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화
"사, 살려주……! 으으읍! 으븝!"
"흐흐흐. 이게 얼마냐. 응?"
보고 있자니 가관이었다. 홀로 있 는 어린아이를 마구잡이로 끌고 가 고 있었다.
약물을 적신 천으로 입가를 가리 니 격하게 저항하던 아이도 스르륵잠들었다.
"얼른 포대자루에 넣어!"
"하고 있다고."
"이 엘프놈들은 눈치가 빨라서 후 딱 도망쳐야 한단 말이야."
"하고 있다니까!"
한두 번 해본 솜씨가 아니다. 인신 매매업자가 분명했다.
'이를 어쩐다...'
아직 스테이지의 목표도 확인하지 못했는데 섣불리 움직여도 되는 걸 까?
'저 애를 구해야 하나?'
어차피 우리가 개입하지 않는 게 본래의 역사일 테니, 저 애가 받는 구원은 허상에 불과할 텐데.
"요즘 엘프도 값이 떨어져서 문제 야, 문제. 안 그래?"
"그러니까. 전에는 한 마리면 천오 백 골드까지 받았는데. 요즘엔 천삼 백 골드면 많이 쳐주는 거라니까."
"그 케이퍼리 컴퍼니 녀석들은 드 래곤 산맥 쪽에 있는 엘프 숲을 공 략한다는데. 우리도 그리로 가볼 까?"
마치 물건을 사고파는 것처럼 아 무렇지도 않게 엘프를 품평한다.
"그래도 요 녀석은 금발에 푸른 눈이니 귀족 나리들이 좋아하실 거 야! 흐흐, 얼마나 받을 수 있으려 나."
대화 내용이 역겹기 그지없었다.
나는 에녹에게 눈짓했다. 어떻게 할 거냐고 묻는 것이었다.
그는 가만히 침묵했다.
'나보다는 에녹이 더 잘 알 테니 일단은 따르도록 할까.'
그가 나서지 않는 데는 이유가 있 겠지.
결국 우리는 어린 엘프가 그들의
손아귀에 붙잡혀 끌려가는 걸 가만 히 지켜봤다.
그들이 멀리 사라진 다음에야 그 에게 물었다.
"안 쫓아가도 되겠어?"
내게도 그랬으니, 엘프인 그가 보 기엔 무척 거북한 장면이었을 텐데.
"필요한 일이니까."
"이게?"
"아마도."
내가 더 자세히 말해달라고 재촉 하자 그가 입을 열었다.
"나도 얼핏 듣기만 한 이야기다.
어린 엘프들이 연달아 실종되자, 그 에 분노한 엘프들이 숲에서 빠져나 와 인간들의 마을을 습격했다는 사 건."
나는 불쑥 샤노테의 얼굴이 떠올 랐다. 이번 일에 무척이나 분노하던 그는 충분히 그럴 법한 인물이었다.
"일명〈스프링 타운 참사〉라고 불 리는 사건이지. 인간들 사이에서 는 «
"스프링 타운?"
"이 숲 밑에 있는 마을 이름이다."
엘프들을 납치한 게 그 마을 주민 들이라도 된단 말인가? 내가 이해하기 어렵다는 얼굴을 하자 그가 부연설명을 덧붙였다.
"엘프들은 인간 사회를 잘 모르니 까, 무고한 마을 주민들도 그들과 한패인 줄 알고 공격한 거지."
아하……. 그렇다면 이야기가 대충 예상이 간다.
"하지만 마을 사람들은 관계자가 아니니 억울하게 죽었을 거고."
"인간 마을을 점거한 엘프를 쫓아 내기 위해 중앙에서 군대를 파견했 고, 그 뒤는…… 또 다른 참사의 연속이었다."
촌동네 주민이면 몰라도 훈련된
중앙 군사를 엘프들이 당해낼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죄다 몰살당했을 거다.
"그럼 이번 스테이지의 목표도 그 와 관련된 내용이겠네."
아마도 우리가 엘프 측에 있는 걸 보아 앞으로 벌어질 참사를 막는 목표일 것이다.
"아마도."
나는 잠시 생각에 빠졌다. 중앙군 이 엘프들을 몰살시킨 다음에도 살 아남은 엘프는 분명 있었을 거다.
에녹이 저 숲 출신이란 게 그걸
증명한다.
'그런 사건을 겪었으니, 소수만 살 아남아 저 엘프 숲 안에 틀어박혀 지냈겠지.'
그렇다면 더더욱 인간에 대한 중 오가 강했을 거다. 그 의지, 그 사 념체가 이번 스테이지형 게이트를 만들어낸 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한 가지 의문점이 들 어.'
