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2화
“하지만 미련하니까 사랑인 것 아니겠느냐.”
“……그럴지도 모르지.”
“굳이 이성 간의 사랑이 아니더라도 말이다. 가족, 국가 또는 친우를 향한 사랑도 맹목적인 경우가 많으니. 애초에 이성적으로 생각해서 될 영역이 아니겠지.”
그렇게 말하는 테오도르도 제 친우를 위해 톨룩을 배신한 바 있었다.
씁쓸한 표정을 감추지 못한 채로, 그가 뒷말을 이었다.
“어찌 됐든 너 역시 이 상황을 잘 극복한 것 같아 다행이구나. 퇴역 군인들이 PTSD로 일상생활에 적응하지 못하는 경우도 흔한데 말이다.”
음. 얼결에 자경단 일에 휘말렸단 얘긴 하지 않는 게 좋겠다.
내가 한가로이 조각이나 즐기면서 일상을 누리고 있는 줄 아는 모양이니까.
***
덜컹, 우편함 안을 손끝으로 더듬어봤지만 손에 잡히는 게 없었다.
우편이 올 때가 됐는데.
‘마지막 편지 내용이 좀 이상했어서 걱정된단 말이지…….’
단순히 발송이 늦는 것뿐이라면 좋겠지만.
하지만 정말 급한 일이었다면 우편이 아니라 다른 방식으로 연락을 해왔을 거다.
이사벨라가 우편을 보내는 이유는 단순히 그 방식이 익숙하기 때문이었지, 다른 방식을 쓰지 못해서가 아니었다.
혹시 모를 경우를 대비해서 테오도르가 만들어준 연락책도 있었고.
‘그래. 별일 아니겠지.’
내 도움이 필요하다면 그녀가 먼저 말을 꺼냈을 것이다.
빈손으로 돌아가자 연원이가 아침 인사를 건네왔다.
“아침은 간단히 먹으려고 하는데. 계란은 언제나처럼 반숙이죠?”
“응. 부탁할게.”
식탁 앞에 앉자 그가 능숙한 솜씨로 아침을 내왔다.
구운 소시지, 계란, 거기다 아보카도와 소스를 얹은 빵까지. 보기만 해도 군침이 돌았다.
“이제 제 대학교 근처로 올 일은 없나 봐요.”
표연원이 자기 몫을 가지고 건너편에 마주 앉았다.
“뭐, 그렇지. 저번에도 그냥 셀이가 부탁한 일이 있어서 간 거였고.”
“그럼 제가 부탁하면요?”
“너도 준비물 놓고 가면 얘기해.”
근데 얘네 과도 준비물이 있던가?
셀이야 야작 때문에 집에 들어오는 날이 별로 없어서 그런 거였는데.
어쨌든 연원이는 내가 셀이를 동생 챙기듯이 하는 게 다소 불만스러운 것 같았다.
이 집에서 나랑 혜원 언니가 워낙 그를 아꼈으니까 그럴 만도 했다.
‘갑자기 막냇동생이 생겨서 관심을 독차지하면 서러운 법이니까.’
물론 셀이도 귀여운 동생이지만, 아무래도 연원이는 진짜 가족 같은 아이였기 때문에 더 신경 써주자고 속으로 생각했다.
그러자 연원이가 작게 한숨을 내뱉는다.
“왜 그래?”
빵을 한 입 베어 물면서 묻자 그가 아니라며 둘러댔다.
묘하게 할 말이 많은 얼굴을 한 채로 입을 다문다.
“아니에요. 오늘 중요한 회의가 있다고 했죠?”
“응. 근데 어차피 나야 외부인이라 별 영향력은 없어. 그냥 얼굴만 비치고 올 거야.”
빌런대책본부와 자경단의 협력을 위한 세부 사항 논의가 오늘 있을 예정이었다.
대책본부 대표로는 이운우가, 자경단 대표로는 최도윤이 참석하기로 했다.
내가 최초 협상 제안자라 함께 자리하긴 하지만 내겐 아무런 실권도 없었다.
“자경단이랑 헌터 사이가 좋진 않을 텐데. 협상 테이블에 앉게 만든 것만으로도 대단해요.”
“나보단 빌런들이 고생했지.”
“네?”
그 타이밍에 습격해오지 않았으면 분명 소득 없이 돌아왔을 텐데.
어쩌면 이 둘의 극적인 화해는 전부 빌런의 덕이라고 할 수 있겠다.
***
“자치권은 포기할 수 없습니다.”
“그건 곤란합니다. 위급한 순간을 대비해서 총책임자는 한 명만 있는 게…….”
