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7화
챕터: 마지막 내기
진심인가?
나도 모르게 놀란 눈으로 레태흐 태드를 바라봤다.
지금까지 그녀와 나는 여러 번 내 기를 해왔지만, 그때마다 그녀가 내 건 것은 내 동료의 목숨 같은 것들이었다.
단 한 번도 자신에게 피해가 갈 법한 걸 내건 적은 없었다.
그런데 하물며 자신의 목숨이라 니?
"진심이야?"
"내가 거짓을 고할 이유가 뭐가 있겠어. 어차피 여기서 널 보내주면 톨룩은 그대로 몰락할 텐데."
마치 남의 목숨을 거는 것처럼 태 연한 어조였다.
아무리 마녀라곤 하지만 본체는 인간이니 목숨은 하나일 텐데. 저태연하다 못해 여유롭기까지 한 태 도가 어쩐지 기묘했다.
"그래. 변덕이라고 해두자."
레태흐태드가 달큰하게 속삭였다.
"조건은 언제나와 같아. 네가 '제 정신으로' 탈출할 것."
불길하게도 '제정신'을 강조한다. 이번만큼은 그녀 역시 자신의 마지 막을 내걸었으니, 그 난도가 만만치 않으리라.
"그럼…… 건투를 빌게."
톡.
레태흐태드가 그녀의 이마를 내
이마에 마주 댔다.
부딪치는 순간 정신이 아득히 멀 어 졌다.
* * *
"줄리아!"
누군가의 고함에 번쩍 눈이 뜨였 다.
처음 보는 여자아이가 누워있는 날 내려다보며 걱정 어린 눈빛을 하고 있었다.
"갑자기 왜 그래? 어디 아파?"
" 아니......
방금 '줄리아'라고 한 거, 날 부른 건가?
이상한 일이었다. 지금까지 레태흐 태드의 술수에 놀아난 적은 많았지 만, 내가 한서하가 아닌 다른 존재 가 된 적은 없었는데.
이건 마치 스테이지형 게이트 같 았다.
주춤거리며 자리에서 일어서자 여 자아이가 늦을 수도 있으니 서둘러 야 한다며 재촉했다.
얼결에 그 여자아이를 따라 서둘
렀다.
콰
거칠게 문을 열고 들어가니 그 안 에는 네댓 명의 사람들이 모여있었 다. 이제 보니 모두 교복을 입고 있다.
'여긴 교육기관인 건가?'
앳된 얼굴들을 보니 열댓 살 언저 리로 보였다.
"자. 그럼 회의를 시작해볼까?"
다들 엄숙한 얼굴을 했다.
"줄리아 졸업 프로젝트를!"
줄리아라고 하면.. 나?
"내 졸업?"
나도 모르게 반문하고 말았다. 그 러자 당연한 소릴 한다는 듯 여기 저기서 대답이 들려왔다.
"그래. 올해는 꼭 졸업해야지!"
"페일, 그 자식이 이번에도 방해하 려고 들겠지만……
"그래도 우리만 믿어! 어떻게든 부 장을 졸업시켜줄게!"
잘은 모르겠지만 내가 오래도록 졸업을 못 한 모양이다. 그 '페일' 이라는 아이의 방해 때문에.
* * *
이런저런 이야기들이 오고 갔지만 제대로 알아들은 건 별로 없었다.
아이들의 이름 정도랑 우리가 같 은 동아리에 소속됐다는 것. 그리고 그 동아리의 회장이 '줄리아'라는 것 정도다.
'아마 이건 스테이지형 게이트와 비슷한 형식인 것 같아.'
그러니 레태흐태드도 내게 제정신 으로 돌아오라고 강조했겠지.
과몰입에 대비하라는 건 스테이지
형 게이트에 입장하는 헌터가 가장 많이 듣는 주의사항이었다.
"……그럼! 다들 졸업시험 날까지 페일의 동선을 낱낱이 파악할 것!"
"오케이!"
"알겠어."
어느덧 회의가 끝난 모양이다. 저 마다 내게 위로의 말을 건네며 회 의실을 빠져나간다.
나는 어색하게 웃을 수밖에 없었 다.
털난이라고 불린 여자아이와 나 단둘이 남았다.
"혹시 기분이 좀 나빴어?"
틸난이 불쑥 묻는다.
"우리가 너무 멋대로 회의를 진행 했나? 네가 별말이 없길래."
"웅? 아냐. 나야 고맙지. 내 졸업 을 위해 다들 이렇게 힘써주는데."
내 말에 틸난이 다행이라는 듯 안 도하는 표정을 짓는다.
"이번엔 꼭 졸업해야지. 제시를 보 러 가야 한다며."