바로 눈앞의 사내에 대한 것이었 다.
"에녹 클라우드. 당신은 왜…… 인 간의 황제에게 충성하지?"
그게 가장 이상한 점이었다. 전부 터 이상하다 생각했지만, 이야기를 들으니 그가 단순히 괴짜인 수준이 아니다.
"다른 엘프들이 당신을 완전히 역 적으로 몰았을 텐데."
말이 좋아 역적이지. 거의 죽일 놈 처럼 생각할 거다.
인간에게도 엘프라 적대받고, 엘프 에게도 인간의 편이라 증오받는 처 지.
그 지독한 위치를 당신은 왜 선택 했는가.
"단순히 황제를 존경해서?"
내 물음에 에녹은 침묵했다.
"이만 돌아가지. 더 시간이 늦으면 이상하게 생각할 거야."
의도가 뻔히 보이게 말을 돌린다.
하지만 그의 아픈 구석임이 명백 해서, 다시 물어볼 순 없었다.
우리는 엘프 마을까지 말없이 걸 었다.
* * *
우당탕탕!
목재로 만들어진 가구들이 바닥을 나뒹굴며 거친 소리를 냈다.
"샤노테! 자네 무슨 짓인가!"
촌장이 그를 나무라며 소리쳤으나, 샤노테는 들어먹질 않았다.
가구들을 막 부수며 소란을 피우 자 엘프들이 모여들어 무슨 일이냐 며 수군거렸다.
"구름 아래 숲 여러분!"
샤노테가 절실하게 외쳤다.
"제 동생이 사라졌습니다!"
허억, 그 말에 누군가 숨을 들이켰 다. 동생이라. 설마 우리가 봤던 그 어린애?
'그러고 보니. 샤노테, 주요인물이 었지.'
내가 이 엘프들 사이에서 그의 이 름을 아는 이유가 뭐겠는가. 시스템 이 이름을 알려준 탓이었다.
"벌써 이게 몇 번째입니까! 언제까 지 우리는 참고만 살아야 합니까? 우리 숲 어머니의 신성한 땅을 그 더러운 발로 짓밟고, 우리 아이들을 납치하고! 그 행태를 얼마나 참아 야 한단 말입니까!"
그 호소에 몇몇은 고개를 끄덕였 다. 혈기가 들끓는 젊은이들은 옳 소! 하며 맞장구를 쳤다.
"안 되네, 샤노테. 많은 엘프들이 죽을 거야."
촌장이 두려움에 가득 찬 목소리 로 속삭였다.
그는 인간의 문명을 엿본 몇 안 되는 엘프들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겁쟁이 같은 소리 하지 마시죠! 물론 숲의 어머니께서 우릴 품으실 때 평화를 사랑하라 이르시긴 했으 나, 불의를 보고도 멍청이처럼 참으 라고 하신 말씀은 아닐 겁니다. 그
분은 누구보다 우릴 사랑하시니까, 우리의 분노도 이해하실 겁니다!"
종교적인 이유로 꺼리는 이들에게 달콤한 말로 방패막을 내민다.
"무릇 엘프 전사들에게 그분께서 면죄부를 내린 이유가 뭐겠습니까? 누군가 습격해올 때 마냥 당하고 있지는 말라고 허용해주신 것 아니 겠습니까!"
"그건 그렇지……
"맞아. 엘프 전사가 있는 이유가 뭐겠어?"
그럴듯한 말에 다들 혹하는 분위 기였다.
"애초에 우리 엘프들은 모두 타고 난 레인저이니, 인간들과 싸워서 질 리 없습니다!"
"샤노테! 제발, 제발 그만하게!"
점점 광분하는 엘프들 사이에서 촌장이 간청했다. 그러나 다들 힘없 는 노인의 말엔 귀 기울이지 않았 다.
"인간들은 폭력적이고 아주 무례 해! 차라리 죽는 게 모두를 위해 나을 거야."
"난 내 아들을 잃었어! 매일 밤 고통 속에서 잠들지……
"엘렌이 사라졌다니. 샤노테, 그대 의 마음이 얼마나 아플지 상상조차 가지 않는군."
저마다 자신의 이야길 떠드느라 바빴다.
집단의 의지가 한곳으로 향할 때, 우리는 쉽게 이성을 상실하곤 한다.
'집단으로 행동할 때 도덕적 해이 가 더 심해진다는 연구도 있었으니 까.'
모두가 함께 책임을 나눈다는 감 각이 그들의 도덕적 기준을 마비시 키는 것이다.
