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1 화
내 말이 끝나자 벨제부브가 뒤편 에서 스르륵 걸어 나왔다.
그새 또 자랐는지 10대 중반쯤 되 는 나이로 보였다.
에드문드가 전투에 젬병이라 했던 건 사실인가 보다.
벨제부브와 나는 서로의 존재를
눈치채고 있었는데, 에드문드는 전 혀 모르는 눈치였다.
"역시 알고 있었군."
"모를 리가. 눈치 못 챈 에드문드 가 이상한 거지."
"추방당할 때 마력통로가 망가졌 을 거다."
살벌한 얘길 아무렇지도 않게 한 다.
"에드문드 얘기에 뭔가 항변할 건 없고?"
"그다지. 모두 사실이니까."
글쎄다.
그런 것치곤 벨제부브가 에드문드 에게 보이는 태도가 영 미심쩍지 않은가.
베아트리스에 대해서 숨기려는 것 같기도 했고, 베아트리스를 감싸려 는 것 같기도 했다.
"뭔가 눈치채더라도 모르는 척 지 나가는 게 나을 거다."
답지 않게 약한 소리였다.
"지금 이대로가 서로를 위한 길이 다."
뭔진 몰라도 또 복잡한 사연이 얽 혀있는 모양이지. 나도 깊게 관여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끼어들 생각 없으니까 걱정 마."
"너무 섭섭하게 생각하지 마라. 너 도 내게 감추는 게 있지 않나."
" 내가?"
눈썹을 살짝 일그러뜨리자, 그가 손을 뻗어 내 미간을 톡 건드렸다.
탁!
나도 모르게 그 손길을 쳐냈다. 직 후에 에드문드가 '티 좀 내지 마.' 라고 조언한 것이 떠올라 아차 싶 었다.
고개를 들어 벨제부브를 바라보자
그는 태연한 얼굴이었다.
"이것 보거라."
"……반사적인 반응이었어."
"아니. 이전부터 네게 여러 번 이 상하다고 느꼈지. 내가 알기로 너와 처음 만난 건 게이트에서인데, 그때 도 넌 날 잘 아는 것처럼 굴었다."
혜원 언니를 또 녀석의 손에 잃을 순 없단 생각에 조급하게 행동하긴 했다.
녀석에게 도전장을 내밀고, 녀석이 찾아오자 대뜸 연합군의 치부를 알 려주겠다며 거래를 신청했으니까.
이상하게 생각하는 게 당연한 수 준이었다.
"여러 번 물었지만 한 번도 제대 로 대답해준 적이 없었지."
나는 꾹 입을 다물었다.
회귀 전의 네가 온갖 쓰레기 짓을 다 해서 그렇다고 말할 순 없는 노 릇이었다.
"누군지 모르겠지만 나와 겹쳐 보 지 마라."
"뭐?"
"네가 그토록 중오하는 누군가와 날 겹쳐 보고 있는 것 아니냐."
엄밀히 말하자면 겹쳐 보는 게 아 니라 당사자를 보는 것이지만, 벨제 부브 입장에선 그렇게 느낄 법도 했다.
내가 잠시 말문이 턱 막혀 있자 벨제부브가 뒷말을 이었다.
"누가 감히 날 다른 이와 비교하 는 것 자체가 난생처음이다만. 내 잘못도 아닌 일로 미움받는 것도 썩 기분 좋은 일은 아니군."
"너랑 나는 적군이니까 그런 것뿐 이야."
"그런 것치곤 난 항상 네게 당하 기만 했는데."
벨제부브가 여유롭게 웃으며 대꾸 했다.
"처음 만났을 때도 네 거래에 응 했고, 그 다음엔 네가 미끼로 나오 길래 장단에 맞춰줬고, 마지막엔 날 죽이려고 드는 것을 겨우 피해내지 않았나."
따지고 보면 그렇기도 했다.
회귀 전이면 모를까, 이번엔 나도 철저히 준비한 덕에 벨제부브를 궁 지에 몰아넣은 적이 꽤나 많았다.
"나로서는 억울하군. 이 정도면 내 가 널 증오해야 옳지 않나?"
장난스럽게 웃는 걸 보면 그냥 날 놀리고 싶은 것 같다.
이자와 내가 얼굴을 마주 보고 농 담을 주고받는 것부터가 말도 안 되는 일이다.
'……회귀 전 벨제부브가 지금의 벨제부브와 같은 인물이라 할 순 없지.'
그건 인정해야 했다.
내가 알던 미래는 너무 여러 번 바뀌었고, 회귀 전 운명을 뒤바꾸고 완전히 새로운 인생을 사는 사람들 도 내 주변에 많았다.
표연원도 이전엔 궁수였는데 이젠 정령술사가 됐고. 과거엔 사망했을 다정 언니도 지금은 살아남아 손에 꼽히는 대장장이가 됐으니까.
