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1 화
"2세대의 참극이 있고 나서 거의 30년 뒤에야 저희 세대가 두드러지 기 시작했죠."
"그 사이에 쭉정이 같은 놈들이 없던 건 아니었지!"
1세대와 2세대 사이에도, 2세대와 2.5세대 사이에도 분명 많은 헌터 들이 있었다.
그 세대를 구분 짓는 것은 단순히 그 시대를 향유했던 헌터가 누구인 지가 아니라, 헌터 사회가 어떻게 변했느냐였으니 까.
2세대로부터 30년이나 지난 뒤에 등장한 윤강백, 전서호, 표혜원의 세대가 2.5세대라고 명명된 것도 그 탓이었다.
3세대라고 하기엔, 2세대와 크게 다르지 않았으니까.
"비파동 게이트가 등장하고, 몬스 터들의 지능화가 뚜렷해진 지금에 야 3세대가 명명됐죠. 그 다음엔 전쟁이 시작되면서 4세대가 시작됐
고요."
"그게 4년 간극이라니, 짧긴 하구 나."
손이석은 씁쓸한 어조로 중얼거렸 다.
다른 거면 몰라도, 헌터 사회가 급 변하는 것은 그다지 좋은 신호가 아니었다.
"예전에야 시스템도 뭣도 없었으 니 더 변화가 느렸던 게지. 그땐 스킬 활용법도 일대일로 전수하는 수준이었으니."
후욱, 후욱!
풀무 밟는 소리가 배경음처럼 울 렸다.
"에 잉!"
휙!
그러나 이내 손이석은 풀무에서 발을 떼고 일어섰다. 송골송골 맺힌 땀방울이 옷자락을 적신다.
"오늘따라 불꽃이 영 별로라 못쓰 겠어."
"스승님."
윤강백이 진지하게 그를 불러 세 웠다.
"세상이 변하고 있습니다. 모르는
척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요."
손이석은 그 호소를 못 들은 셈 치고 싶었다.
"그냥 눈 감고 귀 막는다고 해결 되는 수준이 아닙니다."
"뭐가 그렇게 다르다고. 어차피 헌 터들은 목숨 걸고 싸우고, 일반인들 은 아무것도 모른 채로 일상을 누 리겠지. 규모가 커졌을 뿐, 이전과 다를 게 무어 있단 말이냐."
손이석이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대꾸했다.
그의 말대로 전쟁이 선포됐지만 일반인들의 삶은 크게 달라진 것이없었다.
주가가 요동치고 생필품 사재기가 성행한 것도 잠시였다.
그들은 이내 그 전쟁이 사실 이전 과 크게 다를 바 없다는 걸 깨달았 다.
헌터는 늘 죽어 나갔고, 게이트는 항상 생겨났으니까.
"내가 일선에서 물러난 이유를 너 도 알지 않느냐."
손이석이 뒤돌아 윤강백의 눈동자 를 똑바로 응시했다.
"너 역시. '그날'을 기점으로 많은
것이 바뀌었거늘."
윤강백은 대답 없이 서 있었다.
"그때 다호 그 아이에게 네가 품 었던 감정을 내가 모를 거라 생각 했더냐."
"그럴 리가요. 무엇이든 볼 수 있 는 분을 친우로 두고 계시지 않습 니까."
천리안, 최석철을 언급하자 손이석 은 고개를 저었다.
"그 녀석은 많이 보는 만큼 입이 무겁다. 남의 사적인 감정을 떠벌리 고 다닐 녀석이 아니야."
"그럼 어떻게 아신 겁니까?"
"그 애는 내 첫 제자였다. 너뿐만 이 아니라, 내게도 각별한 아이였 어."
푸른 빛깔의 머리카락이 나부끼는 장면이 금방이라도 손에 닿을 것처 럼 선명했다.
전다호. 영원한 청사의 부길드장.
전서호가 그녀를 기리기 위해 부 길드장 자리를 비워뒀던 것은 다들 쉬쉬하는 일이었다.
"그 애의 기일이면 늘 나보다 먼 저 꽃을 두고 가는 이가 있길래 누
구인지 궁금했었지."
"서호였겠죠. 마지막까지 다퉜던 걸 진득하게 후회하지 않았습니까."
"아니."
손이석은 단호하게 부정했다.
"혼한 국화꽃이 아니었어. 다호가 좋아하던 꽃들이 종류를 바꿔가며 꽂혀있었지."
그는 '서호 그 녀석은 다호와 사이 가 좋지 않았으니, 그러긴 어려웠을 거야.' 하고 덧붙였다.
"그렇다고 해서 그게 제가 놓고 간 꽃이라는 법은……
"그래서 한번 떠본 건데 네가 스 스로 시인하지 않았더냐."