아무리 근면성실하고 선한 이들이 라 할지라도 집단적 광기에 물들면 옳고 그른 것을 판단하기 어렵다.
'게다가 인간에 대한 지식도 없으 니. 그저 모두가 적으로 보일 수밖 에.'
그러니 평화롭게 살아가던 저 아 래 마을에 비극이 닥친 것이다.
"우리는 평화를 사랑하는 종족이 니, 평화를 위해 싸울 것입니다! 분 명 피해자가 있는데 모르는 척만 하는 건 평화가 아닙니다!"
"맞습니다!"
샤노테가 부러진 의자 다리를 들 고 위로 번쩍 들었다.
"일주일 뒤! 저는 혼자서라도 인간 들의 마을에 내려가 제 동생, 제 숲의 형제자매들을 구할 것입니다. 저와 뜻을 함께할 이들은 제각기 마음과 몸의 준비를 마치고 일주일 뒤인 그날! 저와 함께해주시기 바 랍니다."
휘이익! 누군가 휘파람을 불었다.
"나도 함께 갈 거야! 내 아들을 구할 거라고!"
"샤노테, 자네 정말 용감하군!"
"숲의 어머니께서 우릴 굽어살피 실지어다……
그 광경들을 모두 보고 있자니, 예 견된 불행에 몸이 절로 떨려왔다.
자신들이 정말 옳은 일을 행하고 있다고 철석같이 믿고 있었다.
'여기서 내가 아니라고 외쳐봤자 듣지도 않겠지.'
나는 슬그머니 뒤로 한발 물러섰 다.
이 집단 광기는 제3자 입장에서 봤을 때 아주 비정상적으로 보이기 마련이었다.
[알림: 목적을 마주했습니다.]
기다리고 있던 알림이 울렸다.
[스테이지 게이트 '구름 아래 숲'
등급: S
목적: 각 진영을 승리로 이끌어라
내용: 엘프와 인간 진영은 예견된 비극을 눈앞에 두고 있습니다! 각 진영에 배치된 플레이어들은 자신 의 진영을 승리로 이끌어 그들의원한을 달래주십시오!
실패 페널티: 원혼의 저주를 받아 3개월간 능력치가 대폭 하락합니 다.]
등급 S라. 그럴 만하다.
'보아하니 이 엘프 사회는 촌장이 라는 명예직을 빼면 상하 관계가 딱히 없는 것 같은데. 이들을 이끌 고 어떻게 중앙군을 이기지?'
게다가 눈에 띄는 구절도 있었다. 엘프 진영와 인간 진영에 각각 배 치된 플레이어……라는 문구 말이 다.
'다른 사람들이 왜 안 보이나 했 네. 대부분은 인간 진영 쪽에 있는 건가?'
엘프 마을은 소수라 플레이어도 몇 없는 모양이다.
'하필이면 그게 나랑 에녹이라
에녹이야 원래 엘프니 당연히 싱 크로율이 맞는 배역이 엘프였겠지 만, 나까지 엘프로 배정될 줄이야.
'차라리 인간 진영이었으면 일이 편했겠는데.'
그럼 사람들을 지휘해 엘프들의
습격을 막아내기만 하면 될 테니 말이다.
그리고 성공 여부보다 더 중요한 문제가 있었다.
"에녹. 게이트에 입장한 톨룩 쪽 군사는 총 몇 명이나 되지?"
"많지 않다. 스테이지형 게이트란 걸 우린 알고 있었으니까. 날 포함 해서 30명 정도."
서른. 우리에 비하면 터무니없이 적은 숫자다.
여기에 문제가 있다.
'이 게이트, 어떻게든 엘프 진영의
승리로 이끈다고 해도 우리 쪽의 손해야!'
실패 페널티인 '능력치 하락'이 톨 룩은 에녹을 뺀 29명에게 적용되지 만 우리는 각국에서 차출된 최상위 권 헌터들 수백에게 적용되기 때문 이다!
'반대로 엘프 진영이 실패하면…… 비르디아를 보려고 했던 계획이 망 가지게 되는데.'
진퇴양난이다.
승리해도, 실패해도 내겐 손해뿐이 다.
'게다가 인간 진영은 꽤나 단합이
잘 되어 있을 거야.'
나는 능글맞게 웃던 필립을 떠올 렸다. 차라리 필드형이었으면 후반 부에 자기들끼리 분열했을 텐데.
스테이지형에 팀전이면 얘기가 달 라진다.
'골치가 아픈걸……
그때 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생각이 있었다.
번뜩이는 아이디어였다.
" 에녹."
"왜 그러지?"
"날 좀 도와줘야겠어."
그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내게 다 계획이 있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