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0화
"대체 그게 무슨 소린데!"
에드문드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뜬금없이 베아트리스가 죽었느니 어쩌니 하는 말에 그도 어이가 없 는 것 같다.
"뭔 헛소리야! 베아트리스가 지금 마신을 되살리려 한다는데, 또 걔가 죽었다고? 좀 알아듣게 얘기해봐!"
내가 하고 싶은 말이다.
은유인지 뭔지 모르겠지만 모호한 표현이었으니까.
벨제부브는 후, 한숨을 내쉬더니 뒷말을 이었다.
"……직접 베아트리스를 만나면 너도 알게 되겠지. 내가 할 얘기는 아니다."
그렇게 말한다면 더 추궁하기도 어려웠다.
결국 에드문드도 불만 어린 표정 을 하고선 쳇, 하고 혀를 찼다.
"당장 출발할 수 있는 건 아니고.
시간이 좀 필요해. 문지기 골렘의 가동을 멈추는 데 필요한 장치가 다 낡아빠져서 새로 만들어야 하걸 랑."
"나 역시 체력을 회복할 시간이 필요하니 마침 잘됐군."
"그래. 네가 그 어린 얼굴 하고 있 는 거 보면 가증스러워서 구역질이 난다, 인마."
풉, 나는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겨 우 참아냈다.
"일주일 정도 걸릴 거야. 재료도 구해야하고 워낙 옛날 설계도라 수 정할 곳도 많아서."
우리는 일주일 뒤 출발하기로 합 의를 봤다.
에드문드는 어쩐지 시원섭섭한 표 정이었다.
"……다시 널 위해 일하게 될 줄 은 몰랐는데."
스패너를 들고서 작게 중얼거리는 것을 보면, 그의 심경이 대충 예상 이 갔다.
수군수군, 술렁술렁.
사람들이 마치 구경거리라도 생긴 것처럼 에드문드의 집 주변을 둘러 싸고 웅성거렸다.
"세상에! 저 뺀질이가 아침에 일어 나 있는 모습을 다 보다니."
"내일은 해가 서쪽에서 뜨겠구만."
"술 한 모금 안 마시고 멀쩡한 에 드문드라니. 내가 오래 살아 별꼴을 다 보는군!"
대부분 에드문드가 아침부터 일어 나 부지런히 움직이는 것을 보며 깜짝 놀라 한두 마디씩 툭툭 던지 는 것이었다.
"에이, 씨! 뭐 구경났어! 빨랑 농 사일이나 하러 가슈!"
에드문드가 참다 참다 버럭 소리 를 지르자, 저마다 하하호호 웃으며 뒷짐을 진다.
"녀석. 저렇게 기운이 좋을꼬."
"이따 저녁에 우리 집에 와서 감 자라도 좀 갖고 가려무나."
에드문드도 에드문드지만, 이 마을 주민들도 남의 말을 귓등으로도 안 듣는 재주가 있다.
"거, 수도에서 온 귀족 양반. 대체 무슨 요술을 부린거요? 우리 집 와
서 내 둘째 놈도 좀 고쳐줬으면 좋 겠네."
"옆집 아들 한스도!"
내게까지 시선이 쏠리기에 하하, 웃어 넘겼다.
"그런데 뒤에 지고 있는 그건…… 허어억!"
"뿔토끼 아냐, 이거!"
"이 흉악한 놈을 어째……?"
쿵!
나는 이 뒷산에서 사냥해온 마물 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마계와 가까운 곳이라 그런지, 아
님 오염이 곳곳에 침투한 탓인지. 일반 마을 근처에서도 마물이 흔하 게 보였다.
"아니. 귀족 양반이 아니라 사냥꾼 양반이었네그려!"
"힘이 아주 장사야!"
순식간에 말투를 바꿔 고치는 것 이 내가 마물사냥꾼이나 용병쯤 되 는 줄 아는 모양이었다.
"에드문드 씨. 와서 상태 좀 확인 해보시죠."
"아, 저리 좀 비키쇼! 내가 봐야 할 거 아냐."
에드문드가 사람들 틈을 헤집고 들어와 뿔토끼를 살폈다.
이 뿔토끼는 사실 기다란 귀 말고 는 토끼와 그다지 닮은 구석이 없 지만, 이마 한가운데에 돋아 있는 이 뿔이 아주 귀한 약재로 쓰이곤 했다.
"중상급 정도네. 이 정도면 충분 해."
에드문드가 필요하다고 요청했던 재료 중 하나였다.
"역시 인간이 아닌 것 같은데
눈을 가늘게 뜨고 날 바라보는데 의심이 한가득이었다.
"한서하."
