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3화
챕터: 화마를 잡는 법
화르륵!
푸른 불꽃이 끝내 한쪽 귀퉁이를 뚫어냈다. 동시에 표연원이 허억, 하고 깊은 숨을 내뱉었다.
우드득, 우득!
벌어진 틈으로 우악스럽게 손을
집어넣는다. 손가락만 보이는데도 다들 긴장감 어린 눈빛을 했다.
"준비됐나."
전청운의 물음에 원거리 딜러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전청운은 표연원에게 신호 를 보냈다.
딱!
전청운이 손가락 튕기는 소리와 동시에 거목이 완전히 사라졌다.
사르륵, 녹아 없어지자 힘을 주고 있던 이그니스가 씨익 웃는다.
그리고 동시에 그의 얼굴 위로 수
많은 공격들이 쏟아져 내렸다.
콰아아아앙!
휘익, 후우우웅!
쿠구구구!
마법, 화살, 총, 단검. 가리지 않는 다.
놈이 한순간이라도 멈춰 있을 때 더 공격을 퍼부어야 했다!
"탱커들 앞으로! 딜러들은 한 아 «
"넌 누구야?"
전청운의 명령이 중간에 끊겼다.
다름 아니라 이그니스의 목소리가 지척에서 들렸기 때문이다.
오싹 소름이 돋았다.
고개를 돌려보니, 이그니스가 그 많은 탱커들을 무시하고 전청운의 바로 뒤에 서 있었다.
콰아앙!
전청운이 서둘러 검을 뽑아 들어 휘둘렀지만 이그니스의 손에 잡혔 다.
화르륵!
그의 특기대로 푸른 불꽃이 검날 을 타고 흘렀다.
청염, 전청운. 그 아름다운 불꽃은 그의 상징과도 같았다.
그러나 이그니스는 그걸 보고 도 리어 생긋 웃었다.
"우와. 너 불꽃을 쓰네? 제법 순도 도 높고."
남이 보면 이그니스의 손바닥에 닿아 있는 것이 검날이 아니라 장 난감 칼인 줄 알았을 것이다.
그 정도로 태연하기 그지없었다.
"근데 상성이 나쁘네. 불꽃은
화아악!
전청운의 화염과 비견될 정도로, 아니 전청운을 압도할 정도로 강렬 한 불꽃이 이그니스의 손바닥에서 타올랐다.
전청운의 검이 그 열기에 녹아내 리며 살짝 휘었다.
"불꽃으론 날 상처 입힐 수 없거 드 "
이그니스의 말대로였다.
전청운은 상대가 되지 않는단 걸 깨닫자 황급히 뒤로 두어 발자국 물러섰다.
이그니스가 그를 따라 앞으로 나
오기 직전.
탕!
슈우욱!
내 총알이 이그니스의 뺨을 스쳤 다.
화염이 솟아오르면 금방 회복될 상처였지만 이목을 끌기엔 충분했 다.
이그니스가 나와 눈을 마주치곤 환하게 웃는다.
"죽었구나? 그 녀석."
권성민을 지칭하는 말이었다.
내가 이곳에 있다는 건 이전 전투
에서 승리했다는 뜻이니까.
"꼴좋네! 짜증 나는 녀석이었어."
이그니스는 아예 몸을 틀어 내 쪽 으로 향했다.
"마침 잘됐다. 아직도 그 사슴 녀 석이 나오지 않아서 짜증 나던 참 이거든."
그 말에 표연원이 움찔했다.
표연원은 잔뜩 지친 얼굴로 내 쪽 을 바라봤다.
"그런데 방해꾼들은 더 생겨나고 말이야. 난 그냥 그 사슴하고 한 번 더 붙어보고 싶은 것뿐인데."
이그니스는 주절주절 제 불만을 토로하기 시작했다.
주변의 헌터들은 잔뜩 굳은 채 공 격 기회만 노리고 있는 것과 상반 된 반응이었다.
이그니스는 마치 동네 산책이라도 나온 것처럼 여유로워 보였다.
그때 전청운이 말없이 한 손을 들 었다.
까딱.
그가 손짓하자 일순 바람이 불어 머리카락이 휘날렸다.
콰아아아앙!
슈슈슉! 슈슉!
이그니스가 서 있던 곳에 무지막 지한 공격들이 내리꽂힌다.
먼지 폭풍이 가라앉은 다음 이그 니스는 툭툭 제 어깨를 털어냈다. 내려앉은 먼지가 귀찮다는 듯한 태 도였다.
"난 저 둘 말곤 관심이 없거든. 더 이상 귀찮게 하지 않고 물러서면 그냥 살려 보내줄게."
이그니스의 제안에도 움직이는 사 람은 없었다.
"그래? 그렇단 말이지."
이그니스의 눈빛이 일순 번뜩였다.
그리고 다음 순간, 날카로운 비명 이 울려 퍼졌다.
"아아아아아악!"
치이이익.
살결이 익는 소리와 함께 타는 듯 한 냄새가 났다.
"진아야!"
원우태가 반사적으로 소리 질렀다.
