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8화
다니엘과 이사벨라는 조용히 눈을 마주쳤다.
계획대로 흘러가고 있었다.
3황자와 1황녀를 지지하는 귀족들 도 겉으론 점잖은 체했지만 늘어난 경쟁자에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그럼 연회를 시작하지."
황제는 폭탄선언을 해놓곤 풀썩 황좌에 앉았다.
멈췄던 음악이 흐르기 시작하면서 귀족들은 삼삼오오 작금의 사태에 대해 떠들어댔다.
"5황자 저하께서 결국 후보에 드 셨군요."
"황태자 즉위식이 어떻게 진행되 는지 아무도 모르니, 원. 도박이라 도 하는 심정입니다."
황태자가 될 수 있는 후보는 총 셋.
황태자 즉위식에서 후보들을 어떻
게 심사하는지는 철저히 비밀리에 붙여졌기 때문에, 귀족들은 누굴 선 택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역시 총명함은 1황녀 저하께서 일등이시죠. 어떤 문제가 나와도 풀 어내실 테니까요."
"반대로 무력을 시험한다면 1황녀 저하께선 가장 먼저 탈락하실 겁니 다."
"어쩌면 전술을 시험할지도 모르 죠! 5황자 저하께선 전쟁에서 공을 톡톡히 세우지 않았습니까. 그 신묘 한 전술이 기가 막혀 잔뼈가 굵은 노장들도 기함을 토했다 합니다."
이런저런 이야기들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들은 저마다 어느 후보자 측에 붙어야 가장 큰 이득을 볼 수 있을 지 머릿속으로 계산기를 두드리느 라 여념이 없었다.
"토할 것 같아……
시온은 작게 중얼거렸다.
"괜찮으십니까?"
"아니……. 잠깐 테라스로 가서 바 람을 쐬고 싶어."
5황자의 안색이 창백했다. 예상치 도 못한 상황에 잔뜩 긴장한 모양이다.
다니엘이 그를 모시려고 뒤도는 순간, 뒤편에서 날카로운 소음이 울 렸다.
쨍그랑!
와인잔이 바닥의 대리석과 부딪치 며 산산조각 났다.
잔에 담겨 있던 적포도주가 테이 블보를 적시며 핏빛처럼 물들었다.
"꺄아아악!"
"저하! 저하께서!"
"신관들을 불러라! 어서!"
그리고 바로 옆에, 3황자 빈센트가
피를 토하며 축 늘어져 있었다.
그와 대화를 나누다가 얼결에 빈 센트를 부여잡은 귀족 하나가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었다.
"대체 무슨 일입니까!"
"저, 저도 모릅니다! 시종이 가져 온 와인을 한잔 드시더니 갑자 기……
그 말에 장내의 분위기가 싸늘하 게 반전됐다.
와인을 마시고 쓰러진 거라면 이 건 사고사가 아니다.
'타살……!'
귀족들이 수군거리며 1황녀와 5황 자를 바라봤다.
지금 이 시점에서 3황자를 독살해 가장 큰 이득을 볼 사람은 이 둘이 기 때문이다.
1황녀 샬럿은 이 일련의 과정을 보고도 무척 태연한 얼굴을 했다.
샬럿은 창백해진 채 딱딱하게 굳 어 있는 시온을 힐끗 바라보고는, 부채를 촤르륵 펼쳤다.
또각, 또각.
구두 굽 소리가 고요한 회장 안을 가득 채웠다.
샬럿은 여전히 따분한 얼굴을 한 황제 앞에서 가볍게 드레스 자락을 올리며 예를 차렸다.
그리곤 그에게 간청을 올리는 것 이다.
"폐하. 이건 명백한 독살 시도 사 건입니다."
3황자는 바쁘게 들것에 실려 바깥 으로 이송되고 있었다.
그럴 때마다 핏물이 입 밖으로 튀 어나와 예복을 붉게 물들였다.
"와인을 내온 시종을 면밀히 조사 하시고, 어떤 경로로 독이 유입되었
는지 밝혀주십시오. 범인이 누구인 진 알 수 없지만. 감히 황족을 시 해하려 한 대가를 톡톡히 치러야 할 것입니다."
그 서릿발 어린 대응에 황제가 작 게 웃었다.
"시종들을 조사하고, 다른 와인들 도 모조리 검사하도록."
"예, 폐하!"
"오늘 연회는 여기서 마치도록 하 겠다. 오늘 있었던 사건에 대해서는 모두 함구하고, 지나친 억측으로 분 란을 일으켜서는 안 될 것이다."
