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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원에 핀 제비꽃-49화 (49/208)

00049  움트는 새싹  =========================================================================

“성녀님께 편지가 왔습니다.”

눈이 한없이 내리는 겨울의 어느 날이었다. 비올렛은 눈을 깜빡이며 자신에게 내밀어진 편지를 받았다. 붉은 색을 띄는 편지 봉투는 금가루가 뿌려져 아름다운 빛을 내고 있었는데, 비올렛은 사실 이런 고급스러운 봉투는 처음 보았다. 봉투의 입을 보니 섬세한 장미문양이 찍힌 금색의 밀랍이 보였다. 발신인은 체자레였다.

“어? 왜?”

어차피 내일이면 볼 사람이다. 그런데 왜 굳이 왜 초대장을 편지로 보낸 것일까. 후작의 눈치를 보던 비올렛이 편지를 열었다. 비올렛의 표정이 변했다. 손가락이 잘게 떨렸다.

“무슨 일이십니까?”

“교황 성하께서 공작령에 방문하신다고, 절 보고싶어하신다고 말씀하셨어요.”

고급스러운 글씨에는 정말로 ‘교황’이라는 단어가 쓰여져 있었다. 그녀는 후작에게 그것을 보여주었다. 후작역시 놀란 표정이었다. 교황이 성녀를 보고 싶어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인지도 몰랐다. 하지만 공작 령에서 보자는 것은 도대체 무슨 일이란 말일까. 비올렛의 심장이 두근두근 뛰었다.

*

“아 걱정 마십시오, 정말 단순한 초대랍니다. 그리고 교황 성하께서 꼭 보시고 싶다고 하셔서 보냈답니다. 정말 어지간히 성녀님을 뵙고 싶으셨나 봅니다.”

무거웠던 편지와는 다르게, 비올렛이 체자레에게 물어보니 체자레가 가볍게 답했다. 정말 그의 어조처럼 가벼운 일이면 좋으련만, 왕을 알현하는 것 만큼이나 교황을 알현하는 것은 엄청난 일이었다. 게다가 교황은 공식적으로 어떤 곳에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는데, 그녀를 만나러 교황령에서 나와 수도와 가까운 공작의 영지로 향하다니. 결코 어지간히 보고싶었나 보다의 팔불출을 말하는 듯한 말투로 설명되는 일이 아니었다.

“긴장되십니까?”

체자레가 물었다. 사실 마음을 숨길 것도 없다. 아주 당연한 일이다.

“네.”

망설이지 않고 나온 솔직한 대답에 체자레가 웃었다.

“만나 보신다면 좋으신 분이라는 걸 알게 될 겁니다.”

“‘좋으신 분’이요?”

비올렛의 물음에 체자레가 미소를 지었다.

“저번에도 말씀 드리지 않았습니까. 그분처럼 만인의 행복을 강하게 원하시는 분이 없습니다. 그분처럼 성결하신 분도 없으시죠.”

체자레는 언제나 교황에 대해 좋은 말만 한다. 그러나 불안한 것은 똑같았다. 만약 갔다가 그대로 교황령에서 끌려가 나오지 못하면 어떻게 하지? 체자레를 믿는다. 하지만 교황을 믿는것은 아니었다. 만약에 교황이 명령이라도 내린다면 어떻게 된단 말인가. 교황의 수중에 떨어지는게 아닌가.

“아, 가장 걱정하실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겁니다. 그 분은 성녀님을 존중하여 성녀님이 원치 않는 행동은 절대 안하실 분이십니다.”

마치 저처럼. 아니 저보다 더. 체자레가 덧붙였다. 체자레가 안심을 시켜주니 사실 정말 안심은 되긴 했다. 한번 가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 같기도했다. 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두려웠다.

“아, 정 그러신다면 후작과 같이 오시는 게 어떠십니까.”

“네?”

“아, 그러나 입장상 후작께서 오기는 어려우실 것 같군요. 에르멘가르트 경이나 아니면 기사들은 어떻습니까. 저는 그것에 대해 불쾌할 일은 없습니다. 충분히 입장을 이해하니까요.”

