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5화
5황자, 시온은 최근 더할 나위 없 이 행복한 나날들을 보내고 있었다.
호화로운 음식, 각종 편의를 봐주 는 하인들, 아무도 방해하지 않는 자유시 간까지!
그야말로 시온이 꿈꾸던 백수 생 활인 것이다.
물론 언제 다시 출전할지 모른다 는 불안감이 있긴 했지만. 그런 건 잠시 의식 저편으로 밀어뒀다.
"저하. 저하를 뵙고 싶어 하는 분 들이 많습니다. 오늘도 그냥 돌려보 내실 겁니까?"
세드릭이 평화로운 오후 분위기를 망쳤다.
시온은 인상을 팍 찌푸리고는 휙 고개를 돌렸다.
"난 그런 거 몰라."
"모른 척한다고 그들이 사라지는 건 아닙니다. 저하."
"아, 몰라
시온은 귀를 막고 도리도리 고개 를 저었다.
"원래는 나한테 아무 관심도 없더 니. 전쟁에서 승리해서 돌아오니까 이러는 거잖아."
"좋은 일 아닙니까."
"아니야, 아니야. 나한테 뭔가 줄 이라도 대보고 싶은 모양인데. 난 그런 관심 필요 없다고."
한두 번 우연히 이긴 걸로 이런 반응이라니. 시온은 울상을 지었다.
"왜 하필 그때 거기에 지구군들이
숨어있어서……. 에휴. 됐다. 이제 와서 후회하면 뭐 하겠어."
활활 타오르는 불길을 떠올리면 속이 답답해졌다.
그저 식량을 불태우는 멍청한 지 휘관으로 보이고 싶었을 뿐인데.
적의 잠복을 파악하고 단번에 승 리로 이끄는 유능한 지휘관처럼 보 이고 말았으니.
"……황제 폐하께서 이대로 날 잊 어버리면 좋을 텐데."
"조만간 지구로 출전할 테니 준비 하라는 명령이 있으셨습니다."
"나도 알아! 그러니까 다시 상기시 켜주지 않아도 돼!"
시온은 괴로움에 몸부림쳤다.
다시 전쟁터에 끌려갈 생각만 하 면 먹던 음식도 턱 막혀 잘 내려가 질 않았다.
똑똑.
"무슨 일이냐."
시종 하나가 문을 열고 들어오자, 세드릭이 용건을 물었다.
"황제 폐하의 명을 받아 다니엘 경이 찾아왔습니다."
"황제 폐하께서?"
시온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큼큼. 곧 채비해서 가겠다."
"예, 저하."
탁.
문이 닫히자 시온은 떨리는 목소 리로 중얼거렸다.
"……올 것이 왔구나……
다니엘이 찻잔을 정확히 15번 홀 짝인 다음에야 시온이 모습을 드러냈다.
느릿한 걸음걸이에 겁에 질린 얼 굴을 하고서 말이다.
다니엘은 시온 앞에서 예를 갖추 고, 황제의 명령을 읽어내렸다.
"……하여, ……에 이르렀으니. 대 륙의 모든 백성들을 굽어살피고자 친히 황족으로서 모범을 보여야 할 것이다. 이에......하니. 5황자 시온 카이사르 생퀸에게, 르웨카가 가장 높이 뜨는 날 출전할 것을 명 한다."
시온은 고개를 숙이고 몸을 덜덜 떨었다. 드디어 올 것이 왔다!
'또다시 출전이라니!'
절망스럽기 그지없었다.
시온은 겨우 예를 갖춰 대답한 다 음, 황제의 사자로 찾아온 다니엘을 적당히 대접하라고 명했다.
"그럼 편히 쉬다 가길 바라네."
시온이 자리에서 일어나려는데 다 니엘이 불쑥 입을 열었다.
"5황자 저하. 개인적으로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는데. 드려도 되겠습 니까."
"……경이 내게 할 말이 뭐가 있 는지 모르겠지만, 한번 들어보지."
시온은 기분이 썩 좋지 않았기에 다 취소하고 다니엘을 내쫓을까, 싶 었지만.
황제의 말을 전하러 온 그를 함부 로 대할 수 없어 겨우 참아냈다.
"최근 5황자 저하를 호시탐탐 노 리는 이들이 많아진 것은 알고 계 실 겁니다."
"뭐, 의미 없는 짓이지. 나는 그런 것엔 관심이 없거든."
맹세코, 시온은 제 형이나 누이의 것을 탐낼 생각이 없었다.
사실상 황위 계승권 다툼은 제 형
인 3황자와 동생인 1황녀의 독무대 와 다름없었으니까.
"4황자 저하도 그렇게 말씀하시곤 했죠."
