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4화
탁.
창문을 넘어 안으로 발을 디뎠다. 캄캄한 어둠이 내려앉은 한밤중이었지만 여전히 그의 집무실은 바쁘게 돌아가고 있었다.
“임무는?”
“잘 끝내고 왔어. 네 예상대로 거기서 총기를 거래하고 있더라고.”
챙겨온 수트 케이스를 그의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철컥, 탁.
케이스를 열어보니 이것저것 잔뜩 붙어있는 총기가 보였다. 이게 빌런들의 손에 넘어갔으면 꽤 많은 사상자가 나왔을 거다.
“수고했어. 특별히 보고할 만한 일은?”
“딱히 없어. 일단 죄다 생포해서 구금해놓긴 했는데 아무것도 모르는 말단 같아.”
두어 군데 부러뜨려봤는데도 아무 말 안 한 걸 보면 정말 모르는 것 같았다.
금방이라도 기절할 것처럼 거품을 물었으니까 말이다.
“그럼 내일 임무를 미리…….”
“아, 내일은 안 돼.”
“왜지?”
자경단 회의에 참석하기로 했거든, 하는 말은 삼켜냈다.
일단은 그에게 비밀로 하고 있었으니까.
속이는 게 미안하긴 하지만 일단 이운우도 정부에 속해있는 이상 이 일에 대해 모르는 게 나았다.
나중에라도 관여됐다고 밝혀지면 곤란하니까.
내가 침묵하자 이운우가 쥐고 있던 펜을 내려놓고 날 응시했다.
“너 설마, 그 녀석 만나러 가?”
“누구?”
“최도윤 말이야.”
최도윤 ‘씨’도 아니고 그냥 최도윤이라니. 꽤 감정이 섞인 말이었다.
그는 자경단을 죄다 흡수하지 못한 게 꽤 뼈아픈 모양이었다.
“뭐…… 그렇지.”
“요즘 들어 자주 붙어다니네.”
최도윤과 협력하기로 한 게 비밀이긴 하지만 붙어다니는 모습까지 완전히 감출 순 없었다.
그러기엔 이운우의 영향력이 너무 컸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선택한 대안이 있었는데…….
나나 최도윤이나 무척 마뜩잖아 했지만 국지성이 적극 추진하는 바람에 일단 승낙하긴 했다.
이운우가 의심스럽다는 듯이 눈을 게슴츠레하게 떴다.
“무슨 속셈이야?”
“그런 거 아니야.”
“내가 아는 한서하가 이유 없이 자경단의 단장이랑 놀러 다닐 사람은 아닌데…….”
눈치 빠른 녀석.
그의 의심이 증폭되기 전에 선수를 쳤다.
“썸 타.”
“뭐?”
“왜 그렇게 놀라? 최도윤 씨랑 나랑 썸 탄다고.”
목소리가 어색하게 떨리지 않도록 애써야 했다.
그러나 내 노력이 무색하게도 이운우는 그런 걸 신경 쓸 처지가 아닌 것 같았다.
그는 안경이 흘러내리는 것도 모른 채로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었다.
이운우의 옆 테이블에 앉아 조용히 서류를 처리하던 그의 보좌관이 거하게 헛기침을 해댔다.
“쿱! 흡! 저…… 저 잠시, 큽, 차 좀 내오겠습니다…….”
그의 보좌관이 기침인지 웃음인지 모를 것을 겨우 참아내며 바깥으로 향했다.
이운우는 한동안 그렇게 멍하니 서 있었다.
“……네가?”
“그래. 내가.”
“연애를 한다고?”
“연애까진 아니고. 그냥 서로 호감을 갖고, 어…… 알아가는 단계인 거지.”
다른 거짓말도 아니고 이런 말을 꺼내려니 정말 혀가 뻣뻣하게 움직였다.
나는 거의 말을 토해내는 심정으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말도 안 돼.”
“왜 말이 안 돼? 나도 은퇴했는데, 연애할 수도 있지.”
“다른 사람도 아니고 하필이면 최도윤이랑?”
“최도윤 씨가 뭐 어때서.”
객관적으로 그는 나쁘지 않은 사람이었다.
외모뿐만 아니라 인격적으로도.
“자경단은 돈도 별로 못 벌어.”
“내가 많이 벌어둬서 상관없어.”
“너보다 훨씬 약할 텐데?”
“내가 강하면 됐지.”
차근차근 반박하자 이운우도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결혼하는 것도 아니고 그냥 썸타는 것뿐인걸. 조건이 좀 안 맞아도 상관없잖아.”