체자레가 시원스럽게 말했다. 언제나 체자레는 그들이 가장 염려한 부분을 말하며 안심을 시켰다. 그녀의 교육을 맡았을 때도 그는 언제나 가장 민감한 부분을 양보하며 정중하게 허락을 구했다. 그것은 비올렛에게 있어 체자레가 호감으로 다가오게 했다.

*

결국 체자레는 후작을 만나 그를 설득시켰다. 사실 후작으로서는 거절할 명분이 없었다. 우선 체자레는 그녀의 스승이었고, 아프다고 핑계를 대며 빠져나가기엔 그는 이틀에 한번씩 와서 그녀에게 수업을 가르쳤으니 너무 노골적으로 표가 났다. 덕분에 그는 공작의 말대로 가장 믿음직한 에셀먼드를 비롯한 기사들을 선발했다. 국왕은 이 보고에 많은 생각을 하는 듯 했다.

후작도, 국왕도 단 한번도 교황을 본적이 없었다. 그들은 이것이 기회라고 생각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적보다는 적어도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 파악하는 것이 그 무엇보다 중요했다. 특히나 국왕이 거는 기대는 지대해서 에셀먼드는 그 일 때문에 국왕을 직접 배알하기까지 했다.

교황을 만나야 하는 비올렛은 고양이를 데리고 데굴데굴 구르고 있었다. 고양이는 그녀의 긴 머리카락을 가지고 장난치고 있었다. 내일이면 공작령으로 떠난다. 사실 이게 얼마나 엄청난 일인지는 잘 알고 있다. 공작은 비올렛을 배려해서 앤까지 데려와도 된다고 말해주었고, 그녀는 그 호의를 고맙게 받아들였다. 덕분에 졸지에 자신도 공작령에 가게 된 앤은 불안한 모습을 보였다.

“웬만한 국왕파 귀족들은 가보지도 못한 공작령을 제가 가보다니.”

그녀가 말했다.

“그리고 국왕폐하도 보지 못한 교황성하를 제가 보게 되다니, 정말 뭐라고 말해야 할까요.”

앤이 말했다. 고양이가 그녀의 얼굴에 비비적거렸다.

“얘도 데리고 가야 할까?”

비올렛이 물었다. 앤은 자신의 설렘과 걱정을 전혀 고려해주지 않는 비올렛의 태연한 그 말에 한숨을쉬며 글쎄요, 라고 말했다. 그때 솜방망이 같은 팔을 고양이가 휘두르며 고양이가 말했다.

“인간아 나를 놔두고 어딜 갈 생각이냥.”

“.........”

그것을 물끄러미 본 비올렛이 말했다.

“데려가달라는데?”

앤이 한숨을 쉬었다. 언제나 그녀에게 너그러운 공작이니 이정도는 애교로 허용해 줄 것이라 판단했다.

“아, 그런데 고양이 이름은 뭔가요?”

“호랑이.”

“네?”

“호랑이, 랑이야.”

“..........”

호랑이는 너무 크지 않나요. 앤은 묻고 싶었다.

“내가 부른게 아니야. 얘가 그렇게 부르라고 한거야.”

억울한 표정의 비올렛이 랑이야, 랑이야, 라고 부르자 쫄쫄쫄 다가와 얼굴을 비비는 고양이를 보았다.

*

비올렛은 처음으로 에셀먼드와  앤과 같이 마차를 탔다. 어쩐지 그와 함께 하니 긴장해서 몸을 빳빳이 했다. 에셀먼드는 심각한 얼굴을 하고 있었는데, 비올렛은 그가 상당히 긴장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설마 에셀먼드 역시 같은 사람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피도 눈물도 없어보였지만 그냥 평범한 사람이 아닌가 하는. 야옹, 하는 소리에 에셀먼드가 비올렛의 품에 안겨있는 고양이를 보더니 비올렛을 노려보았다.

“..........”

“..얘... 얘가 데려가달라고해서....”

