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1 화
"변호인 측. 다니엘 경을 대신할 다른 변호인이 있습니까?"
다니엘이 무어라 말하기도 전에 세드릭이 일어나 나섰다.
"제가 대신하겠습니다."
"세드릭 경."
다니엘이 작게 그를 부르자, 세드
릭도 다니엘에게만 들리게끔 속삭 였다.
"5황자 저하의 결백을 입증할 방 법은 이것뿐입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제 기억이 유출될 것 아닙니까."
"청렴하기로 유명한 다니엘 경이 두려워할 게 뭐가 있습니까."
그 말에 다니엘은 속이 답답해 인 상을 찌푸렸다.
'침착해야 해. 만약 이 마법사의 목적이 심문이 아니라 다른 데 있 다 하더라도, 질문의 내용 말고 다 른 기억을 읽는 덴 제약이 많아.'
기억을 읽는 마법이란 기본적으로 섬세하지 못할 때가 많기 때문이다.
질문을 통해 기억을 유도하는 게 아니면 그 수 많은 기억들 중에서 원하는 기억만 쏙 골라낼 확률은 매우 낮았다.
일종의 도박이다.
위험한 기억을 들킬 수도 있고, 안 들킬 수도 있는.
다니엘은 원래 이런 도박에 응하 는 편은 아니지만 도망칠 구석이 없었다.
"허락합니다. 5황자 저하의 호위
기사, 다니엘 경을 증인으로 소환합 니다."
땅, 땅, 땅.
망치가 내려쳐질 때마다 다니엘은 심장이 쿵쿵 내려앉는 것 같았다.
'다른 방도가 없어.'
귀족도 아닌 다니엘의 기억을 보 호해줄 이가 누가 있을까.
게다가 이건 황족 시해 사건의 시 시비비를 가리는 자리였다.
황위 계승권자의 자격 박탈이 걸 린 자리에서. 다니엘이 발 빼는 게 용납될 리가 없었다.
꿀꺽.
다니엘은 로스 가문이 멸문될 때 종교를 버렸지만 이번만큼은 저버 렸던 종교를 다시 찾고 싶었다.
신이시여.
부디 굽어 살피소서.
다니엘은 눈을 감고 작게 중얼거 렸다.
* * *
다니엘이 증인석에 서자 심문관은
즐거운 듯 웃었다.
심문관이 손짓하자 다니엘의 옆에 서 있던 마법사가 천천히 손을 들 어 올렸다.
희고 매끄러운 손가락이 이마까지 다가오는 과정이 마치 슬로모션처 럼 보였다.
마침내 그 끝이 닿았을 때, 기묘한 감각이 전신을 사로잡았다.
'이상한 느낌이야.'
다니엘은 자신의 몸 안이 물처럼 변한 것 같았다.
잠잠했던 호수에 누군가 돌멩이를
집어 던진 것처럼 파문이 일었다. 누군가 몸 안쪽 깊숙이 손을 넣고 휘젓는 느낌이 들었다.
불쾌하고 찝찝한 감각이었다.
"증인. 사건 당일 잠깐의 공백이 생겼던 그 시간에. 증인은 어디서 뭘 하고 있었습니까?"
"5황자 저하를 보좌하고 있었습니 다."
"누구와 함께 있었죠?"
"저, 5황자 저하, 세드릭 경. 이렇 게 셋이 함께했습니다."
다니엘은 최대한 다른 생각을 하
지 않으려고 애썼다.
떠올리지 않고 깊숙이 가라앉히면, 어쩌면 들키지 않을지도 모르는 일 아닌가.
"어디에 있었습니까?"
"연무장에 있었습니다."
"5황자 저하께서 두 분께 무술을 배운 모양이군요."
"아니요. 저와 세드릭 경이 가벼운 대련을 했고, 5황자 저하께서 심판 을 봐주셨습니다."
다니엘은 그날의 일을 똑똑히 기 억하고 있었다.
대련을 하면서 세드릭의 실력에 깜짝 놀랐기 때문이다.
물론 부족한 점이 없는 건 아니지 만. 적어도 얼마 전까지 힘도 없던 황자를 지키는 호위 기사라고 하기 엔 실력이 출중했다.
'왜 5황자 저하께 세드릭 경 말고 다른 기사가 없었는지 이해가 될 정도였지.'
그 정도 실력이면 황실기사단에 들어올 수도 있었을 거다.
그런데도 5황자 옆을 꾸준히 지킨 것이 무척 의외였다.
"특별히 이상한 걸 본 기억은 없 습니까?"
