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1 화
테오도르는 반쯤 바닥에 드러누웠 다.
정말로 모든 게 피곤했다. 종속의 목걸이가 어쩌고 하면서 이리저리 끌려 다니고, 그가 다른 마음을 품 은 게 아닌지 정신감정까지 받았다.
'한서하'라는 목줄이 사라진 테오 도르는 다시 위험분자 취급을 받았다.
차준이 그녀 대신 테오도르의 결 백을 보장했기에 망정이지, 아니었 으면 다시 공방으로 돌아오지 못했 을지도 모른다.
"준아. 나 차 좀 한잔 다오……
" 괜찮으세요?"
" 아니......
차준이 능숙한 솜씨로 차를 우려 냈다. 테오도르는 힘들어 죽겠다고 푸념하며 자리에 앉았다.
"정말이지. 그동안 내가 협력한 게 얼마인데, 아직도 이런 취급이란 말
이냐."
"위험한 상황이니, 어쩔 수 없는 거겠죠."
"나 참. 그러게 왜 그 녀석은 말도 없이 이렇게 사라졌담."
탁. 제 앞에 놓인 찻잔에 테오도르 가 빙긋 웃었다.
"그래도 이렇게 차 한잔의 여유가 생겼으니 이제 좀 살겠……
콰앙!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공방 문이 벌컥 열렸다.
"이렇게 들어오시면 안 ....
"……! 잠시만요! 아악!"
쿵, 퍼억! 파지지직!
차준과 테오도르는 딱딱하게 굳었 다. 문 밖에서 심상치 않은 소리들 이 들려온 탓이었다.
테오도르는 조용히 제 옆에 놓인 약물을 손에 쥐었다. 여차하면 확 뿌려버릴 작정이었다.
"플레임."
차준이 작게 자신의 아타노르를 불렀다.
화르륵!
너무 커버린 플레임이 제 모습을
다 드러내진 못하고, 꼬리만 내밀어 살랑거렸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거대한 불길 이 일었다.
.... ..지만, 분명 이 안 에……!"
벌컥!
"으앗!"
차준은 저도 모르게 놀라 바닥에 주저앉았다.
플레임의 꼬리가 문을 통해 들어 온 이들을 공격하려다가 직전에 멈 췄다.
익숙한 얼굴들이었다.
"역천. 그리고…… 청사까지? 여, 여긴 어쩐 일로……
차준이 틀어진 안경을 바로 고치 며 물었다. 둘은 직전까지 공격당할 뻔한 건 묻지도 않고 대뜸 누군가 를 찾았다.
"한서하는?"
"으웅?"
"한서하는 어디 갔지?"
이운우가 확신에 찬 어조로 말을 꺼냈다. 테오도르를 채근하는 말투 였다.
"한서하? 게이트에서 실종됐다고 하지 않았더냐."
테오도르는 낯빛 한번 바꾸지 않 고 대꾸했다.
"이 화염, 아타노르라고 한다지? 한서하의 아타노르는 아직 계약이 깨지지 않았어. 어딘가 살아있는 거 다."
"그럼 어서 찾지 않고 무엇 하는 게냐?"
"테오도르 님!"
차준이 작게 테오도르를 타박했다.
"상대는 청사의 길드장이라고요.
조심하셔야 해요."
차준이 긴장감 어린 눈빛으로 그 를 힐끗 바라봤다. 뒷말은 테오도르 의 귓가에 대고 작게 속삭인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고 유명하거든요……
"다 들려요."
이운우가 툭 내뱉자, 차준은 히익, 하고 숨을 들이키며 뒷걸음질 쳤다.
하지만 이운우는 지금 간 크게도 자신의 앞에서 헛소리를 지껄인 차 준을 질책할 생각이 없었다.
그보다 더 중요한 문제가 남아있
었으니까.
"한서하는 죽지 않았어. 그렇지?"
"방금 네가 그렇게 말했으면서, 왜 내게 다시 묻는지 모르겠구나."
"한서하가 살아있다면, 그 녀석을 숨겼을 가능성이 제일 높은 게 당 신이거든."
이운우가 형형한 눈빛으로 테오도 르를 응시했다. 테오도르는 여전히 태연한 얼굴이었다.
"무엇 때문에 날 찾아와 행패를 부리는 건지 알 수 없군. 밖에 있 는 이들은 어떻게 됐지? 아무리 청 사의 길드장이라 해도 이 안까지
출입이 허락됐을 것 같진 않은데."
테오도르의 지적에 이운우는 생긋 웃으며 답했다.
"그 부분은 당신 윗사람과 따로 협의를 보도록 하지."
