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19 움트는 새싹 =========================================================================
멍청하고 천하다. 후작은 왜 생일 파티를 열었을까. 사실 이 드레스를 입는것도 별로 달갑지 않은 일이었고, 라이셀 백작 부인에게도 본격적으로 그녀가 배운 것을 보여주는 것도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그냥 이대로 있을 수도 있었을 텐데 말이다. 계속 정처없이 걷던 그녀는 드디어 사람이 없는 곳에 왔다는 것을 깨닫고 무릎에 얼굴을 파묻었다. 이렇게 아름다운 드레스가 있으면 뭐하는가. 천민이었을 때는 그래도 그들끼리 서로 웃을 수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앞에서는 웃으며 뒤에서는 멍청하다고 하지는 않았다. 생일이란 조금 행복한 날이었던 것이다. 겨울의 싸늘한 바람이 체온을 앗아갔다.
“이럴수가. 여기 있었구나.”
다정한 미성이 아득하게 들렸다.
“일어나봐.”
남자인지 여자인지 모를 목소리가 귀에 울렸다. 그러나 그 목소리는 흐느낌소리에 파묻혔다. 아무것도 말하고 싶지 않았다. 듣고싶지 않았다.
“어서 일어나보래두? 시간이 없는데 이럴거니?”
어깨를 흔드는 느낌에 그녀가 몸을 일으켰다. 어느샌가 해가 지고 초저녁이 되었다. 그럼에도 그녀는 지금이 낮과 같이 느껴졌다. 새하얀 아이가 서 있었다. 넋을 잃을 정도로 아름다운 소년이었다. 마치 동화속 설산에 나오는 눈의 요정과도 같은 얼굴을 한 아이는 생긋 미소짓고 있었다. 단정한 단발인 머리색은 그녀와 같은 은색이었다. 부드럽게 미소짓는 그 눈 속에는 아름다운 황금색 눈이 있었는데, 그녀를 따스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하늘에서 내려온 신의 사자일까? 그녀는 넋을 잃고 아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언니는 누구세요?”
그녀가 훌쩍이며 물었다. 아이는 미소를 지었다.
“미안한데, 난 남자야.”
아이, 아니 소년은 그녀의 말을 일축 시켰다. 그녀가 당황해 하며 미안하다고 말하자 그는 빙그레 웃었다. 그 미소는 다니엘과는 다른 달빛과 같이 은은했다. 그가 웃자 그의 얼굴에도 빛이 났다. 미소라는게 빛이 있다면 바로 저 사람의 미소이리라, 진짜 성녀가 있다면 저런 모습일까. 그녀는 멍하게 생각했다.
“왜 울고 있니?”
그 다정한 말에 그녀는 할 말을 찾지 못했다. 처음 보는 사람에게 그녀가 이렇게 울고 있는 이유를 알려주고 싶지는 않았다. 어차피 저 사람도 이렇게 천사같이 웃는데 뒤에서는 멍청하다고 할지도 모르는 일이 아닌가. 천민이기 때문에 받는 수모였다. 저 사람도 그녀가 천민이라는 것을 알면 저 얼굴에 서린 미소를 거두고 그 정도에 슬퍼서 우냐고, 그것은 당연한 일이니 울 필요도 없는 일이라며 그녀를 비웃을지도 몰랐다.
“겨우 찾아낸 네가 울고있으니 나도 슬퍼. 이유도 말해주지 않으니 더 슬퍼.”
그러나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그렇게 말하는 소년은 정말로 슬픈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 아름다운 얼굴이 슬픔으로 일그러지자 그녀는 정말 자신이 죽을 죄라도 지은 것처럼 느껴졌다. 그녀는 망설였다. 그러나 저 사람은 정말로 따스하게 웃고 있어서 믿어도 될 것 같았다. 다니엘과는 다른 어딘지 모를 힘이 느껴지는 것 같기도 했다. 어떻게 할까. 그녀는 고민하다 더듬더듬 거리며 이야기를 꺼냈다.
