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9화
챕터: 전심전력
"누가 저 말린 수선화가루 100g만 주세요!"
"저도 지금 바빠요!"
"여기 있던 버디그리 어디 갔어 요? 살아있는 구리 말이에요!"
한창 바쁜 낮에 왔더니 사람이 바
글바글했다. 다들 연금술사가 되고 싶어 온 사람들이겠지.
잘은 몰라도 말하는 걸 들어보면 꽤나 숙련된 연금술사들 같았다.
"김현우 씨! 스파기리아 팅크제를 만들 땐 침전물이 생기지 않게 주 의해야 한다고 말씀 드렸…… 아!"
나는 차준에게 가볍게 손을 흔들 었다.
공식적으로 이곳은 차준의 공방이 니, 제일 상급자는 그였다.
이제 제법 사람 부릴 줄 아는 태 가 난다.
아직 견습으로 보이는 이를 혼내 다가 나와 눈을 마주치곤 머쓱하게 웃는다.
"오늘 오실 줄 몰랐는데요."
"드디어 시간이 나서."
차준이 가볍게 내 몸 상태를 훑었 다.
"생각보다 멀쩡해 보이시네요."
"팔다리라도 하나 부러졌을 줄 알 았어?"
"솔직히 말하자면, 네."
살벌한 소릴 아무렇지도 않게 한 다.
이운우와 혜원 언니가 어찌나 테 오도르를 닦달했는지 대충 예상이 갔다.
테오도르도 떨리는 목소리로 내게 경고하곤 했으니.
차준이 아직 자신의 뒤편에 서 있 는 남자에게 마저 말을 건넸다.
"이거 전부 버리고 새로 만들어 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현우 씨, 아타노르랑 계약한 지 얼마나 됐죠?"
"이제 2주 됐습니다."
견습 연금술사로 보이는 사내의 어깨 위에 엄지손가락만 한 도마뱀 이 붙어있었다.
저게 그가 계약한 아타노르인 모 양이다.
"아직 경험이 부족해서 그럴 수 있어요. 제 아타노르인 플레임의 불 꽃으로 다시 해보세요. 성공률이 전 보단 나을 거예요."
"감사한 말씀이지만……
남자는 주저하다가 자신의 어깨에 놓인 아타노르를 손가락으로 가볍 게 쓰다듬었다.
"제겐 제 불꽃이 있으니까요. 이번 엔 정말 잘할 수 있습니다. 한 번 만 더 기회를 주세요."
그가 허리를 깊게 숙이자 차준이 당황하며 그를 만류했다.
"괘, 괜찮아요! 한 번 더 해보시 고, 그래도 안 되면 그때 플레임한 테 부탁해보세요."
"네. 알겠습니다!"
사내는 서둘러 뒤돌아섰다. 이번엔 정말 성공해보겠다며 의욕에 불탄 채였다.
"테오도르 님께 안내해드릴게요."
내게 말을 건네는 차준의 얼굴엔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다.
"제법 공방의 주인 태가 나는데."
"공방의 주인이라뇨. 그건 제가 아 니라 플레임이죠."
"다른 연금술사 육성도 순조롭나 봐?"
"네. 아타노르랑 계약한 이들도 꽤 많고. 조만간 독립해서 자신의 공방 을 차릴 예정인 연금술사들도 있어 요."
처음부터 차준을 연금술사로 만든 이유가 연금술사 육성을 위해서긴했다.
차근차근 잘 진행되고 있는 모양 이다.
" 이쪽으로요."
평소 드나들던 방으로 가려는데, 차준이 다른 곳을 가리킨다.
" 여길?"
" 네."
작은 창고로 쓰던 방의 문이었다. 테오도르가 여기 있나?
스으윽.
문을 열자 텅 빈 창고가 눈에 들 어왔다.
차준은 익숙한 손놀림으로 창고 제일 안쪽에서 이것저것 만져댔다.
책장에서 책을 빼고, 물약통의 자 리를 바꾸고 마지막으로 은빛 가루 를 사르륵 뿌린다.
"우와."
그러자 아까까지만 해도 없었던 문이 새롭게 생겨났다.
"뭐야. 길을 완전히 바꿨네?"
"네. 최근에 생명의 위협을 느낄 일들이 좀 있었거든요……
차준이 몸을 잘게 떨며 대꾸했다.
국가 직속 연금술사에게 감히 누
가 그런 짓을 하냐고 물으려다가 이내 입을 다물었다.
누가 한 짓인지 대충 예상이 갔다.
"고생이 많았나 보네."
"네에, 뭐…… 그렇죠……
그는 내게 이런 얘길 듣는 게 무 척 떨떠름하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말도 없이 사라진 내가 바로 그를 고생시킨 원흉이니 말이다.
