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69 피어오르는 꽃봉오리 =========================================================================
“저분이 성녀 아그레시아입니다.”
비올렛이 석상을 가리켰다. 궁 안에 마련된 예배당 안에 있는 거대하고 하얀 석상을 보며 이방인들이 저마다 감탄했다. 옷의 섬세한 주름 하나하나까지 잡아낸 아그레시아 석상은 마치 금방이라도 그녀가 돌에서 나와 살아 움직일 것 같은 온기까지 느껴졌다.
“이 분이 신에게 선택을 받았고, 아그레시아님께서 말룸을 퇴치하여서 인간은 악마가 내려준 재앙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이자카는 아그레시아의 얼굴을 보았다. 비올렛의 이마에 새겨진 것과 똑같은 성흔. 구형의 오브와 긴 롯드를 들고있는 여자. 사실 비올렛은 그 후 예배당에 단 한번도 발걸음을 하지 않았고 이번이 처음이었다.
“놀랍군요. 하지만 저 여자는 검을 들고 있지 않습니다. 그녀는 무엇으로 악마의 자식과 싸운 겁니까. 설마 저 구형 물체와 막대기는 아니겠지요?”
라이니그가 그것을 보며 물었다.
“아니요, 저 오브(orb)와 롯드(rod)는 신의 권능을 상징합니다. 성녀는 무기로 싸우지 않았습니다. 신의 힘으로 싸운거지요.”
“그 신의 힘이란‘성력’이라는 것을 이르는 말입니까?”
라이니그가 물었다. 비올렛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만약 신이 선택을 하려 했다면 검을 든 자들, 예를들어 저 에셀먼드 경을 선택하는게 낫지 않았을 까요? 왜 신은 하필이면 이 여인을 선택한 것일까요.”
그 말에 비올렛은 차분하게 대답했다.
“신이 보여주고 싶었던 것은 무력과 지혜, 지략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이었을지도 모릅니다.”
비올렛이 체자레가 알려주었던 것을 그대로 말했다. 그녀 역시 검술을 배웠지만 그것이 주가 아니라는 것은 안다. 말룸은 성녀의 성력에만 처단될 수 있었다.
“구자르트의 위대한 정령의 의지를 가늠할 수 없듯, 저희 역시 신의 의지를 짐작만 할 뿐이죠. 인간이 신의 뜻을 짐작할 수 있다면 그 순간 인간은 인간이 아니라 신이 될 것입니다.”
그 설명을 듣고 있던 이자카가 심각한 얼굴로 아그레시아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비올렛을 빤히 보는 것이다. 비올렛은 갑자기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는 이자카를 보며 당황했다. 아름다운 초대 성녀와 자신을 비교하느라 그런 것일까. 딱 봐도 그녀에게는 아그레시아와 같은 기품와 성결함이 없었다. 타종교를 가진 나라의 사람이 신의 상징인 그녀를 어떻게 평가할까. 그녀는 이자카의 말에 긴장했다.
“네가 더 예쁘다.”
“........”
비올렛은 할 말을 잃었다. 그리고 다른 이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라이니그가 이자카에게 뭐라고 말했다. 이젠 비올렛도 알 수 있었다. 저건 꾸중하는 것이었다. 이자카가 뭐라 반항하기라도 할라 치면 그의 가신들이 또 뭐라고 대답했다. 재빠른 대답에 비올렛은 완벽하겐알아들을 순 없지만 대충 체통좀 지키십시오, 칸. 내가 뭐 어쨌다고, 정도로 해석했다.
“제가 사과드립니다.”
라이니그가 또 다시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사과했다. 저런걸 보면 사실 야만인이라는 것은 군나르 족이 아니라 이자카를 뜻하는게 아닌가 싶다. 다른 사람들은 비올렛에게 아주 정중했으니 말이었다.
“그런데 언제까지 저 여자를 보고 있을건가.”
“네?”
“서른 세명의 여자들이 있다던데 나보고 그 여자들의 동상을 봐야한다는 건 아니겠지?”
“칸!”
더이상 참지 못한 라이니그가 소리쳤다. 너무나 솔직하고 아이다운 반응에 비올렛의 얼굴에 살풋 미소가 서렸다.
“아쉽게도 그 서른 세명의 여자들의 동상은 이곳에 없고 교황령에 있습니다.”