“저희는 협력을 하러 온 거지, 밑으로 들어온 게 아닙니다. 저희는 독자적으로 움직이겠습니다. 정보 공유는 가능하지만 명령을 듣진 않을 겁니다.”
둘의 눈빛이 맹렬하게 서로를 응시한다.
둘 다 차분한 성격이라 고함이 오가진 않았으나 충분히 정중하게 으르렁거리고 있었다.
“본부와 자경단의 방식이 상이하단 걸 아실 텐데요. 그 부분을 조율하지 않으면 허울뿐인 협력이 될 겁니다.”
“그걸 원하시는 거 아니었습니까?”
최도윤이 매섭게 치고 들어왔다.
“어차피 무력은 헌터들이 압도적이니, 우리의 정보력만 취하려고 협력을 제안한 것 아닙니까.”
“어느 정도 사실 아닌가요?”
이운우가 도발하듯이 생긋 웃었다.
“헌터들의 실력을 무시하는 게 아닙니다. 다만 저희는 저희만의 방식이 있다고 말하는 거죠.”
최도윤이 그에 굴하지 않고 꿋꿋하게 자기 주장을 펼쳤다.
“이렇게 약한 우리가 지금까지 빌런들을 상대해올 수 있었던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저희가 자경단 분들의 방식을 폄하하려는 게 아니란 것도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이운우는 비교적 차분하게 뒷말을 이었다.
“하지만 자경단의 방식은 말 그대로 적은 숫자로 최대한 많은 수의 빌런을 상대하는 데 특화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 방식은 지금 우리에겐 불필요하고요.”
이운우가 가볍게 손가락을 튕겼다.
파지직!
허공에서 전기가 파드득 흩날렸다.
“아시다시피. 최상위급 헌터는 그 개인이 일당백을 하거든요. 숫자의 차이는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습니다.”
그는 작게 ‘청사와 홍염의 규모가 그렇게 소규모도 아니고요.’ 하고 덧붙였다.
“그렇겠죠.”
최도윤이 의외로 순순히 긍정을 표했다.
“그 차이를 부정하고 싶은 건 아닙니다. 저희가 약한 것도 사실이니까요.”
그 말에 최도윤과 함께 자경단 측 입장을 대변하기 위해 참석한 다른 이들이 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러니 이대로 저희의 지휘권도 넘겨버리면 뒤에서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당신들이 블랙메일과 싸우는 모습을 지켜보게 될 겁니다. 그런 건 원치 않습니다.”
이 광경을 보고 있자니 꼭 악당이 된 것 같았다.
이운우는 거의 ‘정의롭고 굳센 주인공을 핍박하는 대기업 회장’의 포지션이었다.
“저희의 부족함을 인정하고 있으니 정보는 넘겨드리겠습니다. 하지만 여태까지 일선에서 싸워온 저희를 존중해서, 마지막으로 놈들과 겨룰 수 있는 기회마저 앗아가진 말아 주시죠.”
최도윤의 눈빛이 신념으로 반짝였다.
무궁한 영광으로 빛나는 헌터의 길을 박찬 사내였다.
그 길이 험난하고 힘들지언정 보상은 확실했는데. 모든 걸 마다하고 가시밭길이기만 한 곳으로 뛰어들었다.
그 선택처럼 오늘따라 그가 꺾이지 않는 대나무처럼 꼿꼿했다.
최도윤이 끝까지 강경하게 나오자 이운우는 결국 항복의 의사를 표했다.
“그렇게까지 말씀하시니 제가 붙잡을 수가 없군요.”
사실 본부의 규모는 압도적이라 자경단이 합류를 하건 안 하건 큰 차이는 없었다.
그저 혹시나 이들이 만들어낼 변수가 있을까 봐 통제하고 싶었던 거지.
그러나 내가 느낀 것을 이운우도 느꼈을 것이다.
‘약해. 그것도 꽤 많이. 중상위 헌터급? 물론 게이트에 들어가지 않고 이 정도 성장한 것도 대단하긴 하지만.’
자경단의 대표 격으로 온 이들인데 무력이 형편없다.
이운우나 나 같은 최상위권 헌터가 보기엔 한숨이 절로 새어 나오는 수준이었으니까.
그러니까 이운우도 쉽게 그들을 놓아줄 수 있었던 것이다.
‘어떤 변수를 만들어낸다 하더라도 통제할 수 있다는 계산…….’
머릿속에서 여러 번 저울질해 그렇게 결론을 내린 것이다.
이대로 물러나서 정보라도 안정적으로 공급받는 게 더 이득이라고 말이다.
“그럼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저야말로요.”
둘이 서로 손을 마주 잡았다.
완벽한 동상이몽이었다.
***
회의가 끝나고 가벼운 식사 자리를 권했지만 자경단들은 하나같이 질색을 하며 거절했다.
