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08 움트는 새싹 =========================================================================
그리고 그 남자의 정체를 짐작하자 그녀는 겁에질렸다. 그녀는 왕자의 팔을 물어버린 것이다. 너무나 어마어마한 실수를 저질러 그녀의 두 눈에는 눈물이 고였다. 왕자는 얼굴을 찌푸리고 있었다. 힘껏 깨물었으니 팔이 아플법도 했다. 그러나 그 바다를 담은듯한 새파란 두 눈은 그녀를 차가운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지금보니 그의 머리색은 검은색이 아니라 짙은 푸른 색이었다.
“죄, 죄송합니다.”
그녀가 저지른 짓에 놀라 울먹였다. 분명 자신을 데려간 후작가에 폐가 될 터였다. 그녀의 눈에 차오른 눈물이 금세 차올랐다. 그가 뭐라고 말하려는 순간 그녀가 입을 열었다.
“저, 그러니까 왕자님, 제가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용서해주세요.”
그녀가 무릎을 꿇었다. 무릎을 꿇지 말아야 한다고 후작이 몇 번이나 일렀지만 사실 무릎을 꿇는게 더 자연스럽고 익숙한 그녀였다.
“왕자님?”
그가 그녀가 한 말을 되뇌었다. 그는 얼굴을 찡그렸다. 그것에 더더욱 겁에 질린 그녀가 울먹이는 얼굴로 그를 바라보자 그가 말했다.
“제가 왕자님이라 생각하십니까.”
어이가 없다는 말투였다. 분명 고저가 없는 말투였으나 기가막히다는 감정은 읽을 수 있었다.
그는 손을 뻗었다. 그녀가 머뭇거렸다. 내민 쪽 손이 그녀가 사정없이 물어버린 곳이라 그녀는 잠시 그가 때릴 것이라 생각하여 몸을 움찔 했다. 바다같은 짙은 푸르름이 서린 눈동자가 자신앞에 무릎을 꿇은 소녀를 눈에 담았다. 그녀가 머뭇거리며 손을 잡았다. 손의 온기가 따스했다. 얼떨결이지만 그것은 그녀가 처음으로 누군가가 건넨 호의를 계산없이 받아들인 것이었다. 그는 다른쪽 팔을 들어 그녀가 쓰러지지 않게 어깨를 잡은 후 그녀를 보며 말했다.
“그만 가십시오, 아버님께서 찾으십니다.”
마치 그녀를 아는 듯한 태도였다. 그리고 아버님이라니? 그녀가 동그랗게 눈을 뜨며 경계의 빛을 띄자 남자가 말했다.
“신의 대리인을 뵙습니다. 에셀먼드 에르멘가르트입니다.”
“……네?”
“당신의 첫째 오라비 되는 사람입니다.”
마치 안심하라고 일러주는 것 같았다. 그녀는 자신이 얼굴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첫째 도련님에게 왕자님이라고 부르다니, 이보다 더 창피할 데가 어디있을까.
“참고로 샤를루스 왕자전하께서는 올해 다섯 살이 되십니다.”
왕자는 항상 큰 남자일줄 알았다. 겨우 다섯 살의 꼬마 아이가 왕자라니. 그녀의 얼굴을 보며 에셀먼드가 말했다.
“다음부턴 발언에 주의하셔야 할것입니다.”
“네?”
“성녀님이 다른 자 앞에서 이런 말을 했었다가는 우리 가문은 반역죄로 멸문당했을 겁니다.”
서늘한 목소리에 담긴 것은 경고였다. 그 말에 그녀의 가슴이 선뜩하게 내려 앉았다. 그와 반대로 손의 온기는 따스했다. 그녀는 첫째 오라비의 손에 이끌려 다시 왕성으로 돌아갔다. 비올렛은 물끄러미 손을 잡은 오라비라는 사람을 보았다. 그녀에게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손을 내밀었다. 비록 이틀 정도 묵었지만 하녀들이 수군거리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심지어 그 집의 막내 마저 천민출신에게 무릎을 꿇을 수 없다고 말하지 않았나. 둘째 오라비역시 친절하긴 했지만 그녀에게 다가오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 사람은 꽃의 거리 출신의 천민이라는 것을 모르는 걸까. 어떻게 이렇게 스스럼없이 손을 내밀 수 있는 것일까. 그의 등은 곧고 넓었다. 그저 손을 같이 잡고 걷는 것 만으로도 어딘가가 안정된 느낌이 들었다.
