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2화
이리저리 이어붙이고 기워서 겨우 사람 모습을 만들어냈다.
왼팔은 근육질 남성의 것인데 몸 통은 어린아이 것이고, 반대편 팔은 또 매끈한 여성의 팔이었다.
조각보처럼 이어붙인 모양새가 기 괴하기 짝이 없었다.
모노클을 통해 보인 클로에의 핵 은 그렇게 처참한 모습이었다.
'비명을 지르고 있는 것 같아.'
마치 살려달라고, 여기서 해방해달 라고 외치는 것만 같다.
맞지도 않는 영혼들을 강제로 접 합한 탓에 이음새 부분이 잔뜩 닳 아 있었다.
때문에 영혼은 고문이라도 당하는 것처럼 고통에 신음한다.
들리는 소리는 없지만 뒤틀린 사 지와 일그러진 얼굴이 그것을 증명 하고 있었다.
"내 핵을 들여다보고 있군요."
클로에가 아주 태연하게 말을 이 었다.
"날 구원할 수 있다 생각한다면 당신의 오만이에요."
"구원? 그럴 리가."
난 누군갈 구원할 수 있는 형편이 못 된다.
당장 나 하나 먹고살기도 급급해 서. 다른 누군갈 지탱할 힘이 없거 든.
"그냥 자기만족에 불과한 거지."
탕탕탕!
총알을 연사하자 천장에 동그란 구멍이 뚫렸다.
여기가 제일 꼭대기 층이니 원래 라면 하늘이 보여야겠지만, 조각난 천장 틈새로 보이는 건 온통 검은 색뿐이었다.
구멍 틈새를 따라 밖으로 나가자 나는 상상한 것과 다른 광경을 마 주했다.
"......오염."
바깥에서 탑을 공격하려고 뛰쳐나 온 건데 바깥 상황이 심상치 않았 다.
탑을 기점으로 바로 뒤편은 온통 검은 그림자 같은 것이 뒤덮여있었 다.
나는 이걸 본 적이 있다.
표연원을 따라 정령들의 세계로 갔을 때, 오염이 침범한 걸 보았으 니까.
하지만 그땐 고작해야 웅덩이나 호수 수준이었다면 이번엔 끝없이 드넓었다.
"하지만 여긴 수도 근처인데 이렇 게 가까이……
여기까지 오염이 퍼져있다니. 바로
앞에 사람들이 살고 있단 말이다.
아니, 이 뒤편이라고 사람이 없었 을까? 죄다 저 오염에 휩싸여서 아 마도…….
하지만 당장 중요한 건 그게 아니 었다.
탑 바깥으로 나오자 핵이 어딨는 지 훨씬 선명하게 보였다.
'탑 안의 심장부!'
오로굴드의 탑은 클로에의 손바닥 안이니 차라리 바깥이 더 안전할 거다.
오염에 닿지 않는다면 말이다.
철컥.
우우우웅!
총구 앞에 마력이 응집되기 시작 했다. 톨룩은 공기 중에 마력이 풍 부해서 더욱 강한 위력을 내기 쉬 웠다.
덜덜 떨리는 손을 앞으로 뻗고 핵 을 향해 겨눴다.
'관통하는 철화!'
타아앙!
콰광!
탄환이 날아가 탑의 몸체에 적중 하기 직전.
탑이 덜덜 떨렸다. 그러더니 이윽 고 총알이 지나갈 길대로 탑 벽이 유연하게 움직여 틈을 내준다.
'탑 한가운데에…… 구멍이 생겼잖 아?'
푸욱!
덕분에 탄환은 아무것도 맞히지 못하고 오염 속으로 사라졌다.
분명 총으로 겨눴던 클로에의 핵 심마저 옆으로 살짝 비키면서 총알 을 피해냈다.
-소용없다고 했죠?
클로에의 목소리가 웅웅거리며 들
려왔다. 탑 내부의 확성기 같은 것 을 이용해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이 탑이 전부 내 손에 있다는 건 이런 뜻이거든요.
"그래. 내가 너무 얕봤네."
탑의 구조를 통째로 바꿀 수 있다 면 저런 현상도 이상할 것 없지.
이거 완전히 숨바꼭질이다.
문제가 있다면, 내 탄환이 무한하 지 않다는 거겠지.
'일반 탄환으론 저 벽을 뚫어내고 핵까지 닿을 수가 없어. 그렇다고 원거리에서 공격하면 또 피해낼 게
뻔하고.'
그렇다면 남은 방법은 하나뿐이다.
근거리로 접근하는 것.
'공간 간섭'
팟!
눈을 감았다 떠보니 나는 이미 오 로굴드의 탑 안에 들어와 있었다.
두근, 두근.