끼이익.
한참을 더 밑으로 내려간 다음 마 지막 문을 열자, 드디어 테오도르와 마주할 수 있었다.
"웅? 오! 드디어 왔군!"
테오도르는 언제 설치한 건지 홈 시어터를 틀고 영화를 보고 있었다.
내가 도착하자 야무지게 먹고 있 던 팝콘을 한쪽으로 치운다.
"편해 보이네."
좀 어이없을 정도로 편하게 생활 하는 것 같았다.
"요즘 밖에 잘 안 나가서 말이다. 하나둘 들여놓다 보니 짐이 이렇게 늘었구나!"
뒤편에 촤르륵 진열되어 있는 건 게임기인가? 적응을 너무 잘해도탈이다.
"아, 그래! 몸 상태는 좀 어떻지? 부작용 같은 건 없느냐."
"부작용은 잘 모르겠어. 평소랑 비 슷한 거 같은데."
내 말에 테오도르가 환하게 웃으 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누구 발명품인데. 역시 완 벽하구나."
"몸이 좀 뻐근한 것 같기도 하고."
"정말이냐?"
자랑하는 꼴을 보기 싫어 툭 내뱉 자 진지하게 받아들였는지 눈을 동그랗게 뜬다.
몸이 뻐근한 건 맞았지만 그게 부 작용은 아닐 거다.
"갑자기 움직여서 그런 것 같아."
"아아. 그렇군."
테오도르도 내 말뜻을 알아들었는 지 조용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생각보다 빨리 탈출했는데."
"알면 좀 구하러 와주지 그랬어."
"내가 무슨 힘이 있다고 그들한테 서 널 구하겠느냐."
테오도르가 눈망울을 초롱초롱 빛 내며 연약한 척을 했다.
"그래서, 잘 곳은 있느냐?"
" 뭐'?"
"몰래 도망치느라 돈도 뭣도 없을 텐데. 잘 곳이 없다면 여기서 잠깐 신세를 져도 된다."
내가 다이내믹한 탈출극을 벌였을 거라 믿어 의심치 않는 말투였다.
"……대화로 잘 타협하고 나왔을 수도 있잖아."
"뭐, 해가 늘 동쪽에서 뜨는 건 아 니니 말이다."
헛소리라는 걸 아주 고급스럽게 돌려 말하는군.
"그보다 부탁하고 싶은 게 있어."
"뭘 말이냐."
"한 번 더 톨룩에 가야겠어."
내 말에 테오도르는 반쯤 침대에 몸을 눕히다가 벌떡 일어섰다. 거의 용수철이 튀어 오르는 것 같았다.
"뭐, 뭐, 뭐라고?"
"한 번 더 톨룩에 가야겠다고."
그는 내가 허튼소릴 하는 게 아니 란 걸 확인하자 곧장 차준을 바라 봤다.
차준도 절망에 빠진 얼굴로 테오 도르를 들여다본다.
"……여기서 더 깊게 내려가긴 어 려운데."
"문을 네 개쯤 더 달까요?"
"그런 것보다 차라리 폭탄을 설치 하는 게……
"이번엔 무작정 가지 않을 거야. 해외로 출장 나가는 것처럼 꾸밀 거라고."
둘이 심각한 얼굴로 논의를 벌이 기에 서둘러 끼어들었다.
"뭐, 그렇다면 다행이구나."
테오도르의 얼굴이 활짝 펴졌다.
"준비하는 데 시간이 또 걸리는데.
언제쯤 가고 싶은 게냐."
"황태자 즉위식 때."
내 말이 끝나자 테오도르가 잠시 멈칫했다. 이내 티 나지 않게 다시 미소 짓는다.
"별난 날을 찾는구나."
"네 동생이니, 제1황녀의 성인식 날 정도는 알겠지."
테오도르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알고 있었느냐."
"이번에 들은 게 있어서."
테오도르가 그 정체불명의 4황자 일 줄은 정말 꿈에도 몰랐으니까.
"숨기려고 한 건 아니었다만. 굳이 말할 이유도 없기에 그냥 입을 다 물었을 뿐이다."
" 알아."
괜히 혼자 제 발 저려서 변명을 늘어놓는다.
테오도르가 4황자라고 해서 크게 달라지는 건 없었다. 그는 여전히 톨룩의 배신자였고, 우릴 위해 일하 고 있었다.
'지구에 아주 잘 적응한 것 같고.'
진열된 게임기들과 책장에 가득 들어찬 게임팩들을 보면 아주 의심이 싹 가셨다.
"그보다 물어보고 싶은 게 있는 데."
"뭐지?"
나는 슬그머니 차준을 바라봤다. 그가 듣기엔 너무 기밀 사항이었다.
