"뭐예요, 그게."
표연원이 작게 웃음소리를 냈다. 나야 진지하게 한 말이지만, 농담으 로 넘겨주는 게 오히려 다행이었다.
"진아 씨한테서 얘길 좀 들었는 데."
슬그머니 묻고 싶었던 얘길 꺼냈 다.
"요즘 악몽을 꾼다며.''
"……그런 얘길 해요?"
"자세하겐 못 들었고. 네가 악몽을 꾸느라 요즘 좀 피곤해 보였다 하 더라고."
생각보다 훨씬 날카로운 반응이었
다. 표연원은 딱딱하게 굳은 얼굴을 했다.
"이상한 꿈이에요. 그냥 개꿈이 죠."
강하게 부정하는 걸 보니 더 미심 쩍다.
"무슨 꿈인데?"
"별거 아니에요."
"별거 아니면 얘기해 줄 수 있잖 아."
내가 끈질기게 굴자 표연원은 날 똑바로 마주했다. 올곧은 눈동자가 날 직시한다.
"들어봤자 누나 기분만 나쁠걸요."
"무슨 얘긴지 들어나 보자."
내가 여러 번 재촉했지만 표연원 은 쉽사리 말을 꺼내지 못했다.
"제가 이걸 말했다가, 괜히 안 좋 은 일이 생기면 어떡해요."
"그런 일 없어. 난 미신 안 믿어."
"미신이 문제가 아니라……. 하아, 이걸 뭐라 말해야 할지 모르겠는 데."
표연원이 머리를 한바탕 헤집고서 마음을 다잡았는지 잠시 침묵했다.
"이상한 장면이 자꾸 반복적으로
나오는 꿈이에요."
"무슨 장면이길래 그래."
표연원이 섬뜩한 무표정을 지었다.
"……누나랑, 혜원 누나가 나와 요."
"우리 둘이?"
"네. 꿈에서 저는 활을 등에 메고 있고, 뭘 찾는 것처럼 엄청 분주하 게 움직여요."
활을 들고 있다고? 시작부터 아주 불길하다.
'표연원이 활을 들었던 때는……
회귀 전뿐인데.
오싹, 한기가 등골을 스친다.
"그러다가, 그렇게 한참을 막 찾다 가. 겨우 뭔가를 발견해서 수풀을 헤치고 가면……
표연원이 잠시 뜸을 들였다. 꿀꺽, 침 삼키는 소리가 울린다.
"누나가 있어요. 혜원 누나를 끌어 안고서."
정확하게 일치했다.
"칼에 맞아서 온통 피투성이인 혜 원 누나를…… 서하 누나가 끌어안 고서, 멍하니 절 바라봐요."
회귀 전, 내가 연화도 게이트에서
탈출한 그때와.
"저는,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어 서. 그냥 그게 전부 꿈만 같고, 낯 설게만 느껴져서 그냥 가만히 서 있어요. 멍하니."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 지? 나는 이야기를 늘어놓는 표연 원의 얼굴을 바라봤다.
"그러다가 뒤에서 다른 사람들이 찾아오면, 그제야 저도 정신이 좀 드는 거예요. 그래서 혜원 누나한테 다가가서, 막 상처도 살피고 하는 데. 누나는 이미…… 이미……
차마 뒷말을 잇지 못하고 표연원
이 중얼거렸다.
'이미 죽어 있었겠지.'
내가 그랬으니까.
게이트가 클리어된 후에도 죽은 혜원 언니를 끌어안고서 한참을 그 러고 있었으니까.
"이상한 꿈이죠?"
표연원이 애써 웃었다.
그런데 나는, 조금도 웃기지 않았 다. 웃을 수가 없었다.
"누나?"
"어? 어어……
멀쩡한 척해야 한다는 생각조차 나지 않을 정도였다.
'또야.'
이런 일이 처음이 아니다.
'처음엔 이운우였고, 그 다음엔 나 였어. 그리고 이번에 표연원까지.'
이운우와 표연원은 공통적으로 회 귀 전의 기억을 떠올리는 것 같았 다.
그렇다면 내가 봤던 그 장면 도……?
-가능성은 적지만 이 전쟁을 끝낼
수 있는 힌트야. 내 목숨 하나 희 생해서 시험해볼 수 있으면 수지맞 는 장사지. 안 그래?