과거의 나와 지금의 나도 '같다'고 말하긴 어려울 지경이니, 다른 이들 이야 오죽하겠는가.
'회귀 전에 너무 매몰되어 있던 건 가?'
과거의 기억이 너무 강렬해서 눈 이 멀었던 거다.
그래. 머리로는 안다.
그런데도 벨제부브를 보고 있자면
자꾸만 울컥하고 치미는 것이 있었 다.
-아쉽게 됐군.
피 칠갑을 한 채로 내게 속삭이던 것이 아직도 선명하다.
-네 실수로 재밌는 장난감을 잃게 됐으니 말이다.
그 말에 고개를 돌렸을 땐 혜원 언니가 그만…….
나는 질끈 눈을 감았다. 더 이상 떠올리고 싶지 않았다.
"됐어. 어차피 이번 일만 끝나면 너랑 나는 또 적이 될 텐데. 굳이 친한 척할 필요는 없잖아."
나는 결국 대충 얼버무리는 쪽을 택했다.
"아니라면?"
벨제부브가 툭 내뱉은 말에 나는 멈칫했다.
"베아트리스를 잡아낸다 해도, 주 인을 잃은 성이 둘이나 되니 그 후 계자들을 정하는 것부터 시작해서
여러모로 바빠지겠지."
그의 말은 지금까지의 대전제를 송두리째 흔드는 것이었다.
벨제부브가 적군이 아니게 된다 면?
"그렇게 되면 내정에 바빠 연합군 의 요청에 응하지 못하는 것도 이 상한 일은 아니다. 애초에 난 인간 녀석들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거든."
말과는 다르게 내 머리카락을 사 르륵 넘기는 손길은 퍽 다정했다.
"이렇게 되면 어떨까. 내가 연합군 을 나오는 것을 뛰어넘어……
안 돼.
그 이상은 듣고 싶지 않았다.
나는 확 뒤돌았다. 그와 나는 서로 적으로 남는 편이 나았다.
"됐어. 가능성 없는 소린 하지 마."
"왜 그렇게 생각하지?"
"결국 넌 톨룩의 주민이잖아. 이 세계가 오염에 물들고 있는 이상, 너희와 우린 싸울 수밖에 없어."
"그런 것치곤 톨룩에도 제법 절친 한 친구들을 만든 것 같던데."
비욘드와 다니엘을 떠올리면 나도
마음이 불편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애초에 협력은 황실이 무너지는 그 순간까지만이었어.'
그 이후 비욘드가 톨룩을 잘 추슬 러 우리와 마저 싸우게 된다 하더 라도 할 말은 없다.
이사벨라나 셀과 서로 검을 겨누 게 되는 순간을 생각하면 괴롭지만, 적군과 아군을 가르는 선은 명확하 다.
"마지막에 그들도 내 적이 되겠 지."
"냉정하군."
"현실적인 거야."
이상에 빠져 톨룩과 지구 둘 다 살아날 방법을 찾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진 않는다.
그런 방법이 있었으면 톨룩도 진 작에 찾아냈겠지.
"네가 톨룩의 편에 서지 않으면 어떻게 할 건데. 망해가는 대륙과 함께 죽는 걸 목 내놓고 기다리 게?"
혼들리는 감정을 감추기 위해 더 매섭게 날을 세웠다.
"네 목숨을 버려가면서?"
"넌 꼭 나를 적으로 삼을 이유가 없으면 안 되는 것처럼 구는군."
정곡이었다.
그건 일종의…… 내 마지막 방어 기제 였다.
내 실수로 혜원 언니를 죽게 만든 주제에, 벨제부브를 증오하면서 분 풀이를 하고 있던 거다.
그러니 지금의 벨제부브도 내 적 이어야 마땅하다. 그래야 저놈은 나 쁜 놈이라고 생각하면서 애써 위안 을 얻을 테니까.
"할 수만 있다면 네 그 머리통을
열어보고 싶을 지경이야. 내가 베아 트리스처럼 정신계가 아닌 게 아쉽 군."
끔찍한 소릴 다 한다.
"단지 원망할 대상이 필요한 것뿐 인가?"
나는 작게 입술을 달싹거렸다. '어 쩌면'이라고 말하고 싶은데, 목소리 가 나오질 않았다.
"네 사적인 감정이 눈을 가리고 있을지도 모른단 걸 잘 생각해보면 좋겠군."
그 말을 끝으로 벨제부브는 에드 문드를 따라 지하실로 향했다.
나는 홀로 남은 채로 잠시 멍하니 서 있었다.
벨제부브가 한 말의 의미는 뭐였 을까.
내 사적인 감정이 내 눈을 가리고 있다니.
