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9화
챕터: 남은 자들의 이야기
“……그래서 마주할 수 있었습니다. ‘크로노스’와요.”
적막한 공간에 타닥타닥 타자 소리만 울려 퍼졌다.
상황을 기록하는 서기관이 차가운 눈빛으로 우릴 바라보고 있었다.
“그 다음은 어떻게 됐죠?”
이운우가 청사의 길드장이자 전직 총사령관으로서 질문을 던졌다.
나는 잠시 서기관을 바라보다가 뒷말을 이었다.
“‘크로노스’ 말로는 자신의 힘으로도 이 지구의 오염을 완전히 되돌리는 게 불가능하다고 하더군요.”
탁.
서기관의 타자가 멈췄다.
“그러더니 제게 한 가지 제안을 해왔습니다. 제 영혼을 내놓으라고요.”
“영혼을……?”
“네. 제 영혼을 흡수하면 될 것도 같다고 하더군요.”
“그 제안을 거절했나 봅니다. 지금 이곳에 서 있는 걸 보면.”
이운우가 추궁하는 어조로 물었다.
‘설마 그러겠다고 한 건 아니지?’라는 뉘앙스가 짙게 깔려있었다.
“아뇨. 승낙했습니다.”
그는 인상을 팍 찌푸렸다. 나를 취조하러 온 것치고는 사적인 감정이 다분했다.
그래.
그때, 나는 동의의 말을 내뱉었다.
***
“네 이름을 걸고 약속할 수 있어?”
-얼마든지.
“정말로…… 내 영혼만 내어주면, 이 세상의 오염을 되돌릴 수 있냐고.”
-물론. 이런 일에 거짓을 말할 정도로 고약하진 않거든.
노이트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나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잠시 주저했으나 고개를 똑바로 들고 크로노스를 바라봤다.
“내 영혼을 줄게.”
크로노스가 제 안에 들어있는 모래를 살랑 흔들었다.
-후회하지 않겠느냐? 어쩌면 네 영혼을 바치지 않더라도, 지구가 승리할 수도 있다.
“오염이 지구를 좀먹기 시작한 이상…… 이미 돌이킬 수 없어졌어.”
톨룩과 연결된 채로 있으면 그들을 파멸시킨 오염이 지구까지 번지기 시작할 것이다.
연결을 끊어내고 오염을 정화하는 것.
그것이 급선무였다.
-네가 아끼는 동료들도 두 번 다시 볼 수 없을 텐데.
“내가 없어지면…… 다들 슬퍼하겠지.”
좌절하는 혜원 언니와 눈물 흘리는 다정 언니가 곧바로 머릿속을 스쳤다. 곧이어 최대한 침착한 척할 이운우도 생각이 났다.
“그래도 이겨낼 수 있을 거야.”
왜냐하면 세상은 으레 그런 법이니까.
나 한 명 사라진다 하더라도 이 세상은 계속 굴러가게 되어있다.
시간이 지나면 그들도 천천히 나를 잊으리라.
“자. 내 영혼을 가져가.”
나는 크로노스를 향해 손을 뻗었다.
노이트가 당장이라도 총알을 내뱉을 것처럼 바들바들 떨려왔다.
-기꺼이.
[알림: ‘노이트 리볼버’의 잠금이 해제됩니다.]
[알림: 특수 탄환 ‘감싸 안는 비익’이 열렸습니다.]
크로노스의 말에 화답하는 것처럼 여섯 번째 탄환이 열렸다.
[알림: ‘노이트 리볼버’의 모든 잠금이 해제되었습니다!]
그래. 마지막 순간에 너 역시 온전해졌구나.
철컥.
나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타앙!
방아쇠를 당기자 환한 빛이 주변에 흩뿌려지기 시작했다.
저절로 눈을 감을 정도로 강한 빛이었다.
사방이 조용해지고 감각이 아득히 멀어져만 갔다.
‘내 영혼은 이대로 흡수되는 건가.’
육신의 감각이 멀어지고 몸이 어디론가 붕 뜨는 느낌이 들었다.
눈을 감은 채였지만 사방을 볼 수 있었다.
기묘한 감각이었다.
-네 승리다. 한서하.
그때 머릿속에 크로노스의 음성이 울려 퍼졌다.
-보기 좋게 져버렸구나. 그러나 네가 걸어온 길들을 나 역시 함께했으니…… 어떻게 누구의 승리고, 누구의 패배라고 할 수 있겠느냐.
‘무슨 소리야.’
당장 날 흡수하지 않고 뭐 하는 거지? 잡담을 나눌 시간은 없는데.
-보거라. 네가 잊은 과거의 기억이니.
화아악!
동시에 눈앞이 밝아오며 생전 처음 보는 광경이 펼쳐졌다.
-오염을 되돌리러 왔다. 크로노스.
한 여자와 모래시계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익히 아는 모습이었다.
턱 끝에 새겨진 흉터와 무미건조한 분위기. 지금의 나보다 좀 더 나이를 먹어 성숙해져 있었다.