"없습니다. 결백합니다."
"대련에 집중하느라 5황자 저하께 서 잠시 사라진 걸 눈치 못 챘을 가능성도 있지 않습니까?"
"제 본분은 5황자 저하의 호위 기 사입니다. 그런 일은 없었습니다."
다니엘이 단호하게 부정했고, 심문 관은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셨다.
"진실인가?"
심문관이 마법사에게 물었다.
다니엘은 혹시나 이 마법사가 다
른 것까지 읽진 않았을지 긴장하며, 그녀의 대답을 기다렸다.
마법사는 로브 아래로 다니엘을 스치듯이 바라보았다.
"전부 진실입니다."
"..그렇군."
심문관은 무척 실망한 기색이 역 력했다.
그러자 세드릭이 틈을 놓치지 않 고 파고들었다.
"이로써 5황자 저하의 무죄는 중 명됐습니다."
재판장이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럼 그 와인과 메시지 카드는 누가 갖다 놓은 것이란 말 입니까!"
"그게 누구인지 밝혀내는 게 심문 관들의 소임 아닙니까?"
세드릭의 물음에 심문관이 입을 다물었다.
"독이 든 와인을 가져다 둔 하녀 가 5황자 저하의 명령을 받았다는 걸 증명해야 하는 건, 심문관 측입 니다. 입증 책임은 혐의를 제시하는 쪽에 있습니다."
"심문관 측. 더 제시할 증거가 있 습니까?"
재판장의 물음에 심문관은 서서히 고개를 저었다.
"더 이상의 재판은 무의미할 것 같군요."
시온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반면에 심문관은 얼굴을 잔뜩 구 기고 있었다.
"지금까지 나온 증거와 증언들로 는 피의자의 죄를 입증할 증거가 불충분한 점을 고려해, 이 시점에서 판결을 내리도록 하겠습니다."
3황자 독살 사건이 마무리되고 있 었다.
"무죄를 선고합니다!" 탕, 탕, 탕!
* * *
사르륵, 사르륵.
서류 넘기는 소리가 공기를 가득 채웠다.
늦은 밤에도 업무를 보느라 황제, 카를로스는 펜대를 놓을 줄 몰랐다.
똑똑똑.
"법정서기관입니다."
"들어오라 하게."
카를로스가 대꾸하자 문이 열리고 서기관이 안으로 들어왔다.
"페하. 오늘 열린 재판의 판결문입 니다."
"결과가 어떻게 됐지?"
"5황자 저하는 증거 불충분으로 피의자 신분에서 풀려났습니다."
"그렇게 됐군."
카를로스는 판결문을 건네받고는 이만 들어가 보라고 명했다.
옆에서 함께 야근하던 재상, 조슈 아가 그 모습을 보곤 웃으며 말을건넸다.
"원점으로 돌아왔군요. 황족을 시 해하려 한 범인이 아직 잡히지 않 았다니. 하늘이 노할 일입니다. 심 문관들에게 더 철저히 조사하라 명 하겠습니다."
"아니. 됐다."
카를로스는 태연하게 폭탄선언을 했다.
"범인은 3황자다."
"……3황자 저하의 자작극이란 말 씀이십니까."
"너도 예상 못 한 건 아닐 텐데."
"제가 어찌 그런 불경한 생각을 하겠습니까."
조슈아가 의뭉스럽게 웃었다. 말과 다르게 대충 예상하고 있었단 얼굴 이다.
"심문관들에게 대충 조사하는 시 늉을 하다가 적당한 자가 있으면 그자의 단독 범행으로 처리하라 이 르거라."
"묻어 주시는 겁니까?"
"일을 키워봐야 좋을 것 없지."
3황자가 아직까지도 몸이 회복되 지 않을 정도로 크게 다친 사건인데도 카를로스의 얼굴엔 흔들림 한 점 없었다.
"3황자 저하께서 대담한 건 알지 만 이번 일은 심했습니다. 황태자 즉위식까지 제대로 회복되지 않는 다고 들었는데, 그것마저 자작극이 었다뇨."
"녀석도 황태자 즉위식에서 무력 을 시험하는 일은 없단 걸 아는 거 지. 게다가 좋은 기회도 얻지 않았 느냐."
"무엇을 말입니까?"
"진짜 충직한 이들을 골라낼 기회
카를로스는 빈센트의 선택이 나쁘 지 않다 생각했다.
도덕적으로 옳고 그름을 떠나서, 군주 된 자로서 그 선택은 실보단 득이 많으니까 말이다.
들키지만 않는다면.