4황자, 테오도르.
이제는 거의 금기시된 그 이름을 입에 담는다.
"지금 톨룩의 배신자와 나를 비교 하는 건가?"
시온은 부러 기분 나쁜 티를 냈다. 테오도르와 엮여서 좋은 꼴 볼 리 없으니 미리 선 긋는 행위였다.
"그런 의미는 아니었습니다. 하지
만 4황자 저하께서도 늘 그렇게 말 씀하셨죠. 아예 오로굴드의 탑에 이 름까지 올리면서 입장을 확고히 하 시지 않았습니까."
"그랬지."
"그런데도 사람들은 그분을 많이 따랐었죠. 저하, 이런 흐름은 저하 개인이 부정한다고 해서 막을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시온은 잠시 말문이 막혀 입을 다 물었다. 그의 말대로였다.
테오도르는 황제 자리에 뜻이 없 고 그저 연구만 하며 살면 족하다 고 여러 번 뜻을 밝혔지만, 그럼에도 그를 지지하는 세력은 계속해서 불어났다.
왜냐하면, '테오도르'에겐 그만큼 유용한 가치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역할이 판에 박은 듯이 시온과 유사했다.
시온 역시 정치에 관심이 없다 못 박았지만, 일단은 전쟁에서 그 쓸모 를 증명하지 않았는가.
"……그럴 수가."
그 사실을 깨닫자 자신도 모르는 새에 귀족들 사이에서 은근한 움직 임이 시작됐을지도 모른다는 불안 감이 엄습했다.
"그런 말을 하는 이유가 뭐지?"
시온이 다니엘을 쏘아봤다. 황제의 호위 기사인 그가 이런 충고를 그 에게 건네는 이유가 무엇이란 말인 가.
"제 개인적인 호의입니다. 저하."
"황제 폐하께서 명령하셨나?"
"그럴 리가요. 그분은 언제나, 모 든 걸 관망하시는 분이죠."
말 속에 뼈가 있는 것처럼 느껴진 건 시온의 착각이었을까.
그러나 황제 말고 누구도 섬기지 않는 것으로 유명한 다니엘에게 다른 의도가 있을 것 같진 않았다.
3황자의 파격적인 권유를 대번에 거절했던 일은 이미 유명한 일화였 다.
"호의는 고맙지만 경이 신경 쓸 부분은 아닌 것 같군. 이만 돌아가 보게."
시온이 차게 축객령을 내렸으나, 다니엘은 도리어 부드럽게 웃어 보 였다.
"아니요. 저와도 아주 깊은 연관이 있습니다."
"자네와?"
시온이 의아하게 되묻자, 다니엘이 담담하게 대꾸했다.
"예. 왜냐하면, 제가 이제부터 5황 자 저하를 지지할 생각이거든요."
잠시 침묵이 흘렀다.
시온은 방금 자신이 들은 소리가 너무도 황당해서, 순간 잘못 들은 게 아닌가 싶었다.
그러나 고개를 돌려 세드릭을 보 니, 세드릭 역시 놀란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제야 자신이 헛것을 들은 게 아 님을 깨달았다.
"……방금, 뭐라고?"
"5황자 저하를 지지할 생각입니다. 적극적으로요."
다니엘은 태연하게 찻잔을 홀짝였 다.
시온은 충격받아 표정 관리도 제 대로 못 한 채, 덜덜 떨리는 음성 으로 되물었다.
"……날 왜? 자, 자네는 황제 폐하 만 섬기는 충신 아니던가."
"주군을 섬기는 데 이유가 따로 있겠습니까. 그동안은 제 충정을 다 바칠 정도로 제 마음을 흔드는 이
가 없었을 뿐입니다."
"내 형님께서 자네에게 드래곤 협 곡 옆에 있는 황금 광맥과 3대 동 안 계승되는 백작 작위를 제안하지 않았나."
3황자가 다니엘에게 내걸었던 파 격적인 조건은, 그야말로 평민 출신 기사인 다니엘에겐 천금 같은 기회 였을 것이다.
그냥 명예직도 아니고 계승이 되 는 귀족 작위에, 영토는 없지만 그 야말로 황금이 흐르는 광맥이라니.
누구라도 혹할 만한 조건이지만, 다니엘은 그마저도 거절한 것으로알려져 있었다.
"물질적인 것으론 제 마음을 움직 일 수 없습니다."
"1황녀는 7살 때부터 각국의 현자 들과 대화하고 의견을 나눌 정도로 영특했지. 아직 성년도 채 되지 않 았는데 내 형님과 황위를 겨룰 정 도로 야심도 있고. 그 애는 어떤 가."
