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79 외전- 별궁의 붉은 소년 =========================================================================
단호한 거절에 그가 머뭇대자 체자레가 다시 미소를 지었다. 그는 환하게 웃고 있었는데, 진심으로 그를봐서 기뻐하는게 느껴져서 트라이덴도 미소를 지었다.
“만나고 싶었어.”
“저를 말입니까?”
“그렇잖아. 내 작은 아버지라는건 믿어지지 않지만, 그래도 형인걸!”
“아.”
“형이잖아. 숙부라고 부를 수는 없어. 숙부는 조금 더 큰 아버지만한 사람이어야지.”
그 말에 체자레가 키득거리며 웃었다.
“그 말이 맞습니다. 저도 왕손이 조카라기보다는 동생으로 생각됩니다.”
“정말, 진짜?”
“네, 정말입니다.”
밤 하늘의 달과 같다. 체자레의 미소에 트라이덴도 같이 미소를 지었다. 외로운 두 소년들이 만났다. 그와 같은 별궁의 붉은 소년이 따스하게 미소 지었다.
“형이라고 불러도 돼?”
“이미 부르고 계시지 않습니까, 왕손.”
그 말에 그가 배시시 웃었다. 그러다 트라이덴은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아, 여기까지 오는거 정말 힘들었는데, 또 언제 다시 올 수 있을까.”
그 말에 체자레가 말했다. 그 황금색 두 눈이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정말 저를 다시 만나고 싶으십니까?”
“당연한거 아니야? 나는 형이랑 놀고 싶어.”
그 볼멘소리에 체자레가 미소지었다.
“그러면 제가 찾아가도 될까요? 왕손께서는 그저 창만 조금 열어두시면 됩니다.”
생각해보니 그런 방법이 있었다.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에 더더욱 기뻐하는 체자레의 얼굴은 처음 봤던 차분한 모습이 아니라 장난기 어린 ‘형’같았다.
*
“우, 우와...읍!”
잠자다가 내려앉은 그림자에 그는 비명을 지르려다 입이 막혔다.
“소리를 줄이세요, 왕손. 접니다.”
자세히 보니 체자레였다. 말로만 듣던 암살자라도 되는 줄 알았다. 아직도 심장이 두근두근거렸다. 그 와중에도 달빛을 등진 체자레의 노란 눈만이 빛을 발하고 있었는데, 그 모습은 다른 이들이 절대로 흉내낼 수 없는 묘한 아름다움이 있었다.
“형, 나는 빠져나오기도 힘든데 어떻게 여기까지 찾아오는거야?”
“그거야, 저는 성력이 있으니까요.”
“성력이? 그건 신관들만이 있는거 아니야?”
체자레가 미소를 지었다.
“아닙니다. 사실 성력이라는 것은 신의 힘을 빌려쓰는게 아니라. 사람별로 조금씩 조금씩 잠재되어 있는 재능입니다. 그 재능은 신을 향한 맹목적인 사랑으로 뭉친 의지로 강해지죠. 저같은 경우에는 그런 능력을 받아 태어났고요. 하지만 보통 사람들은 그것을 모른채, 수련하지 않고, 세속에 찌들어 그것을 잃어버리죠. 사람들은 모든 힘을 성력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신앙이라는 마음을 단련시키는 믿음의 힘으로 강해지는 것이지, 결코 신의 힘을 빌리는게 아닙니다. 물론 신께서, 이 힘을 주시는거겠지만요.”
“우와아. 나도 있을까?”
그 순진한 물음에 체자레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그레시아 왕족들은 아주 작은 신성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마 왕손께서도 가능하실 겁니다.”
“에이. 정말로?”
“음, 사실은 왕손께서는 별로 가지고 계시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뭐야, 놀리지 마!”
그 말에 체자레가 잔잔하게 웃었다. 소년이지만 그의 미소는 잔잔한 달빛과도 같았다. 트라이덴이 고된 하루를 끝내면 체자레가 와 있었고, 그는 자신의 여러 문제점을 이야기하고는 했는데 체자레는 그것을 미소를 지으며 들어주고 때로는 충고를 하기도 했다.
“형, 형은 나중에 뭐가 될 거야?”
트라이덴의 물음에 체자레가 미소를 지었다.
“글쎄요, 저는 아나스타샤님의 행적을 쫓고 싶습니다.”
“성녀님? 왜?”
체자레는 하늘을 보았다. 빛조차 내지 못하는 그믐달을 보며 말하는 것이었다.
“아그레시아의 건국 신화는 다정하고 따뜻합니다. 성녀님들의 이야기를 보면 성녀님들은 모두 다 고행을 떠나셨다고 해요. 분명 말룸을 격퇴한 성녀님은 부와 명예를 누리며 행복하게 사실 수 있으실텐데. 더 낮은곳으로 내려가 조용히 여생을 마감한다고 합니다.”
사실 성녀가 말룸을 처치한다는 것만 알았지, 그 후 성녀들이 고행을 떠나는 것에 대해서는 모르고 있었다.
“이번 성녀는 아나스타샤님이죠. 그리고 사라지신지 40여년 되었습니다. 혹여나 살아계실수도 있고, 아니시면, 마지막 흔적이라도 찾고 싶어요.”
“아하.”“
“그리고, 사실 물어볼 것도 있고요.”
“물어볼거?”
그 말에 체자레가 조용히 말했다 .