윤강백은 저도 모르게 생긋 웃었 다. 당황을 감추기 위한 반사적인 행동이었다.
"아직 부족하구나. 부족해."
"그러게 말입니다. 저는 아직 스승 님이 필요한가 봅니다."
"구렁이 담 넘어가듯이 말 돌리는 걸 보니 내 도움 없어도 충분할 것 같은데."
"무슨 말씀이십니까. 아직 이 제자 는 한참 부족합니다."
둘이 아웅다웅 말씨름을 했다. 그 러다 손이석이 먼저 버럭 소리를 질렀다.
"난 더 이상 그 어떤 것에도 관여 하고 싶지 않다!"
"한서하 헌터는 도와주지 않으셨 습니까."
"그래서 결국 그 애도 죽었지."
윤강백은 입을 다물었다.
첫 제자를 잃은 뒤 슬픔에 빠져 한참을 앓아누웠다가, 겨우 병환에 서 빠져나온 뒤엔 숲속에 틀어박혀 속세와 연을 끊었던 그를 알기 때문이다.
"겨우 다시 인연의 끈을 맺었는데. 또 이 꼴이 됐어."
"▲스니..."
- O I그 .
"난 더 이상은 싫다! 주인 없이 홀로 돌아오는 무기도, 무기 없이 홀로 돌아오는 시신도. 더 이상은 보고 싶지 않구나."
손이석은 제 뜻을 굽힐 생각이 전 혀 없어 보였다.
그의 고함에서 처절한 절규를 느 꼈기에, 윤강백도 더 이상 권할 수 가 없었다.
"……오늘은 이만 돌아가겠습니 다."
"'오늘은'이 아니다! 다신 오지 말 거라."
"하지만. 그 죽음을 막기 위해선 스승님의 무기가 필요하단 걸 알아 주셨으면 합니다."
아이러니한 일이었다.
손이석은 더 이상 죽음을 보고 싶 어 하지 않는데, 그가 개입하지 않 으면 더 많은 이들이 죽어나갈 테 니 말이다.
"……난 이미 많이 지쳤다. 내 제
자를 배출한 것으로, 내 소임은 다 했어."
그가 작게 중얼거렸다.
윤강백은 무어라 대꾸 없이 뒤돌 아섰다. 다음에 다시 찾아오겠다는 기약과 함께.
똑똑.
시종장이 문을 두드렸다. 황제, 카 를로스가 슬며시 고개를 끄덕이자 시종이 문을 열었다.
"왔군."
그의 앞에 붉은 머리카락을 한 기 사가 예를 갖춰 고개를 조아렸다. 황제의 기사, 다니엘이었다.
"부르셨습니까."
"그래. 따로 물어볼 것이 있어 불 렀지."
다니엘은 그가 무슨 말을 하려는 지 대충 알 것 같았다.
"5황자, 시온을 지지한다고."
최근 들어 이사벨라와 다니엘을 주축으로 한 5황자 세력이 그 몸집 을 부풀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빈센트가 그렇게 구애할 때는 거 들떠도 안 보더니. 무슨 심경의 변 화라도 생겼나?"
다니엘은 차마 당신의 등에 칼을 꽂기 위해 그런다고는 할 수 없어 서 말을 골랐다.
"그분의 가능성을 봤습니다."
"그거 재밌군."
그럴듯하게 꾸며낸 말이 카를로스 의 흥미를 자극했는지, 진득하게 웃 어 보인다.
"무슨 가능성? 그게 빈센트보다 더 찬란하게 빛났나?"
"굳이 따지자면 그렇겠죠."
둘 다 훌륭하다고 치켜세울 법도 하건만. 다니엘은 도통 빈말을 할 줄 몰랐다.
그래서 카를로스는 다니엘을 더욱 아꼈던 것이다.
"통 내 자녀들에게 관심이 없길래 황위계승 싸움엔 관여할 마음이 없 는 줄 알았는데. 이리 뒤늦게 뛰어 들 줄이야."
"혼란을 빚어 죄송합니다."
"아니, 일이 재밌게 흘러가니 구경 하는 맛이 있어."
카를로스는 작게 웃었다.
"그래서. 5황자의 무엇이 자넬 이 끌었지? 궁금하군."
"제가 폐하를 처음 뵙던 순간을 기억하십니까."
카를로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황위에 오른 이후로, 수도 없이 많 은 인간 군상을 만났다.
개중 다니엘과의 첫 만남은 잊을 수 없으리만치 강렬했다.
"잊을 리가. 평민이 검술 대회에서 우승한 것도 놀라운데, 원하는 것을 말해보라 했더니 대뜸 날 원한다고
하지 않았나."