이곳에서도 있었다고 했지만 선왕 아스토르가의 광기로 인해 모든게 불타 없어졌다고 했다. 하지만 자세한 사정은 이들에게 말할 수는 없었으니 그러했다.
“너희는 이 여자의 석상아래서 기원하는가? 멍청하게 이곳의 여자만 바라보며?”
“칸!”
그 물음에 비올렛은 빙그레 웃으며 대답했다. 그녀는 처음으로 이자카가 했던 말이 마음에 들었다. 그 미소에 이자카가 그녀의 얼굴에 집중했다.
“네,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너희는 성녀를 섬기는가, 아니면 ‘신’을 섬기는가?”
그가 물었다.
“당연히 신을 섬깁니다.”
“나는 너희들이 신보다는 신의 기적을 보여주는 대상을 섬기는 것 같다.”
이자카가 말했다.
“우린 위대한 정령을 섬긴다. 그렇다고 그 위대한 정령의 무녀는 존중하나 숭배하지 않는다.”
이자카는 다시 비올렛을 바라보며 말하는 것이었다.
“섬김과 숭배는 오로지 그것을 받을만한 것에게 하는것이다. 인간에게 하는게 아니다.”
“.........”
이자카의 매를 닮은 눈동자는 진지했다. 이자카는, 그녀가 그렇게 숭배받을만한 대상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었다.
“맞지 않는 대상에게 숭배와 섬김을 한다면 그 사람은 억지로 신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은 이상하다. 살아있는 인간이 그렇게 우상이 되는것이 가능한 것인가?”
칸, 제발 그만하십시오, 라는 가신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비올렛은 그가 다르게 보였다. 그녀의 말을 대충 들을거라는 생각과는 다르게, 이자카는 꽤나 진지하게 그녀의 설명을 들어주고 있었던 것이다. 비록 정면으로 그네들의 종교를 비판하고 있었지만 적어도 그것은 그가 그녀의 말을 듣고 이해하려 노력하고 있었다는 증거였다.
“또한, 저 여자가 그 악마의 자식을 없앴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지금까지 숭배를 받을만한 일인가? 나라를 지키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것이 왜 숭배를 받는것인가? 그저 여자 뒤에 숨어서 살아남은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기라도 하는 것인가?”
“칸!”
이 말에 비올렛 역시 놀랐다. 비올렛이 에셀먼드를 바라보았다. 에셀먼드 역시도 이 말에, 조금은 놀란듯 보였다. 군나르 족은 한사람 한사람이 모두 다 강건한 전사라고 했다. 여자들도 예외가 없었고, 나라를 지키려 희생한 것은 그들에게 아주 당연한 일이었다. 그렇지만 아그레시아는 성녀의 뒤에 숨어서 살아남았다. 이자카는 그것을 지적하고 있었다.
“너희의 나라는 이상하다.”
그가 말했다.
“그저 여자 한명에게 신의 대리자라는 이름을 붙이며 모든 책임을 떠맡기는것이 아닌가.”
그 말에 비올렛의 머릿속엔 어쩐지 체자레의 모습이 스쳐지나갔다. 왜 인지는 모른다, 갑자기 그 얼굴이 스쳐지나갔다. 체자레는 만약 이자카의 이 말에 뭐라고 대답했을까. 그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했을까. 아니면 신화속에 남아있는 백성들 역시 그것에 싸웠지만 이길 수 없었노라고 대답할까. 아니면 아그레시아는 그럴만한 존재라고 대답할까.
“우리는 위대한 정령을 숭배하지만, 그렇다고 무녀에게 모든 책임을 떠맡기지 않는다. 설령 무녀가 마법을 쓸 수 있는 전사라도 그렇다.”
그 말에 비올렛은 이자카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녀가 조용한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자, 그는 갑자기 정신을 차린듯 표정이 일그러졌다. 그는 마치 자신의 실수를 깨달은 어린아이의 표정이었다.
“아, 그렇지만 너는 예쁘다. 숭배 받을만 하다.”
갑자기 변한 그의 태도에 비올렛이 얼굴을 갸웃 했다. 왜 갑자기 또 저런 뜬금없는 대화를 한단말인가? 비올렛은 그 동상을 보며 말했다.
“아그레시아가 숭배를 받았던것은 그녀가 강하기 때문이 아니고, 단순한 신의 대리인이라서가 아니에요.”