'지나친 억측'이라는 말을 내뱉을
때 황제의 시선이 시온에게 향했다.
"감히 내 앞에서 내 아들을 독살 하려 한 자가 누구인지. 명명백백히 밝혀내 엄벌에 처할 것이다."
이른바 '3황자 독살 미수 사건'의 시작이었다.
한동안 수도가 떠들썩했다.
유력한 황태자 후보였던 3황자가 그렇게 쓰러진 뒤, 구사일생으로 목 숨을 부지하긴 했으나 몸을 회복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란 진 단을 받았기 때문이다.
덕분에 3황자의 입지는 꽤나 흔들 리고 있었다.
"그럼 무력도 5황자 저하께 밀릴 텐데, 즉위식에서 어떤 시험이 나오 더라도 3황자 저하께서 통과할 확 률은 극히 낮은 것 아닌가!"
"그렇지. 즉위식까지 몸을 회복할 수 있을지도 의문이라던데. 지금이 라도 5황자 저하께 연을 대는 게 어떻겠소."
"1황녀 저하는 이미 오랜 시간 측 근들을 쌓아두었으니 이제 들어가
도 제대로 이득을 보기엔 늦었지. 차라리 5황자 저하 밑으로 들어가 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군."
귀족들은 저마다의 판단으로 1황 녀나 5황자의 문을 두드렸다.
3황자를 지지하는 세력 중 아주 충성스러운 자들만이 끝까지 남아 그를 보좌했다.
* * *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5황자 세력 밑으로 들어간 이들에게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들렸다.
3황자의 독살 미수 사건의 피의자 가 다름 아니라 5황자, 시온이었다.
"그럼 지금부터 재판을 시작하겠 습니다."
재판장이 엄숙한 얼굴로 개정을 선포했다.
톨룩에서 이렇게 공개적인 재판이 열리는 일은 흔치 않았다.
대체로 고위 귀족이 흉악 범죄를
저질렀다는 의심을 받을 때, 그 시 시비비를 명백히 가리기 위해 존재 하는 제도였다.
피의자를 기소하는 검사 측은 사 건을 조사한 심문관들이 맡으며, 변 호인은 전문 변호인을 고용하거나 피의자의 최측근들이 나서곤 했다.
"우선 심문관 측. 사건 개요를 설 명해주시기 바랍니다."
"네. 이번 사건은 '황태자 즉위식 후보 발표 무도회'에서 일어났습니 다. 황제 폐하께서 황태자 후보를 모두 발표한 다음, 대략 30분 정도 뒤에 3황자 저하께서 독이 든 와인
을 마시고 쓰러진 것이죠."
심문관은 깨진 유리잔 조각과 적 포도주 소량을 제줄했다.
"사건 당일 3황자 저하께서 사용 했던 와인잔과 시종이 따랐던 독이 든 와인을 증거로 제출합니다."
"채택하겠습니다."
"확인해본 결과 독은 잘 정제된 '라크'였습니다."
라크!
그 유명한 독에 관중들이 웅성거 렸다.
라크는 북부에서 나는 식물의 뿌
리를 잘 정제하여 만든 결정체로, 소량을 사용하면 마력을 회복해주 는 치료제지만 과량을 복용할 경우 전신의 마력을 폭주하게 만드는 맹 독이다.
라크를 희석해서 사용하면 문제 될 것이 없기에 희석액은 제국 어 디서나 두루 유통되고 있었다.
"와인을 따랐던 시종을 심문해본 결과, 시종은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확실합니까?"
"예. 정신계 마법사를 동원해 진실 인지 거짓인지 가려봤습니다.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게 분명했습니다."
정신계 마법사는 악용의 여지가 커 아주 극소수만 양성됐는데, 그들 이 맡는 역할 중 하나가 바로 이 심문이었다.
머릿속 기억을 헤집어 진실과 거 짓을 가려내는 그 마법사들은 황제 의 손안에 있었다.
"그래서 독이 든 와인을 조사해보 니 놀라운 사실을 알 수 있었습니 다."
심문관의 눈빛이 피의자석에 서 있는 시온에게 향했다.
"바로. 이 와인은 황궁 정식 비품
이 아니라는 겁니다."
"무슨 뜻입니까?"
"황궁으로 들어오는 모든 주류는 철저히 검사를 받습니다. 각 와인마 다 인식 번호가 부여되어 있고요. 그런데 해당 와인은 기록에 없는 와인이었습니다."
그 말이 시사하는 바는 명백했다.
