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0화
"위험한 소릴 하는군."
세드릭이 날카로운 눈빛으로 주변 을살폈다.
이 얘기가 황제의 귀까지 들어갈 까 봐 두려워하는 모습이었다.
"5황자 저하께서 황제 자리를 원 하지 않으시는데, 어찌 내가……
"황제 폐하께서."
세드릭의 말을 도중에 끊어냈다.
"폐하께서 5황자 저하를 가만히 내버려 두실 것 같습니까."
"그럼?"
"전쟁 결과가 시원치 않았을 텐데, 왜 자꾸 전쟁터에 내보내실까요?"
내 말에 세드릭은 잠시 침묵했다.
그동안은 그냥 황족이니까, 혹은 황제가 뭔지 모를 뜻을 품고 있어 서. 그렇게 생각했겠지.
내가 할 일은 거기에 아주 작은 의문을 심어주는 거다.
"언제쯤 5황자 저하께서 황궁으로 돌아가실 수 있을까요? 전쟁이 끝 나면? 더 큰 실패를 하면? 어쩌 면..
" 그만."
세드릭이 차게 대꾸했다. 내가 하 려던 뒷말이 뭔지 눈치챈 기색이었 다.
"황제 폐하께서…… 저하를 죽게 만들려고 밖으로 보내신단 말이냐."
목소리가 잘게 떨려왔다.
부정하고 싶으면서도 어쩌면 그럴 지도 모른다는 의혹이 담겨 있었다.
"제가 황제 폐하의 의중을 어떻게 알겠습니까."
이쯤에서 한발 물러선다.
"이미 인간이길 포기했으니, 그런 사정은 잘 모르거든요."
우리가 인간 사회에 몸담은 이들 이 아니란 걸 슬그머니 강조한다.
제3자의 의견은 꽤나 공신력 있어 보이기 마련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너희완 관 계없는 일이다."
아직은 경계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첫술에 배부를 순 없는 법이지.
"저횔 바로 내치실 게 아니면 방 으로 안내해주시죠."
나는 일부러 당돌하게 말을 꺼냈 다.
스윽.
목을 겨누고 있는 칼날도 손으로 밀어냈다.
세드릭은 잠시 고민하더니, 이내 휙 뒤돌았다.
"따라와라."
* * *
방 안에 들어오자 류라임은 넓은 침대에 뛰어들었다.
풀썩, 폭신한 소리가 났다.
"어떻게든 성공했네요! 기사님은 우리가 마음에 안 드는 모양이지만 요."
"그럴 만하지. 아무리 봐도 수상쩍 잖아."
류라임은 몸을 빙그르르 돌려 내 쪽을 바라보며 물었다.
"톨룩의 황제가 정말로 황자님을 죽이려 할까요?"
"그럴 리가."
"하지만 아까는 그렇게 말했잖아 요."
"적당히 끼워 맞춘 거지. 황제는 아마도 5황자가 쓸 만한 사령관인 지 아닌지 헷갈려하고 있을걸."
첫 번째 게이트 말곤 이렇다 할 성취가 없는 5황자를 여기저기 써 보는 것도 그 때문일 거다.
"그럼, 기사님은…… 황자님을 황 제로 만들고 싶으실까요?"
그건 꽤 어려운 문제다.
"글쎄. 확실하진 않지."
왜냐면 5황자 본인이 그다지 원하 지 않으니까.
"그래도 마냥 무시할 순 없을 거 야."
세드릭이 정확히 무슨 이유로 5황 자에게 충성을 바치는진 몰라도, 5 황자가 죽길 바라진 않을 거다.
"과연 세드릭의 충정은 황제를 적 으로 돌릴 정도로 굳건할까……
나는 자그맣게 중얼거렸다.
5황자 시온은 우리가 흑마법사가 됐단 걸 신기해할 뿐, 진위를 가리 려 하진 않았다.
"종종 듣긴 했는데 실제로 보게 될 줄은 몰랐군. 그러고 보니 우리 쪽에도 협력하는 흑마법사가 하나 있지."
그렇게 말할 뿐이었다.
"내가 너희들을 그대로 두고 온 게 마음에 걸려 아직까지 악몽을 꾸었는데. 늦게라도 다시 보게 되니 다행이구나."
"마족의 힘을 받아들이는 일이 쉽 지 않아 시간이 다소 걸렸습니다."
"그래. 아무렴, 쉽지 않은 일이었 겠지!"
기뻐하는 시온의 뒤로 세드릭이 복잡한 눈빛으로 우릴 바라봤다.
아직도 우릴 어떻게 처리해야 할 지 고민 중인 눈치였다.
'진짜 황제가 5황자를 죽이려고 하 는 거면 우리의 도움이 필요할 테 니까.'