마치 뭔가 아는 것처럼 굴고 있지 않은가. 나는 목덜미에서 달랑거리 는 것을 꺼내 들었다.
테오도르가 건넸던 반지 세 개가 반짝거리며 빛나고 있었다.
* * *
얼마 지나지 않아 벨제부브는 제 본연의 모습을 되찾았고 에드문드 는 필요한 장비를 다 갖췄다.
"준비됐지?"
에드문드가 쾌활하게 물었다.
우리 둘이 고개를 끄덕이자 그가 알아서 계획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비밀 통로 입구로 들어가려면 성 외곽 지역에서 들어가야 하거든. 외 진 곳이기도 하고 아마 경비는 별 로 없을 거야."
그가 톡, 가리키는 곳은 성으로부
터 조금 떨어진 곳이었다.
이 성은 깎아지른 듯한 절벽 위에 지어져 있었는데 그가 가리키는 곳 은 그 절벽 한복판이었다.
"거긴 아무것도 없는데요."
"그렇게 생각하기 쉽지! 그냥 허공 이다, 비어있다! 뭐, 그렇게. 그게 바로 노림수다~ 이 말이야."
여기서 뭔가 생긴다는 건가?
"다행히 안전장치는 이 절벽 밑에 해뒀거든. 그러니 내가 그 절벽 밑 에서 이 열쇠를 꽂으면, 허공에 구 멍이 하나 생길 거야."
에드문드가 눈을 반짝, 빛낸다.
"그 뒤는 내가 말한 대로만 하면 돼!"
계획대로만 흘러간다면 말이다.
그래. 모든 게 순조로웠다.
에드문드의 말대로 절벽 밑은 하 위 마족들이나 박쥐들이 좀 있을 뿐이었다.
에드문드가 열쇠를 집어넣고 허공 에 문을 만든 것까진 좋았다.
그런데 딱 한 가지 변수가 생겼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벨제부브 님."
잘 차려입은 집사복에 한쪽 눈에 쓴 모노클. 빗어 넘긴 머리카락이 아주 단정하다.
정중한 말투의 노신사가 나와 벨 제부브 앞을 가로막는다.
"카뤼센."
벨제부브가 중얼거리는 말을 듣자, 나는 그가 누구인지 깨달았다.
그 카뤼센이었다. 테토를 보냈던 충성스러운 부하.
벨제부브의 위치가 밝혀질까 봐 주종 계약마저 끊어냈던.
"무사했던 건가? 아니. 여긴 어떻
게 알고 들어온 거지?"
"에드문드 님께서 추방당하실 때 두고 간 물건들이 꽤나 많지 않습 니까."
그가 하얀 장갑을 낀 손으로 무언 갈 보여줬다.
에드문드가 요 며칠 고생해서 만 든 열쇠와 비슷하게 생긴 것이었다.
추방당할 때 잃어버렸다더니, 그걸 저자가 가지고 있었나.
"덕분에 이 안까지 들어올 수 있 었습니다."
그는 인자한 얼굴로 벨제부브를
바라보며 웃었다.
"여기서부턴 제가 모시겠습니다. 벨제부브 님. 인간보다는 제가 더 도움이 될 겁니다."
나는 앞으로 한 걸음 다가서려는 벨제부브를 만류했다.
"기다려봐."
"왜 그러지? 걱정 말거라. 카뤼센 이 저렇게 말하는 건 내 충직한 부 하이기 때문……
"저 뿔이 안 보여?"
카뤼센의 이마 양옆에 돋아난 뿔 들이 보였다.
새까만 뿔이 어둠 속에 가려져 제 대로 보이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베아트리스의 상징……
그렇게 말하는 벨제부브의 목소리 는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카뤼센. 베아트리스의 손아귀에 놀아나게 됐구나."
"아닙니다. 제 진정한 주인을 찾은 것뿐이죠."
웃으며 대꾸하는데 말의 내용은 전혀 가볍지가 않았다.
"지금까지는 당신을 제 주인으로 모시고 살았지만, 베아트리스 님을
만나고 모든 것이 바뀌었습니다. 그 분이야말로 제 영혼의 주인이십니 다."
"영혼을 저당 잡혔군."
쯧, 벨제부브가 작게 혀를 찼다.
"이 안에 아무도 들여보내지 말라 는 주인님의 명령이 있었습니다."
카뤼센이 한때 자신의 주인이었던 자 앞을 가로막았다.
"갑자기 싸움을 걸어오는 탓에 조 금 고생하긴 했지만 말이죠."
그의 등 뒤로 산산조각 난 골렘 더미가 보였다.
원래 수호자 골렘이었을 것이다. 내가 상대하려고 했던.
수호자 골렘이 망가지면서 뒤에 문은 뻥 뚫리긴 했으나, 카뤼센의 기세가 심상치 않았다.
"이 앞은 지나가실 수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