“어디가 편찮으세요?”
조심스럽게 물어온 핀에게 비올렛은 고개를 저었다. 몸에 힘이 없었다. 사실 이렇게 몸이 아픈 것 조차도 큰일 날 일이었으나, 그녀는 참는데에 익숙한 사람이었다.
“어제 후작님이 많이 혼내시던가요?”
“혼이요? 혼을 내셨어요?”
그녀가 되물었다. 얼굴색이 변한 후작이 결과적으로는 성녀를 찾았을 때, 더군다나 첫째 아들의 손을 꼭 잡고 있을 때의 표정이란. 후작은 결과적으로 그녀에게 주의를 줄 생각을 했으나 신관을 피해 도망갔다는 소리를 듣자 다행이라고, 잘하셨다고 몇 번 말하고 그녀를 마차에 태워 보냈다. 저녁식사를 먹고 그녀는 침실에 계속 누워있었다. 그러니까 혼을 내지는 않았다는 소리였다.
“오늘부터 가정교사가 방문하시기로 했어요.”
“가정교사요?”
“네, 이스킨데르 자작 부인이십니다.”
“자작 부인이요?”
아직도 그녀에게는 귀족이란 까마득한 존재였다. 그 고상해보이는 예법을 몸에 배운다는 것 자체가 그녀에겐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럼에도, 그녀는 그것을 해야한다고 몸소 깨우치고 있었다.
“자, 자, 아침 먹어야죠? 자작부인은 오후에 오신다고 하셨어요.”
그녀의 말에 그녀의 얼굴이 침울해졌다. 어제도 에이든에게 놀림을 당했기 때문이었다. 식당에 가자 후작이 있었고 후작의 오른편에는 어제 보았던 첫째 도련님이 있었다. 그 건너 편에는 둘째가 있었고 맨 끄트머리에 앉은 에이든은 그녀를 업신여기는 얼굴로 보고 있었다.
비올렛은 주춤거리며 자리에 앉았다. 그 자리는 큰 오라버니의 바로 옆자리였다. 어제의 짙푸른 청색의 눈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뭐라고 하지 않은 채 시선을 돌렸다. 어느새 긴장으로 온 몸이 딱딱해졌다. 전채요리는 크림을 바른 빵이었고 그들은 조용히 그것을 먹고 있었다. 달콤한 빵은 그래도 제법 비올렛의 입맛에 맞아 비올렛은 지금 상황도 잊어버린채 손으로 집어 그것을 먹고 있었다. 이렇게 맛있는 빵은 처음이었다.
“으, 너무 달아.”
에이든이 불평했다. 다니엘도 마찬가지 인듯했다. 그러나 그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에이든, 반찬투정하면 못써.”
“하지만 갑자기 이런 빵이라니, 느글거려 못먹겠다.”
그가 짜증을 냈다. 후작이 눈치를 줬으나 그는 개의치 않는 듯 했다. 에이든이 고개를 돌리다 비올렛이 빵을 손을 들어 베어먹는걸 봤을 때 그는 소리쳤다.
“야, 멍청아! 나이프를 써야지! 아 진짜 밥도 못먹겠네.”
“…….”
그녀가 깜짝 놀라 에이든을 바라보았다.
“너 얼굴에 크림 범벅인건 아냐? 더러워서 못봐주겠다.”
핀이 재빨리 다가와 그녀의 얼굴에 있는 크림을 닦아주었다. 갑자기 모두의 시선이 날아 꽂혔다. 그녀는 움직일 수가 없었다.
“성녀님께선 아직 배우시지 못해서 그런거야. 배우시면 더 나아지실거라고.”
“언제까지 배울건데? 밥먹을 때마다 저런 꼴을 봐야해?”
에이든의 말에 그녀가 입을 다물고 있었다. 그녀의 눈이 떨렸다. 갑자기 속에서 구역질이 밀려오는 듯했다. 다소 급하게 의자에서 내려오자 촛대가 그녀쪽으로 쓰러져 그녀의 앞에 있는 빈 접시를 내려쳤다. 쨍그랑, 소리가 촛대가 굴러떨어졌다. 유리 파편이 그녀의 옷에 튀었다.. 조용한 식당에 그 소리는 크게 울려퍼졌다.