그 은근한 비꼼에 테오도르도 살 짝 표정을 굳혔다.
"속일 생각은 하지 마. 테오도르, 당신이 전부터 이상한 개인 연구를 진행하고 있단 얘길 들은 지 한참 됐거든."
"호오. 거기까지?"
"개인 연구 성과가 슬슬 나왔을
법도 한데. 안 그런가?"
테오도르는 느긋하게 웃었다.
"미안하지만 내 개인 연구는 국가 에 귀속되어 있기에 함부로 말하기 어렵군. 국가 기밀이라서."
"그걸 말하는 게 아니란 걸 알 텐 데."
"그럼? 난 그것 말곤 모르겠구나. 준아, 너는 아는 바가 있느냐?"
갑작스레 이름을 불린 차준이 잔 뜩 버벅거렸다.
"예, 예? 아, 아, 아뇨! 저는 아, 아무것도 모릅니다!"
"내 조수도 아무것도 모른다는군."
이운우는 결국 마지막 수를 쓰기 로 했다.
권력을 이용한 압박, 상대의 비밀 을 쥐고 흔드는 협박도 먹히지 않 았으니 마지막은 단 하나뿐이었다.
"제발......
순식간에 이운우의 눈가가 촉촉하 게 젖어들었다.
"허, 헉! 우세요? 어, 어어어?"
차준이 황급히 휴지를 꺼내 건넸 으나 이운우는 받지 않았다.
"제발 부탁이야. 내 친우가 죽지
않았다는 확신만 갖게 해줘."
누가 듣더라도 가슴이 절절해질 정도로 애절한 목소리였다.
"거짓말이라도 좋으니까. 그냥 살 아있다고 말해줘……
그 애원에 테오도르는 잠시 침묵 했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 말해도, 나도 아는 게 없 어 어쩔 수 없구나."
"테오도르. 난 비록 피가 이어져 있진 않지만, 서하가 내 가족이라 생각해."
곧바로 표혜원이 뒷말을 이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난 알 권리 가 있어."
표혜원이 맑은 눈빛으로 테오도르 를 응시했다. 테오도르는 그 안에서 아주 진득한 간절함을 느낄 수 있 었다.
그러나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테오도르는 억울하다는 표정을 지 으며 대꾸했다.
"정말 모르는 걸 어쩌란 말이냐."
스룽!
"헉! 잠, 잠시만요!"
표혜원이 아예 레이피어를 뽑아 들어 테오도르에게 겨눴다. 그 앞을 차준이 겨우 막아선다.
"진정하세요! 진정하세요!"
"너 정말 몰라? 확실해?"
"일단 칼! 칼 좀!"
차준이 발작하듯이 외치자 표혜원 도 겨우 레이피어를 도로 집어넣었 다.
"허억, 허억……
차준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들어가, 플레임."
화르륵!
표혜원의 등 뒤에서 불만스럽다는 듯 휙휙 좌우로 흔들리는 불꽃이 있었다.
"진정해. 아무 일도 없었잖아."
차준의 중얼거림에 플레임이 시무 룩하게 추욱 늘어졌다.
그러더니 스르륵 바닥으로 스며든 다.
"조심해주세요. 여긴 제 공방 안이 란 말이에요. 아타노르는 이곳의 주 인이고요."
표혜원은 저도 모르게 등골을 따
라 식은땀이 흐르는 걸 느꼈다.
언제라도 자신의 발밑에서 화염이 솟아올라 자신을 잡아먹을 수 있다 는 걸 자각한 탓이었다.
"제 아타노르가 절 과보호하는 편 이 아니라 다행이에요."
"그럼. 그랬으면 이미 전부 다 잿 더미가 됐겠지. 하하."
테오도르가 농담을 얹으며 웃었지 만, 아무도 함께 웃지 못했다. 그게 농담인지 진담인지 헷갈릴 지경이 었다.
"좋아. 우리가…… 너무 흥분했던 모양이야."
이운우가 겨우 차분하게 말을 꺼 냈다.
"아까부터 말했다시피. 우린 한서 하가 죽지 않았다는 가설에 더 힘 을 싣고 있어. 다른 사람들은 어떨 지 모르겠지만……
한서하를 죽은 것으로 처리하고 남은 것을 갈라먹고 싶어 하는 이 들이 한가득이었다.
13부대를 탐내는 이들, 성배 지분 에 군침을 삼키는 이에, 마지막으 로…….
"노이트 리볼버. 그 아이템을 갖고 싶어서, 죽지 않았더라도 그냥 죽여
버리고 싶어 하는 이들이 한 트럭 이거든."
