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7화
이운우는 눈만 깜빡거렸다.
왜 말을 꺼낸 자신보다 그가 더 아파 보이는 걸까.
“절 자식처럼 여기셨다고요?”
“그게 아니면 내가 왜 너한테 청사를 물려줬다고 생각하는 거냐.”
“그야…… 제가 쓸모가 있기 때문에…….”
“물론 네가 그 자리에 올라설 만큼 능력이 있는 것도 맞지. 하지만 청사의 길드장 자리는 단순히 실력주의로 돌아가는 자리가 아니란 것도 알 텐데?”
이운우는 입을 다물었다.
그의 말이 맞았다. 누구나 인정할 수 있을 만한 실력이 필수 요건이긴 하지만, 단순히 실력이 좋다고 길드장 자리를 가질 수 있는 건 아니었다.
“네가 날 딱딱하게 대하는 건 그냥 내가 어려워서 그런 줄 알았는데…….”
전서호가 쓴웃음을 지었다.
설마하니 자신이 누군가의 대용품이라 생각하고, 그래서 제 쓸모를 증명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을 줄이야.
그런 줄도 모르고 아이가 학구열이 높다고. 힘에 집착하는 경향이 있다고만 생각했다.
양육자로서 완전히 자격 미달이다.
“다시 한번 말하마. 나는 가정을 꾸려본 적도 없고, 제대로 된 가족을 겪어본 적도 없다. 그래서 아버지 노릇이란 게 어떤지 몰랐어.”
전서호에게 부모란 늘 차갑기만 한 존재였다.
그는 부모와 자식이 어떤 관계인지, 어떻게 소통하는지 정확히 알지 못했다.
그래서 더더욱 서툴렀다.
“하지만 누군가 자식 같은 아이를 꼽으라 하면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있다.”
전청운 역시 미안하기만 한 조카지만 그와는 달랐다.
그를 향한 마음이 죄책감으로 점철되어 있다면, 운우를 향한 마음은 좀 더 애틋했으니까.
다 자란 자식을 보는 부모, 자신을 뛰어넘은 제자를 보는 스승의 마음에 더 가까울 것이다.
“운우야. 나는 널 내 자식이라 생각한다.”
그 선명한 울림은 오해의 여지 없이 명확하게 전해졌다.
“지금까지 내가 너무 무심했던 모양이야.”
그는 스스로가 한심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이 나이 먹고도 사람 대하는 것이 이리 서툴러서야.
속내를 감추는 짓만 했더니 언제부턴가 진심을 전하지도 못하는 머저리가 되어 있었다.
“길드장님…….”
“그래. 전부터 나는 이 호칭이 마음에 안 들었어.”
이운우가 울 것 같은 얼굴을 하자 전서호가 부러 장난스럽게 씨익 웃었다.
“너와 내 나이 차가 부모자식간이라기엔 애매해서, 또 아버지라 부르기 부끄러워 그런 줄로만 알았지.”
아버지라니!
이운우는 감히 그를 그렇게 부를 생각조차 해본 적이 없었다.
언제나 전서호는 하늘같은 스승이자 진창 속에서 자신을 구해준 생명의 은인이었으니까.
“지금 당장은 어렵겠지. 늦어도 좋다. 언젠가 네가 아버지라고 부를 날이 왔으면 좋겠구나.”
퍽 다정스러운 말에 아직까지도 현실 감각이 없었다.
이게 진짜인가? 혹시 꿈은 아닐까?
진득한 욕심이 배어나온 환상은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그러나 다시 확인해도 이건 현실이었다.
“당분간 여기에 머물러야겠다.”
“예?”
갑작스러운 선언이었다.
“이대로 다시 바다로 나가버리면 네가 아버지라고 부를 일은 영영 없을 것 같은데.”
“……원하시면 아직 청사 본부 건물이 그대로 남아있으니 그곳에서 잠시 지내셔도 괜찮을 겁니다.”
혼란스러운 와중에 그가 차분하게 대안을 내놓았다.
“아니. 네 집에 빈 방 많은데 뭐 하러.”
“……제 집이요?”
그가 이보다 훨씬 어렸을 때도 그는 전서호와 같은 집에서 기거한 적이 없었다.
고작해야 열 살 먹은 어린애에게 방이 세 개 딸린 집을 구해다 줬으니 말이다.
“내가 사준 집이잖아.”
이운우는 항복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 그가 지내는 집의 원주인은 전서호였으니까. 이 역시 이운우가 청사의 길드원으로 일할 때 전서호가 마련해준 집이었다.
‘그러고 보니 대부분 다 길드장님께서 내어주신 거네.’