상당히 매서운 눈빛에 겁을 집어먹은 그녀가 말했다. 앤이 말했다.

“그렇게 눈을 뜨니 아가씨가 도련님을 무서워 하시는 거 아니에요.”

그가 그말을 듣더니 말없이 고개를 돌렸다. 턱을 괴는 모양새에 얼굴이 찌푸려져 있는게 영락없이 못마땅해하는 얼굴의 에이든을 닮았다. 형제니 당연한건가. 그러다 그녀는 피식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

그녀의 미소에 에셀먼드와 앤의 시선이 그녀를 향하자 그녀는 깜짝 놀랐다. 그리고 그녀는 머쓱해져 그녀가 느꼈던 것을 말했다.

“아, 저, 오라버니는 에이든을 닮았어요.”

“........”

그 말에 그는 더욱 더 인상을 쓰는 것이다. 또 뭔가를 잘못한걸까 겁을 집어먹자 앤이 속닥거렸다.

“에이, 아가씨. 막내 도련님이 첫째 도련님을 닮은거죠.”

“...그, 그런가?”

또 실수했다. 그렇게 생각하며 에셀먼드를 보자. 에셀먼드가 하아, 하고 한숨을 쉬었다. 마치 정말 한심하다는 것을 보는 태도였다. 그에 그녀의 몸이 움찔 했다. 그리고 그는 비올렛을 바라보며 말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재잘거리지 말고 잠이라도 좀 자둬.”

“네?”

“정신사납다.”

“..........”

비올렛은 입을 삐쭉 내밀었다. 그렇지만 사실 소풍가는 것도 아니었으며 교황을 보러 가는데, 분별없이 들떠있는 것도 같았다. 그래서 그녀는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러다가 꾸벅 꾸벅 졸았다. 사실 그녀도 어제 잠을 못잤기 때문이었다.

그녀의 몸을 흔들어 깨우는 손길에 그녀는 잠에서 깼다. 아가씨, 일어나세요. 앤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녀가 잠에서 깨어났다.

“아이참, 그렇게 잠만 자서야.”

“미안해.”

비올렛이 몸에서 일어나자 무릎위에 있던 고양이가 툭 떨어지더니 냐아, 하며 불쾌한 소리를 냈다. 물론 고양이의 울음소리는 그녀의 귀에 더욱 긴 잔소리로 들렸지만 그녀는 그것을 깔끔하게 무시한 채로 마차 문을 열었다. 이미 에셀먼드가 앞에서서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이제는 익숙한 손의 온기를 느끼며 비올렛은 공작의 성을 보았다. 하늘을 찌를 듯이 뾰족한 건물 인상적이다. 마치 전투는 염두에 두지 않은 듯한 모양새였다.

그 건물 앞에 공작이 서 있었다. 공작은 오늘 한층 더 화려한 옷을 입었는데, 그들이 도착한 때가 어둑한 저녁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옷에 박힌 찬란한 보석이 반짝거렸다. 새하얀 모피를 망토처럼 두른 체자레는 환하게 웃으며 자신의 제자를 맞아들였다.

“환영합니다. 성녀님, 환영합니다. 에르멘가르트 경.”

에셀먼드가 그에게 고개를 숙여 짤막한 인사를 건넸다. 체자레의 성은 장밋빛 벽돌로 쌓아올려져 겨울인데도 붉게 빛이났는데 비올렛은‘붉은 추기경’이라는 그의 별명과 이 성의 이미지가 맞다고 생각했다. 오로지 공작만을 위해, 선선대 왕이 내리신 영지였으니. 수도 근처에 있는 영지를 누가 공격하겠는가, 그리고 왕이 내린 영지를 누가 탐하겠는가. 따라서 이 건물은 체자레만을 위한 땅이었고, 그만을 위한 성이었다.

고롱고롱 소리를 내며 잠든 랑이를 보고 체자레가 반갑게 인사했다. 그러자 이 고양이가 눈을 두어번 깜빡이더니 비올렛의 품에서 풀쩍 뛰어내려 마치 자기집이라도 되는 듯 꼬리를 빳빳이 세우고 안으로 들어갔다.

