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2화
나는 사방을 쓱 둘러봤다.
사실 내겐 너무 익숙한 공간이었 다. 그땐 지금보다 아주 작은 상태 로 왔었으니 크기가 살짝 다르게 보이긴 했지만.
"아직까진 잘 모르겠네. 이사벨라 의 집에 들어와 있거든."
-멜몬드 백작부인의 저택에?
"웅. 내가 톨룩에서 아는 곳이 별 로 없잖아."
기껏해야 이사벨라의 집, 다니엘의 집 그도 아니면 황제의 하얀 첨탑 정도다.
"돌아갈 때까지 얼마나 걸릴지 모 르겠는데. 그쪽 상황은 어때?"
-말도 마라. 나한테 찾아와서 네 가 어딨냐고 묻던데, 제대로 대답하 지 않으면 날 죽일 기세더구나.
"그래서. 대답했어?"
-그럴 리가.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직은 지구랑 톨룩을 오갈 수 있는 기술력이 있단 게 밝혀지면 곤란해. 당장 대규모로 사용할 수 있는 기술도 아니고. 국가에 귀속되 면 나도 접근이 제한될 테니까."
-알고 있다. 그러니 입 다문 것 아니겠느냐. 그래도 서두르는 게 좋 을 거다. 널 찾으려는 이들이 머지 않아 네가 지구에 없단 걸 알아챌 지도 모른다.
노이트를 노리는 이들에, 국제 연 합에서도 내 행방을 찾아 헤맬 테 고, 거기다 개인적인 친분으로 날찾는 이들까지 더해지면…….
"좀 소름 돋네."
-전 세계를 다 뒤지는 데 얼마나 걸릴 것 같으냐.
"최대한 빨리 끝내고 갈게."
이렇게 황급히 넘어올 생각은 없 었지만, 어찌 됐든 이렇게 되어버렸 으니 온 김에 할 일은 다 끝내고 가는 게 낫겠지.
-게이트에서 돌아온 다음에 자취 를 감출 계획을 세우자고 하더 니…… 그 안에서 죽을 위기가 있 었던 게야?
"비슷해. 죽음을 각오해야 하는 일 이 있었지."
-그럼 한 번 더 명심해야 할 거 다. 모든 '존재'는 한 순간에 한 곳 에만 존재할 수 있다. '존재'가 중 복될 순 없는 법이지. 그래서 이번 엔 다소 과격한 방법으로…… '지 구'에 있는 널 지우는 방식으로 그 중복을 예비했다만, 이게 말처럼 쉬 운 일이 아니야. 아주 잠깐이라도 존재에 공백이 생기면 곧장 죽음으 로 이어지니까. 그래서 내가…….
"알았어. 테오. 그만."
-응?
테오도르가 잔뜩 신나서 말을 늘 어놓다가 퍼뜩 정신을 차린 것처럼 되물었다.
-방금, 뭐라고?
나는 부러 모르는 체했다.
"어쨌든 때가 되면 돌아갈게. 그동 안 적당히 모르는 척해줘."
-그러고 있긴 한데,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모르겠구나. 서둘러야 할 거야.
그러더니 한 번 더 되묻는다.
-그런데 내가 잘못 들은 게 아니 라면 방금 네가 분명히 날 '테오도르'가 아니라 '테오'라고 한 것 같……!
나는 다음에 다시 연락하겠다 이 르고는 통화를 끊었다.
탁.
타이밍 좋게도 이사벨라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녀는 처음에 커진 날 보고 무척 당황스러워했는데, 이윽고 내 옷차 림이 너무 이질적이라며 옷을 구하 러 갔었다.
"이걸로 갈아입어."
"이건?"
"하녀복이야."
발목까지 내려오는 스커트에 하얀 색 앞치마가 인상적인 옷이었다.
"이 안에서 돌아다니려면 차라리 이게 낫겠어."
"그런가요?"
내가 보기엔 이 하녀복이 훨씬 이 상한데. 이사벨라가 농담을 하는 것 같진 않았기에 대충 수긍했다.
"그보다, 그 모습은 뭐야? 왜 갑자 기 커진 건데?"
"커진 게 아닙니다. 원래 이 정도 키니까요."
나보다 살짝 작은 이사벨라를 내 려다보자, 그녀는 그게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지 불퉁한 표정을 했다.
"한동안 톨룩에서 머물 것 같습니 다."
"뭐? 5황자를 전쟁 영웅으로 만들 려던 계획은?"
"아마 제 동료가 이어서 수행할 겁니다."
이운우도 이미 내가 죽지 않았단 걸 눈치챈 모양이니까. 이대로 흐지 부지되게 내버려두진 않을 거다.