“아, 아 죄송합니다.”
그녀는 구토기를 참고 손으로 들어서 얼른 그 파편을 주우려고 했다. 그러다가 날카로운 파편에 찔렸다. 하지만 그녀는 개의치 않고 그것을 주웠다. 그릇을 얼른 줍지 않으면…. 크게 혼이 날거야. 그녀의 머릿속이 두려움으로 윙윙 울렸다.
“서, 성녀님! 그만.”
그때 누군가가 거칠게 그녀의 팔목을 잡아챘다. 첫째 도련님이었다. 에셀먼드가 짙푸른 눈으로 다소 엄한 눈으로 그녀를 질책하고 있었다.
“그만하라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
그녀가 눈을 크게 뜨며 옆에 서 있던 그를 바라보자 그가 말했다.
“손이 다치셨습니다.”
“아…….”
하얀 테이블보에 피가 뚝뚝 떨어져 있었다. 그녀의 손에서 흐른 피였다.
“어머 성녀님 손을!”
핀이 소리쳤다 손에 알싸한 고통이 느껴지며 그녀가 옆에 있는 새하얀 냅킨으로 팔을 둘러주었다. 그녀는 핀이 손을 댄 것만으로도 지나치게 화들짝 놀라 몸을 움츠렸다.
“어서 방으로 가요.”
핀이 그녀를 재촉하자 그녀역시 얼른 그녀를 따라갔다.
“성녀님, 거기서 그릇을 깨면 어떻게 해요.”
그녀가 작게 힐난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핀이 짜증을 내는 것 같았다.
“죄, 죄송해요.”
그녀가 모기만한 목소리로 대답하자 핀이 한숨을 쉬었다. 그 한숨이 비올렛의 마음을 무겁게 짓눌렀다. 속이 더욱 더 메스꺼워졌다. 방에 들어가자 마자 그녀가 했던 일은 욕실에 뛰어들어 토하는 일이었다. 어제 저녁에도 있던 일이라 핀은 놀라지 않고 그녀의 등을 툭툭 두드려주었다. 그날 먹었던 것을 게워내고서도 아직도 몸이 꿈틀꿈틀 경련하는 게 느껴졌다. 비올렛의 몸이 바르르 떨렸다.
“성녀님.”
핀이 안타깝게 그녀를 불렀다. 눈물샘이 자극되어서 그런걸까. 그녀가 눈물을 흘리며 훌쩍이기 시작했다.
“밥먹기 싫어요 핀.”
“그래도 여긴 밥은 꼭 같이 먹어야해요.”
“항상 실수할까봐 무서운걸요.”
“좋아 질 거예요.”
그녀의 입에 묻은 토사물을 닦아주며 핀이 등을 토닥였다. 핀이 그녀를 품에 안아주자 그녀는 울음을 터트리고 있었다. 어쩌면 이렇게 아둔할까. 그런 실수를 하고 말이야. 손목을 잡았던 첫째 도련님, 그러니까 첫째 오라버니의 눈빛이 잊혀지지 않는다. 여기 사람들은 매질 대신에 경멸의 눈초리와 조롱으로 그녀를 몰아간다.
“후, 후작님?”
핀이 깜짝놀라 말하자 그녀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핀의 어깨 너머로 서 있는 후작이 보였다. 그녀는 당황했다. 후작은 그녀의 옆에 있는 채 치우지 않은 토사물과 울고있는 그녀를 번갈아 보았다. 그리고는 이야기 하는 것이었다.
“성녀님께서 정 불편하시면 아무래도 식사는 혼자 하는게 나을 듯 합니다.”
“…….”
차라리 혼자 하는게 나았다. 하지만 그녀를 더 이상 봐주기 함들다는 말인 것 같아 그녀는 더욱 서글퍼졌다. 그녀가 꼬옥 옷을 붙들고 있자 후작이 뭐라 말하지 못하는 착잡한 눈으로 그녀를 훑어보고 나가버렸다.
“그나마 다행이네요, 아가씨.”
핀의 말에 고개를 끄덕여야 하는건가 알 수 없었다.
============================ 작품 후기 ============================
12시에 뵙시다! 참고로 에셀먼드는 원래는 에드문드라고 이름을 지으려고 했어요. 여기 이름들은 전부 다 크루세이더 킹즈라는 게임에서 따온거랍니다. 지명도 이름도 전부다요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