명목은 우수한 기사를 뽑기 위한 대회로, 검술 대회엔 신분을 막론한 모두가 참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역대 우승자는 모두 고위 귀족가 자녀였을 정도로 뿌리 깊은 귀족 중심 대회였다.
최초의 평민 우승자.
그 실력이 대단해 황제가 직접 원 하는 것이 있으면 무엇이든 들어주 겠노라 선언했었다.
"……그땐 말을 가다듬을 줄 몰랐 죠."
다니엘은 감히 황제의 옆자리를 원했다.
갖은 금은보화를 마다하고, 황제의 호위 기사 자리를 꿰찬 그를 두고 갖은 음모론이 들끓을 정도였다.
"그때 황제 폐하를 뵙고 느꼈던 그 느낌을, 5황자 저하께 받았습니 다."
" 호오......
카를로스는 턱 끝을 쓰다듬었다.
"위험한 발언이군."
황제와 5황자를 동일시하다니. 반 란을 꾸몄다고 잡혀 들어가도 할말이 없는 수준이다.
"기분 상하셨다면 죄송합니다. 제 가 느낀 바를 가장 정확하게 표현 할 수 있는 말이었습니다."
다니엘은 제 뜻을 낮추는 척하면 서 다시금 의견을 피력했다.
"이상한 일이지. 조슈아도 그렇고, 너도 그렇고. 아비인 나도 모르는 5황자의 이면을 보는 것처럼 굴고 있으니까."
카를로스가 보기에 5황자는 머저 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데 말이 다.
한두 명도 아니고 귀족 사회에 새
롭게 5황자의 세력이 생겨나고 있 었으니.
카를로스는 자신의 눈이 잘못된 건 아닌가 의심스러울 지경이었다.
"죄송합니다. 제가 주제넘게……
"아니. 널 탓하려고 부른 건 아니 었다."
카를로스는 처음 그를 맞이했을 때처럼 손을 대충 휘적였다.
"이만 나가봐도 좋다."
"폐하. 주제넘지만 한 가지 청을 드려도 되겠습니까."
"뭐지?"
다니엘이 뭔갈 요구하는 건 아주 드문 일이었다.
카를로스는 다니엘의 새로운 면모 를 거듭 마주하는 것에 내심 놀라 고 있었다.
"이번 반란을 잠재운 공으로, 저를 5황자 저하께 하사해주십시오."
M ¥ 아
...경.
카를로스가 차갑게 그를 불렀다.
"경이 5황자를 지지하는 것은 자 유지만, 5황자의 기사가 되는 건 별개의 문제란 걸 알 텐데."
"예. 압니다."
기사는 한번 주군으로 모신 자를 바꾸지 못한다. 그 주군이 죽기 전 까지는 말이다.
카를로스가 멀쩡히 살아있는데 다 니엘을 5황자에게 하사하는 건, 다 름이 아니라 다니엘을 향한 심한 모독이었다.
"난 내 기사를 욕보인 주인이 되 고 싶진 않다."
"5황자 저하를 지키는 호위 기사 가 세드릭 경 한 명뿐이라고 들었 습니다. 터무니없이 적은 숫자입니 다."
카를로스는 살짝 인상을 찌푸리곤
계속해보라며 고갯짓을 했다.
"황태자 즉위식이 얼마 남지 않았 으니, 황자 저하의 안전에 각별히 신경 써야 할 때가 아닙니까. 하나 새로운 기사를 뽑기엔 위험성이 크 니, 황제 폐하의 기사인 저를 잠시 수여하는 걸로 상을 대신하시면 어 떻겠습니까."
" 흐음."
들어보니 나쁘지 않은 제안이었다. 5황자를 지키는 기사 수가 적은 것 도, 중원이 필요한 것도, 그에 따른 위험성이 상당한 것도 모두 맞았으 니까.
"네 명예가 부러져도 상관없나, 다 니엘."
황제의 물음에 다니엘은 고개를 숙인 채로 잠시 침묵했다.
그는 지금까지 평민 신분이란 흠 결 때문에 더더욱 명예에 집착해왔 다.
완벽한 기사가 되기 위해서 말이 다.
그런 그에게 불명예는, 과장해서 말하면 죽음과도 같았다.
"상관없습니다."
카를로스는 다니엘이 삼켜낸 뒷말
이 '5황자를 지킬 수만 있다면'인 줄 알았으나.
실상은 달랐다.
'황제. 당신을 내 손으로 죽일 수 만 있다면. 명예 따위는 아무래도 좋아.'
다니엘은 속으로 복수의 칼날을 갈고 닦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