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9화
싸늘한 정적이 감돌았다.
이그니스의 정체를 아는 건 표연 원뿐이었지만, 그 칭호를 몰라도 심 상치 않은 강자라는 것만은 명확했 기 때문이다.
"왜 대답이 없어?"
이그니스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여기서 제일 강한 사람이 누구냐 니까?"
화르륵, 문신이 새겨진 곳에서 가 볍게 화염이 튀었다.
하지만 선뜻 답하는 사람은 없었 다.
"에이. 재미없어. 여기도 꽝이야?"
이그니스가 눈썹을 축 내리며 속 상한 표정을 지었다. 순진무구한 얼 굴이지만 속아 넘어가선 안 된다.
"약한 인간들은 전부 죽……
"제가!"
이그니스가 속눈썹을 깜빡, 하며
살벌한 말을 마무리 짓기도 전에 표연원이 앞에 나섰다.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 쏠렸다.
이그니스가 진득한 미소를 머금는 다.
"제가, 당신이 찾는 사람입니다."
표연원은 짓씹듯이 내뱉었다.
감히 그가 노련한 적멸보다 헌터 로서 뛰어나다고 말하긴 어렵겠지 만, 적어도 그들과 싸웠을 때 승리 할 자신은 있었다.
이그니스가 말하는 '강함'은 그런 종류의 강함일 테니. 표연원이 나서는 게 맞는 일이었다.
"다행이다! 나는 싸우는 걸 되게 좋아하는데, 이제 마계에선 나랑 싸 워주는 마족들이 없더라고! 다 죽 었거나, 다 날 피해."
순수함은 광기와 한 끗 차이라고 들 하지.
해맑게 웃는 모습에서 표연원은 알 수 없는 섬뜩함을 느꼈다.
"한~참 심심하게 지냈거든. 그런 데 타이밍 좋게, 다른 세계의 인간 들과 만날 수 있게 되다니! 난 운 도 좋은가 봐. 그렇지?"
표연원은 차마 고개를 끄덕일 수
없었다.
반대로, 그들에게 이그니스와 마주 한 것은 절망보다도 더한 불행이었 으니까.
"톨룩의 인간들은 죄다 약해 빠졌 던데…… 너희는 좀 다를까?"
이그니스가 빙그레 웃었고, 표연원 은 살짝 눈을 감았다.
손등의 문양이 밝게 빛나고 눈 안 에 연두색 빛깔이 깃들었다.
"한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다른 이들은 건드리지 말아주세요."
"약한 인간한텐 홍미 없어."
그 대화가 마지막이었다.
쿠구구구구궁!
촤아악!
바닥을 뚫고 식물들이 솟아오르며 이그니스를 가격했다.
퍼억! 둔탁한 소음이 울렸다. 그것 도 잠시.
화아아악!
"음〜. 다른 건 없어?"
이그니스의 문신을 따라 흐르는 불길이 식물들을 죄다 불태워버렸 다.
그가 내딛는 걸음마다 수풀이 고 개를 숙이고, 파릇파릇하던 것들이 노랗게 말라 죽었다.
"나랑 상성이 안 좋은 것 같은데."
-도망쳐! 도망쳐야 해!
정령들이 부산스럽게 떠들었다.
-아직 네가 상대하기엔 일러, 인 간.
-상대는 3마왕, 투견 이그니스라 고!
표연원도 가능하면 그들의 말대로 도망치고 싶었다.
뼈를 녹일 것처럼 뜨거운 화염을
내뿜는 이에게 대적하고 싶은 이가 어디 있겠는가.
하지만 그는 물러설 수 없었다.
" 연원아……!"
"표연원!"
뒤에서 가냘프게 그를 부르짖는 원우태와 경진아 때문이기도 했고.
"지원군! 지원군 부탁드립니다! 상 대는 한 명! 너무 강력합니다!"
-지원 요청받았습니다. 현재 지원 군이 모두 출전하여 인원이 부족합 니다. 잠시만 대기를……!
"당장 다 죽게 생겼는데 뭔 대기
야! 빌어먹을!"
살기 위해 몸부림치는 여러 헌터 들 때문이기도 했고.
-난 셰프도, 탱커도 되지 못했지 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쓸모를 증명하고 싶었거든.
그를 진창에서 끌어올린 누군가의 다짐 때문이기도 했다.
"난. 물러설 수 없어."
타닥, 타닥. 불티가 허공에 튀었다.
이그니스가 흥미롭다는 눈빛으로 그를 응시한다.
여기서 물러나면, 고통스러운 기억 으로부터 벗어나고자 노력하고 단 련했던 날들이 수포로 돌아가는 것 같아서.
"내가 너보다 약할진 몰라도, 너보 다 무르진 않거든."
육신은 몰라도 정신만큼은.
그 다짐에 이그니스가 찢어지게 웃는다.
"좋아! 난 너처럼 신념을 가진 것 들이 좋더라고. 너 같은 녀석들은
아무리 다치고 부러져도 다시 일어 나거든!"
그가 호탕하게 외쳤다.
"덤벼!"