장밋빛 벽돌로 쌓인 성 안은 황금색으로 빛이 났다. 과연 공작이 입은 옷 만큼이나 화려한 성이었다. 비올렛이 안으로 들어가자 더욱 더 화려한 내부가 보였다. 크리스탈로 장식된 천사의 조각상들이 촛불의 빛을 받아 무지갯빛으로 빛이나고 있었다. 궁도 이렇게 화려하지는 않았다. 규모만 작을 뿐이지, 또 하나의 왕성이라고 생각될 정도였다.

“성하께서는 내일 점심 이후에 오신다고 합니다.”

“네.”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내일이라는 소리를 들으니 더더욱 긴장이 되었다. 체자레는 비올렛의 얼굴을 보며 방긋 미소를 지었다.

“식사를 준비시켰습니다. 자, 여독을 푸십시오. 모두들.”

체자레가 준비한 식사는 화려하고도 완벽했다. 게다가 비올렛이 좋아하는 종류들의 음식들만 있어서 입이 즐거웠다. 남자들 위주의 식사만 하느라 언제나 큰 덩어리진 음식을 먹었던 그녀는 처음으로 그녀의 입 크기에 맞추어 조리된 요리들을 먹을 수 있었는데, 비올렛은 체자레의 그 세심한 배려에 고마웠다.

저녁을 먹고 그들은 체자레가 안내하는 성을 구경했다. 그는 정말로 자신을 방문해준 방문객들의 존재에 신이 난 듯했다. 그는 아름다운 화초들로 장식되어 있는 화초의 방과, 온갖 진귀한 시계가 모여있는 시계의 방, 그리고 화려하게 세공된 거울의 방 같은 특이한 방을 안내했다. 그리고 인형이 모여 있는 방에 그녀를 안내하자 비올렛은 화려하고 기이한 모양의 인형에 정신이 팔렸다. 정말 사람처럼 섬세하게 세공된 인형도 있었고, 일부러 포근하게 만든 헝겊인형도 있었다. 인형의 집 벽에는 분홍색으로 작게 만들어진 인형의 집이 진열되어 있었다. 비올렛이 다가가 인형의 집 안을 들여다보자 반짝이는 발광석이 빛을 내고 있었다. 내부 역시도 진짜 사람이 만든 것 처럼 되어 있었다.

“여기서 작아지면 그대로 살수도 있겠어요.”

비올렛이 말하자 체자레가 말했다.

“그럼요, 제가 얼마나 심혈을 기울여 제작한건데요.”

“스승님은 인형도 좋아하시나요?”

“좋아합니다. 사람의 지극한 아름다움만을 뽑아내어 가둬둔 물체가 아름답지 않을리가 있습니까. 저는 아름다운 것을 좋아합니다.”

참으로 체자레다운 말이었다. 에셀먼드는 가만히 그것을 지켜보았다.

“나중에 여름쯤에 다시 한번 와주시겠습니까? 그때는 장미들이 아름답게 피어있을 겁니다 이 붉은 성 역시 더욱 더 화려하게 빛을 발하겠지요.”

“어, 정말요?”

비올렛이 물었다. 체자레가 긍정의 미소를 지었다. 그는 비올렛이 이곳에 관심을 가지는 것이 기쁜 듯 그의 정원에 대해 천천히 설명해 주었다.

“아, 그렇군요. 이 인형의 집.”

“네?”

“성녀님이 가지십시오.”

“네에?”

비올렛이 눈을 크게 떴다. 한눈에 봐도 저 인형의 집은 귀한 것이었다. 어떻게 그걸 덥썩 준단 말인가.

“인형도 가지고 싶으신게 있으면 얼마든지 가지셔도 됩니다.”

“어머 잘되셨네요!”

시종일관 그녀의 옆에서 그녀와 같은 반응을 하고 있던 앤이 말했다. 확실히 체자레가 가지고 있는 것은 남자들보다 여자들의 환상을 자극하는 무언가가 있었다. 인형의 집이라니, 게다가 아주 귀한 발광석까지 들어가 있는 집이라니 과분했지만 한편으로는 기뻤다.

