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9화
"엘리사. 네가 사형수라고?"
"네. 맞아요. 여기 낙인도 있어요."
엘리사가 옷자락을 살짝 끌어내리 자 쇄골보다 살짝 밑에 문양이 새 겨진 게 보였다.
잘은 몰라도 저게 사형수라는 표 식인 모양이다.
"제 사형 집행일도 잡혔었어요. 저 는 너무 무서워서 울고만 있었는 데…… 그때 오빠가 찾아와줬어요."
두려움에 덜덜 떨던 엘리사의 몸 이 천천히 잦아들었다.
"잘은 모르겠지만, 오빠가 잘 해결 됐다고 했어요!"
나는 그런 엘리사를 보며 차마 마 주 웃어줄 수가 없었다.
"그 이후로 여기서 지내고 있는 거예요. 여긴 조금 외롭긴 하지만, 식사도 나오고 오빠도 가끔 찾아오 니까 괜찮아요!"
엘리사가 애써 밝게 웃는다.
"이제 요정님도 있고요!"
엘리사가 사형수가 된 사유는 모 르겠지만 그 사형 집행일을 무기한 연기하기 위해, 에녹이 지금까지도 애를 쓰고 있는 거겠지.
사형수의 낙인에는 은은하게 마력 도 감돌았다.
아마 황제가 원하면 얼마든지 엘 리사의 목숨을 앗아갈 수 있으리라.
대충 일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지 짐작이 갔다.
"엘리사. 네 오빠는 언제쯤 다시
올 것 같아?"
"으음〜. 3일 전에 왔었으니까…… 아마 오늘?"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탑을 올라 오는 인기척이 느껴졌다.
발걸음부터 시작해서 잘 단련된 이의 것이었다.
하녀나 하인은 아닌 듯하니, 누구 인지 뻔했다.
에녹 클라우드. 그였다.
"맞다, 요정님은 비밀이었죠! 오빠 가 오기 전에 얼른 돌아가 봐야겠 어요."
엘리사는 아쉽지만 다음에 또 찾 아와달라고 말하며 배시시 웃었다.
하지만 엘리사의 예상과는 다르게 오늘만큼은 에녹을 만나봐야 했다.
"엘리사. 네게 부탁을 좀 해도 될 까?"
"부탁이요? 요정님이 제게요?"
"응. 사실은 엘리사의 오빠랑도 내 가 친해지고 싶은데, 그냥 여기 있 으면 깜짝 놀랄 것 같거든."
엘리사가 찬찬히 고개를 끄덕인다.
"좋아요! 그럼 제가 요정님을 잘 소개해드릴게요."
* * *
에녹 클라우드는 지친 몸을 이끌 고 하얀 탑으로 향했다.
최근 들어 즉위식 준비로 바쁘긴 했지만, 황태자 즉위식만 끝나면 모 든 것에서 해방이란 생각이 그를 부지런히 움직이게 만들었다.
마지막 안배일까? 황제도 그가 하 얀 탑에 자유롭게 출입하는 걸 허 가했다.
'엘리사는 자고 있으려나.'
아닌 척해도 엘리사가 깊은 외로 움에 빠져 고통스러워하고 있는 걸 그가 모를 수 없었다.
그때마다 가슴이 찢어질 것처럼 아팠지만, 달리 다른 방도를 찾을 수도 없었다.
-난 항상 제3의 선택지를 찾아내 거든.
자신만만했던 누군가의 목소리가 머릿속을 울렸지만 애써 지워버렸 다.
'난 그자와 달라.'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주어 진 선택지 내에서 최악을 피하는 것뿐이었다.
끼이익.
"엘리사."
"오빠!"
잠들어 있을 줄 알았던 엘리사가 환하게 웃으며 그를 반겼다.
"자고 있을 줄 알았는데."
"응? 아냐. 오빠가 올 것 같았거 드 "
에녹은 그런 엘리사의 머리를 가 볍게 쓰다듬었다.
"오늘은 별일 없었어?"
"으웅. 딱히."
그런데 엘리사의 태도가 영 이상 했다.
평소라면 그동안 쌓였던 시시콜콜 한 이야기들을 쭉 늘어놓아야 하는 데.
뭔가 다른 데 정신이 팔린 것처럼 자꾸만 눈동자를 도르륵 굴렸다.
"뭐 감추는 거라도 있어?"
"내가? 에이, 무슨 소리야!"
"엘리사. 하고 싶은 말 있으면 해 도 돼. 갖고 싶은 거라도 있는 거 야?"
그 말에 엘리사가 아니라며 고개 를 저었다.
