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2화
총사령부가 묻는 건 아마도 '예정 대로 표연원을 희생해서 마왕을 붙 잡는 게 가능한가'를 의미할 거다.
마왕 둘을 표연원이 혼자?
짧은 시간이고, 한 자리에 머무는 수준으로 완벽한 포박이 필요한 게 아니니 가능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하나가 아니라 둘이 된 이 상 단언할 수 없다.
"여기는 팀 제트. 둘 다 확보하긴 어렵다."
-치직. 여기는 총사령부. 알겠다. 잠시 대기하도록.
그대로 무전이 끊겼다.
그리고 동시에, 쿠구구궁!
지반을 뚫고 그들이 모습을 드러 냈다.
-내 구역이 완전히 엉망이 됐잖 아! 이 짜증 나는 인간들! 죄다 용 암에 튀겨 죽여주마!
쉭쉭, 위협적인 소리를 내는 센티 피드와,
"조용히 해, 센티피드."
흙먼지를 뒤집어써 심기가 불편해 보이는 벨제부브가 말이다.
무려 땅이 내려앉았는데도 둘은 별 타격이 없어 보였다.
'13분......
나는 그 시간을 되뇌면서, 힐끗 혜 원 언니와 표연원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우리는 동시에 눈이 마주쳤다.
그래. 아무리 상황이 달라졌다지
만, 여기에 표연원을 흘로 두고 떠 날 순 없었다.
"최대한 버텨야 해요! 곧 무전기가 울릴 거예요!"
내 말에 다들 결연한 표정을 지었 다.
"시간을 끄는 게 목적이에요."
콰드득! 콰직!
"으아아아악!"
살이 파 먹히는 소리가 울렸다. 누 군가의 목숨이 스러지는 소리였지 만, 누구도 그에 반응해주지 못했 다.
"끝이 없슴다!"
"계속, 계속 밀려들어옴다!"
김태병은 목이 터져라 외쳤다. 몬 스터가 너무 많다고. 견디는 데 한 계가 있다고.
이 드넓은 전선을 유지하는 건 무 리라고!
"버텨야 합니다!"
"견뎌내야 합니다!"
그러나 돌아오는 대답은 매번 똑 같았다. 죽는 한이 있더라도 버텨야 한단 소리뿐이었다.
'젠장. 나도 버티고 싶다고!'
그건 굳건한 의지만으로 가능한 게 아니었다.
몬스터의 이빨에 닿으면 살이 패 고, 근육이 찢기면 무릎이 꺾이는 것은 그가 어떻게 할 수 없는 영역 이었으니까.
-키에에엑! 케게게겍!
몬스터가 입을 쩍 벌리고 김태병 에게 달려들었다.
그가 흠칫 놀라 방패를 위로 치켜 들자, 그걸 노렸다는 둣 바로 발목 을 향해 이빨을 들이밀었다.
'당한다……!'
이대로 발목이 사라져 의족을 낀 채로 살아야 하는 건가! 그런 생각 이 김태병의 머릿속을 스쳤다.
서걱.
그때, 살점이 도려내지는 소리가 들렸다. 통증이 없었다.
자신의 발목이 잘리는 소리는 아 닌 것 같았다.
김태병이 슬며시 눈을 뜨자, 낯익
은 얼굴이 보였다.
"민준이 형!"
얼굴을 반쯤 복면으로 가린 채 위 를 스쳐지나간다. 그가 이리저리 활 약하면서 탱커들의 부담을 덜어주 고 있었다.
-케에에에!
덜컹!
감탄할 새도 없이 몬스터가 다시 쏟아져 나왔다. 그래도 김태병은 전 처럼 절망스럽지 않았다.
"하아아압!"
오히려 기합을 넣으며, 얼얼한 두
손에 다시 힘을 줬다.
"할 수 있슴다! 견며낼 수 있슴 다!"
최우도에게 헌터의 덕목을 물었을 때, 그렇게 답하지 않았던가.
'견뎌내는 것'이 헌터가 갖춰야 할 덕목이라고. 견뎌내다 보면 어느 순 간 살아남아 있고, 모든 것이 해결 되어 있다고!
불끈!
그는 자꾸만 풀어지려고 하는 근 육을 잔뜩 긴장시켰다.
여기서 좀만 더 버티면, 그러면 곧
모든 게 끝날 테니까.
"흐아아아아압!"
그는 그저 묵묵히 견딜 뿐이었다.
삐삐! 삐삐! 삐삐!
무전기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울 었다.
퇴각 신호였다!
우리는 지친 와중에 서로를 바라 봤다.
나는 고개를 살짝 끄덕였고, 혜원 언니와 표연원도 아주 느릿하게 눈 을 깜빡였다.
'앞으로 남은 시간이 고작해야 5분 정도라는 소리!'
무전기가 울리자 겨우겨우 살아남 아 있던 이들의 눈빛에 생기가 돌 았다.
휘이이익!
콰앙!
센티피드의 꼬리를 겨우 피해내면 서 다른 이들에게 외쳤다.