후방에 위치하고 있던 경진아가 불시에 습격을 받은 것이었다.
"아파? 너 때문에 나도 많이 아팠
거든!"
이그니스가 경진아의 목덜미를 움 켜쥔 채 낮게 속삭였다.
"이제 내 기분을 좀 알겠지? 살갗 이 녹아내리는 기분 말이야!"
"진아야아!"
처참한 광경에 총구를 들었다가 다시 내렸다. 경진아와 이그니스가 너무 가까이 붙어있었다.
이그니스가 손목만 까딱하면 내 총알에 경진아가 맞아 다칠 수도 있었다!
그 때문에 다른 헌터들도 머뭇거 리는데 원우태가 벌떡 일어나 나섰 다.
"흐아아압!"
퍽, 콰앙!
"크윽!"
당연히 이그니스가 가볍게 팔을 휘두르자 나가떨어졌지만 말이다.
그러나 원우태는 물러서지 않고 바닥을 굴러 이그니스의 발목을 붙 잡았다.
치이이익!
"크아아아악!"
그러나 온몸을 둘러싼 문신에서 불길을 뽑아낼 수 있는 이그니스에 겐 가소로울 뿐이었다.
원우태의 손바닥마저 심한 화상을 입고 있었다.
"원우태 헌터! 뒤로 물러나십쇼!"
"물러나야 우리도 공격할 수 있습 니다! 어서 후퇴하세요!"
주변에 있던 헌터들이 말렸지만 원우태는 도무지 듣질 않았다.
세밀한 작업을 주로 하는 어쌔신 인 그에게 손은 그야말로 재산과도 같을 텐데.
"그럴 수 없어요! 그럼, 그럼 진아 는 어떡하냐고요!"
누구도 그 물음에 대답하지 못했 다.
상황이 심각해지면 경진아에게까 지 피해가 가는 걸 감수하더라도 공격을 퍼부어야 했으니까.
"진아를, 놔줘! 이 개자식아아아!"
"정말 쌍으로 귀찮게 구네."
이그니스가 무심한 눈길로 우너우 태를 내려다봤다.
"네 손목째로 태워주지."
"허억……
이그니스의 발목에서 시작된 불길 이 그 크기를 키워나갔다. 원우태가 애써 비명을 참아내는 그때.
슈우우욱!
식물 줄기가 바닥에서 솟아났다.
줄기는 이그니스가 경진아의 목덜 미를 쥐고 있는 손과 원우태가 붙 잡은 발목을 동시에 휘감았다.
" 연원아!"
빠르게 고개를 돌려보니 아까까지 만 해도 죽을 것처럼 헐떡이던 표 연원이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저……건......?"
표연원의 몸을 따라 연두색 오오 라 같은 것이 일렁였다.
저벅, 저벅.
그가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황폐 한 바닥에서 식물들이 자라났다.
발자국마다 풀과 꽃들이 피어나며 그의 행차를 알렸다.
나는 이 현상을 전에도 본 적이 있었다.
"..드라이어드?"
"아니에요."
내 중얼거림을 듣고 표연원이 대 꾸했다.
말투는 분명 표연원의 것인데, 두 눈 가득히 들어찬 연두색 빛을 보 니 그가 무척 낯설게만 느껴졌다.
분위기도 바뀌어 한층 신비로운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느낄 수 있어요. 드라이어 드가 나와 함께하고 있다는 걸."
그 말이 끝나자마자 표연원의 머 리 위로 활짝, 드라이어드의 뿔이 반투명하게 나타났다.
그 뿔은 제 자태를 뽐내는 것처럼 우아하게 펼쳐졌다가 이내 작게 겹 쳐졌다.
천사의 링이나 월계관이 떠오르는 모양새였다.
혹은 숲의 왕에게 바치는 왕관 같 기도 했다.
"이그니스."
표연원이 식물 줄기를 떨쳐내려고 애쓰는 이그니스를 나지막이 불렀 다.
"여기서 끝낼 때도 됐어."
"뭘 끝내! 그 어정쩡한 모습은 또 뭔데? 너도 어설프게 남의 힘을 빌 려 와 쓰는 주제에 기고만장하긴!"
"네 말이 맞아."
슈욱!
표연원이 손짓하자 바닥에서 넝쿨 이 더 솟아나 이그니스를 완전히 옭아맸다.
"이건 온전히 내 힘도 아니고, 나 자신은 나약하기 그지없지. 맞아. 난 약해."
" 으브븝..
넝쿨들이 서서히 이그니스의 몸을 타고 올라오고 있었다.
이그니스의 입을 틀어막고, 머리끝 까지 향한다.
그때 이그니스의 불꽃이 돌연 화
르륵 타올랐다.
"난 스스로 이 힘을 얻어내기 위 해 끝없이 스스로를 단련해왔다 고!"
이그니스의 불꽃과 표연원의 넝쿨 이 치열하게 맞붙었다.
그러다 이내 이그니스의 불꽃이 넝쿨을 불태우며 그를 자유롭게 했 다.