와닿지 않는 이야기를, 해야한다는 것은 참 고된 일이다. 그러나 비올렛은 신앙적으로 그들을 납득시켜야 할 의무가 있었다.
“사람들은 모두 자신들을 사랑해 주는 ‘신’이라는 존재의 유무에 대해 고민하고 그것을 확인받고 싶어합니다. 그리고 아그레시아가 상징하는 것은 신의 사랑이었습니다.”
“........”
“아그레시아는 단순한 여자가 아닙니다. 신의 사명을 받고 그것을 완수하기 위해 나왔다는것. 누군가를 지키기 위해 무언가를 하기 위해 결심한 것은 당연한게 아닙니다. 당신들의 백성 모두가 나라를 지키기 위해 전사가 되어 목숨을 바치는 것도 당연한게 아닙니다.”
비올렛이 이자카를 똑바로 보며 말했다. 비올렛은 이자카의 말에 거부감을 느꼈는데, 이자카는 자신들의 백성에 대해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지배자의 태도였다. 그리고 비올렛은 그것을 싫어했다.
“어린 여자의 몸으로서, 신탁을 받고, 그 거대한 말룸에 싸웠을 때의 두려움, 공포와 싸우며 끔찍하고 무서운 생김새의 말룸을 처단했습니다. 그 용기와 희생은 사람들을 사랑하지 않고 나올수가 없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
“그리고 그 용기를 가지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면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만약 그녀라면 어떻게 될까. 내일이라도 말룸이 나타나면 그녀는 싸울 수 있는 것일까. 그녀는 고민했다.
“용기와 희생때문에 숭배하는게 아닙니다. 신의 사랑을 대변하고, 사랑받았기 때문에 사랑을 준 존재를 영원히 기억하는겁니다. 우리는 단순히 그녀가 말룸을 무찔렀기 때문에 숭배하는게 아닙니다. ”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이자카를 보았다. 그녀의 말을 듣고 라이니그를 비롯한 가신들은 깨달음을 얻은 표정을 짓고 있었고, 이자카 역시 굳어있는 표정으로 비올렛을 보았다. 새하얀 조각상이 햇빛을 반사해 비올렛의 얼굴은 더욱 더 하얗게 빛이나 보이게 했다. 결 좋은 은발이 그녀의 잔 움직임마다 찰랑거리며 은은한 빛을 머금었다. 순간이지만 그녀는 아그레시아처럼 신성한 어떤 존재로 보였다.
비올렛은 자신이 너무 이자카의 말에 정면으로 반박했나 생각했다. 은근 슬쩍 자신들의 강건함을 자랑하던 이자카의 태도를 지적하기까지 했으니, 조금 심했나 생각하며 비올렛이 말했다.
“사람들에게는 신의 추상적인 사랑보다는 아그레시아의 희생적 사랑이 더 와닿는 법이니까요. 이해하시기 힘들지도 모르겠습니다.”
난감한 얼굴로 돌려 말하자 이자카가 조용히 말했다.
“아니.”
“네?”
“방금 이해했다.”
그는 그렇게 말하며 한결 기가 죽은 태도로 비올렛을 바라보았다. 이자카는 다시 고개를 들어 그 여자를 지켜보는 것이다. 그리고 비올렛을 바라보았다.
“너희의 신앙을 무시해서 미안하다.”
비올렛은 생각보다 이자카가 사과를 잘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다. 권위적이라고 생각했던 모습과는 다르게, 그는 깨끗이 다름을 받아들이고 잘못을 인정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조금 수그러졌을 거라고 생각했던 그의 시선은 어쩐지 더욱 더 열기를 띄고 있었다. 안그래도 강한 인상이라 무서운데, 저렇게 자신만 뚫어져라 바라보는 것은 안그래도 부담이 되는 그가 더욱 더 무서워 보이게 했다.
============================ 작품 후기 ============================
열두시에 봅시다. 코멘 많이 주신거 너무 감사드립니다. 오탈자도 사랑합니다:)!!!
앞으로 공모전 끝날때까지 후원제비는 열두시 한편, 오후 한편, 다시 열두시, 이런식으로 연재가 될 것 같아요
일요일 재밌고 행복하게 보내세요 ^0^
+이자카 커미션은 아마 완성되기까지 시간이 걸릴것같아요~ 뜰에 오시면 리베라 합창단의 음악이 준비되어 있으니 한번 들어보시고 가세요 헤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