'전쟁을 끝낼 힌트. 그런 중요한 내용은 내 기억에 없었어.'
그래서 이운우에게는 회귀 전 기 억이었지만 나는 이상한 장면을 본 거라 생각했다.
이제 상황이 달라졌다. 표연원까지 회귀 전 기억을 본 거라면, 내가 본 그 장면도 분명…….
'회귀 전에 있었던 일이야! 전쟁을 끝낼 힌트. 그게 대체 뭐였지?'
왜 나는 그런 중요한 걸 기억하지 못하고 있는 거지?
뭔가 이상하다. 내 기억을 어디까 지 믿어야 하는지, 그 의문은 항상 있었지만.
'이렇게 송두리째 흔들릴 줄이야.'
혼란스러운 마음을 감출 수가 없 었다.
"누나? 죄송해요. 제가 괜한 얘길 해서…… 아무래도 현장에서 일하 는 누나한테는 입조심을 해야 했는 데."
"뭐? 아냐. 그런 거. 그냥 좀 놀라
서……
나는 황급히 대화를 마무리 지었 다. 혼자서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 다.
"나, 나는 급한 일이 생겨서 좀 가 볼게."
" 누나?"
"나중에 연락해!"
도망치듯이 자리를 떠났다.
* * *
곧장 달려간 곳은 게이트 연구소 였다.
테오도르에게 가볼까, 생각했지만 그것보단 백목련의 전공에 가까운 것 같았다.
갑작스러운 방문이었지만 백목련 은 내 출입을 허가해줬다.
출입증을 목에 걸고, 제한구역 바 로 앞에 있는 손님 응접실로 들어 갔다.
"무슨 일이에요?"
보기 드물게도 백목련은 가운을 입은 채였다. 연락도 없이 갑자기찾아온 내가 의아한 기색이다.
"백목련 씨. 한 가지 물어보고 싶 은 게 있어요."
"뭔데 그래요?"
"혹시 최근 헌터들 중에 이상한 기억을 봤다고 호소하는 사람들이 있습니까?"
"이상한 기억이라……?"
백목련이 무슨 말인지 가늠하는 것처럼 되물었다.
"딱히 들은 건 없는데요."
"정말로요? 자기가 겪은 적 없는 걸 봤다거나, 자기 주변 인물이 기
억에 없는 행동을 하는 꿈을 꾼다 거나. 그런 경우가 없습니까?"
"당연히 있기야 하죠."
백목련의 눈빛이 서늘하게 가라앉 았다.
"PTSD로 은퇴한 헌터들에게서 혼 히 볼 수 있는 증상이죠."
이런.
의심받고 있었다. 내 정신이 무너 진 게 아닌지.
'그야 갑자기 나타나서 이런 걸 물 어봤으니 그럴 만도 하지.'
조금 더 조심스럽게 물어봐야 했
는데.
그렇다고 이제 와서 사실 내가 회 귀를 했는데, 주변 사람들이 회귀 전 기억을 보는 것 같다고 말할 순 없었다.
'그럼 정말 정신 병원에 강제로 입 원당할지도 몰라.'
낭패였다. 무력과 관계없이 정신이 무너져 은퇴하는 헌터들은 셀 수 없이 많았다.
나 역시 그들 중 하나가 아닌지. 백목련은 그걸 가늠하고 있었다.
"자세히 얘기해봐요. 당신, 어떤 걸 본 거예요?"
"최근에 주변에 그런 증상을 호소 하는 이들이 많아져서 물어본 거였 어요. 혹시 유의미할 정도로 수치가 증가했나 싶어서요."
"게이트 자체가 인간에게 유해한 영향을 끼치는 건 맞죠. 정신적으로 도, 신체적으로도."
백목련은 잠시 침묵했다. 그러더니 작게, 이곳에서 말할 수 있는 내용 은 아니라고 일렀다.
'게이트의 유해성. 정신뿐만 아니 라, 신체적으로……?'
그렇다면 짐작이 가는 게 있었다.
-너도 오염에 젖어있잖아!
-오염에 젖은 인간의 최후는 어떻 지?
오염.
오랜 시간 잊고 있었지만, 내 안에 도사리고 있는 시한폭탄이 있었지.