5황자가 이번 게이트에서 성공을 거두어 돌아간다면 모를까, 아직까 진 마땅한 세력이 없는 탓이었다.
"그나저나 게이트가 열린 지 꽤
됐는데…… 지구군은 통 보이질 않 는단 말이지."
슬쩍 흘리는 말에 나도 모르게 귀 를 기울였다.
"정찰병들이 아직도 발견한 게 없 더냐."
"예. 아직이라고 합니다."
"이상하군. 다른 게이트는 벌써 전 투가 시작됐다고 하던데……
그의 의구심이 더 커지기 전에 슬 쩍 주제를 돌렸다.
"그나저나 전쟁터인데 이렇게 고 급 음식을 맛볼 수 있다는 게 신기
합니다."
"황궁 요리사를 데려와서 그렇다."
비록 나와 류라임은 신분 탓에 5 황자와 같이 밥을 먹진 못했지만, 그가 식사하는 동안 말동무 삼아 함께 있을 순 있었다.
"식량을 공급받는 통로가 가까이 있나 보네요."
"가깝진 않지만, 그래도 물자는 전 쟁의 기본이니까. 적어도 배를 곯아 도망치는 짓은 하지 말……
시온이 눈을 번쩍 떴다.
"그래! 그거야!"
나는 남몰래 씨익 웃었다.
"식량 배급로를 파괴하는 거야!"
" 예?"
세드릭이 황당하다는 얼굴을 감추 지 못하고 되물었다.
"하지만, 저하. 그렇게 되면 식량 조달에 문제가 생깁니다."
"당연한 소리 하지 말게! 식량 조 달에 실패해서 돌아왔다고 하면 우 리가 얼마나 머저리처럼 보이겠 나!"
그렇기야 하겠지.
우리가 수작질을 부리지만 않는다
면 말이다.
"이것만 성공하면 나도 황궁에서 놀고먹는 한량이 될 수 있어!"
주먹을 불끈 쥐고 말하는 게 꽤나 의욕이 넘쳐 보였다.
세드릭은 겨우 표정을 수습하고 살짝 미묘한 무표정으로 돌아왔다.
"좋은 생각이십니다, 저하."
내가 맞장구를 치자 세드릭이 휙 고개를 돌렸다.
'황제로 만들어주겠다면서 이런 계 획에 동의한다고?'라며 따지는 듯 한 얼굴이었다.
"식량 배급로에 실수인 척 불을 지르는 건 어떨까요? 식량 창고까 지 불길이 번지게 하면 당장 먹을 것이 없으니 곧장 퇴각해야 할 겁 니다."
"리트! 자네는 내 마음을 읽는 것 같다니까! 아주 마음에 들어."
최대한 바보 같은 실수를 저지르 고 싶어 하는 5황자에게 이건 먹음 직스러운 사냥감이었다.
세드릭이 뒤에서 무슨 꿍꿍이냐는 듯한 표정을 짓는 것만 빼면 모든 게 착착 진행되고 있었다.
나는 잔뜩 흥분한 5황자에게 맞장
구치면서 슬그머니 류라임을 가렸 다.
우물우물.
류라임이 5황자의 밥상에 몰래 손 을 댄 탓이었다.
꾸욱.
나는 뒤꿈치로 류라임의 한쪽 발 을 지그시 밟았다.
왜 그러냐는 표정이길래 적당히 하라는 눈빛을 보내자, 류라임이 알 겠다는 듯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저기 파란 접시에 담긴 게 제일 맛있어요. 드셔보세요."
작게 속닥거리는 게 음식에 대한 감상평이었다. 추천 메뉴까지 살뜰 하게 챙긴다.
"……5황자의 음식이니 먹지 말라 고 하지 않았습느끄……
끝으로 갈수록 이를 악물고 속삭 였다. 류라임은 고개를 갸웃했다.
"들키지 않았으니 괜찮은 거 아닌 가요?"
나는 입을 다물었다.
말이 통하지 않으니, 그냥 대화를 안 하는 게 상책이었다.
* * *
쾅!
세드릭이 위협적으로 벽을 쳤다.
우릴 움츠러들게 만들 계획이었던 모양이지만 난 태연했고 류라임은 음식을 우물거리느라 바빴다.
"무슨 생각인지 도통 모르겠군."
"지겹지도 않나요? 이쯤 되면 절 이해하는 걸 포기할 때도 된 것 같 은데요."
세드릭은 드물게 평정을 잃은 것 처럼 보였다.
"황제 폐하를 들먹인 것도 다 그 냥 장난질이었나?"
"그건 나름 진심이었습니다."
반쯤은.
"지금이라도 널……
" 절?"
