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2화
챕터: 레태흐태드를 거꾸로 하면
허억, 허억.
불현듯 내 숨소리가 거칠다는 걸 느꼈다.
'뭘 하고 있었더라.'
맞아. 졸업시험에서 낙제했고, 그 래서 몰래 졸업식장에 숨어들었다.
그런데 그 안에서 끔찍한 몰골을 봤지.
퍼뜩 그 생각이 들자 나는 번쩍 눈을 떴다.
'그 다음엔 동생을 보러 왔어. 제 시를. 그런데, 제시는..
욱씬!
"윽!"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파 왔다. 관자 놀이를 짚으려고 이마에 손을 댄 순간, 내 손이 피범벅이란 사실을 눈치챘다.
눈을 깜빡, 감았다 뜨자 주변 광경
이 보이기 시작했다.
"……아."
날 중심으로 온통 시신들이 널브 러져 있었다.
"히 익!"
나는 내 손에 쥐어져 있는 이름 모를 총에 소스라치게 놀랐다.
"……내가 한 짓인가?"
시신들은 죄다 총에 맞아 죽은 것 처럼 보였다. 피로 물든 총도 내 손에 쥐어져 있었으니, 타당한 추론 이었다.
"내가 어떻게……?"
나는 공부라면 모를까, 몸 쓰는 덴 쥐약이었는데. 다른 아이들이 교양 으로 듣곤 하던 사냥 실습 같은 것 도 듣지 않을 정도였다.
그런데 내가 무슨 수로, 학원에는 반입 불가인 총을 들고 여기까지 올 수 있었을까?
아주 기이한 일이었다.
나는 덜덜 떨리는 다리로 자리에 서 일어났다. 이유는 아무래도 좋았 다.
동생을 찾아야만 했다.
"제시……. 제시! 제시, 어딨어! 내
가 데리러 왔어!"
넓은 저택이 침묵으로 가득 차 있 었다.
을씨년스러운 분위기가 물씬 풍겼 다. 발을 딛는 곳마다 시신이 없는 곳이 없었다.
하녀, 하인, 기사. 가리지 않고 죄 다 죽었다.
"제시! 제시이!"
내가 있었을 적에 제시는 제일 꼭 대기 다락방에서 지내곤 했었다.
그게 생각나 서둘러 계단을 타고 올라갔다. 중간중간 건너기 힘들 정도로 시신이 쌓여있는 것만 빼면 어려운 일은 없었다.
그리고 중앙 홀과 이어지는 계단 위에 섰을 때, 나는 벽에 걸려 있 는 가족사진을 볼 수 있었다.
행복해 보이는 가정이었다.
다정한 부모 아래서 개구쟁이처럼 웃고 있는 두 아이가 눈에 띄었다.
"o}.
그 가족사진 어디에도, 나나 제시 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대부분은 길거리에 널린 고아들
을 데려다가 몰래 집어넣는 경우가 많으니까…….
-네가 학원으로 가자마자 그해 마 지막 날 식탁 위에 올랐지.
가족. 나는 지금껏 학원에서 가족 을 생각하며 버렸다.
학원으로 가기 전 고작 몇 달뿐이 었지만, 따스하게 대해줬던 기억이 사무치게 인상 깊었던 탓이다.
아무도 길거리 고아에게 그렇게 대해준 적이 없었으니까.
거기에 감동 받아 열심히 공부해
서 이들에게 보답해야겠다고 생각 한 건, 세상 물정 모르는 어린아이 의 순진한 발상이었을까?
"제시..
다른 것보다, 그 아이를 생각하면 마음이 찢어지는 것만 같았다.
나는 숨을 제대로 쉬기가 어려워 서 난간에 기대 주저앉았다.
"허억, 홉, 흐흐혹.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치밀어 오르는 감정이 있었다.
그건 부정할 수 없으리만치 선명 했고, 거부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렬했다.
자신을 속인 이들을 향한 분노.
다 알면서 모르는 척 눈 감았던 이들을 향한 혐오감.
그리고 마지막으로, 아무것도 모른 채 순진하게 놀아났던 자기 자신을 향한 증오!
그 뼛속 깊이 새겨지는 고통에 나 는 그저 신음할 수밖에 없었다.
"아아아아아악!"
속이 답답해서 미쳐버릴 것만 같 았다.
마구 악을 질러도 속에서 풀리지
않는 응어리가, 자꾸만 나를 갉아먹 었다.
" 아아아아악!"
살아있는 이라곤 오로지 나뿐인 저택에서 나는 홀로 절규했다.
그 순간이었다.
천지가 개벽했다.
-안녕, 꼬마야.
내 머리 위로 그림자가 드리웠다.