그때 벨제부브가 뒤편에서 날 불 렀다. 어린아이에서 조금 더 자란 모습이다.
"역시 애들은 하루가 다르게 큰다 니까."
"암. 내 손주녀석도 그랬는데."
그가 등장하자 주민들이 또 한두 마디씩 얹기 시작했다.
그 정도 수준이 아닌 것 같긴 하 지만, 어쨌든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 건 다행이었다.
톡톡.
그가 제 날카로운 송곳니를 가리 킨다.
피를 마실 때가 됐다는 의미였다.
* * *
이 이상한 동거는 생각보다 순탄 하게 굴러갔다.
나는 에드문드가 요청하는 마물들 을 잡아와 재료를 충당해주고, 벨제 부브는 제 치료에 전념한다.
에드문드는 종종 나를 빤히 바라 보는 걸 제외하면 대체로 설계에 충실한 일상을 보냈다.
마을 주민들이 내게 망나니를 갱 생시켜줘 고맙다며 감사 인사를 건 네는 것도 하루 일과가 되어가고 있었다.
"내가 오래 고민해봤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그것밖에 없는 것 같다."
에드문드가 어느 날 불쑥 내게 말 을 걸어왔다.
"너 우리 뒤통수 치려고 기다리고 있는 거지. 베아트리스의 끄나풀이 지!"
손가락으로 척 가리키며 하는 말 이 어처구니가 없다.
"내일 필요한 재료는요?"
"말 돌리지 말고!"
대꾸할 가치를 못 느낀 것뿐이다.
그냥 넘어갈 기세가 아니라서 나 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마신이 깨어나면 인간이고 마족 이고 죄다 죽을 텐데 제가 뭐 하러 요?"
"그거야 모를 일이지. 베아트리스 도 마신이 깨어나면 자기도 죽을 텐데 마신을 깨우려 하고 있으니
까."
에드문드는 손으로 턱을 매만지며 눈썹을 찌푸렸다.
"내 생각엔 너, 아주 수상해."
"저는 에드문드 씨에게 아주 협조 적이었다고 생각하는데요."
그가 필요한 재료가 있으면 납죽 가져다주고 있지 않은가.
"나 말고."
에드문드가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 로 본질을 꿰뚫었다.
"벨제부브 말이야."
나는 순간 멈칫했다.
"뭐야. 내가 모를 줄 알았어?"
"티 내지 않은 줄 알았거든요."
"너무 티 나던데! 벨제부브 녀석한 테 피 넘겨줄 때도 못 믿겠다는 티 팍팍 내고, 한 번씩 얼굴 마주치면 묘하게 인상 찌푸리고!"
내가 그랬던가? 무의식적인 반응 이었던 것 같다.
"그래서 마족을 싫어하나~ 했는데 나한텐 또 멀쩡하고."
에드문드가 붕대에 감긴 귓가를 손끝으로 더듬었다.
"물론 난 이제 마족이라기엔 반푼
이지만……
"마족 자체에 유감이 있는 건 아 니에요."
물론 적군으로 자주 만났으니 좋 은 인상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마족 이라는 종족 자체를 싫어하는 건 아니었다.
"벨제부브 개인에게 좀 원한이 있 는 거지."
"그 녀석이 성격이 좀 더럽긴 해."
"저만 그런 건 아닐 텐데요. 에드 문드 씨도 강제로 쫓겨났다고 했잖 아요."
"그건…… 그렇지."
에드문드가 제 뒷목을 긁었다.
엄밀히 따지면 우리 셋은 모두 '일 시적' 협력 관계일 뿐이었다. 제각 기 마신을 제지하기 위해 노력하는 거고.
에드문드가 내 옆에 풀썩 앉았다.
바람에 따라 수풀이 흔들리고, 야 심한 밤에 별빛이 쏟아져 내릴 것 처럼 반짝였다.
"뭔진 몰라도 그 자식이 잘못했겠 지."
정확히 말하면 지금의 벨제부브가
아니라 회귀 전 벨제부브였다.
혜원 언니를 장난감처럼 쥐고 흔 들다가 끝내 죽여버린 그놈 말이다.
생각만 해도 주먹에 힘이 들어갔 다.
"나랑 베아트리스는, 원래 그 녀석 놀이친구로 만났어."
뜬금없는 이야기였지만 일단 맞장 구를 쳤다.
"놀이친구요?"
"잘은 몰라도 저 녀석 선대 마왕 이 쟤 아주 어릴 때부터 후계자로 점찍어 두셨거든. 그래서 어린 나이
부터 마왕성에 들어가 살았는데, 그 때 말동무나 할 겸 또래 마족을 붙 여둔 게 나랑 베아트리스였지."