콰아아앙!
표연원이 소환한 식물 줄기가 다 시금 그와 맞부딪치며 굉음을 냈다.
후두둑, 이그니스와 맞닿은 부분이 재가 되어 바닥에 떨어졌다.
* * *
혹마법에 대해서 알려진 바는 거 의 없다.
애초에 '흑마법사'라는 존재 자체 도 상당히 미스터리한 부분이 많으 니까.
찰그락.
쇠사슬이 바닥에 쓸리며 차가운 소리를 냈다.
'공간 간섭을 써도 소용이 없었 지.'
쇠사슬의 길이만 좀 늘어나는 게 고작이었다. 그리고 섣불리 사용하 면 큰일 날 수도 있다.
'만약 이 쇠사슬의 길이에 한계가 있으면 공간 간섭으로 그 한계를 벗어났을 때, 발목만 남고 나머지만 공간을 이동할 가능성도 있어.'
그렇게 되면 발목이 거의 절단되 다시피 할 거다.
'물론, 이 혹마법을 푸는 방법을 끝까지 알아내지 못하면 그것도 감 수해야겠지만……,'
이런 식으로 신체와 매개하여 발 동하는 마법은 그 신체 일부를 잘 라내면 나머지 신체 부위엔 영향력 을 행사하지 못하니까.
'한쪽 발이 없어도, 어차피 난 허
공에서 싸우는 편이니. 재활 치료만 잘 견디면 크게 지장은 없을 거야.'
싸우다 사지를 잃는 헌터들을 위 해 그런 쪽은 연구가 잘 되어 있는 편이니.
'물론 어디까지나 그건 최악의 경 우고. 혹마법에 대해서 잘 아는 바 는 없지만, 이런 조건부 마법진의 약점이라면 대충 꿰고 있지.'
결국 흑마법도 마법이니, 그 틀에 서 벗어나진 못할 거다.
"어떻게 하죠?"
정로운이 불안한 기색으로 말문을 열었다.
"탈출할 방법이라도 있나?"
신도아의 물음에 나는 잠시 침묵 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하진 않지만, 시도할 가치가 있는 방법이 하나 있었다.
드르륵.
식사 시간이 되자 문 밖에서 소리 가 울렸다. 우리는 숨을 죽이고 기 다렸다.
달칵.
문고리가 열리고, 끼익 문이 살짝 열린다.
이름 모를 병사가 들어오는 그 순 간.
" 얼어붙어라!"
콰과과곽!
"허억!"
정로운의 외침과 함께 터엉, 문이 박살나고 얼음벽이 병사를 안쪽으 로 밀어 넣는다.
"잡았다."
나이스 캐치.
그 목숨 줄은 우리가 잡았다.
"무슨 일이냐!"
" 얼어붙어라!"
뒤이어 쫓아 들어온 병사들도 같 은 꼴이 났다.
'하나, 둘, 셋…… 열다섯.'
순식간에 생포된 병사들만 열다섯 이었다.
그 다음은, 류라임의 차례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류라임은 낫을 타 고 올라 천장에 폭탄을 뿌렸다.
"얍, 얍!"
콰아아앙!
쾅, 콰과과과광!
후두둑 떨어지는 잔재를 재주껏 잘 피해낸다.
뻥 뚫린 하늘이 보였다. 붉은 하늘 이. 배경으로 딱 좋군.
"무슨 생각이지?"
뒤돌아보니 권성민이 서 있었다.
"고작 그런 병사 몇으로 날 협박 하려는 건 아닐 테고."
그래. 이렇게 소란을 부린 목적은
권성민을 끌어내기 위함이란 걸, 우 리도 알고 그도 알겠지.
그런데도 순순히 이 앞으로 나온 이유는 뭘까. 자신감? 오만함?
"이 족쇄 풀어. 아니면 험한 꼴을 볼 테니까."
"무슨 험한 꼴?"
그가 대놓고 비웃음을 보였다.
"그 병사들? 죽이고 싶으면 얼마 든지 죽여. 상관없으니까."
"그래? 후회할 텐데."
"말도 안 되는……
"이 흑마법. 피에 반응하잖아."
내 말에 권성민이 멈칫했다. 어떻 게 알았냐고 묻고 싶은 얼굴이었다.
'왜냐고? 그야, 처음에 이 마법진 위에 미끼를 깔아뒀잖아.'
그 미끼는 이 마법진에 바치는 제 물이기도 했겠지만, 마법이 발동한 시기는 정확히 기억하고 있다.
'류라임의 폭탄에 사람들이 죽어갔 을 때.'
유혈이 바닥을 적신 그 순간. 그때 가 바로 시작이었다.
'게다가 나뿐만이 아니라 내 부대 원들도 붙잡혔어. 미리 내 부대원들
까지 다 파악하고 인물을 지정해둔 건 아니었겠지.'
내 부대원을 전부 파악하고 있는 이도 드물고.
그렇다면 아마도 '조건부'로 걸었 을 거다.
예컨대, 우리 부대가 공중 부대라 는 것만 알면 얘기는 쉬워진다.