"도망쳐요!"
-어딜! 누구 마음대로 도망치겠단 거야!
센티피드가 극렬히 분노했다. 밀폐 된 공간이 아닌 게 천만다행이었다.
우리 대부분이 공중에서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 게 아니었으면, 벌 써 사상자가 나오고도 남았다.
"연원아, 정로운 씨!"
슈우우욱! 콰드득!
이미 한번 썼던 술수지만 피해낼 도리는 없을 거다.
식물과 얼음이 혼연일체가 되어 센티피드를 감싼다.
-키에에에엑!
센티피드가 울부짖으며 몸을 뒤틀 었지만 식물들이 더욱 겹겹이 쌓이 며 그녀를 붙잡았다.
"흐읍, 하아……!"
표연원이 마력석을 꺼내 들었다.
이제부터는 센티피드를 저 끝나지 않는 식물줄기 감옥에 가둬둘 차례 였다.
다른 이들은 모두 서둘러 후퇴 준 비를 했다. 약속한 바로는 남는 건 표연원뿐이니까.
주머니에서 미리 준비한 아이템을
꺼내들고 발동시킨다.
우우웅, 공간이 뒤틀리며 다른 이 들의 형상이 아른거린다.
"서하 님! 서하 님은요!"
뒤늦게 류라임이 나를 찾아 소리 쳤다. 나는 어서 가라고 손을 흔들 어 보였다.
"걱정 마요. 이따 볼 테니까."
하지만 내 대답이 그다지 믿음직 스럽지 않았는지, 류라임은 눈물을 글썽였다.
내가 이곳에 남는단 걸 직감한 얼 굴이었다.
"안 돼애애애……!"
슉!
다른 이들은 그대로 사라졌다.
남은 건 우리 셋뿐이었다. 나, 표 연원 그리고 혜원 언니까지.
"따라가지 않는 건가."
자신에게 향하는 공격만 대충 상 대하며 방관하던 벨제부브가 물었 다.
바로 옆에서 센티피드가 잔뜩 화 를 내고 있는데, 구해줄 생각은 없 어 보였다.
"너야말로. 도망치지 않네."
마법진이 심상치 않은 기운을 내 고 있는데 말이다. 덕분에 사방은 쥐 죽은 듯이 조용했다.
마물이나 마족들은 전부 마법진 외곽 쪽에서 고군분투하고 있겠지.
탁.
벨제부브가 땅에 내려왔다.
"모처럼 다른 잔챙이들이 사라진 기회 아닌가. 이 정도 마법진은 눈 깜빡할 새에 탈출할 수 있다."
그래. 그러니 마지막까지 누군가 남아서 벨제부브를 잡아둬야 했던 거다.
표연원이 만든 감옥은 센티피드가 대신 당해버렸지만.
"그럼, 덤벼. 재밌게 해줄 테니까."
내 말에 벨제부브가 입꼬리를 말 아 올렸다. 소름끼치는 미소였다.
"도발하지 말거라. 널 죽이게 될까 봐, 아주 많이 참고 있으니까."
"안 오면 내가 먼저 가지."
휘익!
'공간 간섭!'
순식간에 그의 뒤를 점했다.
철컥, 총을 겨눠보지만 그가 즉시
총구를 쳐낸다.
콰득!
그가 내 팔꿈치를 가격해 팔을 망 가뜨렸다. 그 충격에 노이트가 부응 허공에 떴다.
황급히 거리를 벌려보지만, 그가 빠르게 따라붙었다.
'노이트!'
나는 부러지지 않은 쪽 손으로 노 이트를 소환했다. 그 사이 벨제부브 가 내게 손을 뻗어왔다.
그의 손이, 내 목을 노린다.
슈우욱!
똑바로 눈을 뜬 채 바라보자 손끝 이 점점 내게 다가오는 게 보였다.
'하나, 둘, 셋.'
속으로 숫자를 세고, 한 번 더 공 간 간섭을 발동했다.
내 뒤로, 혜원 언니가 서 있다.
후욱!
"......넌!"
벨제부브는 그제야 혜원 언니의 얼굴을 자세히 본 것 같았다.
"아깝네. 거의 다 왔는데."
혜원 언니의 목덜미 바로 앞에서,
벨제부브의 손끝이 멈췄다.
정말 직전이었다.
"……하. 이런 속셈이었나."
벨제부브가 짜증 섞인 목소리를 냈다.
"케르베로스의 맹약. 잊지 않았겠 지'?"
표혜원은 손끝 하나 건드리지 않 는다.
케르베로스의 맹약에 대고 한 그 맹세를 어기면 제아무리 마왕인 벨 제부브라 하더라도 무사하지 못할 테니까.
"이러니 내가 널 쉽게 죽이지 못 하는 거다, 한서하."
벨제부브가 손을 내리며, 고개를 돌려 날 응시했다.
"이렇게 재밌는 장난감은 다른 데 서 구할 수 없거든."
"누가 누구 장난감이래!"
혜원 언니가 손을 뻗어 벨제부브 를 붙잡으려 했지만 놈이 더 빨랐 다.