온통 검은색 일색인 무언가가 사 람의 형태를 띠고 있었다.
그림자를 빚어 만든 것처럼, 아무 것도 분간이 되지 않을 정도로 칠혹 같은 어둠이었다.
검은 아이의 목소리는 성별을 분 간할 수도 없을 정도로 웅웅 울렸 다.
-나랑 계약하자.
아이가 툭 내뱉었다. 내게 손을 내 민다.
검은 기름인지 진흙인지 알 수 없 는 것이 아이의 손을 타고 주르륵 흘러내렸다가 다시 기어 올라간다.
지나치게 비현실적이었다. 나는 뺨 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느낄 수 있 었다.
이게 의미하는 바를 모를 정도로 멍청하진 않았다. 배운 것 없는 어 린 시절부터, 그들은 공포의 대상이 었으니까.
"마녀."
오랜 시간 이 땅에 스며든 인간을 향한 증오심. 그 의지들이 모여 만 든 사념체.
그와 계약해 스스로 인간이길 포 기하고 오로지 인류를 멸하는 데 온 신경을 집중하는 이들을 우리는 '마녀'라고 불렀다.
나 역시 마녀를 두려워했다.
이렇게 눈물이 나는 이유는. 이렇 게 심장이 아려오는 이유는.
목구멍이 홧홧하게 달아오르는 이 유는. 그건.
내가 한순간에 평범한 학원 생도 에서 예비 마녀로 몰락했기 때문일 까. 꿈에도 그리던 것이 모두 물거 품이 됐기 때문일까. 아니면, 당신 이 너무도…….
"……너무 늦었잖아."
정말 너무도 늦었기 때문일까.
-나랑 계약하자.
검은 아이가 다시 제안했다.
하지만 당신은 너무 늦었다.
나는 처음 이 집안에 발을 들인 순간부터 이렇게 될 운명이었는데. 차라리 그날 나를 찾아와 미래를 속삭이고 계약을 제안하지 그랬나.
그러면 기꺼이 이 손을 잡았을 텐 데. 내 동생이 살아남은 것을 위안 으로 삼으면서.
-나랑 계약하자.
한 번 더 내게 속삭인다.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이 손을 잡으면, 나는 두 번 다시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으리란 걸.
마녀가 되어 완전히 새로운 삶을 살게 되리란 걸.
하지만 그게 무슨 상관일까?
이미 내 인생은 이전으로 돌이킬 수 없게 됐는데.
여기서 마녀가 되지 않는다고 하 면, 내게 남은 선택지는 다시 길바 닥에 나앉는 것뿐이다.
아니. 도망쳐 나온 곳으로 다시 끌 려가 도축되지 않으면 다행이려나.
그래. 내겐 더 이상 떨어질 곳도 없었다.
그렇게 생각하고 나는 손을 들어
올렸다.
사념체의 손을 맞잡고, 차라리 마 녀가 될 작정이었다.
내가 겪은 이 모든 고통을 남아있 는 개자식들에게 돌려주고 싶었다.
내 동생의 원수를 갚고, 저 학원에 서 희생된 수많은 친우들의 복수를 하고 싶었다!
떨리는 손끝이 검은 아이에게 닿 기 직전이었다.
[알림: 귀속 아이템 '고장 난 나침 반'의 사용자가 재설정됩니다.]
이상한 알림창이 떴다.
'이게 뭐지?'
[알림: '고장 난 나침반'의 새로운 사용자로 '한서하'가 선택되었습니 다.]
[알림: '고장 난 나침반'이 적합한 그릇을 가진 사용자를 찾아 기뻐합 니다.]
무슨 소린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그런데 '한서하'라는 말을 보자마 자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파 왔다.
"으윽!"
나는 뻗으려던 손으로 바닥을 짚 고 나머지 손으로 이마를 부여잡았 다.
[알림: '고장 난 나침반'의 봉인이 해제됩니다.]
[알림: '고장 난 나침반'이 아이템 명이 '미네르바의 나침반'으로 변경 됩니다!]
동시에 품 안에서 환하게 빛나는 무언가가 튀어나왔다.
영롱하게 빛을 내는 나침반이 눈 높이까지 두둥실 떠오른다.
마치 자신을 어서 거머쥐라는 듯 살랑살랑 혼들리기까지 했다.
내가 잠시 고민하자, 검은 아이가 한 걸음 다가오며 내게 말했다.
-나랑 계약하자.
그러자 지지 않고 나침반도 환한 빛가루를 사방에 뿌려대기 시작했 다.
혼란스러움이 가중됐다. 뭔진 몰라
도 이 선택이 아주 중요하게 작용 할 거란 생각이 떠나질 않았다.