그러자 차준도 눈치껏 차를 타 오 겠다며 밖으로 나갔다.
문이 닫히고 테오도르와 나 단둘 이 남게 되자 본론을 꺼냈다.
"톨룩이 지구를 선택한 이유. 가깝 고 살기 좋은 세계라는 거 말고 다
른 이유 더 있어?"
"다른 이유라……
테오도르는 오로굴드의 탑에서 수 석 연구원으로 일했으니, 목적지로 지구가 선택되는 과정을 모두 지켜 봤을 거다.
"글쎄다. 그냥 모든 면에서 조건이 제일 적당해서 그랬던 것 같은데."
"황제는 반응이 어땠어."
"황제 폐하 말이냐?"
자신의 아버지일 텐데도 극존칭을 써서 말하는 게 특이했다. 5황자도 그러던데.
"아. 그러고 보니 좀 이상한 일이 한 번 있기 했지."
"무슨 일인데."
"당연히 처음 조사할 땐 다른 세 계들도 후보군에 올랐었다. 각 세계 를 조사하는 데 드는 비용과 시간 이 있으니 개중에서 몇 군데를 더 골라내야 했지."
그는 과거 일을 곰곰이 생각하는 것처럼 턱을 긁적였다.
"그런데 후보군을 다 보시더니 갑 자기 지구를 조사하라고 명하시더 군."
"곧장 말이야?"
"그래. 근데 신기하게도 정말 지구 를 조사해보니 모든 면에서 완벽했 지."
역시. 단순히 우연이 아니었던 거 다.
톨룩의 황제는 뭔가 알고 있었던 게 틀림없었다.
'오염을 되돌릴 수 있는 아이템이 지구에 있다는 그런 암시를 봤던 거겠지. 그래서 단번에 지구를 고른 거야.'
그게 아니면 설명할 수 있는 방법
이 없었다.
"왜 그러느냐?"
테오도르의 물음에 나는 잠시 침 묵했다.
"아니. 아무것도."
테오도르가 내게 숨기고 있는 걸 지도 모르지만, 일단 겉으로 드러나 는 걸로 봤을 땐 아이템에 대한 내 용은 모르는 것 같았다.
아는 사람이 많아져서 좋을 게 없 으니 일단은 입을 다물 수밖에.
"그보다 톨룩에선 어떻게 지냈느 냐? 나도 그곳에 두고 온 이들이
꽤 있지. 나에 대해서 말하는 것도 들었나?"
4황자가 폐황자가 되어 다들 언급 조차 쉬쉬한다는 걸 말해줘야 할 까?
나는 좀 고민스러웠다.
내가 당혹스러워하는 걸 보더니 대충 눈치챘는지 곧장 말을 바꾼다.
"아니지. 그들에게 난 배신자일 테 니 좋은 말을 했을 리가 없겠어."
애써 밝은 어조로 말하는데도 표 정이 제법 씁쓸해 보였다.
그는 황가에 대해서 말할 땐 아주
질색을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톨룩 에 대한 기억이 모두 나쁜 건 아닐 터였다.
이따금 그는 그런 기억들을 곱씹 는 것 같기도 했다.
그러더니 이내 고개를 돌려 내 쪽 을 바라본다.
"……네가 여기 있다는 건 오로굴 드의 탑도 다녀왔단 얘기겠지."
그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클로에. 그 애를 봤나?"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몇 살 정도로 보였지?"
"열댓 살 정도."
"조금 더 자란 모양이야."
그는 클로에가 진짜 댄버의 딸, 클 로에가 아니란 걸 알면서도 희미하 게 미소 지었다.
외형은 진짜 클로에를 기반으로 했으니. 만약 그 애가 살아서 성장 했다면 비슷한 모습이었을지도 모 른다.
"그 애가 뭐라고 하던가."
"……더 이상 아무도 그 애를 통 제할 수 없는 것 같았어. 연구원들 이 지워낸 기록까지도 전부 찾아냈
으니까."
"정해진 수순이지."
감성에 젖어있는 테오도르에겐 미 안하지만 나는 이 말을 꺼내야만 했다.
"내가 클로에를 파괴했어."
"......뭐?"
"클로에를 파괴했다고. 정확히 말 하면 고통받는 영혼을 해방해준 거 야. 그러니까 너무 놀라지 말고......
"아니. 그게 문제가 아니다."
테오도르는 보기 드물게 무척 당
황한 얼굴을 했다.
"톨룩에서 그 정도 사고도 예상 못 했을 것 같으냐?"
"그럼?"
"'인공지능' 클로에는…… 늘 백업 이 되어 있다. 그러니까 그 애를 파괴해봤자 같은 기억을 공유하는 또 다른 클로에가 다시 생겨나는 것뿐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