시온은 거의 애원하는 것처럼 말 했다.
3황자와 1황녀를 시장에 내놓고 파는 것처럼 줄줄 장점을 읊고 있 으려니, 양심이 살짝 찔려왔다.
"1황녀 저하께선 현명하시지만 잔 혹하지 못하시고, 3황자 저하께선 사람을 다루는 능력이 탁월하시지 만 지나치게 이득에 매몰되는 경향 이 있으시죠. 두 분 다 훌륭한 군 주의 자질을 갖추고 계시지만 그뿐 입니다."
다니엘의 말에 시온은 재빠르게 되받아쳤다.
"그, 그럼 나는? 나는 1황녀처럼 현명하지도 못하고, 3황자처럼 계 산기 두드리는 능력이 뛰어나지도 않은데?"
그러자 다니엘은 마치 준비한 것
처럼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대꾸했 다.
"5황자 저하께선 자신의 능력을 뽐내지 않는 겸손함, 그러나 위기의 순간에 그 실력을 드러내는 대범함 을 갖추셨지요. 또한 전쟁터에 나가 솔선수범하는 모습까지 보이시니, 그야말로 현명한 군주가 될 자질을 두루 갖추셨다고 할 수 있습니다."
시온은 당장이라도 '뭔 헛소리야!' 하고 외치고 싶은 걸 체면을 생각 해 참아냈다.
'겸손? 대범? 그런 게 어딨어! 난 그냥 진짜 아무 능력도 없는데 운
이 좋아 공적을 몇 개 쌓은 것뿐이 라고!'
시온은 뭐라고 말 좀 해보라는 뜻 으로 세드릭에게 눈짓했다.
"그런 편이시긴 하지. 사람 보는 눈이 뛰어나군."
그러나 세드릭은 고개를 끄덕이며 다니엘의 찬사에 동의를 표하고 있 었다.
시온은 입을 쩍 벌리고 그런 세드 릭을 바라봤다.
당장이라도 세드릭의 멱살을 잡고 진심이냐고 묻고 싶은 것을 겨우 삼켜 냈다.
"그런 소릴 자주 듣습니다. 5황자 저하께서 앞으로 나아갈 길이 더욱 기대되니, 일찍이 제 의사를 표하고 자 찾아온 것입니다."
"으흠. 눈치만 보고 있는 다른 귀 족들보다 훨씬 낫군."
"과찬이십니다."
다니엘과 세드릭은 서로 쿵짝이 잘 맞아 하하호호 웃으며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시온은 뭔가 잘못되고 있다고 생 각했다.
"아, 아니 난 황위에 관심 없다니
까?"
"그건 저하의 뜻과 무관한 일입니 다. 이미 많은 이들이 저하의 행보 에 관심을 쏟고 있습니다. 그들은 아주 작은 것까지도 크게 확대해 부풀릴 준비가 되어 있지요."
시온은 절망했다.
그 역시 귀족들의 생태계를 잘 아 는 탓이었다.
"큼. 크흠! 그래도 자네를 완전히 다 믿을 순 없네."
시온은 전략을 바꾸기로 했다. 황 위에 관심 없다는 말이 안 먹혔으 니 아예 '난 널 믿을 수 없다'고 주장하기로 한 것이다.
"자네는 황제 폐하의 사람이지 내 사람이 아니지 않나! 그런 이를 옆 에 둘 순 없지!"
암, 그렇고말고. 시온은 고개를 끄 덕였다.
"그러실 줄 알았습니다. 신중함 역 시 군주의 미덕이지요."
"뭐? 아니, 그런 뜻이 아……
"잘 알겠습니다. 그럼 조만간 제 충정을 중명하는 증거를 들고 찾아 뵙도록 하겠습니다."
"어어'?"
다니엘이 자리에서 일어서자 시온 은 일이 급격히 잘못되고 있음을 느꼈다.
'이게 아닌데?'
시온은 자신이 뭐라 내뱉을수록 상황이 꼬여가자, 간절한 마음으로 세드릭의 옷자락을 슬쩍 쥐었다.
이럴 때면 늘 세드릭이 그의 마음 을 읽은 것처럼 상황을 정리해주곤 했다.
그러나 오늘만큼은 달랐다.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명심하겠습니다."
세드릭의 말을 듣자마자 시온은 답답함에 목이 턱 막혀왔다.
"그럼. 다음에 다시 찾아뵙겠습니 다."
탁.
다니엘이 문을 닫고 나가자, 시온 은 그대로 의자와 함께 뒤로 넘어 갔다.
콰당!
"저하! 괜찮으십니까!"
세드릭이 기겁을 하며 달려갔지만, 시온은 거의 기절할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