나는 그가 벽을 내려친 팔에 손을 얹었다. 그가 움찔한다.
"잊으신 모양인데…… 저희가 황 자 저하 앞에 나서는 게 늦은 이유 는, 마족의 힘을 체화하기 위해서였 거든요."
거짓말이지만.
두 눈을 똑바로 응시하며 읊조리 자 그럴듯해 보였는지 세드릭이 인 상을 찌푸렸다.
"황자 저하께서 속상하실까 봐 경 을 배려하는 것뿐입니다."
언제든지 당신을 죽일 수 있다고 속삭인다.
뒤에서 류라임이 해맑게 작은 폭 탄을 손가락 사이에 끼워서 촤르륵 펼쳤다.
"길, 비켜주시죠."
그를 밀어내자 스르륵 뒤로 물러
선다.
그도 어느 정도 경지에 이른 검사 이니 느낄 수 있었을 거다.
'귀찮게 굴면 정말로 죽일까 싶었 거든.'
세드릭을 남겨두는 이유는 그를 죽이는 것보다 살려둬서 협력을 구 하는 게 더 이득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사건건 트집을 잡으며 귀찮게 굴면 그냥 죽이는 게 더 나 을 수도 있다.
'5황자를 통제할 수 있는 자가 그 나마 세드릭이니까. 일단은 살려두 지.'
방금 경고로 세드릭도 정말 우위 에 있는 게 누구인지 눈치챘을 거 다.
그가 우릴 봐주고 있는 게 아니다. 우리가 그를 살려주고 있는 거지.
류라임이 콧노래를 부르며 따라붙 었다.
"죽일 걸 그랬나요?"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직은 쓸모 가 더 많아 보였다.
"저, 저하……. 여기까진 어쩐 일 로..
갑작스러운 5황자의 등장에 보급 품 조달을 담당하던 이가 당혹스러 운 얼굴을 했다.
대놓고 말하진 못해도 '네놈■이 여 긴 어쩐 일이냐?'라는 기색이 역력 했다.
"큼큼. 식량이 곧 전쟁의 기본 아 니더냐. 내가 직접 살피러 온 것이 니 신경 쓰지 말거라."
"예, 예에에……
신경이 안 쓰이겠냐? 그렇게 말하
고 싶은 걸 애써 참는 얼굴이었다.
"아! 저기 옵니다!"
터벅, 터벅.
말들이 먹을 것을 실은 수레를 끌 고 오는 소리가 들렸다. 아득히 멀 리서부터 그 수가 꽤 많아 보였다.
"홈홈."
5황자가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내 리느라 움찔움찔했다.
미끌!
"어?"
군졸들은 말이 휘청이는 것을 보 고서야 뭔가 이상하단 걸 알아챘다.
"바닥이…… 바닥이 뭔가 이상합 니다!"
"멈춰! 멈춰! 깃발을 올려라!"
이상한 낌새를 눈치채자 즉시 붉 은 깃발을 위로 올리느라 소란이었 다.
더 이상 다가오지 말라는 신호였 다.
"저하! 뭔가 이상합니다. 안으로 드시는 게……
" 아차!"
그때, 5황자는 웃으며 횃불을 들었 다.
"......저하?"
"내가 손이 미끄러졌네!"
후욱!
횃불이, 성벽을 따라 추락했다.
경악 어린 병사들의 얼굴이 스쳐 지나가고, 웃는 얼굴의 5황자가 기 대감 어린 눈빛을 했다.
화르륵!
불길이 순식간에 번졌다.
활활 타오르면서, 붉은 빛이 먹잇 감을 먹는 맹수처럼 날름날름 입맛 을 다신다.
히이이이잉! 히잉!
"으아악!"
모든 것이 불덩이 속에 파묻혀 타 들어 가려는 그때.
"으아아아아악!"
다른 곳에서도 비명이 들렸다.
식량을 실은 수레로부터 멀지 않 은 곳이었다.
"사람 살려!"
"후퇴, 후퇴하라! 적들이 눈치챘 다!"
누군가의 다급한 음성이 울려 퍼
졌다.
"어... 어! 적, 적군이다! 적군이 숨어있었다!"
"적들이 불에 타 죽어간다!"
상황을 파악한 병사들이 큰 소리 로 외쳤다.
활활 타오르는 불길 속에서 사람 으로 추정되는 형상이 덩실덩실 춤 을 춘다.
불길을 피하려고 애쓰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
"저하! 적들의 기습을 어떻게 아신 겁니까?"
5황자가 일부러 횃불을 던지는 걸 똑똑히 목격한 병사가 물었다.
"어?"
5황자는 그제야 뭔가 잘못됐다는 걸 깨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