치이이익!
표연원을 중심으로 피어올랐던 풀 들이 이그니스의 화염에 짓밟혔다.
"너처럼 비겁한 놈들하고 난! 차원
이 달라!"
그 순간 이그니스의 신형이 사라 졌다. 너무 빠른 속도에 그만 놓치 고 만 것이다.
그가 다시 나타났을 땐 표연원의 코앞에서 주먹을 내지르다 제지당 한 채였다.
"으으윽...
그의 불꽃으로 휘감긴 주먹이 표 연원의 넝쿨에 붙잡혀있었다.
"그러니까 난 언제나 약한 이들의 편에 설 거야."
표연원의 목소리 뒤로 드라이어드
의 음성이 겹친 것 같은 착각이 들 었다.
"읍……!"
끝내 이그니스의 머리끝까지 넝쿨 에 휘감겼을 땐, 누구도 감히 입을 열지 못했다.
"이 힘에 자만하지 않고, 언제나 남을 위해 사용할 거야. 내 사리사 욕을 위해 쓰라고 있는 힘이 아니 니까."
이리저리 꿈틀대던 움직임이 서서 히 멎고 있었다.
"그게 내게 힘을 내어주신 분께서 원하시는 길이기도 하니까."
표연원이 넝쿨로 만들어진 고치에 톡, 이마를 맞댔다.
그의 머리 위에 떠 있던 월계관이 고치에 맞닿으면서 화악, 환한 빛을 흩뿌렸다.
동시에 약한 파동이 주변으로 뻗 어나갔다. 익숙한 기운이 감도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성수의 기운과 비슷하잖아.'
몸에 활기가 돌고 악한 것이 정화 되는 감각.
피곤이 녹아내리는 게 성수를 들 이마신 것처럼 개운한 느낌이었다.
"드디어…… 내 실수를…… 바로 잡……
털썩!
" 연원아!"
표연원이 작게 중얼거리다가 바닥 으로 픽 쓰러졌다.
서둘러 다가가 살펴보니 다행히 심각한 건 아니고 곤히 잠든 것뿐 이었다.
추욱 늘어지는 몸을 붙잡고 있으 니, 아까까지만 해도 압도적인 존재 감을 내뿜던 것이 믿기지 않을 정 도였다.
"마, 마왕이……!"
"죽은 건가!"
표연원이 쓰러지면서 넝쿨 고치도 사르륵 녹아내렸다.
그 안에 들어있던 것이 바닥으로 쏟아져 내렸는데, 다름 아니라 작은 부싯돌이 었다.
이그니스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으 니 그 부싯돌이 그의 시신이라고 생각해야 옳겠지.
마왕의 시체치곤 조촐한 마무리였 다.
".. 구조대를... .
쓰러진 경진아, 원우태 그리고 표 연원을 병원으로 이송하기 위해 한 바탕 소란이 일었다.
나란히 병원으로 실려 가는 셋을 보자니, 어쩐지 마음이 시원섭섭했 다.
표연원이 끝내 헌터답게 제 실수 를 잘 마무리 지은 것이 기특하면 서도, 후배 헌터들이 저렇게 고군분 투하는 동안 아무것도 해준 게 없 어 미안한 감정이 들었다.
"게이트가 사라졌다고 합니다!"
"SSS급 게이트가 닫히면서 그레이 트홀도 사라졌대요!"
"몬스터들은 아직 남아있지만 그 레이트홀이 없으니 금방 정리될 것 으로 보입니다!"
기쁜 소식들이 곳곳에서 들려왔다.
역시나 예상했던 대로 이그니스와 권성민이 이번 SSS급 게이트의 주 인공들이었던 모양이다.
기나긴 전투가 드디어 끝이 났다.
우리는 승리했다.
'클로에. 지구도 가만히 당하고 있 진 않거든.'
이번 브레이크 아웃은 클로에의 소행인 게 분명하다.
이전까지는 이런 낌새도 보이질 않았으니까.
클로에가 적극적으로 침략에 동참 하게 되면서 게이트의 수준이 한층 높아진 것 같았다.
"전청운 헌터."
"……한서하. 너인가."
"이만 돌아가죠."
다들 후퇴할 준비를 하고 있는데 전청운만 멍하니 자리를 지키고 있 었다.
그는 제 휘어진 검을 한참이나 내 려다보고 있었다.
이그니스에게 불꽃으로 싸워 패배 한 것이 꽤나 마음에 걸렸던 모양 이다.
"이그니스는 용암호수에서 태어나 나고 자란 마왕이라고 해요."
나는 뜬금없이 그런 이야길 시작 했다.
"누구보다 화염에 내성이 있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기도 하죠."
"……위로하지 않아도 된다."
너무 뻔히 보였나 보다.
전청운은 휘어진 검을 제 옷자락 으로 감쌌다. 검집에 들어가지 않으니 그게 최선이었다.
"검도 수리하고, 나도 더 단련해야 겠어. 내가 너무 정체되어 있었던 것 같군."
전청운의 시선이 표연원에게 향하 는 것이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