"저는 그동안 여기서 할 수 있는
일을 하려고요. 이를테면, 5황자의 최측근 마련부터 혁명의 밑작업 같 은 일들 말입니다."
내 말에 이사벨라가 눈을 크게 떴 다.
"좋아. 그 전에 한 가지 확인하고 싶은 게 있어."
" 뭐죠?"
"다니엘. 그 남자는 우리와 함께할 생각이 없어 보이던데."
갑작스럽게 튀어나온 그 이름에 잠시 놀랐다. 둘이 서로의 존재를 눈치챘단 것까진 알았는데.
따로 만났다가 좋은 꼴은 못 본 모양이지.
"다니엘도 5황자를 황태자 즉위식 때 그 안에 들이는 일엔 동의했습 니다."
"그 뒤는?"
이번엔 나도 입을 다물었다.
"우리의 혁명이 성공하길 바라지 도 않는 사람과 어떻게 한배에 타 겠어?"
"이사벨라. 하지만 5황자의 지지 세력을 끌어 모으려면 다니엘이 함 께하는 게 훨씬 유리해요."
"당장은 그렇겠지. 하지만 말했잖 아. 나는 그런 사람하고 같은 배에 탈 순 없어."
잘은 몰라도 둘 사이가 꽤나 틀어 진 것 같았다. 골치가 아프군.
하지만 언제까지고 회피할 순 없 는 문제긴 했다.
이사벨라는 혁명을 원하고, 다니엘 은 귀족 중심의 사회가 존속되길 원했으니까.
이 둘이 아무런 문제 없이 화목하 게 지낼 거라 기대하는 게 멍청한 짓이다.
"좋아요. 이해해요. 중요한 일이니 까, 신중하게 접근해야 한다는 거."
많은 이들의 목숨이 달린 일이니 까.
"하지만 이사벨라. 때론 신념이 아 니라 이득이 더 믿음직스러울 때도 있어요."
적어도 다니엘이 자신의 신념 때 문에 복수를 포기할 것 같진 않았 으니까.
"다니엘은 이번 일을 통해 분명히 얻고 싶어 하는 이득이 있어요. 그 게 있는 한, 적어도 그가 황태자 즉위식 전까지 우릴 배신하는 일은
없을 거예요."
"하지만……
이사벨라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적어도 그가 즉위식까진 함께하 겠다고 약속한다면. 그건 수용할 수 있겠어요?"
"그 직후에 배신할 게 분명한데 도?"
"그건 따로 대비하면 되죠. 다니엘 은 개인이고, 이사벨라는 비욘드와 함께하지 않습니까."
"그야말로 종잇장처럼 얄팍한 동 맹이네."
이사벨라는 차게 비웃었지만, 아주 부정적으로 생각하진 않는 것 같았 다.
"그래. 신념보단 이득…… 그렇게 생각하니,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겠 지."
다른 무엇보다 자신의 신념을 위 해 모든 걸 포기한 이사벨라에겐 이해하기 어려운 족속들일 것이다.
이사벨라가 신념을 버리고 이득을 취했더라면, 차라리 눈과 귀를 막고 귀족 부인으로서 살아갔을 테니까.
"좋아. 황태자 즉위식이 끝나기 전 까지. 딱 그때까지만 협력하겠어."
그렇게 수긍해준다니 다행이군.
나는 그녀와 혁명에 대한 얘길 좀 더 자세히 나누기로 했다.
"최근 사회적 분위기는 어떻죠?"
"평민들 사이에서 알음알음 퍼지 는 분위기야. 하지만 오히려 강하게 압박받은 이들은 뿌리까지 세뇌되 어 반발이 심하고, 부유한 상인 계 층이나 적당히 먹고 사는 평민들 사이에서 더 유효한 반응을 얻고 있어."
"두려운 겁니다. 귀족이요."
하지만 예로부터 우린 배운 것이
있다. 백성들이 들고 일어나는 때 는, 자고로 태평성대가 아니다.
핍박받고 더 이상 살아갈 희망이 없을 때.
이렇게 살다간 정말 모두 다 죽겠 다는 공포심이 턱 끝까지 차오르면, 궁지에 몰린 쥐가 고양이를 물듯이 치고 올라오는 것이다.
"미리 포섭해둔 서자들 있죠?"
이사벨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 중 한 가문을 골라, 가주와 적장자를 죽이세요."
"그러면?"
"임시로나마 그 서자가 가문을 이 끌겠죠. 그렇게 된 직후엔 뭔가 꼬 투리를 잡아 세금을 살벌하게 올리 고, 마을에서 장정들을 데려다가 의 미 없는 노동을 시켜요. 뒤뜰에 별 채를 짓는다든가, 뭐 그런 거요."