"3황자 저하를 시해하기 위해 몰 래 가져다 놓은 와인이란 소립니 다."
"하지만, 그게 3황자 저하께 갈 줄 누가 안단 말입니까?"
"3황자 저하께선 특정 지역 와인 만 드십니다. 그걸 알고 있으면 계 략을 꾸미기 충분하죠."
그리고 마지막으로 심문관은 서류 뭉치를 제출했다.
"와인을 가져다 놓은 범인을 찾아 내기 위해 주변인들은 모두 심문했 습니다. 그 결과 한 하녀를 찾아냈 습니다."
"좀 보겠습니다."
재판장은 심문관이 제출한 서류 뭉치를 건네받아 슥슥 읽어보았다.
와인 창고 앞을 지키는 병사들부
터 시작해, 와인 창고 인근을 드나 드는 하녀들의 증언까지 모두 모아 놓은 것이었다.
마지막 페이지에 이르자 와인을 가져다 놓은 것이 누구인지 명백해 졌다.
"5황자궁 소속 하녀, 마리아를 중 인으로 요청합니다!"
웅성웅성.
5황자궁 소속이라는 말에 사람들 이 제각기 속닥거렸다.
재판장은 서류를 모두 읽어본 결 과 마리아의 소환이 적법하다는 판 단을 내렸다.
"허락합니다."
마리아가 중인석에 서는 것은 일 사천리 였다.
갑작스레 모두의 앞에 서게 된 마 리아는 덜덜 떨고 있었다.
"증인. 이름과 직업을 말하도록."
"저, 저는.. 마리아고, 5황자궁 에서 바느질을 맡고 있는 시녀입니 다.......
"증인. 증인이 이 와인을 들고 5황 자궁에서 와인 창고까지 옮겼다는 목격담이 있다."
심문관의 물음에 마리아가 시선을
피하며 애써 대꾸했다.
"제가요? 저는…… 그, 그런 건 잘 몰라서……
"재판장님. 정신계 마법사를 대동 할 것을 요청합니다."
"허락합니다."
검은 망토를 푹 눌러쓴 여자가 곧 장 안으로 들어왔다.
"저 사람이……
"정신계 마법사인가. 처음 보는 군."
술렁술렁, 보기 드문 이의 등장에 다들 호기심 어린 눈빛을 보냈다.
"다시 한번 묻겠다."
마법사가 마리아의 이마에 손을 대고 있었다.
거짓을 말하면 곧장 들킨다는 의 미였다.
"독이 든 와인을, 와인 창고로 옮 긴 적이 있나?"
그 살벌한 물음에 마리아는 잠시 침묵했다.
고개를 푹 숙인 채로 입을 다물다 가, 이내 고개를 들었을 땐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독이 든 와인인 줄 정말 꿈에도 몰 랐어요……!"
마리아의 자백에 시온은 제 옷자 락을 꽉 쥐었다.
일이 어떻게 흘러가고 있는진 몰 라도 아주 착실히 망하고 있었다.
시온은 맹세코 저 하녀를 본 적도 없었다!
"중인! 5황자궁에서 와인을 와인 창고로 옮긴 것은 확실하단 말인 가!"
"예……. 제가 했습니다……. 하지 만, 정말로 3황자 저하를 해치려는 의도는 아니었어요! 그저, 5황자 저
하께서 3황자 저하께 드리는 선물 인 줄 알았는걸요!"
"왜 그렇게 생각했지?"
" 예?"
어리둥절해하는 마리아에게 심문 관이 다시 물었다.
"그 와인을 옮기라고 시킨 게 5황 자 저하셨나?"
"그게……
울먹거리던 마리아는 잠시 기억을 더듬었다.
"그게, 직접 뵌 적은 없지만, 어느 날 제 방 안에, 와인 한 병과 이걸
와인 창고로 옮기라는 메시지가 적 힌 카드가 함께 놓여 있었습니 다……. 저는 그래서 당연히 그게 5황자 저하이신 줄 알았죠."
"정확히 5황자 저하의 얼굴을 뵌 건 아니지만 명령을 적은 카드가 놓여 있었다?"
"예, 몇 시에 어디로 가면 된다고 상세히 적혀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시간대에 갔더니 정말 와인 창 고 앞에 아무도 없었고요."
상황이 점점 5황자에게 나쁘게 흘 러가고 있었다.
증언이 끝난 뒤, 마법사는 마리아
의 이마에서 손을 떼고 감정 결과 를 발표했다.
"모두 사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