“후작 께는 제가 다 말씀 드리겠습니다. 에르멘가르트 영식.”

체자레가 서 있던 에셀먼드에게 말했다. 에셀먼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비올렛은 그가 못마땅한 얼굴이라는 걸 바로 눈치챘다. 너무 들뜬건가. 하지만 앤 역시도 좋아하는걸 보면 그렇게 나쁜건 아닌 것 같은데.

“영식, 그런 표정을 지으면 성녀님께서 무서워하십니다.”

체자레의 말에 에셀먼드가 비올렛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그녀는 바로 시선을 돌렸다.

“제가 금화를 드리겠다는 것도 아니고 보석을 드리겠다는 것도 아닙니다. 그저 제가 드릴 수 있는건 이런것 뿐이라 드리는 겁니다. 이건 스승이 아끼는 제자에게 주는 선물입니다.”

그 말에 에셀먼드가 조용히 말했다.

“공작각하의 마음에 한 치의 오해도 없습니다. 염려 마십시오.”

그는 그렇게 말하며 체자레에게서 한걸음 물러섰다. 어쩐지 분위기가 싸늘해 진 것 같다. 체자레는 시종들을 불러 비올렛이 묵을 방에 인형의 집을 가져다 놓도록 명령했다. 체자레가 미소를 지었다.

“자 다음은 어디로 갈까요?”

“음, 전 이제 쉬고싶어요, 스승님.”

“이런, 제가 손님을 너무 오래 붙잡아 뒀군요.”

비올렛은 에셀먼드가 보여주었던 반응을 떠올리며 성 구경을 여기서 멈추었다. 이 상태로 가다가는 웬지 에셀먼드가 별로 좋아할 것 같지 않았다.

“내일 아침에 또 구경시켜 주시겠어요?”

그 말에 체자레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비올렛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그들이 안내해주는 방을 향했다. 체자레는 정말로 마지막까지 완벽한 사람이었는데, 우선 비올렛의 방과 에셀먼드의 방을 붙여놓았다는 것이 그러했다. 덕분에 비올렛은 한결 마음이 편했다.

안내된 방에 들어가자 앤과 비올렛은 감탄했는데, 어찌나 화려한 장식들이 있던지 마치 대낮같았다. 방에 들어가니 폭신한 카펫이 그녀의 발을 감싸주었다. 섬세한 자수가 수놓아진 커튼을 걷으니 창문이 보였다 . 비올렛이 다가가 창문을 내다보니 공작 가가 한눈에 내려다 보였다.

체자레가 부른 하녀들이 그녀를 향해 웃으며다가왔다. 비올렛은 그들이 후작가의 사람들과 상당히 다른 태도를 보이는 것을 알았다. 비올렛은 그녀를 업신여기며 못마땅하게 생각하던 하녀들을 떠올렸다. 그녀들은 저마다 비올렛을 모시는게 너무나 큰 영광이라고 말했으며 비올렛도 그것이 진심임을 알았다. 그녀들이 시중을 들어주려고 했지만 비올렛은 어쩐지 부담스러워 그들을 모두 거절하고 앤을 선택했다.

앤은 그것이 기쁜듯 재잘재잘 떠들며, 성이 어땠는지에 대해 감탄사를 늘어놓으며, 공작은 정말로 성녀님께는 좋은 사람일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언제나 체자레를 경계했던 앤을 보던 비올렛은, 처음으로 앤이 체자레에게 긍정적인 반응을 보여주자 기뻤다. 사실 후작 가의 분위기는 그녀는 체자레에 대한 호감을 대놓고 드러낼 수 없었다. 기사들의 분위기 역시 험악했기에 더욱 더 그러했다.