그러곤 슬쩍 그의 눈치를 살피더 니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실은~ 오빠한테 내 비밀친구를 소개해주고 싶어서 그래."
"비밀 친구라면…… 로지?"
"아니! 로지 말고."
하긴. 최근에는 그 목걸이를 한 모 습을 못 보긴 했다. 그새 흥미가다 떨어진 모양이지.
"전부터 한 번씩 날 찾아와 주셨 어. 내 하나뿐인 친구야."
에녹은 또 엘리사가 만들어낸 상 상 속 친구라고 생각했다.
"보고 놀라면 안 돼? 화내도 안 돼!"
"걱정 마. 안 그러니까."
"진짜지?"
엘리사는 연신 그에게 확인을 받 아낸 다음에야 안심했다는 듯이 웃 었다.
"요정님! 이제 나와도 돼요!"
그 순간, 아까까지만 해도 없던 인 기척이 생겨났다.
일순 분위기가 변화했다.
에녹은 저도 모르게 반사적으로 허리춤을 더듬었다.
하지만 문관으로 엘리사를 속여 온 그가 그녀를 보러 오면서 창을 챙겨 왔을 리가 없었다!
"싸우러 온 거 아니니까 걱정하지 마."
검은 머리카락이 눈앞에서 흔들렸 다.
이 순간마저도 그녀는 담담한 표
정이었다.
'한서하.'
지구의 헌터. 몇 번이고 합을 주고 받았던 그 여자가 바로 이곳에 있 었다.
톨룩에!
'가능한가? 대체 언제부터? 무슨 목적으로? 엘리사와 접촉한 이유는 뭐지?'
갖가지 의문점이 먼저 머릿속에 피어났다.
에녹은 뻣뻣하게 몸을 굳혔다.
'먼저 달려들면 필패다.'
에녹은 주요 무기인 창이 없었고, 상대방은 허리춤에 총을 매고 있었 다.
섣불리 움직였다간 바로 제압당하 거나, 최악의 경우 엘리사 앞에서 죽을 수도 있었다.
다른 건 몰라도 죽어선 안 된다.
제가 죽고 나면 황제가 엘리사에 게 무슨 짓을 할지도 모르고, 동생 앞에서 처참하게 죽는 모습을 보여 주고 싶지도 않았다.
함부로 움직일 수도 없지만, 적군 이 황실 한가운데서 움직이는 걸 그냥 둘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어떻게 해야 하지?'
에녹의 머릿속이 혼돈으로 가득 찼다.
그는 이런 경우에 어떻게 대처해 야 하는지 배운 적이 없었다.
"싸우러 온 거 아니야. 믿기 어렵 겠지만. 대화를 하려고 온 거지."
"맞아! 요정님은 좋은 분이셔. 오 빠도 너무 그렇게 무서운 얼굴 하 지 마."
엘리사가 열심히 변호를 하고 나 섰다.
에녹은 머리가 지끈, 아팠으나 겨
우 한마디를 툭 내뱉었다.
"대체 어떻게?"
"우리 쪽에 좋은 기술자가 하나 있다고 해두지."
"목적은 뭐지?"
"네게 한 가지 제안을 하려고."
"엘리사에게 접근한 것도 그것 때 문인가?"
"처음엔 우연이었어. 정말로."
믿을 수 없다. 하지만, 그를 협박 하는 게 목적이었으면 굳이 엘리사 와 친분을 쌓을 필요는 없었을 것 이다.
그것도 '요정님'이라는 이상한 별 칭까지 얻어가면서 말이다.
"와! 내가 제일 좋아하는 둘이랑 이렇게 나란히 같이 있으니까 너무 좋다."
엘리사의 말에 에녹은 결국 항복 했다.
"이야기는 들어보지. 하지만, 나가 서 얘기했으면 하는데."
엘리사가 전쟁이니 뭐니 하는 건 듣지 않았으면 했다.
그 말에 다행히 한서하도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 * *
"엘리사에게 이상한 짓을 한 건 아니겠지."
"이상한 짓이라니. 날 요정님으로 알고 있는 애한테 뭘 어떻게 하겠 어."
아끼는 여동생이라 그런지 평소보 다 반응이 훨씬 격했다.
내가 아는 에녹은 초지일관 무표 정으로 사람 속 뒤집어놓는 녀석이 었는데.
이렇게 감정적으로 동요한 모습을 보니 새로웠다.
"네가 황제에게 충성을 바치는 이 유. 전부 이것 때문이지?"
내 말에 에녹이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인질로 잡혀서 종신 노예 계약이 라."