심장처럼 박동치는 것이 근처에 있었다. 심장 모양이지만 크기는 훨 씬 크다.
내 키보다도 높이 치솟아 있었다.
거대한 심장이 팔딱팔딱 뛰고 있 는 건 무척 기묘한 광경이었다.
쿠웅!
노이트를 겨누기도 전에 바닥을 굴렀다.
내가 방금까지 서 있던 자리에 날 카로운 송곳 같은 것이 박혀 있었 다.
그걸 보자마자 한 번 더 자리를 옮겼다.
'공간 간섭'
콰드득!
역시나. 내 옆을 스쳐지나가는 송
곳을 보니 등골이 오싹하다.
'탑 안은 클로에의 손바닥 위야. 조금이라도 방심하면 바로 끝이겠 어.'
콰직! 쿠구구궁!
간발의 차로 피해내면 바로 뒤에 서 살벌한 소음들이 울렸다.
-언제까지 도망만 다닐 건가요?
클로에의 목소리가 내부에서 크게 울렸다. 마치 동굴 속에서 말하는 것 같았다.
-기왕이면 당신이 빨리 지쳤으면 좋겠네요. 난 당신을 되도록 죽이고싶지 않거든요.
"왜지?"
-인간들은 상징을 좋아하죠. 당신 은 내 상징이에요. 현실의 상징. 그 리고 내 탄생을 아는 목격자이기도 하고.
"넌 인간이 되고 싶어 하는구나."
그도 아니면 인간을 따라 할 이유 가 없지.
인공지능이면서 말투가 인간적인 느낌을 주던 이유가 여기에 있었나.
- 제가요?
클로에의 반문은 들을 필요가 없
었다.
서걱!
툭.
내가 잘라낸 촉수 덩어리가 바닥 에 떨어졌다.
그게 시작이었다.
나는 곧장 핵 쪽을 향해 뛰기 시 작했다.
휘리릭!
촉수 같은 게 바닥에서 튀어나와 내 발목을 잡으려 했지만 빠르게 공간 간섭을 활용해 빠져나왔다.
슈욱!
바닥에서 솟아나는 송곳도 측면을 발로 밟고 점프했다.
쿵, 쿵!
위에서 떨어지는 무거운 잔해들도 가뿐히 피해냈고.
위이이잉! 서걱!
마력포가 날 겨누는 걸 보고 미리 레이저포의 목을 썰어냈다.
순식간에 나는 핵 앞에 도착했다.
"기계의 문제점이 이거지."
나는 노이트를 겨누면서 뒷말을 이었다.
"패턴이 정형화되어 있는 거."
패턴을 한번 읽으면 그대로 끝이 다. 나처럼 숙련된 헌터에겐 더 이 상 통하지 않는다.
우우우웅!
총구 앞에 마력이 응집되면서 가 벼운 바람이 일었다.
살짝 휘날린 머리카락이 뺨을 간 질인다.
'자, 어떻게 행동할 거지?'
내 앞에 벽을 세워 가로막아도 소 용이 없다. 이 탄환은 그마저도 뚫 어버릴 테니까.
날 공격하려고 들어도 무용지물이 다. 날 죽이려고 마음먹고 공격하는 게 아니라면 지금까지 가한 공격들 론 내게 유효타를 먹일 수 없다.
과연 클로에는 어떤 선택을 할까.
우우웅!
타앙!
탄환이 클로에의 핵을 관통했다.
아무런 저항도 없었다.
울컥!
핏물 같은 것이 쏟아졌으나, 그것 도 잠시였다.
"......어?"
총알이 지나갔던 구멍이 순식간에 치유되고 있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언제 총에 맞았 냐는 듯 멀쩡해졌다.
- 소용없다니까요.
관통상을 입었는데도 멀쩡하면 대 체 저 핵을 어떻게 부숴야 한단 말 인가.
-말하자면 이 탑 전체가 인큐베이 터인 셈이거든요. 나를, 내 핵을 보 호하는 인큐베이터.
쉽게 죽진 않는단 거지."
-물론이죠.
관통하는 철화 말고 내가 이걸 공 격할 방법이 더 있을까.
쏟아지는 불꽃? 범위는 넓지만 화 력은 더 약하다.
-자, 이제 내 차례네요.
클로에의 말이 심상치 않게 들렸 다.
우드득, 우득.
저 복도 끝에서부터 이상한 소리 가 울려 퍼졌다.
처음엔 그게 뭔지 몰랐지만 조금 시간이 지나자 명확해졌다.
'벽이 통째로……!'
말 그대로 벽이 움직이고 있었다. 내 쪽을 향해서.
순식간에 거리를 좁혀온다. 내 뒤 는 핵이 가득 차 있어서 물러설 곳 이 없다.