“이래서 헌터들이란…….”
면전에 대고 차게 비웃음을 선사하는 이도 있었다.
지나치게 적대적인 반응이라 다소 의아하기까지 했다.
한편으로는 그들의 반응이 꽤 익숙했는데, 다름이 아니라 귀족들을 대하는 평민들의 모습과 닮아있었다.
톨룩에서 종종 보던 그림이다. 귀족들은 여러모로 특혜를 누리는 이들이니까, 그에 불만을 품는 평민들 말이다.
그런데 왜 자경단이 그런 태도를 헌터들에게 보인단 말인가.
물론 국가에서도 각성자 범죄 처단이나 자경단의 처우보다는 게이트에 더 촉각을 곤두세우긴 했지만…….
그들 입장에선 우리가 편애를 받는 것처럼 보인 모양이었다.
마지막까지 이운우와 대화를 나누다 나온 최도윤도 식사 권유를 받았다.
“아뇨. 그거라면 됐습니다.”
그 역시 단칼에 거절하더니 이내 다른 한편에 서 있는 나와 눈이 마주쳤다.
약간 주저하는 기색도 잠시.
그가 내 쪽으로 다가와 말을 걸었다.
“회의에 참석해있는 건 봤는데 인사를 따로 못 했네요.”
“그러게요. 저야 따지고 보면 외부인이라서 끼어들 새가 없었거든요.”
“……괜찮으시면, 같이 식사라도 할까 하는데. 시간 괜찮으십니까?”
그가 작게 속삭였다.
기껏 목소리를 낮춘 그에겐 미안하지만 이 안에 있는 헌터 출신들은 전부 이 대화를 엿들었을 거다.
그의 등 뒤, 내 시선의 끝이 닿는 곳에서 이운우가 불퉁한 표정을 짓는 것을 보면 더더욱 명확했다.
“식사라면 이 뒤에 만찬회가 준비되어 있긴 하죠.”
“아뇨. 그것 말고요.”
그가 이운우의 권유를 거절한 것을 봤기 때문에 에둘러서 ‘준비된 만찬회에 가자는 뜻이냐’고 물었다.
그러자 단박에 부정하는 대답이 튀어나왔다.
“개인적인 식사를…… 함께 하고 싶은데요.”
그 말에 대화를 엿듣던 헌터들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웃음을 참는 것 같기도 했고, 놀란 것 같기도 했다. 어쩌면 둘 다일지도 모르겠다.
누군가는 내 쪽과 이운우를 번갈아 바라보기도 했다.
“……따로 말씀드리고 싶은 것도 있고요.”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되는 와중에 최도윤이 슬쩍 용건을 말해왔다.
“여기서 말하긴 곤란한가 보네요.”
“그런 편입니다.”
“좋아요. 그럼 같이 저녁 식사나 하도록 하죠.”
“시간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나까지 동의를 표하자 이젠 대놓고 ‘어떡해, 어떡해’ 하며 속닥거리기까지 했다.
저들이 뭘 상상하는진 알겠는데. 나랑 최도윤은 절대 그런 사이가 아니다.
최도윤도 내게 다른 마음을 품고 식사를 권한 것 같진 않았다.
아마 겉보기엔 그런 것처럼 보이려고 다소 부드러운 어투를 사용하긴 했지만. 날 보는 눈빛은 이전과 크게 달라진 게 없었다.
경계심이 잔뜩 서려 있고 은근한 불쾌함마저 느껴지는 그 눈빛 말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저런 눈으로 볼 리가 없지. 이건 그의 말대로 다른 용건이 있는 게 분명했다.
그러니까 이건 데이트 신청 같은 게 아니란 소리다.
‘뚫어지겠다, 뚫어지겠어!’
사람들의 시선이 온통 나와 최도윤에게 향하고 있었다.
“헌터와 자경단 사이의……. 이거 완전 로미오와 줄리엣 아닌가요?”
“……럴 줄 알았다니까요. 갑자기 협상을 한다길래 누구 입김인가 했는데…….”
“하지만 그러면 ……님은 어떻게…….”
하여간 가십거리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어디에나 있다니까.
이런 종류의 가십이 낯선 것도 아니었다. 신문에서는 심심하면 3세대 헌터들 중 대표 격인 나와 이운우, 아니면 나와 전청운을 씹어대곤 했으니까.
대개는 나랑 이운우가 친구 사이인 걸 이용해서 같이 식사라도 하면, 다음 날 신문 1면에 ‘3세대 대표 커플 탄생? 데이트 장면 포착’ 이렇게 기사를 내는 식이었다.
인지도 높은 헌터는 사실상 연예인과 다를 바 없기 때문에 이런 일이 생기곤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