“사람들이, 다 저보고 천민이라고, 다 절 비웃고 끅! 다 절 미워해요.”
비올렛이 말을하다 멈추고 흐느끼자 그는 안타깝다는 표정으로 저런, 이라고 말하며 그녀를 끌어안았다. 따스한 품에 그녀의 울음이 진정되었다.
“여기가 힘드니?”
“네, 힘들어요.”
그녀의 말에 소년이 그녀의 등을 토닥였다.
“세상은 언제나 행복으로 가득 차 있다던데, 너는 불행하구나.”
“아니요, 세상은 불행으로 가득 차 있는 걸요.”
리나와 로즈도 불행했던걸요. 그녀는 그렇게 덧붙이고 싶었지만 저 소년은 그녀들을 모르므로 그녀는 입을 다물었다. 소년은 그녀의 대답에 알 수 없다는 것을 들은 듯 눈을 이리저리 굴리고 있었는데, 아무래도 그녀의 말 뜻을 파악하려고 하는 듯 했다. 그러는 모습이 더 없이 순수해 보였다.
비올렛은 그제야 소년을 올려다 볼 수 있었다. 처음에 보기에는 여자와 같았지만. 자세히 보니 목에는 목젖이 있었다. 부드러운 선을 가진 이목구비의 소년. 아름다운 사람이었으나 그녀는 그가 어딘가 익숙한 느낌이 들었다. 그는 그녀의 시선을 눈치 챈 듯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너도 내가 보고싶었니?”
천만에, 그녀는 그를 몰랐다. 그래서 그저 고개를 갸웃 할 뿐이었다.
“나는 네가 너무 보고싶었어.”
그 말에 서린 진득한 감정이 그저 부담스러웠다.
“널 찾아 여기까지 왔어, 비올렛.”
“…….”
“네가 보고 싶었어.”
“…….”
“나는 널 미워하지 않아! 네가 천민이든 아니든 상관없어.”
달빛을 등진 소년의 얼굴은 진지했다. 그는 어딘지 모르게 필사적으로 보였는데, 그것이 비올렛의 마음을 흔들어 놓았다.
“그러니 날 따라가지 않을래?”
그가 손을 내밀었다. 달빛에 비친 손은 새하얳다. 너무도 다정하고 따스하다. 그리고 자애로운 미소까지 가지고 있다. 이렇게나 다정한 사람인데, 따라가도 되지 않을까. 여긴 너무 싫었다. 여긴 너무 무서웠다. 그녀를 한 순간에 삼킬 것 같았다.
좋은 옷, 맛있는 밥을 먹을 수는 있었지만 괴로웠다. 그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그녀는 그가 새하얀 신관복을 입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정결한 신관복이 어울리지 않았던 신관들이 아닌, 바로 그가 입었기에 그녀는 그것이 신관복이라는 것조차 눈치채지 못한 것이었다. 신관은 싫어, 그녀가 마음속으로 소리쳤다. 하지만 그는 이렇게 그녀가 천민이라도 상관없다고 말하고 있다. 어쩌면 이것이 마지막 기회는 아닐까? 그런 생각이들 찰나였다.
“앗!”
그때 은빛의 검신이 그녀를 향했다. 그녀는 깜짝 놀라 비명을 질렀다. 너무나 오랜 만에 본 그 서늘한 빛의 날카로운 금속은 그녀가 가장 무서워 하는 것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은빛의 검날은 그녀를 겨냥한 것이 아니라 소년의 목 옆에 겨누어진 것이었지만 정말로 오랜 만에 본 그것이 주는 공포감이 어찌나 거대했던지 다리가 풀려 주저 앉을 뻔했다. 달빛에 푸르게 빛나는 검신에 그녀가 겁에 질려 있을 때 그 검신만큼이나 서늘한 목소리가 들렸다.