내가 멈칫하고 있는 그때, 다른 알 림이 또 머릿속을 울렸다.
[알림: '노이트 리볼버'가 당장 나 침반을 집어 들라고 소리칩니다!]
[알림: 특수탄환 '쏟아지는 불꽃' 이 나침반을 집지 않으면 총으로 쏴버리겠노라 경고합니다!]
[알림: 특수탄환 '찬동하는 목책' 이 자신은 언제나 사용자를 지지하 지만 이번엔 다른 이들의 의견을 수용하는 게 좋겠다고 충고합니다.]
[알림: 특수탄환 '바로잡는 창천' 이 현명한 선택을 할 것을 권고합 니다.]
단번에 쏟아지는 알림에 나도 모 르게 떠밀리듯 나침반을 집어 들었 다.
그러자 나침반이 바르르 몸체를 떨며 기쁜 내색을 했다. 검은 아이 는 아쉽다는 듯 서서히 뒤로 물러 나 사라졌다.
[아이템을 확인합니다.]
〈미네르바의 나침반(귀속)〉
등급: SSS
설명: 지혜의 신 미네르바가 자신 의 숨결을 불어넣은 나침반입니다. 사용자에게 언제나 올바른 길을 안 내합니다. 소유자의 영혼에 귀속되 며 주인과 함께 성장합니다.
곧이어 나침반의 침이 빙그르르 돌더니, 한 방향을 가리키기 시작했 다.
계단의 위쪽이었다.
나는 엉겁결에 나침반이 가리키는
곳으로 향했다. 계단을 조금 더 오 르자, 본래 내가 가려고 했던 목적 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다락방의 앞이었다.
나침반은 명확하게 다락방을 가리 키고 있었다.
"이 안에 들어가라고?"
나침반이 고개를 끄덕이는 것처럼 흔들거렸다.
"……난 아직 자신이 없어."
이 안에 제시의 흔적이 남아있을 까?
있다고 하면 나는 더욱 슬픔에 사
무칠 것이고, 없다고 하면 허무함에 절망할 것이다.
아직까진 이 문을 열 자신이 없었 다.
그러자 나침반이 답답하다는 듯 강하게 다락방 문을 가리킨다.
그 명확한 의지에 나는 주저하면 서도 문고리에 손을 올렸다.
달칵.
문고리가 돌아가자 나는 침을 꿀 꺽 삼켰다.
스으으윽.
천천히 문을 열어보니 그 안은 까
만 어둠뿐이었다.
동시에 나침반이 내 등 뒤를 슬쩍 밀었다. 기대하던 풍경과 달라 잠시 멍했던 나는 순식간에 앞으로 떠밀 리고 말았다.
짧은 비명과 함께 문 너머로 빠져 들고 말았다.
* * *
정신을 차렸을 때 레태흐태드는 날 보며 생긋 웃고 있었다.
하지만 미소로 가득한 얼굴과 대 비되게 손끝을 모래처럼 사르륵 흩 날렸다.
"아쉽네. 그 나침반이 방해하지만 않았어도 내가 승리할 수 있었는 데."
그러자 품 안에서 나침반이 두등 실 떠오르더니 과시하는 것처럼 한 바퀴 빙글 돌았다.
하마터면 줄리아와 동화된 채 사 념체와 손을 잡을 뻔했다.
그러면 곧장 나는 마녀가 되어 레 태흐태드의 자매가 되었겠지. 상상 만 해도 끔찍한 일이다.
"네 진짜 이름은 '줄리아'인 거 지?"
"나름 마지막 수단이었어. 내 기억 을 보여주는 건. 근데도 넘어와 주 질 않네."
레태흐태드는 간접적으로 긍정을 표했다.
나는 아직도 그 끔찍한 감각이 잊 히지 않아서 주먹을 쥐었다 폈다.
잠깐이었지만 내가 아는 세상이 전부 무너져 내리는 그 느낌이 지 나치게 생생했다.
"그때 손을 잡고 마녀가 되었지.
어때. 마녀가 될 만했지 않아?"
나부터가 그녀에게 동화해 마녀가 될 뻔했으니 할 말이 없었다.
그래서 잠시 침묵하다가, 불현듯 생긴 질문을 던졌다.
"왜 '레태흐태드'였어?"
"내 이름?"
"처음부터 네 이름인 건 아니었을 거 아냐. 네가 스스로 붙인 마녀 이름일 테니까."
"갑자기 그런 게 궁금해졌어?"
레태흐태드가 푸훗,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더니 이렇게 뒷말을 이었다.
"남의 죽음을 먹고 자란 내게 딱 어울리는 이름이지."
Deatheater.
그녀가 아직 사라지지 않은 손끝 으로 덧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