이제껏 받기만 해서 몰랐는데, 꼽아보니 이운우가 가진 것의 대부분은 전서호가 준 것이었다.
그의 집부터 시작해서 안에 놓인 가구들, 옷들, 심지어 전서호의 계좌와 연결된 카드까지 있었다.
청사의 길드장이었던 이운우가 물질적으로 부족할 리가 없는데도. 그냥 용돈 삼아 마음대로 쓰라며 강제로 쥐여준 카드였다.
그것을 깨닫자 이운우는 어쩐지 멍해졌다.
***
“아아니, 괜찮다니까요!”
엘리사가 곤란한 듯 울상을 지었다. 하지만 매니저는 무척 단호하게 대꾸했다.
“신인 때는 백번 조심해도 모자라지 않다니까요. 게다가 당장 내일도 음방 스케줄이 있는데…….”
“매니저님, 한 번만요! 네? 저 데뷔하고 하루도 쉬지 않고 열심히 했잖아요.”
“아니, 연예계에 하이에나 같은 기자들이 얼마나 많은데요! 그러다가 뭐 하나 꼬투리라도 잡히면……!”
둘의 실랑이가 끊이지 않고 있었다.
이대로 가다간 문 앞에서 저녁까지 싸우고 있을 지경이었다.
결국 나는 선글라스를 벗으면서 끼어들었다.
“매니저님.”
“잠시만요! 이건 소속사와 엮인 문제기도 하니까 제3자는 끼어들지 말…….”
그가 반사적으로 고갤 돌렸다가 입을 다물었다.
눈을 크게 뜨고 멍하니 날 바라보다가 작게 중얼거린다.
“……한서하 헌터님?”
헌터‘님’? 그 호칭은 좀 의문스러웠지만 아무튼 내가 한서하인 건 맞았다.
고갤 끄덕이자 매니저가 어버버, 말이 꼬여 정체불명의 소리를 냈다.
“……지, 진짜요? 아니, 엘리사랑 아는 사이…… 아, 아니지! 사인부터 좀……!”
“엘리사와 친한 언니, 동생 사이라서요. 내일 방송국까지 제가 책임지고 데려다줄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마시죠.”
“아니, 그래도 그건 좀…….”
“기자가 따라붙는다 해도 신인인 엘리사보단 저 위주로 기사를 낼 겁니다.”
이제 갓 데뷔한 가수보단 내가 더 흥미로운 기삿거리 아니겠는가.
그러자 매니저도 그럴듯하다 느꼈는지 반응이 훨씬 유해졌다.
“정 그러시다면…… 되도록 바깥출입은 자제하신다고 약속해주신다면…….”
“예. 물론이죠. 이 안에서만 있을 거고, 내일 아침이면 안전하게 데려다주겠습니다.”
“한서하 헌터님을 못 믿으면 누굴 믿겠습니까. 그럼 우리 엘리사 잘 부탁드립니다.”
엘리사와 함께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텐데 제 담당 연예인을 살뜰히 챙기는 것 같았다.
아마 다른 PD나 방송 관계자들에게도 저렇게 인사하겠지.
매니저가 물러나자 엘리사의 얼굴이 한층 밝아졌다.
“요정니이이임~!”
“요정님 아니라니까…….”
와락, 엘리사가 내 목에 팔을 감고 매달렸다.
정말 간만에 보는 것 같았다.
데뷔한다고 바쁘더니, 이번에 솔로 여가수로 정말 데뷔를 했다.
곡 반응도 나쁘지 않았으니. 매니저가 노심초사하는 것도 이해가 갔다.
엘리사 정도의 미모는 아무리 가려도 티가 나는 법이다.
“이만 들어가자.”
나는 문고리를 잡으며 엉겨붙는 엘리사를 살짝 떼어냈다.
“에드문드가 기다리고 있을 거야.”
***
사실 엘리사보다도 더 보기 힘든 게 에드문드였다.
병원 치료를 받긴 했지만 그가 집 안에 틀어박혀 타인과의 접촉을 거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저번에 왔을 때도 아마 깨어있었겠지.’
내가 갈 때마다 갖가지 핑계를 대며 날 피하곤 했으니까.
그래도 엘리사 얘길 꺼냈을 때 반응이 나쁘지 않아 다행이었다.
에드문드는 오랜 숙고 후에 엘리사를 만나보고 싶다는 의사를 밝혔다.
“우와, 되게 고급스러운 느낌이 드네요.”
엘리사가 여기저기 둘러보며 감탄사를 내뱉었다.
집 내부 인테리어는 온전히 벨제부브의 취향이었다. 흡사 중세 귀족이 썼을 법한 느낌의 고풍스러운 디자인의 가구들이 늘어서 있었다.