"가장 나약해졌을 때 누가 그 옆 을 지키는가. 그 과정을 통해 진짜 내 편을 골라내는 일은, 황제가 되 기 전에 해둬야 가장 정확한 법이 다."
"폐하께서도 종종 그런 생각을 하 십니까?"
조슈아가 서류를 바라보며 물었다.
"폐하의 편이 누군지 시험해보겠 단 생각 말입니다."
"그럴 리가."
카를로스는 오만한 미소를 지었다.
"누군가 내 옆에 서는 것이 아니 다. 내가 그들을 선택하는 거지."
제국 전체를 발아래 둔 황제다운 생각이었다.
"나였다면 이런 실패는 저지르지 않았을 거다."
"실패라뇨. 자신의 편을 솎아냈으 니 이 정도면 성공이죠."
"아니. 5황자를 놓치지 않았나."
3황자는 분명 5황자를 범인으로 만들어 후보자 자격을 박탈하고자 했을 터였다.
그러나 5황자는 그 의도와 달리 피의자 신분에서 벗어났다.
"내가 아는 빈센트는 치밀한 놈인 데 5황자가 무슨 수로 그 틈을 빠져나갔을까."
"운이 좋았을지도 모르죠."
"이쯤 되니 정말 내 눈이 흐려진 게 아닌가 싶군."
카를로스는 판결문의 내용을 쓱쓱
훑어보며 중얼거렸다.
"요즘은 자꾸만 이런 생각이 드는 거지. 내가 모르는 5황자의 모습을 자꾸만 목격하게 되니까 말이다."
조슈아는 그런 카를로스를 빤히 바라보았다.
"5황자, 시온. 그 녀석이…… 어린 시절부터 날 속여왔다면?"
카를로스의 얼굴이 뻣뻣하게 굳었 다. 무엇이든 제 손아귀 안에 넣었 다고 생각하던 자만이 깨지고 있었 다.
"이 모습이 진짜고, 내가 아는 게 가짜라면?"
그보다 더한 반전이 있겠는가.
반푼이인 척하며 남들을 속인 황 자라니.
"……황태자 즉위식 때 모든 게 밝혀지겠지."
의미심장한 말투였다.
"어찌 됐든 3황자와 5황자 둘 다, 꼬리를 밟히지 않았고 함정을 무사 히 빠져나왔으니 누굴 책망할 생각 은 없다. 적당히 마무리하는 게 낫 겠군."
카를로스는 판결문을 내려놓았다.
"두 분을 시험하신 거군요."
"시험? 아니. 그럴 리가."
카를로스의 대꾸에 조슈아가 의아 하다는 듯 물었다.
"시험이 아니었다고요? 하마터면 둘 중 하나, 또는 둘 다 위험에 빠 질 수도 있는 계획이었습니다. 그걸 눈감아주신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 으셨을 것 아닙니까."
"물론 이유가 있지."
카를로스는 책상 위에 놓인 종을 가볍게 울렸다.
맑고 청량한 소리가 채 멎기도 전 에, 둘 앞에 불쑥 검은 복장을 한사내가 나타났다.
고개를 푹 숙인 채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그저 황제의 앞에서 무 릎 꿇고 있었다.
카를로스와 조슈아 둘 다 그자가 갑자기 나타나는 데 익숙한지 놀란 기색이 없었다.
"가서 이 여자를 데려와."
카를로스가 판결문을 휙 던졌다.
"물어볼 것이 있다."
그러자 남자는 다시 대꾸도 없이 휙 사라졌다. 소리 없이 허공에서 증발하듯이 말이다.
" 여자라됴?"
"이번 재판에 참석한 정신계 마법 사다."
조슈아가 홈칫 놀랐다.
"다니엘의 머리를 헤집어 봤다는 군."
"……그걸 예상하셨습니까?"
"5황자의 무죄를 입증하는 데 가 장 유용한 방법 아닌가. 드물게 평 민 출신 기사니, 정신 감정을 요구 해도 거절할 명분이 없지."
"다니엘 경을 의심하고 계십니 까?"
조슈아의 물음이 꽤나 묵직했다.
누구보다 신임받는 기사였던 다니 엘이, 이제는 황제의 의심을 받는 인물이 되었는가.
카를로스는 잠시 침묵했다.
"……의심까지는 아니다. 다만 확 인해둬서 나쁠 것 없지 않나."
"치밀하십니다."
"조심성이 많다고 해두지."
카를로스는 짙게 웃었다. 조슈아도 그런 카를로스를 바라보며 엷게 미 소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