"이번 일만 마치면 곧 모든 게 끝 난다."
이번 일? 아하.
"황태자 즉위식 말이야?"
"잘 알고 있군. 톨룩으로 넘나든
지 얼마나 된 거지?"
에녹의 질문에 답해줄 이유는 없 겠지. 자연스럽게 무시하고 내 할 말부터 꺼냈다.
"정말로 놔줄 것 같아?"
"황제 폐하께서 약조하셨다. 스스 로 하신 약속을 어기실 분은 아니 야."
" 말장난은?"
내 말에 에녹이 '뭐?' 하고 되물었 다.
"말장난은 좀 치시나?"
" 그건......
"황제에게 바치는 충성이 끝나고, 새로 즉위한 황태자에게 바치는 충 성이라면 어떨 거 같아."
내 말에 에녹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는다.
하지만 이건 내가 지어낸 말이 아 니다. 실제로 회귀 전 에녹은 황제 뿐만 아니라 황태자에게도 절절맸 으니까.
"그럴 리가……
"정말 없을까?"
내 말에 그의 동공이 거칠게 흔들 렸다.
"그……
뭐라고 부정해보려고 입을 열었지 만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는지 고 개를 푹 숙인다.
"그렇다 해도…… 따를 수밖에."
그의 얼굴에 짙은 체념이 스쳐 지 나갔다.
황제가 이제 자신 말고 황태자를 따르라 명한다 하더라도 그는 묵묵 히 따를 수밖에 없는 처지였으니까.
"엘리사가 사형수인 것과 관련이 있는 거지?"
"맞다. 그것까지 알고 있었군."
그는 작게, '엘리사는 그때의 기억 을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 잘 얘기 하지 않는데.'라고 덧붙였다.
"그 낙인은 황제와 직접 연결되어 있고?"
이번에도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나 내가 추측한 대로다. 황제 가 에녹의 고삐를 다른 이에게 쥐 여 줬을 리가 없지.
"그러니 엘리사를 인질로 나에게 또 다른 뭔가를 요구하고 싶은 거 라면…… 나는 따를 수 없다."
그가 무척 괴로운 듯이 대꾸했다.
"황제 폐하께서 아시는 순간 엘리 사가 죽고 말 테니까."
에녹은 당연하게도 내가 그를 협 박할 거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엘리사의 목숨을 손아귀에 쥐고 그를 이리저리 뒤흔들 거라고.
"너도 엘리사를 가엾게 여긴다면 부디..
"내가 제안하려던 건 그게 아니었 어."
그가 고개를 들어 날 물끄러미 내 려다봤다.
침울한 얼굴이다. 도저히 희망이라
곤 찾을 수 없는, 굴종에 젖은 모 습.
"황제를 죽이자."
내 말에 에녹이 흠칫 놀랐다.
나는 멈추지 않고 뒷말을 이었다.
"네가 협력하면 얼마든지 가능해. 황제를 죽이면 저 낙인도 힘을 잃 겠지. 그럼 엘리사도 자유의 몸이 될 거야."
내가 한 말이 너무도 파격적이었 는지, 그가 입을 쩍 벌렸다.
"네가 그랬지. 네가 날 조금 더 일 찍 만났더라면. 네가 나와 같았더라
면. 그랬다면 뭔가 달라졌을지도 모 르겠다고."
스테이지형 게이트가 끝나갈 무렵 그는 그렇게 중얼거렸다.
"나는 늘 제3의 선택지를 만들어 낸다고 했잖아."
나는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는 여전히 두려움에 가득 찬 얼 굴로 날 쳐다보고 있었다.
"네게 제안하는 거야, 지금. 또 다 른 길을 선택하겠냐고."
마지막으로 쐐기를 박았다.
"네가 나처럼 될 수 없다면. 적어
도 내가 내미는 손을 거부하진 말 아야지."
스스로 제3의 선택지를 고를 수 없는 건 충분히 그럴 수 있다.
하지만 눈앞에 선택지가 들이밀어 졌는데도, 또 다른 가능성을 알려줬 는데도 선택하지 않는다면 그건 능 력 부족이 아니라 회피다.
"……대체 어떻게?"
"내 손을 잡을 거야?"
승낙을 받지 않고 함부로 발설할 수 있는 내용은 아니었다.
"걱정하지 마. 내겐 다 방법이 있
으니까."
나는 그를 안심시키기 위해 호언 장담을 했다.
에녹이 멍한 눈빛을 했다.
"넌 언제나 날 놀라게 만드는군."
음울하게 잠겨 있던 그의 얼굴에 허탈한 미소가 담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