"그것 참. 누군가의 과오구나."
테오도르가 이운우를 보며 슬그머 니 웃었다.
한서하가 영원히 찬란히 빛날 줄 알고 슬쩍 흠을 냈던 것이, 도리어 그 자신을 불안감에 잠기도록 만들 고 있었다.
"그래. 한서하가 이렇게 사라질 줄 몰랐던 내 과오지."
이운우가 반쯤 짓씹듯이 대꾸했다.
이렇게 홀로 사라진 게 아니었다
면 그런 무리들은 아무 위협도 되 지 않았을 거다.
청사의 길드장에 역천의 길드장의 호의를 받고, 홍염의 길드장까지 그 녀를 비호하는데.
그 누가 한국에서 한서하를 건들 수 있었겠는가.
"이제 상황이 달라졌어. 우리가 먼 저 한서하를 찾지 않으면 위험하다 고."
만약 그녀가 정말 살아있다면 말 이다.
한서하의 측근이 아닌 이가 먼저 발견한다면, 살아 돌아올 수 있을까?
혼자서 sss급 아이템을 노리는 그 수많은 이들로부터 도망칠 수 있을 까?
"그러니, 테오도르. 당신이 정말로 한서하를 위한다면, 우리한테 그 행 방을 알려주는 게 맞아."
이운우는 맹렬한 눈빛으로 테오도 르를 바라봤다.
"한서하가 원치 않더라도."
테오도르가 한서하의 부탁 때문에 입을 다물고 있다고 반쯤 확신하는 어투였다.
그러나 테오도르는 태연하게 어깨 를 으쓱했다.
"난 모르는 일이야."
"그럼 대화는 여기서 끝."
표혜원이 탁! 테이블을 내려쳤다.
쩌적, 하고 원목 테이블이 갈라진 것을 테오도르는 애써 모르는 체했 다.
"지금은…… 정말로, 네가 서하의 행방을 모르는 걸로 치자고. 그러니 까 나중에라도 뭔가 힌트를 알게 되면 연락 줘."
표혜원은 자신의 명함을 테이블의
갈라진 틈에 끼워 넣었다.
터벅, 터벅.
그대로 표혜원은 뒤돌아섰다. 이운 우는 쯧, 가볍게 혀를 찬 다음 그 뒤를 따랐다.
"후회하지 않는 선택이길 바라지."
살벌한 경고를 남겨두고 말이다.
테오도르는 고개를 휘휘 저었다.
"무섭네요. 역천의 길드장…… 원 래 저런 성격이었던가요?"
"그러게 말이다."
테오도르가 찻잔을 들어 올리자 기어코, 쩌적!
쿵!
테이블이 반으로 조각나 바닥에 쓰러졌다.
팔랑, 표혜원의 명함이 하늘을 날 았다가 그 위에 사뿐히 내려앉는다.
"……말 안 한 거…… 잘한 거겠 죠'?"
"……아마도."
그때 였다.
삐비비빅 j
시끄럽게 알림이 울렸다.
테오도르는 찻잔을 대충 내려놓고
안쪽 방으로 향했다.
비밀번호를 입력하고 안으로 들어 간 다음 손가락 끝을 찔러 피를 한 방울 흘려 넣자 사용자를 인식한다.
철저한 보안을 다 지난 뒤에야 겨 우 그 모습을 드러낸다.
"……차원 이동기."
거대한 홀을 가득 채울 정도로 거 대한 기계였다. 테오도르가 지난 시 간 동안 계속해서 열중해왔던 연구.
지금까지는 어쩔 수 없이 '투사체' 만 움직일 수 있도록 했었다.
그러나 그 한계를 깨고 본체가 직
전 차원을 움직일 수 있도록 하는 기계.
테오도르의 역작.
차원 이동기였다.
삐비비빅!
한 차례 더 알림이 울렸다.
테오도르는 자신의 역작을 감상하 다 말고 후다닥 달렸다. 이 차원 이동기에 잡히는 신호라면 하나뿐 이었으니까.
달칵.
"그래. 잘 도착한 모양이구나."
-물론이지.
"좀 더 철저히 준비하고 넘어간다 고 했던 것 같은데."
-어쩔 수 없었어. 좀 더 준비했으 면 내가 죽은 게 아니라 어디 게이 트에 들어간 걸로 처리할 수 있었 을 테지만…….
어쩔 수 없다는 어투였지만, 후회 는 없어 보였다.
"그래서. 소감은 어떻지?"
-무슨 소리야?
"톨룩에 도착한 소감 말이다."
테오도르가 나지막이 덧붙였다.
"한서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