'마법진이 발동했을 때 땅에 붙어 있던 자들은 전부 마법진에 흡수되 고, 하늘에 있던 이들은 전부 족쇄 에 걸린다. 이런 식으로 설정해뒀다 고 가정하면 모든 게 설명되지.'
이렇게 마법진의 조건을 파악할
경우, 그걸 우리가 역이용할 수도 있었다.
"잠……
"이미 늦었어!"
권성민이 창백한 얼굴로 잠깐, 이 라고 말하려 했지만 내가 더 빨랐 다.
콰드득!
서걱!
"으아아아악!"
이름 모를 병사 하나가 팔을 잃었 고, 동시에.
" 얼어붙어라!"
쿠구구구구구!
권성민이 딛고 있던 바닥에 얼음 이 솟아나면서 권성민을 하늘로 띄 웠다.
"크으윽!"
그가 황급히 얼음 바닥에서 탈출 하려고 바닥을 주먹으로 내리쳤다.
하지만, 마법진은 이미 발동한 뒤 였다.
우우우웅!
"날아요!"
은은한 빛이 서리기 시작하고 우 리는 병사들을 내버려둔 채 하늘위로 날아올랐다.
콰드득, 콰직!
"으아아아악!"
"살, 살, 살려줘어어어!"
바닥에 널브러져 있던 병사들이 처참하게 마법진에 잡아먹히고 그 피를 원동력 삼아서 먹잇감을 찾는 다.
"안 돼! 나는, 나는 시전자라고!"
권성민이 소리를 질렀지만 마법진 이 그걸 알아들을 리가 없었다.
철컥.
그의 발목에도 족쇄가 끼워졌다.
조건부 마법진의 한계다. 대가를 적게 바쳐도 되는 대신, 주인을 알 아보지 못하지.
"젠장! 젠장!"
쾅쾅, 그가 두어 번 발목에 감긴 족쇄를 내려쳤지만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자, 권성민. 선택해."
내가 그의 앞에 섰다.
"4대1로 우리와 맞서 싸워서 한참 두들겨 맞은 다음에 풀래, 지금 풀 래."
그가 악에 받친 눈빛으로 날 바라
봤다.
"웃기지 마. 내가 또다시 네 발밑 에서 구를 것 같아?"
그가 흉흉하게 외쳤다.
양손에 검은 마나가 파지직 스파 크처럼 튀었다. 뺨을 타고 번개 맞 은 것 같은 문양이 스멀스멀 기어 올랐다.
'마나의 과잉 공급.'
저 검은 뿔. 저곳에서부터 마나가 흘러넘쳐 권성민을 감싸 안고 있었 다.
'여전히 남의 힘에 기대고 있어.'
결국, 그것이 권성민이 계속해서 쌓아온 선택이었고 동시에 결과였 다.
"하앗!"
그가 바닥을 쿵, 주먹으로 내려치 자 거대한 마력이 사방으로 퍼져나 갔다.
후욱!
그를 중심으로 만물이 흔들렸다.
"꼬아앙!"
"중심을 잡아라!"
정로운과 류라임은 저 멀리 날아 가다가 투명한 벽에 부딪힌 것처럼멈춰 섰다.
"으윽......
신도아는 발톱으로 바닥을 움켜쥔 채 버텼고, 나도 연속적으로 공간 간섭 스킬을 쓰며 위치를 조정했다.
거센 바람에 눈을 감았다 떠보니, 권성민이 코앞에 있었다.
'공간 간섭!'
후우욱!
급하게 피해내자, 내가 있던 곳에 검은 마력포가 적중했다.
"아깝네."
그가 실실 웃는다. 검은 마력이 주
먹을 감싸고 있는 게, 심상치 않았 다.
" 나야말로."
퍼어억!
신도아가 등 뒤에서 권성민을 공 격했지만, 검은 마력이 방패막처럼 일어나 막아낸다.
"아깝네."
그가 한 말을 고스란히 돌려주자 권성민이 까드득 이를 갈았다.
"넌 항상 그렇게 모든 걸 아는 것 처럼 굴지. 짜증 나게."
김기택이 했던 말이 잠깐 떠오르
는 말이었다.
내가 정말 그렇게 보이나.
"내가 정말 모든 걸 알았으면 이 런 바보 같은 함정에 걸리진 않았 을걸."
"입은 살았군!"
콰아앙!
탄환이 검은 마나에 부딪히면서 거센 파열음을 냈다.
"류라임 씨!"
"넵!"
내 외침에 하늘 위에서 대답이 들 려왔다. 후두둑, 폭탄이 위에서 떨어진다.
"정로운 씨!"
" 얼어붙어라!"
권성민의 발목을 얼음덩어리들이 붙잡았다.
콰득!
"이 정도로 날 막을 수 있을 거 같아?"
하지만 얼음덩이는 금방 떨어져 나가고 말았다. 권성민의 물음에 나 는 당연히 아니, 라고 답했다.
"그럴 리가."
철컥.
탕!
'아늑한 바람.'
막 피하려는 그의 목덜미를 내가 붙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