"어? 어. 그렇지."
제시가 누군데, 라고 묻고 싶었지 만 애써 참아냈다. 너무 이상하게들릴 거다.
털난과 저녁 식사를 하러 식당으 로 이동하면서 나눈 대화를 통해 몇 가지 힌트를 더 얻을 수 있었 다.
'내 동생이라……
제시라는 여자아이는 내 하나뿐인 동생이라고 한다.
게다가 이번에 꼭 졸업해야 하는 이유도 그 아이랑 연관되어있었다.
여러 가지 사정으로 줄리아와 제 시는 나중에야 귀족가의 사생아라 는 게 밝혀져서 나이가 좀 든 뒤에 야 그 집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핏줄이 섞인 건 줄리아뿐 이고, 제시는 그런 줄리아가 강력히 주장해 덤으로 얹혀온 것뿐이란다.
그런데 줄리아가 여기 들어와서 몇 번이고 졸업이 무산되면서, 제시 가 집안에서 쫓겨날 위기에 처했다 는 것이다.
'그래서 얼른 졸업을 해서 동생을 보러 가야 동생이 쫓겨나는 일을 막을 수 있나 보네.'
동생이 가끔씩 편지를 보낼 때마 다 괴롭고 힘들다는 이야길 써놔서 줄리아가 졸업에 더욱 목맨다고 했다.
나는 음식을 받고 자리에 앉으며 가만히 생각했다.
'이것도 스테이지형 게이트와 비슷 하다고 보면, 줄리아의 졸업을 도와 주는 게 이번 목표인 건가?'
내가 털난에게 빙의해서 줄리아를 돕는 게 아니라 줄리아 본인이 됐 다는 게 좀 다를 뿐이었다.
« o "
퉤.
나는 스테이크를 한 점 입에 넣고 씹다가 금방 뱉어냈다.
"왜 그래?"
"아니. 고기 맛이 좀 이상한 것 같 아서."
내 말에 털난은 고기 한 점을 입 에 넣더니 의아한 듯 고개를 갸웃 거렸다.
"평소랑 똑같은데?"
"그래?"
아니. 그럴 리가.
일반 소고기, 돼지고기뿐만 아니라 갖가지 마물 고기도 먹어봤지만 이 런 맛은 처음이었다.
'톨룩에서만 양식하는 종의 고기인
가?'
그럴 수도 있었다.
하지만 어쩐지 손이 잘 가질 않아 서 나는 결국 샐러드만 뒤적거렸다.
"아까 쓰러진 것도 그렇고. 몸이 안 좋은 거 아니야?"
"그냥 입맛이 좀 없어서 그래."
틸난의 걱정 어린 말을 대충 흘려 보냈다.
'섣불리 먹지 않는 게 좋겠어.'
이 교육기관이 뭘 위한 곳인지 명 확히 알기 전까진 말이다.
나는 틸난에게 티 나지 않게 이것
저것 돌려 물어봤다.
"내일 수업은 뭐 듣더라?"
"으음. 문학사의 이해랑 예절 실 습."
과목 이름은 평범해 보였다.
"그럼 졸업시험은……
탁.
우드득!
"아, 아아아! 아파!"
등 뒤에서 접근한 녀석이 내 어깨 에 손을 올리려 하길래 반사적으로 힘줘서 잡아버렸다.
얼굴을 확인하니 처음 보는 녀석 이다. 아까 동아리 회의 할 때 못 본 녀석인데.
"페일!"
틸난이 소리치는 것을 듣고 나서 야 그가 누군지 알았다.
페 일.
내 졸업을 방해하는 그 녀석이었 다.
"이거 놔!"
탁!
녀석이 팔을 뿌리치길래 순순히 놓아줬다.
'이 녀석이 방해한다고?'
그렇다고 치기엔 너무 약해 보이 는데.
아니. 졸업시험을 어떻게 치르는지 잘 모르니 섣불리 단정 지을 순 없 지.
페일은 욱신거리는 손목을 부여잡 고 욕지거리를 내뱉더니 씩씩거리 며 내게 소릴 질러댔다.
"너 미쳤어?! 내 손목 부러뜨리려 고?"
"페일. 엄살떨지 마. 줄리아가 무 슨 수로 네 손목을 부러뜨린다고
그래?"
틸난이 그를 책망하자 페일이 억 울하다는 듯 다리를 동동 굴렀다.
실제로 그의 손목을 부러뜨릴 뻔 했지만 모르는 척부터 시전했다.
"무슨 볼일인데?"
"허, 참! 어이가 없네. 곧 졸업시 험이라고 연습 좀 열심히 하나 봐?"