속 알맹이는 몰라도 일단 겉으로는 결혼 생각할 나이도 아니었다. 할 생각도 딱히 없고.
“……다른 사람들도, 알고 있나?”
“아닐걸.”
딱히 말을 꺼내본 적은 없었다.
혜원 언니나 연원이나 내가 누굴 만나는지 크게 신경 쓰는 편도 아니었다. 다정 언니는 손이석 대장장이 만나러 산에 올라가 있고.
“왜 그렇게 놀라?”
“놀라지 않게 생겼어? 지금까지 그런 쪽으로 관심도 없더니.”
사실 지금도 그다지 관심은 없었다.
하지만 거짓말이었다고 말할 수도 없는 노릇이라 멋쩍게 뒷목만 긁적였다.
그런 간질간질한 감정에 휘둘리기엔 내가 너무 닳아있었다.
“어쨌든 그렇게 됐어. 주변에서도 많이 수군거리던데. 진짜 몰랐어?”
이미 신문 1면을 장식한 적도 있을 거다.
워낙 흔한 일이라 다들 신경 쓰지도 않았지만.
“그런 이야기 지어내길 좋아하는 사람들이 만들어낸 헛소문인 줄 알았지. 그런 소문은 너랑 나도 많이 떠돌았으니까.”
그는 여전히 이 상황이 믿기지 않는지 넋을 뺀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렇게 충격적인가?
하긴. 나 같아도 갑자기 혜원 언니나 다정 언니가 연애를 시작하면 적잖게 놀랄 것 같았다.
류라임이 연애하면? 상대방이 걱정스러울 것 같은데…….
“……너 거짓말하는 거 아냐?”
이 눈치빠른 녀석.
나는 부러 녀석을 타박했다.
“부러워서 그래? 너도 연애 좀 해라.”
그러자 이운우는 하고자 한다면 얼마든지 할 수 있다고 반박했다.
뭐, 저 녀석에게 치근덕대는 여자가 없는 것도 아니었으니. 아마 사실일 거다.
어디 잡지사에서 발표한 헌터 인기 순위에서 이운우는 남자 헌터들 중 세 손가락 안에 꼽히기도 했었으니까.
“대체 언제부터야? 그 식사 자리?”
“응.”
그때부터 자경단과 손을 잡았으니까.
“대체 어디가 마음에 든 건데?”
“……그냥. 사람이 좋아 보여서.”
진짜 최도윤을 좋아하는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그렇게 두루뭉술하게 둘러댔다.
“뭐…… 아무튼 축하해.”
영혼 없는 말투였다.
“아직 사귀는 거 아니라니까. 그래도 고맙다.”
“내일 임무는 다른 사람한테 맡겨둘게.”
그게 본래 목적이었다. 나는 흔쾌히 고갤 끄덕였다.
***
자경단 회의에 참석하기도 전에 국지성이 내게 걱정 어린 충고를 했다.
“그…… 거기 사람들이 나쁜 건 아닌데. 좀 다들 괴짜기도 하고, 배배 꼬인 사람도 많아서. 그래도 나쁜 사람들은 아니야.”
그렇게 말하면서도 확신 없는 얼굴을 하고 있는 게 꽤 웃겼다.
최도윤과 달리 국지성은 두어 번 대활 나눈 다음부터 날 편하게 대했다.
헌터가 어쩌고 하며 날을 세우던 것이 무색할 정도였다.
“헌터라고 하면 그냥 덮어놓고 싫어하는 사람들도 많아서 그래.”
“상관없어. 환영받으려고 가는 것도 아니고.”
그들과 나는 철저히 비즈니스적인 관계 아니던가.
공과 사를 구분하지 못할 정도로 머저리들은 아니겠지.
……라고 생각했는데.
“흐음. 귀한 헌터님들은 뭐 먹는 것도 다른가 했는데, 그렇지도 않은가 봐?”
“와, 나 그 총 구경해도 돼~? 완전 멋있어! 이게 그 SSS급 무기야~?”
“오……. 그 영웅님……? TV 보는 것 같네…….”
저마다 한마디씩 건네다 보니 잔뜩 소란스러워졌다.
말을 꺼내지 않는 이들도 어쩐지 경계심과 호기심이 섞인 눈빛으로 날 바라보고 있었다.
‘적대……까진 아니지만. 완전히 동물원 속 원숭이 보듯 하네.’
그 소란을 잠재운 건 뒤늦게 등장한 한 여인이었다.
“다들 조용히 해. 손님께 실례잖아.”
“하정 누나!”
“하정 씨.”