'하지만 정부에선 발표하고 싶지 않은 내용일 거야.'
가뜩이나 게이트 안에 헌터들을 집어넣어야 하는 입장인데, 게이트 가 오염을 축적시킨다는 연구 결과가 나오면 어떻겠는가.
'죽음을 무릅쓰고 나서는 헌터들이 라 해도, 오랜 투병까지 각오한 건 아니니까.'
하지만 내가 얘기하고 싶은 건 오 염에 대한 게 아니다.
'아니. 오염이랑 연관이 있나?'
하지만 이운우는 몰라도 표연원은 아직 한국대학교 게이트 말곤 던전 밖에 안 가본 초짜 아니던가.
'맞아. 표연원이 게이트에 수시로 들락날락했던 건 회귀 전뿐인……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번뜩 퍼
즐이 맞춰지는 것 같았다.
'회귀 전의 기억. 회귀 전에 쌓였 던 오염……
나, 이운우 거기다 표연원까지.
그렇게 생각하면 이해가 간다. 우 리 셋만큼 전쟁터를 전전했던 이들 도 드물 테지.
-상태가 아주 심각한데 뭘 모르는 척이야!
-하지만, 어떻게? 지구의 오염은 톨룩에 비하면 새 발의 피일 텐데. 오염이 반응할 정도로 네가 오염되어 있다고?
어디서 왔던 건지 모를 정도로 농 도 깊게 축적된 오염들.
그게 혹시, 회귀 전부터 이어져서 내려온 거라면?
'전부터 의심했지만 이거…… 정말 로 이상하잖아.'
이운우와 내가 되돌려진 거라 생 각했다. 그런데, 표연원까지 더해진 다니.
'단순히 우리 셋의 문제일까? 아 냐, 나와 이운우뿐이었을 땐 둘만이라 생각할 수 있었지만……
이렇게 되면 정말 합리적인 의심 이 든다.
'우리 셋만이 아니라, 세상이 전부 되돌려진 거라면?'
이유는 모르겠지만 세상은 되돌려 졌고, 그 과정에서 모두들 기억을 잃었지만 나는 잃지 않았던 거라 면?
정확히 말하면 잃지 않았다고 착 각하고 있었다. 왜냐면 나조차 몰랐 던 기억이 분명 있으니까.
'그러다 그 잊힌 기억들이 불현듯 다시 떠오르고 있는 거라고 생각하
면 앞뒤가 맞아.'
하지만 누구는 기억이 떠오르고 누구는 모른 채로 살아가는 이유가 뭐란 말인가.
'나, 이운우 그리고 표연원의 공통 점. 지금 생각나는 건 오랜 전쟁을 거친 이들이란 것뿐인데.'
오랜 전쟁을 거쳤다는 건 곧, 몸 안에 오염이 만만치 않게 쌓였다는 뜻이다.
이것도 오염과 연관이 있을까?
"나중에 따로 연락하면 알려드 릴……
"아니요. 괜찮아요. 오염에 대한 얘기죠?"
내가 태연하게 응수하자 백목련이 살짝 눈을 치켜뜬다.
대체 어디서 정보가 샌 건가, 되짚 는 얼굴이다.
"어쨌든 광범위하게 일어나는 현 상은 아니란 말이죠. 알겠습니다."
탁!
내가 황급히 마무리하고 자리에서 일어나려는데 백목련이 내 손목을 붙잡았다.
뒤돌아보자, 그녀도 무의식중에 한
일이었는지 당혹스러운 표정이었다.
"어…… 혹시. 혹시라도, 그게 만 약 당신 얘기면."
"아니에요."
"알아요. 그러니까 만약이잖아요."
아니라고 하는 내 말은 들리지도 않는 건가.
"만약 이게 당신 얘기면, 주저하지 말고 찾아와요. 환청, 환각은 PTSD 를 겪는 헌터들에게 흔한 증상이니 까. 그리고 그건 부끄러운 일도 아 니고요."
요즘 세상에, 하고 덧붙이는 말 안
에 숨겨진 다정함이 설핏 보였다.
좀 방향성이 잘못된 것 같긴 하지 만, 그래도 그 간질간질한 느낌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새어 나왔다.
" 명심할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