깃털이 들어있는 침대가 푹신하기 그지없었다. 화려한 욕실에서 목욕을 끝낸 비올렛은 머리를 말리고 그 푹신한 침대에 누웠다. 방의 온도는 노곤노곤 잠이 오기에 적절한 온도였다. 이렇게 완벽한 곳이 있을까. 비올렛은 생각했다. 인형의 집을 보며 비올렛은 체자레가 첫 만남때 자신이 데려갔어야 했었다는 것을 기억했다. 정말로 왕자님과 같은 사람이 아닌가. 물론 나이는 할아버지였지만.

그리고 비올렛은 상상해보는 것이다. 어쩌면 후작보다 체자레는 더욱 더 능숙하게 그녀를 돌봐줄 수 있었을 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때의 그 끔찍한 기억같은것은 없을지도 모르지. 아나블라의 괴롭힘때문에 울지도 않았을 지도 모르며 다니엘의 냉대에 상처받지도 않았을 것이며 에이든의 눈치없는 말에 식사가 가장 무서운 것이 되지도 않았을 것이다. 어쩌면 후작가를 선택한 것이 잘못되었을 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던 그녀는 선잠이 들었다.

*

야옹, 야옹, 고양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 목소리는 간헐적으로 그녀의 귀를 간지럽히다 급박하게 그녀를 재촉했다. 비올렛은 눈을 떴다. 창을 보니 아직은 어두운 밤이었다. 그러고 보니 랑이가 어디 있는거지? 언제나 그녀가 있는 곳으로 되돌아 때문에 걱정하지는 않았지만 생각해보니 랑이는 이곳이 처음이라 길을 잃었을 수도 있었다. 비올렛은 자리에서 눈을 비비며 일어났다. 어떻게 할까 한참을 망설이던 비올렛은 방 밖을 나가서 직접 고양이를 찾아보기로 했다. 다행히 성벽에 희미한 불빛이 있어서 앞을 분간할 수 있었다. 게다가 그녀는 작은 유리등불역시 준비해왔다. 그럼에도 화려한 이 성의 샹들리에 조명이 꺼지니 어쩐지 으스스했다. 더군다나 어째서인지 사용인들은 단 한명도 볼 수 없었다.

“랑이야.”

아무도 없으니 그녀의 목소리가 동굴에 있는 것 처럼 울려퍼졌다. 메아리 치는 자신의 목소리조차 섬찟해 비올렛은 몸을 움츠렸다. 저기 에셀먼드가 있는데 깨워서 같이 찾아달라고 할까. 라고 생각하다가 앤도 깨우지 않았는데 자길 천한 인간이라고 말하는 고양이 하나를 찾기 위해 공작가를 돌아다닐리가 없었다. 오히려 그녀를 꾸짖지 않을까.

그녀는 체자레가 자신에게 관대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돌아다녀도 사실 별 문제가 없었다. 체자레는 자신의 집처렴 여겨주길 바란다는 말을 하기도 했고. 따라서 그녀는 자신이 있는 층계를 다 훑어보았다. 랑이야. 고양이를 부르는 그녀의 가냘픈 목소리가 성벽에 울려퍼져 여전히 섬뜩했다.

“랑이야.”

야옹, 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것도 같았다. 비올렛은 반가운 마음에 천천히 계단을 내려갔다. 꽤나 깊숙한 곳으로 간듯 맨 아래에 들리는 목소리에 그녀는 재빨리 데려오자 라고 생각하며 계단을 계속 내려갔다. 그러다 그녀는 정체를 알 수 없는 돌문을 발견했다. 비올렛은 거기서 이상한 기운이 뿜어져 나오는 것을 알았다.  야옹거리는 목소리가 크게 들려온다. 아, 저 안에 있는 거로구나.

“랑이야, 여기야, 이리와.”

비올렛이 불렀다. 아이 참, 얘는 왜 저기에 들어가서는. 비올렛은 투덜거리며 그 문을 열었다. 굳게 잠겨있거나 너무 무거워 열리지 않을 거라는 생각과는 다르게 그 문은 너무도 쉽게 열렸다. 그와 동시에 이상한 기운도 사라졌다. 비올렛은 고개를 갸웃, 하며 안으로 들어갔다. 야옹거리는 목소리를 향해 문 안으로 들어갔다. 어쩐지 악취가 나는 것도 같았다. 비올렛은 코를 틀어 막았다. 뭘까. 어두운 조명과 그녀의 작은 등불에 의지하며 비올렛은 조심조심 고양이의 울음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향했다.