회귀 전의 나였다.
-지구의 오염만 되돌리는 것은 내 관할이 아니다. 신격을 소모하지 않고선 오로지 ‘시간’을 되돌리는 것만이 가능하지.
그 말에 과거의 내가 크게 낙담하는 얼굴을 했다. 미동도 없던 얼굴 근육이 묘하게 일그러졌다.
-하지만…… 다른 방법이 있을지도 모른단다.
-다른 방법?
크로노스가 입맛을 다시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는 내 영혼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네 영혼은 아주 강인하고 또 고귀하구나.
뜬금없는 소리에 과거의 내가 의아하다는 듯 눈썹을 치켜들었다.
-하지만 지금 당장은 부족해. 그래. 이렇게 할까?
크로노스가 내게 제안했다.
-널 과거로 회귀시켜주마. 여기 오기까지의 수많은 역경이 네 영혼을 제련했으니, 같은 과정으로 한 번 더 닦으면 네 영혼은 아주 찬란하게 빛날 테지.
그는 벌써 내 영혼을 흡수하고 싶어 안달이 난 것 같았다.
-그 다음 너를 흡수하면 나는 이 굴레에서 벗어나 ■■에 오를 수 있을 것이다……!
-잠깐만.
당시 나는 성좌니 뭐니 하는 것들은 하나도 몰랐지만 한 가지는 짐작할 수 있었다.
영혼을 내줘봤자 크로노스만 좋은 일이란 것 말이다.
-지구의 오염을 되돌릴 방법은?
-그래. 모든 것에는 대가가 따르기 마련이지.
그는 나의 허락이 없으면 함부로 내 영혼에 손을 댈 수가 없었으니. 크로노스는 이내 내기를 제안했다.
-이렇게 할까? 나와의 내기에서 네가 이기면 내 신격을 모두 소모해 지구의 오염을 되돌려주마.
과거의 내게 희망이 깃들었다.
-대신.
크로노스가 엄숙히 선포했다.
-네가 진다면 네 영혼을 내게 넘겨줘야 할 것이다.
-좋아. 승낙하지.
내기 내용이 뭔지 듣지도 않고 우선 승낙을 외쳤다.
왜냐하면 정말로 전쟁이 극단에 치닫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구는 궁지에 몰려 있었고.
지금 목숨을 걸지 않더라도 어차피 뒤이은 전쟁에서 스러질 것이 분명했다.
-내기 내용은…… 네가 정해보겠느냐?
나는 잠시 침묵하다가 이렇게 대꾸했다.
-회귀 후의 내가, 세계를 살리기 위해 내 목숨을 건다는 데 내 모든 걸 걸겠어.
크로노스의 목소리에 웃음기가 잔뜩 배어 있었다.
-좋다. 재밌겠구나. 하지만 내용을 약간 바꾸지.
그는 앞에 한 가지 조건을 추가로 달았다.
-이 내기의 기억은 완전히 지워버리고, 회귀 후 아무것도 모르는 네가 왔을 때…….
그가 작게 속삭였다.
-그 영혼을 내게 바치기로 한다면 너의 승리다.
-어려울 것도 없네.
회귀 전의 내가 간단히 일축했다.
그러나 크로노스는 그런 나를 비웃었다.
-회귀 후의 네가 지금의 너와 같을 거라 생각한다면 큰 오산일 거다. 인간은 아주 변화무쌍하고, 근본적으로 무척 이기적이니까.
크로노스는 자신의 승리를 확신하는 것 같았다.
반면에 회귀 전의 나 역시 자신의 승리를 확신하고 있었고 말이다.
그 다음 순간 장면이 전환됐다. 나는 다시 전쟁터 한복판에 서 있었다.
훅, 쿠우웅!
탕, 탕!
여러 공격을 피하고 합을 주고받다가 나는 끝내 그를 마주했다.
-또 만났군. 귀뾰족.
에녹을 저렇게 부를 때도 있었지. 지금의 에녹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의 사내가 대꾸도 없이 창을 휘둘렀다.
부우웅!
휙!
몸을 뒤로 젖혀 반사적으로 창을 피해냈다.
-다음에도 네 얼굴을 또 봐야 한다는 게 고역이긴 하네.
회귀 전의 나는 그렇게 작게 중얼거렸다.
그리곤, 거의 에녹의 창에 몸을 던지다시피 했다.
푸우욱!
허어억, 하고 숨을 깊게 들이쉬었으나 고통이 극심해 내쉬질 못한다.
기이하게 일그러진 에녹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회귀 전의 내가 천천히 눈을 감았다.
죽음.
그 안식이 찾아온 것이다.
그제야 나는 기억의 공백을 되찾았고, 에녹이 왜 그렇게 이상한 표정을 지었는지 이해했다.
‘그냥 에녹하고 싸우다 죽은 게 아니었어.’
내기에 관한 기억이 모두 지워졌으니 나는 자연히 그와 겨루다 내가 패배한 줄 알았지만 그게 아니었던 거다.