“누구냐.”
그 목소리는 그녀도 익히 잘 알고 있었다. 첫째 도련님, 에셀먼드였다.
크게 놀란 그녀와는 다르게 목에 검이 겨누어진 소년은 여유로운 얼굴이었다. 그러다가 그 소년의 시선이 덜덜 떨고 있는 비올렛에게 향한 순간 소년의 얼굴이 싸늘하게 변했다. 그는 무척이나 분노했다.
“신관복을 보시고도 모르시겠습니까? 지나가던 신관입니다만?”
그 말에 에셀먼드가 말했다.
“오늘 신관을 초대한 기억은 없다.”
그녀는 처음으로 벼려진 살기를 느꼈다. 리나와 로즈가 죽었을 때도 느껴보지 못한 살기였다. 그녀는 눈물을 흘리고 있었지만 울음은 커녕 숨쉬기도 버거워졌다. 그만큼 그것은 처음으로 느껴보는 거대한 기의 흐름이었다.
“하지만 티게르난 공작께서는 이곳에 오셨을 거라고 생각합니다만, 에르멘가르트 영식(令息).”
그 말에도 검은 거둬지지 않았다.
“후작께서는 공작각하를 초대하신 적이 없다.”
“그런가요? 그렇지만 어떡하죠? 이곳에는 공작이 와 계신데.”
그 말에 그의 얼굴이 미미하게 찌푸려졌다. 여전히 검은 겨누어진 상황이었고 그는 위험해 보였다. 티게르난 공작이라니, 그 사람은 누구일까. 그녀는 티게르난 공작이라는 이름을 몇번 오다 가다 들은 적이 있는 것 같았다.
“날 건드리고 절대 무사하게 넘어갈 수 없을것같은데, 에멘가르트 경. 분명 오다가 공작님의 마차를 보지 않았나?”
안심하라고 그녀에게 짓는 미소는 무척이나 따스했지만 에셀먼드를 대하는 소년의 목소리는 서늘했다. 게다가 그가 에셀먼드에게 하대를 하자 갑자기 느껴지는 생경한 느낌에 그녀는 온 몸이 곤두섰다. 이건 무슨 느낌이지? 뭐라 정의할 수 없는 느낌을 더 느껴보려는 순간 에셀먼드가 이윽고 검을 내렸다.
“성녀님은 에멘가르트 가문의 사람입니다.”
“글쎄요, 경 빼고는 모두가 다 그렇게 생각하진 않은 것 같은데요.”
다시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바라보는 신관 소년은 아까의 서늘한 기백은 눈을 씻고 봐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방해꾼이 나타나버렸네, 비올렛.”
그는 그렇게 말하며, 그녀의 손을 잡아 그녀를 일으켜 주었다.
“다음 번에는 내 손을 잡아주기를.”
그렇게 말하며 그는 허리를 숙여 그녀의 손에 입을 맞추었다. 이제와서 보니 소년의 키는 에셀먼드와 같았으면 같았지 절대 작지 않았다. 그 아름다운 소년은 홀릴듯한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강렬한 시선으로 바라보더니 사라져버렸다. 밤은 서늘했다. 분명 외투를 입었지만 몸은 달달 떨리고 있었다.
============================ 작품 후기 ============================
드디어 신캐 등장이네요. 이 아이의 성격을 보자면 아 일러스트 공개하고싶어!! ㅠㅠ ㅠ아 진짜 스포라서 공개 못하게써여! 재밌게 보셨다면 추천 부탁드립니다 ^0^
오늘은 동생 돌잔치를 다녀왔더니 너무 피곤하네요.. 일직 자야겠어요 꼬르륵...
아 지니어스 봤어요..흡.. 저는 그 둘의 조합을 좀더 보고싶었는데 정말 최강 조합아닌가여.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그래도 진짜 이번 시즌은 꿀잼이네여 더 지녀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