“이게 뭐지?”

온갖 뾰족한 쇠붙이들이 벽에 걸려 있었다. 이상한 냄새는 이 쇠붙이의 비린내 때문일까? 벽에는 그래도 체자레가 신경을 썼는지 꽃모양의 장식물이 박혀 있었다. 비올렛은 그것을 만져보았다. 마치 두꺼운 종이 같았다. 그 옆에는 짚게같은 기구가 걸려 있었다. 여긴 무엇을 만드는 곳인가?

벽을 장식한 누런색의 바스락거리는 종이 꽃과 섬뜩한 모양의 집게같은 기구. 비올렛은 불안함을 느꼈다. 지금이라도 돌아가면 되지 않을까. 하지만 야옹이의 가냘픈 소리에 그녀는 포기할 수가 없었다. 어디선가 흐느낌 소리가 들려오는 것도 같았다. 울음소리도 들려오는 것 같기도 했다. 짐승이라도 있는 것일까. 그렇게 생각하며 비올렛이 문 하나를 더 지났다. 그리고 원형의 공간이 나왔다.

“야옹.”

다행이도 고양이가 비올렛의 품에 폭 안겼다.

“너 때문에 걱정했잖아.”

비올렛은 왠지 화가 나 고양이에게 투덜거렸다. 하지만 고양이는 발톱을 세우고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고양이의 털에서 심한 악취가 났다. 이곳이 대체 어디기에 이런 냄새가 나는 거지? 비올렛은 그 악취가 상당히 익숙하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그 악취의 정체가 무엇인지 깨닫자 그녀는 몸을 잘게 떨었다.

저건 오물 냄새와 피 냄새다.

비올렛은 고개를 돌렸다. 저 어둑한 것 너머에 무엇인가가 보였다. 쨍그랑소리와 함께 쇠사슬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짐승의 울음소리가. 어쩌면 지금 가면 아무것도 못보고 넘어갈 수 있다. 그녀는 생각한다. 하지만 그녀는 그것을 외면할 수가 없었다. 머리는 빨리 돌아가야 한다고 소리친다. 발은 그녀의 의지를 반하고 있다. 마치 주인의 의지를 배반하듯, 그렇게.

“으으.”

왜 돌아갈 수 없었냐면, 왜 돌아가지 않았냐고 묻는다면 그녀는 이렇게 말할 수 있었다. 그 짐승의 목소리가 너무도 익숙했기 때문이라고. 그래서, 벗어날 수 없었노라고. 등불이 쇠창살을 비추었다. 여긴 감옥인가. 풍겨오는 악취와 비린내에 코를 틀어막고싶었지만 그럴수도 없었다. 그녀는 등을 들어 그 쇠창살 안을 보았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앙상한 손이 갑자기 불쑥 나타나 쾅, 하는 소리를 내며 창살을 쥔다.

“으으으!!”

그 목소리에 비올렛은 뒤로 넘어질 뻔했다. 심장이 두근거린다.  그것은 짐승이 아니라 사람이었다. 아니,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것을? 그 사람은 알몸으로 마치 개처럼 묶여 있었다. 그는 눈물 섞인 애절한 눈빛이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는데, 어딘지 모르게 낯이 익었다. 비올렛은 랜턴을 더 가까이 비쳐보았다. 붉은 눈이 그 갇힌 수감자의 얼굴을 비추었다. 그 수감자의 얼굴은 앳되었고, 앙상한 체구를 감안함에도 남자이지만 작았다. 그렇다면 그는 소년이라는 뜻이었다.

“으으으으”

그는 이상한 소리를 내며 그녀에게 무엇을 전달하려고 했다. 그러자 그 입에서 침이흘러내렸다. 비올렛은 머릿속을 스쳐지나가는 생각을 몇번이고 망설이다 말했다.