졸업시험에 힘쓰는 과목도 좀 있 는 모양이지.
아무튼 남이 방해할 수 있는 종류 의 시험이라면 아마 아까 들은 예절 실습 같은 과목도 시험을 보는 모양이다.
"밥은 좀 조용히 먹자. 웅?"
쾅!
틸난이 숟가락으로 책상을 강하게 내려치자 페일이 잠시 움찔했다.
그러더니 휙, 뒤돌면서 위협적이지 않은 경고를 내뱉는다.
"이번엔 네가 졸업할 수 있을 것 같아? 꿈도 꾸지 마!"
"저리 꺼져!"
틸난이 기어코 숟가락을 집어 던 졌다. 페일은 쏙 피해내더니 틸난을약 올리며 사라졌다.
"진정해. 털난."
"어유, 열 받아! 줄리아, 넌 대체 예전엔 저런 거랑 어떻게 친구 먹 고 지냈던 거야?"
내가 쟤랑 친구였다고?
"그러게……
"뭐가 그러게야. 아무튼 좀 싸워서 사이 틀어졌다고 몇 년째 저러고 있는 것도 꼴불견이야."
내 졸업을 몇 년 동안 방해했다면 저 녀석도 몇 년간 일부러 졸업을 미루고 있단 소린데, 과한 집착 같긴 했다.
"학원장 아들이라고 교사들도 설 설 기고…… 아주 지 세상이라니까. 여길 졸업만 하면 아무것도 아닌 주제에."
아하. 그렇다면 좀 이해가 갔다.
이 학원장 아들이라 이 안에서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손에 넣은 듯하 니까.
이 달콤한 권력에 취해 세상 밖으 로 나가기 두려운, 뭐 그런 걸 수 도 있지.
'그나저나 학원장 아들까지 여기 있으면 이 스테이크에 뭔가 약을
탄 건 아닌 것 같은데.'
모든 학생들에게 같은 음식을 배 급하고 저 녀석도 여기서 식사를 마친 것 같으니까 말이다.
"혹시 학원장 아들한테만 더 좋은 음식을 따로 제공해주나?"
"그런 건 아닐걸. 그냥 급식 받아 먹던데."
그럼 이 고기엔 이상이 없다고 봐 야 하나.
왠지 모를 찝찝함에 나는 스테이 크를 뒤적거리다가 결국 포크를 내 려놓았다.
* * *
틸난은 기숙사로 돌아가는 길 내 내 페일과 줄리아의 악연에 대해서 설명했다.
"작년 졸업시험 때는 일부러 실습 때 너희 조를 방해했고, 재작년에는 너한테 부정행위 누명을 씌웠고 또……
"올해는 어떻게 방해해올까?"
지금까지 갖가지 방법으로 졸업을 방해한 건 알겠다.
그렇다면 내가 해야 할 일은, 일단 어떻게든 저 방해 공작을 뚫고 졸 업을 해내는 거였다.
"그러게. 슬슬 뭔가 움직임을 보일 텐데."
동아리 애들이 페일의 동선을 감 시하고 있으니 조만간 무슨 수법인 지 밝혀낼 수 있을 거라며 호언장 담을 한다.
그리고 기숙사 앞에 도착하자 사 감이 내 앞으로 온 편지를 내어줬 다.
편지봉투에는 '제시 홉스'라고 쓰 여 있었다.
"누구야? 네 동생?"
« o "
흐.
얼굴도 모르지만 일단 내 동생에 게서 온 편지였다.
기숙사 방에 도착한 다음 편지지 를 열어보니 내용이 꽤나 적나라했 다.
r……그래서 새어머니께서 나한 테 다신 눈에 띄지 말라고, 다락방 에나 들어가 있으라고 하셨어……. ……조만간 옷가지만 챙겨서 나가 라고 할 거라면서 웃는 소릴 들었어. 언니. 나 너무 무서워……. ……언제쯤 다시 언니를 볼 수 있 을까?
-언니를 그리워하며, 동생 제시 가-J
나는 편지를 잠시 바라보다가 책 상 위에 내려놓았다.
방 안에 놓인 거울을 찾아내 그 앞에 섰다.
" 역시나."
짙은 보라색 머리카락과 눈동자.
특유의 나른한 얼굴까지.
"줄리아라고?"
언제부터 그렇게 평범한 이름을 가졌다고.
레 태흐태드.
부정할 수 없게도 앳된 얼굴의 그 녀가 거울 속에 비치고 있었다.
내가 왼손을 들며 어린 레태흐태 드도 따라 왼손을 든다.
줄리아가 곧 레태흐태드였다.
그래. 여긴 다름 아니라 레태흐태 드의 기억 속이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