“마왕성하고 비슷한 느낌이에요.”
“비슷하게 꾸몄으니까요!”
대꾸는 다른 곳에서 들려왔다.
테토가 그림자 속에서 얼굴을 반만 내민 채로 이야기하고 있었다.
“에드문드는?”
“방 안에 있어요! 밖에 나오길 꺼리시거든요. 벨제부브 님께서 위로 모시라고 하셨어요!”
테토는 그림자 밖으로 쑤욱 나오더니 우릴 안내하기 시작했다.
“따라오세요!”
제법 집사 태가 나는 모습이었다.
2층 가장 끝에 놓인 방 앞에 서자 테토가 똑똑 방문을 두드렸다.
“실례하겠습니다.”
스으윽.
문이 열리자마자 습한 공기가 훅 끼쳐왔다.
환한 대낮인데도 방 안엔 햇빛 한 점 들지 않고 있었다.
한가운데 호화로운 침대 위에 에드문드가 기대듯이 앉아있었다.
“이야, 우리 영웅님 오셨네.”
그가 장난스레 웃었지만 이전과는 다르게 느껴졌다.
한눈에 보기에도 살이 많이 빠진 것 같았다.
에드문드의 상태에 대해서 미리 귀띔을 받았는데도 엘리사가 당혹스러워하는 게 느껴졌다.
엘리사를 등 뒤로 잠시 감추면서 태연하게 안부를 물었다.
“나보다 네가 더 귀하신 몸이지. 도통 보기 어렵던데.”
“요즘 수면 시간이 불규칙하거든.”
“밥은 먹고 다니는 거야?”
“으음…….”
에드문드가 곤란한 듯 미소 지었다.
그러자 침대 옆 의자에 앉아있던 벨제부브가 대신 대답했다.
“죽은 좀 먹더군.”
“입맛이 없어.”
입맛이 없다, 정도로 치부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닌 것 같은데.
나는 에드문드를 다시 병원에 입원시키는 게 좋을지 슬슬 고민되고 있었다.
에드문드 본인이 강력하게 희망해서 밖으로 나온 거긴 하지만…….
아플 땐 전문가의 힘을 빌려야 하지 않겠는가.
“저…… 안녕하세요.”
그때 엘리사가 슬그머니 고갤 내밀면서 인사를 건넸다.
이제야 감정이 다 추슬러진 모양이다.
“오랜만이네요.”
엘리사가 살짝 미소 지었다.
“어……. 와, 몰라볼 뻔했네.”
“많이 바뀌었죠? 저희 오빠도 가끔 놀라요. 적응 안 된다고.”
엘리사가 염색한 머리칼을 매만지며 배시시 웃었다.
데뷔 때문에 머리 색도 바꾸고 스타일링도 다르게 한 탓에 잠시 낯설게 느껴졌던 모양이다.
“아냐. 좋아 보인다. 잘 지내는 것 같고.”
엘리사는 다른 이들보다 훨씬 빨리 지구에 적응한 편이었다.
톨룩에서의 삶이 워낙 형편없었기에 더욱 그럴지도 모른다.
“이것 봐요. 귀도 감쪽같죠!”
“진짜 자른 건 아니지?”
“아니에요! 테오도르 님이 만들어주셨어요! 귀만 살짝 모습을 바꾼 거라고요.”
참고로 불법이다.
으음, 국가에서 허락한 불법이라고 해두자.
기본적으로 모습을 바꾸는 마법이나 아이템은 죄다 불법이었다.
악용의 여지가 너무 크기 때문이다. 그게 합법이었으면 나도 귀찮게 모자나 마스크를 쓰고 다닐 이유는 없었겠지.
엘리사나 에녹의 경우 귀가 지구에서 생활하는 데 큰 지장이 있을 수 있기 때문에 국가에서 예외적으로 허락해주긴 했지만 말이다.
“만지면 살짝 티 나요. 만져보실래요?”
“그래도 돼? 이거 좀 궁금하네.”
마도공학자인 그의 흥미를 이끌었는지 눈빛이 반짝거리고 있었다.
엘리사는 자연스럽게 그의 침대 맡에 앉아 도란도란 이야길 나누기 시작했다.
“뭐? 그럼 나도 그 무대 볼 수 있어?”
“앗, 민망한데!”
“보고 싶어!”
“으음. 그럼 잠깐만 보여줄게요.”
그 모습을 잠시 지켜보다가 나는 눈치껏 빠져주기로 했다.
멀뚱히 옆에 앉아있는 벨제부브에게도 입 모양으로 속삭였다.
나, 와.
잘 전해졌는지 그도 슬그머니 밖으로 걸어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