“토....미?”

그녀의 입에서 익숙한 이름이 나왔다. 잊지 못하던 그 이름을 말하자 그 앙상한 수감자의 눈에서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그가 쇠창살을 흔들자 그것이 철컹거렸다. 그녀가 뒷걸음질을 치다 . 벽에 손을 짚었다. 벽에 장식되어있는 종이 꽃장식들이 바스라져 떨어졌다. 그녀는 그것을 보았다. 자세히 보니 그것은 꽃이 아니었다. 꽃잎처럼 보이는 그것은........

그녀는 구역질을 했다. 토할 것 같았다. 창살을 쥔 토미의 손이 왜 짐승같았는지 깨달았다. 그의 손에는 손톱이 없었다. 비명조차 나오지 않았다. 비올렛은 필사적으로 뒷걸음질 쳤다. 달아나자, 이곳에서. 그러나 비올렛은 출구에 서 있는 남자를 보고 입을 다물었다.

“이런, 성 구경은 내일 아침에 시켜드리기로 하지 않았습니까.”

이 순간 가장 보고 싶지 않은 남자가 서 있었다. 그는 이 악마의 공간에 군림하는 왕처럼 서 있었다. 그는 여느 때처럼 매력적인 특유의 나른한 미소를 짓고 있었는데 쉬다가 온 것인지 가벼운 차림의 남자의 목에 단추가 하나 둘 풀러있었다. 만약 이 장소가 아니었으면 비올렛은 그 모습이 꽤나 새롭고 멋있다고 여겼을 것이다.

“먼저 구경하시면 재미가 없어집니다, 비올렛. 그리 보시고 싶으셨습니까?”

그의 손짓에 벽에 작게 타오르던 횃불들이 맹렬하게 타 올랐다. 그러자 이곳이 환하게 물들었다. 그녀는 뒤를 돌아보았다. 이곳은 원형의 방이었고 그녀는 그 가운데에 서 있었다.  동굴같은 감옥에 수감자들이 갇혀 있었다 낯익은 사람들의 얼굴이 보였다. 여자의 얼굴이 보인다. 누구인가 해서 봤더니 익숙한 얼굴이다. 이제는 금방 알아볼 수 있었다. 핀이다. 비올렛의 등골이 서늘해졌다. 오른쪽을 보니 낯선이가 있었다. 아나블라의 하녀다. 그녀에게 꽃의 거리 출신이라고 특히나 밉살스럽게 비아냥거리던. 수감된자들은 모두 다 비올렛에게 잘못을 저질렀던 사람들이었다.

============================ 작품 후기 ============================

다음편, 아니면 다다음편이 유년기의 마지막 화이자 1부의 끝입니다 ㅋ..

오늘까지가 딱 예선까지 올릴 수 있는 화네요. 21일 24시까지라고 하지만 더 올릴 생각은 없어요. 일부러 조금 무리했지만 용량을 넉넉하게 넣었습니다. 24일에 봬요 모두들!

부족한 소설을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제가 오탈자가 많은 편임에도, 그걸 감수해주시며 지적해주신 분들 너무도 감사합니다. 항상 말하는 거지만 제가 사실 손이 빠른 편이라서 그에 파생되는 것들이 잘 보이지 않네요... 마치 장애물 달리기를 하는데 1등으로 달리는데 허들을 모두 쓰러트리며 달리는 거랄까요. 고치고자 하는데 사실 쉽지가 않네요 제 고질병이라...ㅋ.;;;

본선에 떨어지든 본선에 진출하든 소설은 계속 연재될 겁니다. 사실 제가 부족한 만큼  약속드릴 수 있는건 완결에 대한 약속밖에 없네요.

아무튼 본선 진출시에는 3일 후에 돌아오고 아닐 경우는 일주일정도 쉬고 돌아오겠습니다.

추천 많이 박아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ㅁ<

좋은 기회에 여러분들을 만나서 행복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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