슉!
순식간에 혜원 언니와 거리를 벌 린다.
"이제 상황이 바뀐 것 같네? 도망 쳐야 하는 건 우리가 아니라 너야."
혜원 언니가 당당하게 웃었다. 그 와 달리 벨제부브의 표정은 일그러 졌다.
모든 게 계획대로였다.
센티피드가 나타난 것만 빼면.
이 게이트 안에 들어오기 전, 그러 니까 정확히는 표연원이 자신의 결 정을 혜원 언니에게 고하던 그날 아침 식탁 위에서 이 모든 게 계획 됐다.
* * *
"넌 안 죽을 거야. 널 죽게 내버려 두진 않을 거야……
내가 나지막하게 중얼거리자, 표연 원이 즉각 반론해왔다.
"서하 누나. 하지만 이 방법 외엔 다른 수가 없잖아요."
그러나 지난 밤, 나도 헛되이 슬픔 에 빠져 허우적대기만 한 건 아니 었다.
나는 밤새 머리가 빠지도록 고민 했다. 어떻게 하면 표연원을 살릴수 있을지.
어떻게 하면 벨제부브를 죽이면서 표연원의 생존을 보장할 수 있을지. 그 방법을 말이다.
"마지막까지 남으면 생존하는 건…… 불가능하잖아요. 그런 방법 이 있었으면 아마 저한테 이런 제 안이 오진 않았겠죠.''
그 말이 맞았다. 나는 머리가 그렇 게 잘 돌아가는 편이 아니니, 다른 방법이 있었으면 이운우가 먼저 알 아냈겠지.
하지만 그들도 모르는 변수가 있 다면?
오로지 나만 알고 있는, 벨제부브 와 관련된 변수가 있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나는 침을 꿀꺽 삼키고 말문을 열 었다.
"혜원 언니. 저는 사실, 전에 벨제 부브와 거래를 한 적이 있어요."
"거래? 그건 또 무슨 소리야."
"자세한 건 묻지 말아줘요. 언제, 어떻게 했는지. 그런 것들이요."
내 말에 혜원 언니가 마지못해 고 개를 끄덕였다.
"……벨제부브는 언니를 해치지
못해요."
내 말이 무슨 뜻인지 도통 모르겠 단 표정이었다. 나는 심호흡을 한번 하고, 부연 설명을 덧붙였다.
"전에 벨제부브와 거래를 한 적이 있어요. 케르베로스의 맹약에 대고 하는…… 서로 어길 수 없는 거래 를요."
"마왕하고? 대체 무슨 거래를 한 건데?"
기겁하는 목소리를 뒤로하고, 나는 최대한 침착하게 말하려고 애를 썼 다.
나는 이 얘길 꺼내도 될지 오랜
시간 고민했다. 혜원 언니를 위험에 빠뜨릴 수도 있었으니까.
혜원 언니를 보호하기 위해 표연 원을 희생시켜야 하는가, 그런 고민 까지 했을 정도다.
하지만…… 새하나교 사건 때, 언 니가 내게 말한 적 있지 않은가.
-난 네 아군이면 아군이지, 네게 보호받는 어린애가 될 순 없어.
그래. 언니는 내가 보호해야 할 대 상이 아니다. 차라리 나와 함께 싸 우는 전우에 가깝다.
그렇기 때문에 이 얘길 꺼낼 수 있었다.
"벨제부브는 언니에게 물리적인 상해를 입히지 못하게 되어 있어요. 이걸 이용하면…… 뭔가 새로운 수 가 생길지도 몰라요."
내 말에 혜원 언니의 눈빛에 번뜩 생기가 돌았다.
"물리적 상해..... 그럼, 차라리 내가 연원이 대신에......!"
"공식적으로 밝힐 순 없어요. 마왕 과 거래를 했다는 점도 그렇고, 공 개적으로 밝히기 어려운 부분들이 많아서 요."
일반인에 불과했던 내가 어떻게 케르베로스의 맹약을 이용해 벨제부브와 거래할 생각을 했는지, 벨제 부브에게 왜 당시에 깊은 친분도 없던 표혜원의 안전을 요구했는지 드드 "〒〒솔직하게 말하기 어려운 부분들이 너무 많았다.
"하지만…… 언니도, 저도, 연원이 도, 전부 벨제부브 대적팀에 들어간 다면 그 안에서 뭔가 만들어낼 순 있겠죠."
적어도 표연원 홀로 그곳에 두고 오는 것보다는 더 나은 선택지를 만들어낼 수 있겠지.
우리는 그곳에서 여러 전략을 짜
냈고, 철저히 비밀에 부쳤다.
끝내 나는 게이트에서 벨제부브와 마주했고, 그 붉은 눈동자를 정면으 로 응시하며 말했다.
"원래는 저 감옥도 네 몫이었는데. 아쉽게 됐네."
센터피드가 아직도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는 나무 넝쿨 감옥을 턱 짓하자, 그가 픽 웃었다.
"방심할 수 없군. 정말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