‘내가 회귀하기 위해 스스로 죽음을 선택했던 거야……!’
그걸 이제야 알아챘다.
화아아악!
깨달음과 동시에 과거의 기억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나는 여전히 영혼만 둥둥 뜬 것 같은 상태로 크로노스와 마주하고 있었다.
-이제 전부 기억났느냐?
“대충은 알겠어.”
역설적이게도 크로노스에게 내 목숨을 바치기로 한 결단이 날 살려낸 것이다.
비르디아의 예언처럼.
“내가 승리했다는 건.”
-그래. 보란 듯이 당했군.
“오염은? 전부 되돌린 건가?”
크로노스가 빙그르르 돌자 모래시계가 흐르기 시작했다.
-너와 약속한 대로. 모든 오염을 씻은 듯이 사라질 것이다.
나는 화한 느낌이 내 발끝부터 치밀어 오르는 것을 느꼈다.
-네 영혼의 오염까지 말이다.
하얀 빛이 날 감싸 안자 몸이 무척 가벼워졌다.
마치 엘프가 산과 공명할 때처럼, 몸을 짓누르던 감각이 사라지고 상쾌함만 남았다.
파스스!
오염으로 추정되는 검은 가루들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쨍그랑!
-이런.
“뭐야, 방금? 뭐가 깨진 거야.”
그때 뭔가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크로노스가 미안하다는 듯이 대답했다.
-연금술사가 아닌데도 아타노르와 계약하지 않았더냐.
파이로를 말하는 것이었다.
-본디 이들은 연금술사에게 속해야 하는 법. 자연의 법칙을 어긴 탓에 계약이 약해져 있었던 모양이야.
“그럼 지금 나랑 파이로의 계약이 깨졌다는 거야?”
-계약은 결국 영혼과 영혼 사이의 결합이다. 내가 떼어내려 해도 떼어낼 수 없는 것이지.
휴우.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잠깐 역소환된 것뿐이니라. 네가 다시 소환하면 되는 일이니 걱정하지 말거라.
그렇다면 다행이었다.
사르륵, 모래 흩어지는 소리가 부드럽게 울려 퍼졌다.
-그동안 모은 신격을 인간과의 내기에 져서 죄다 소모해버렸으니. 어리석은 일이구나.
“앙심을 품고 해코지하진 않겠지?”
-그럴 리가.
내가 봤던 기억 속의 크로노스는 성좌의 자리에 오르기 위해 잔뜩 혈안이 된 것 같았는데.
지금의 크로노스는 그렇지도 않아 보였다.
-기나긴 세월을 사는 우리에게 10년도 채 되지 않는 세월은 찰나와 같지.
크로노스가 내 마음속을 읽은 것처럼 말했다.
-내기의 승패를 가늠하기 위해 나는 회귀 후 네 행적을 꾸준히 지켜봐왔다.
뭐? 그랬단 말야?
-그리고 어쩌면 나 역시, 네게 감화되었을지도 모르겠구나.
그는 작게 중얼거렸다.
-네가 그토록 애를 쓰면서 지키려고 하는 것들이 내게도 소중하게 느껴지는 걸 보면 말이다.
무슨 의미냐고 되물으려는 순간. 크로노스의 안에서 사르륵 쏟아지던 모래 줄기가 뚝 끊겼다.
시간이 되돌아간 것이다.
-자, 이제 돌아갈 시간이다.
“잠……!”
허업!
말하는 도중에 나는 번쩍 눈을 떴다.
한순간에 현실감이 돌아왔다. 사방을 둘러보니 나는 한 깊은 산속에 홀로 누워 있었다.
***
“……터! 한서하 헌터!”
이운우의 부름에 나는 회상을 멈췄다.
“그리고 어떻게 된 겁니까? 거기서 승낙을 했는데 어떻게 살아서 여기 있는 거냐고요.”
그렇지. 나는 내가 수행한 임무에 대한 마지막 보고서를 제출하기 위해 취조를 당하는 중이었다.
하지만 회귀 전의 내가 어떻게 했고, 크로노스와 한 거래가 어땠는지 구구절절 설명할 필요는 없었다.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결국 나는 그렇게 변명했다.
“아마 크로노스가 변덕이라도 부린 모양이죠.”
이운우가 도끼눈을 뜨고 제대로 대답하라고 재촉했다.
나는 앵무새처럼 같은 말만 반복할 뿐이었다.
결국 수십 번 같은 대답을 한 뒤에야 나는 취조실에서 풀려날 수 있었다.
“좀 성실하게 대답하시죠.”
“진짜 모르는 걸 어떡합니까.”
이운우의 채근에 태연하게 대꾸하자, 그가 가증스럽다는 듯 날 바라본다.
그러더니 이내 후우, 하고 제 머리를 휘젓는 것이다.
“됐어. 이제 이런 일도 두 번 다시 없겠지.”
그의 말대로였다.
왜냐하면 나는 헌터에서 은퇴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