-있지. 난 우리 도련님이 그렇게 도련님 모습인 게 너어〜무 좋아!
베아트리스가 벨제부브를 '도련님' 이라고 부른 게 그 탓이었나?
"평화로웠어. 나는 마왕성의 지원 을 받아 이것저것 만드는 게 즐거 웠고, 우리 셋 다 사이는 좋았으니 까."
하지만 그렇게 평화로운 사태가 지속됐다면 셋의 관계가 이렇게까 지 망가지진 않았겠지.
마왕이 된 벨제부브, 추방된 에드 문드 그리고 세상을 망가뜨리려는 베아트리스.
무엇이 그들을 산산조각 냈을까?
"첫 시작은…… 선대 마왕 '발할 라', 그 개자식이 베아트리스를 못 마땅하게 본 것부터였어!"
에드문드는 그 이후로 발할라가 끊임없이 베아트리스의 온갖 것에 꼬투리를 잡았다고 덧붙였다.
"마지막엔 베아트리스가 발할라의 하수인 중 하나를 죽였다고 주장하 기까지 했다니까! 말도 안 되는 누 명이었고, 나는 당연히 거기에 반발 했지!"
에드문드가 아드득 이를 갈았다.
그 뒤는 안 봐도 대충 알 것 같았 다.
"그래서 베아트리스의 누명을 벗 기기 위해 주장하다가 시비가 붙어 결투 재판에 섰고, 패배해서 추방당 하게 됐다는 거군요."
"그래. 그때 나는 벨제부브에게 간 곡히 부탁했었어. 베아트리스의 누명을 풀어 달라고. 또 내가 추방당 하지 않게 해달라고……
"그걸 벨제부브는 외면했고요."
에드문드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 다.
"지금이야 이런 시골 동네에 처박 혀서 생각 없이 술이나 퍼마시며 지내지만, 추방당한 직후엔 정말 막 막했지."
모르긴 해도 그랬을 것이다.
우선 그의 외형부터가 일반 인간 들과 다르니 뭇매를 맞았겠지.
"그런데 그 베아트리스가 마왕이
되어 벨제부브를 위협하고 있다니. 웃긴 일이지."
어린 시절엔 그녀가 벨제부브를 도련님이라 부르며 따랐을 텐데 말 이다.
"난 자업자득이라 생각한다. 벨제 부브 그 개자식의 인과웅보라고!"
그렇게 버럭 소리 지르더니, 이내 작게 덧붙인다.
"……물론 마신을 부르는 건 좀 과했지만."
그건 동의하는 바다.
"아무튼! 벨제부브 그 자식은 이만
큼 개자식이고, 나도 그때 생각만 하면 절로 이가 갈릴 지경이야!"
이렇게 장황한 이야기를 늘어놓은 데는 다 이유가 있겠지.
그는 나를 설득하고 싶은 거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자식이 어 린 시절 모습을 하고 있는 걸 보면 나도 모르게 마음이 약해져."
처음 벨제부브와 마주했을 때 에 드문드는 바닥을 구르면서 포복절 도를 했었지.
그 과장된 반응도 혹시 이런 마음 을 감추기 위해서였나.
"아니, 그 말이 아니고! 그러니까 그 개자식이 뭔 짓을 했는진 몰라 도, 일단 한배에 탄 이상 너무 티 내는 건 좀 자제하는 게 좋겠다~ 이 말이지!"
탁!
그가 내 어깨를 툭 치려는 걸 잡 아냈다.
반사적인 반응이었다.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진 대충 알 겠어요."
앞으론 벨제부브를 대할 때 더 주 의하는 게 좋겠다.
아직은 그 녀석이 어린아이 모습 이라 그나마 괜찮지만, 성인 모습으 로 돌아오면 정말 화를 참을 수 없 을지도 모른다.
"……팀 사기에도 악영향을 미치 니까. 당신 말이 맞아요."
부디 내가 참을 수 있어야 할 텐 데.
벨제부브가 날이 갈수록 원래 모 습을 되찾아가는 걸 볼 때마다 속 에서 울컥 치미는 것을 나도 느끼 고 있던 참이었다.
"그래, 그래! 좋은 생각이야!"
에드문드는 내 어깨 대신 악수를 하고선 붕붕 손을 흔들었다.
"난 설계도에 확인할 게 남아서 이만 들어갈 건데."
"전 좀 더 남아있을게요. 먼저 들 어가세요."
"그럼 너무 늦기 전에 들어오라 구!"
에드문드가 활짝 웃더니 허름한 판잣집 안으로 쏙 들어갔다.
그의 모습이 눈앞에서 사라지자, 나는 툭 내뱉었다.
"이만 나와. 벨제부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