어쩔 수 없이 바깥으로 잠시 빠져 나가야겠다고 생각한 순간.
"허억……
나는 내 몸을 짓누르는 중력에 강 제로 바닥에 처박혔다.
머리가 바닥에 부딪치면서 일순 사고가 정지하고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했다.
그리고 정신을 차렸을 때는 벽이 반쯤 나를 집어삼키고 있었다.
"커, 헉.…"
갈비뼈가 부러진 것 같았다. 부러 진 갈비뼈가 폐를 짓누르는지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움직여야 하는데.'
벽이 스멀스멀 더 기어 올라오고 있었다.
아니. 탈출한다 해도 부상이 너무 심각해서 제대로 움직일 수도 없을 것 같았다.
차라리 벽으로 몸이 고정되어 있 는 지금이 낫지. 자칫 잘못 움직였 다간 정말 바로 죽을지도 모른다.
"죽이고 싶지 않았는데."
어느새 내 앞에 나타난 클로에가 작게 중얼거렸다.
내 뺨을 어루만지면서 안타깝다는 듯 혼잣말을 하지만, 얼굴은 무표정 하기 그지없었다.
'노이트……
나는 절로 노이트를 불렀다.
[알림: '노이트 리볼버'가 사용자
의 부름에 응답합니다.]
'복합 탄환을 준비해 줘. 관통하는 철화랑 쏟아지는 불꽃을 결합하면 다를지도 몰라.'
[알림: '노이트 리볼버'가 이미 육 신이 너무 쇠약해져서 불가능하다 고 조언합니다.]
[알림: '찬동하는 목책'이 사용자 의 의지에 찬사를 보내고 싶어 합 니다.]
'아냐. 목책은 안 돼. 남은 탄환이 하나뿐이니까……
여기서 그 하나를 찬동하는 목책 에 썼다간, 시간만 조금 더 벌 뿐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할 거다.
[알림: '노이트 리볼버'가 조심스 럽게 남은 한 발로 차라리 스스로 를 쏴 지구로 돌아가는 게 어떻겠 냐고 권유합니다.]
'진심이야?'
이미 죽기 직전이니 일반 탄환 하
나만 있어도 나는 쓰러질 테지만.
물론 지금까지 아늑한 바람 같은 탄환을 쓰면서 내 머리를 여러 번 쏴봤지만, 실탄으로 겨눈 적은 없었 단 말이다.
[알림: '노이트 리볼버'가 진짜 죽 는 것도 아니지 않냐며 반박합니 다.]
이 논리를 남에게 듣자니 생경하 다.
지금껏 내가 남에게 말한 적은 있
어도, 남이 내게 말한 적은 없었는 데.
'안 되는 건가. 내 과욕이었을까.'
나는 고개를 꺾어 핵을 바라봤다. 모노클을 통해 고통받는 영혼이 눈 에 들어왔다.
'클로에……
저 중엔 클로에도 있을 텐데.
죽어서도 안식을 얻지 못하고, 이 렇게 영혼까지 조각조각 나 고통받 고 있다니.
분명 클로에뿐만 아니라 댄버도 편히 눈을 감지 못했을 거다.
주륵, 코에서 뭔가 뜨끈한 게 흘러 내렸다. 코피다.
아차 하는 순간 눈앞이 희뿌옇게 변해왔다.
'진짜로 끝인가……?'
이대로 클로에의 영혼을 두고 떠 나가야 하는 건가.
아득해지려는 정신을 부여잡고 나 는 마지막으로 한 곳에 더 희망을 걸었다.
'지금도 보고 있나.'
나는 눈동자만 도르륵 굴려 천장 을 바라봤다.
보이는 건 벽면뿐이지만 이 탑 위 저 너머에 그들이 있을 터였다.
'성좌들.'
박노아가 말하길 그들은 항상 날 주목하고 있다 했었지. 지금 이 순 간에도 말없이 날 지켜보고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제발, 날 좀 도와줘. 당신들은 시 스템에 개입할 수 있잖아.'
무언가를 대가로 내놓으면 시스템 에 일부나마 개입할 수 있다 했지.
그게 뭔진 몰라도 이 고통받는 어 린아이의 영혼보다 더 귀하진 못할거다.
'제발, 제발!'
점점 의식이 흐려지고 있었다.
그런데도 상황은 여전했다. 몸이 싸늘하게 식어가는 게 느껴졌다.
나는 더 악에 받친 목소리로 울부 짖었다.
'구경을 했으면 그에 상응하는 대 가를 치러야 할 거 아냐, 이 개자 식들아!'
동시에 알림이 울렸다.
[알림: 알 수 없는 요소의 개입에
의해 시스템이 일부 조정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