그녀가 나타나 주의를 주자 삽시간에 주변이 조용해졌다.
그녀는 내 앞에 서서 악수를 건넸다.
“만나서 반가워요, 한서하 씨. 소하정이라고 해요.”
“만나서 반갑습니다.”
“도윤이한테 얘기는 많이 들었어요. 실력이 그렇게 뛰어나다고요.”
굳이 겸양의 말을 내뱉진 않았다.
여기 있는 이들이 한 번에 전부 덤벼도 날 이기진 못할 테니까.
“이렇게 한서하 씨가 함께해주시니 저희에겐 큰 힘이 되네요.”
“아뇨. 저야말로요.”
소하정은 차분한 분위기에 생글생글 웃는 낯이 인상적인 사람이었다.
그런데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 짐작하기 어렵다는 점에서 함부로 대하기 어려운 분위기가 흘렀다.
묘하게 남을 압도하는 사람이다.
“그럼 우선 서로 소개부터 할까요? 새로운 분이 오셨으니까요.”
“엥, 소개? 귀찮은데~.”
“그래도 해야죠. 앞으로 같이 움직이게 될 텐데, 서로에 대해서 잘 모르면 여러모로 불편하지 않겠어요?”
“알겠어…….”
자경단의 대표가 최도윤이라고 하더니. 이렇게 안에서 보니 또 모양새가 다르다.
이거 완전히 소하정이 다른 이들을 쥐고 흔드는 실정이었다.
남들보다 한참 앳된 얼굴의 남자아이가 먼저 소개를 시작했다.
“난 민시우. 13살.”
“13살……?”
“어리다고 얕보지 마. 고유 스킬은 ‘반사’거든.”
생각보다 한참 어리기에 나도 모르게 반문했다.
저 어린 나이에 여기 끼어 있는 것만으로도 그의 능력이 출중하다는 증거겠지만.
“그 총, 나한테 한번 쏴봐.”
“……정말로요?”
“응. 궁금하네. 내가 과연 저걸 반사해낼 수 있을지…….”
민시우의 말에 노이트를 손에 쥐었지만 정말 쏴도 될지 의문이 들었다.
“예시를 보여줄게.”
민시우가 손가락을 튕기자 옆에 있던 이가 대뜸 단검을 휘둘렀다.
촤악!
단검이 그의 손등을 노리고 휘둘러졌다. 그리고 분명히, 베어냈다!
카앙!
그러나 손등에 닿기 직전 단검은 강한 방어막에 부딪친 것처럼 거친 소리를 뿜어냈다.
휙, 탁!
튕겨져 나간 단검이 바닥을 굴렀다.
말 그대로 ‘반사’였다.
“이런 거야~. 어때, 괜찮지? 내가 나이만 조금 더 있었으면 헌터가 됐을지도 모르는데.”
아무리 그래도 13살은 어리다. 공식적인 헌터로 활동할 순 없는 나이였다.
그래서 자경단으로 활동하고 있는 건가?
가볍게 헌터를 입에 올리는 걸 보면 헌터에게 딱히 유감이 있는 것 같지도 않았다.
“전부터 궁금했어. 내 반사에도 대충 ‘한계’가 있는 것 같은데…… 주변에서 테스트해봐도 그 끝을 알기가 어려웠거든~.”
그렇다고 총을 쏴달라 한다니. 이해는 잘 되지 않는 사고방식이었다.
“어때~?”
“안돼요, 시우 군. 여기서 소란을 일으켰다가 계획에 차질이 생기면 큰일이잖아요?”
내가 거절의 말을 입에 담기 전에 소하정이 먼저 나섰다.
“아쉬운데…….”
“안 돼요.”
단칼에 거절한다.
그 뒤로 간단한 자기소개가 이어졌다.
“난 유다윤. 잘 부탁해. 헌터 님.”
은근한 비꼼이 느껴지는 소개부터 시작해서.
“악수……해도 돼……? 난 그냥…… 가을이라고 불러줘…….”
끊어질 듯 말 듯 간신히 이어지는 소개까지.
몇몇 사람들을 제외하면 전부 반말이었다. 기본적으로 헌터들이 상호 존대를 사용하던 것과 크게 다른 분위기였다.
훨씬 거칠었고, 정돈되지 않은 느낌이 강했다.
“한서하라고 합니다. 헌터는 이미 은퇴했고, 지금은 임시로 빌런대책본부와 함께 일하고 있습니다.”
누군가에게 날 소개하는 것도 오랜만이었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대부분 날 알고 있었으니까.
“자, 그럼 회의를 시작하죠.”
드디어 그 서문이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