이사벨라는 그 전형적인 고위 귀 족의 행패에 눈살을 찌푸렸다.
"지금 혁명에 대한 얘길 하고 있 는 거 맞아?"
"네. 본론은 여기부터죠. 마을에 미리 비욘드 사람을 몇 심어둬요. 떠돌이 상인이나, 용병 같은 이들로 변장시켜서요."
그제야 이사벨라는 내게 귀를 기 울였다.
"그들이 앞잡이가 되어 마을에서 소규모로 '반란'을 일으키는 겁니 다."
"그러면?"
"귀족의 성채를 점령하고 잠시 항 거하라고 해요. 그러면 중앙군이 내 려오겠죠."
"……무혈혁명을 바라진 않는다고 하긴 했지만, 이렇게까진……
이사벨라가 꺼림칙한 표정을 지었 다. 그에 내가 태연하게 대꾸했다.
"안 죽을 겁니다."
"중앙군이 내려올 텐데? 일반 시 민들이 기사를 상대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
나는 빙긋 웃었다. 다 방법이 있었 으니까.
이사벨라에겐 간단히 계획을 설명 했다. 처음엔 반신반의하던 그녀도 내가 적절한 설명을 덧붙이자 이내 수긍했다.
"그렇게 하면…… 제법 그럴듯하 네."
"그렇지?"
"좋아. 그럼 우선은 당신을 비욘드 사람들에게 소개해주는 게 우선이 겠어."
이사벨라가 탁,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아까는 느껴지지 않았던 인기척이 생겨났다.
심지어 꽤나 익숙한 이였다.
"..셀?"
"우와! 드디어 다시 만났네."
덥수룩하게 기른 앞머리가 시야를 가린다. 앞이 제대로 보이는 건가, 싶을 정도지만 본인은 태연해 보였 다.
"비욘드로 가라 해서 갔는데, 정작 당신은 없어서 얼마나 당황했었는 지. 다른 사람들한테 '한서하'는 왜 없냐고 물어도 그게 누구냐고만 하 고!"
마지막에 내가 보던 셀은, 좀 더 절망에 빠진 이였는데.
비욘드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해서 잘 지내고 있는 모양이었다. 저번보 다 훨씬 밝아 보였다.
"오늘에야 다시 보네. 고마워, 당 신 덕분에 새로운 보금자리랑 목표 를 찾았으니까."
"네게도 잘 맞았다니 다행이네."
그를 비욘드로 보내긴 했지만 이 렇게 정말 한편이 되어줄 줄은 몰 랐다.
왜냐하면 마법사란 그 존재부터가 준귀족이라, 굳이 평등사상에 흠뻑 빠질 이유가 없었으니까.
'게다가 셀은 그런 신념에 크게 열 정적인 사람은 아니었던 것 같은 데.'
적어도 이런 혁명에 목숨을 바칠 인물은 아니어 보였기에, 비욘드도 그가 잠시 스쳐지나가는 곳 중 하 나가 될 줄 알았다.
내가 조금 의아한 기색인 게 눈에
보였는지 셀이 씨익 웃었다.
"나는 가진 게 별로 없었으니까. 그나마도 다 잃은 적도 있고."
피범벅이 된 채로 덜덜 떨던 그가 돌연 떠올랐다.
"그래서 난 내 손아귀에 있는 건 아주 소중하게 여기거든."
무슨 의민지 알기 어렵게 아리송 했다.
어찌 됐든 비욘드가 그의 터전이 되었으니, 우리에겐 좋은 일이었다.
"내가 직접 가긴 어렵고, 셀 네가 비욘드를 소개해주렴."
"네에〜, 아가씨. 걱정 마시죠!"
셀이 장난스러운 어조로 웃었다. 그러더니 불쑥 내게 손을 뻗는다.
"자."
그건 마치 새로운 세계로 안내하 는 초대장과 같았다.
"가자. 모두에게 버려진 이들이 모 이는 그곳. '틈새'로."
그 명칭이 참 서글펐다.
나는 선뜻 그의 손을 잡았다.
티 내지 않았지만 속으로 호기심 이 샘솟았다.
톨룩에 대해서 잘 아는 체했지만, 처음 본체로 넘어온 것이었으니.
몸집이 작았을 때도 혹시나 들킬 까봐 숨어 다니느라 바빴다.
나는 떠나기 직전, 하녀복을 다시 이사벨라에게 건네줬다.
"생각해준 건 고맙지만, 역시 내게 그 옷은 어울리지 않는 것 같네요."
이사벨라는 픽 웃었다.
"내 생각에도 그래. 당신은 그 옷 이 제일 잘 어울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