“정말로 저를 낳으셨는지. 그런거요.”
“에? 진짜 그래?”
트라이덴도 이젠 들어서 알고 있다. 이 별궁의 붉은 왕자는, 할아버지와 아나스타샤의 아들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그도 그런것이, 할아버지를 만날 때 ,그는 언제나 아나스타샤를 찾고는 했었다. 또한 아나스타샤에 대한 그 집착도 어마어마해서. 그는 신전에 있는 아나스타샤의 석상을 모두 수집했다고 한다.
“에? 만약에 성녀님이 엄마라면, 형은 더이상 천한 신분이 아니잖아?”
트라이덴의 얼굴이 환하게 물들었다.
“글쎄요. 부정한 아이라는건 변함이 없....”
“아니야! 어떻게 성녀님이 엄마인데 부정할 수 있어?
그 말에 체자레가 멍하게 그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입을 막고 웃음을 터트리는 것이다. 언제나 심각해보이던 체자레의 얼굴이 웃음이 터지는 것은 처음이었다. 트라이덴은 비웃음을 당하는 것 같아서 볼을 빵빵하게 부풀렸다. 그러나, 형의 웃음소리가 어찌나 맑았던지, 그 웃음을 짓는 얼굴이 어찌나 아름답던지, 눈에 눈물이 맺히는 것을 닦아내며, 그를 바라보는 시선이 어찌나 가슴이 따스할 정도로 애정어린 눈빛인지, 트라이덴은 감히 화조차 낼수가 없었다.
“아, 왕손께 이 이야기를 하기를 잘했습니다. 제가 너무 웃어서 기분나쁘셨습니까?”
그가 고개를 도리도리 돌리며 말했다.
“형은 미소짓는게 아니라 웃는게 더 잘생긴 것 같아.”
“정말이요? 저는 왕손이 더 남자답고 잘생긴 것 같습니다.”
“아니야. 형이 더 잘생겼어.”
“아닙니다, 저는 왕손이....”
그러다 그들은 다시 서로의 얼굴을 마주보며 웃음을 터트렸다. 똑똑, 노크소리가 들렸다. 그러자 체자레가 황급히 침대로 숨었다.
“왕자님, 무슨 일이 있습니까?”
“아니, 그냥 읽고있는 책이 너무 웃겨서.”
호위기사인듯 문을 여는 소리가 들리고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뭐야, 너? 왕족의 방 문을 함부로 열고 와도 돼?”
“아, 아니. 죄송합니다. ”
트라이덴은 화가 난 말투로 호위기사를 쫓아냈다. 체자레가 침대에서 기어나왔다. 트라이덴이 킥킥거리며 웃음을 참았다.
“왕손, 밤늦게 수고해주시는 기사님들께 그렇게 함부로 대하시면 안됩니다.”
“그게 다 형을 위한거잖아!”
그가 속닥였다. 체자레가 어쩔수 없다는 미소를 지었다.
“아, 소원, 생각났습니다. 왕손을 오래오래 지켜보고 싶어요.”
“진짜?”
“왕손은 왕이 되겠죠? 저는 그 나라를 지켜보고 싶습니다.”
그 말에 트라이덴의 가슴이 벅차올랐다. 그가 미소를 지었다.
“진짜지?”
“네.”
“약속이야, 형.”
침대밑에 있느라 어색한 폼이긴 했지만 체자레는 한손을 바닥에 짚은채 새끼손가락을 들어올렸다. 침대 위에 앉은 트라이덴역시 허리를 숙여 새끼손가락을 가져다 댔다. 자그마한 손가락들이 약속을 만들어냈다. 비록 새끼손가락이지만 따스하기 그지 없었다. 트라이덴은 이제 더이상 외롭지 않았다.
*
“생일 선물을 가져왔습니다.”
“선물?”
평소처럼 찾아온 체자레의 손에 내밀어진 조그마한 푸른 돌이 달린 목걸이를 보며 그는 얼굴을 찡그렸다.
“저건 여자애들이나 차는 거잖아.”
“그래도 받아주세요. 제 성력을 아주 조금 담았거든요.”
“진짜?”
“제가 드릴 건 이런 것 밖에 없으니까요.”
그 씁쓸한 얼굴에 트라이덴이 소리쳤다.
“아냐, 찰 거야! 봐, 나쁘진 않잖아?”
“여자애 같군요.”
“뭐?!”
그가 소리쳤다. 체자레가 킥킥거리며 웃었다. 트라이덴도 웃었다. 그래도 힘이 담긴 목걸이라니 그것을 받아 기뻤다. 다른 귀족들이 준 공물이나 선물보다는 체자레의 힘이 담긴 선물이 좋았다. 형이 준 선물이다. 헤헤. 그는 히죽거리며 웃었다.
*
사실, 빨리 발각되지 않은 것이 이상한 일이었다. 왕자의 방에서 웃음소리가 들린다는 괴이한 소문이 왕궁 내에 퍼졌고, 그들이 이야기하고 있는 장면을 이제 드디어 섭정이 된 제 1왕자인 아스토르가가 보게 된 것은 시간문제였다. 창가에 앉은 체자레와 웃고 떠들고 있는 트라이덴. 아스토르가는 다짜고짜 다가가 체자레의 뺨을 내려쳤다. 자비없는 폭력과 함께 체자레가 바닥을 굴렀다.
“아바마마!”
그가 체자레에게 다가가 소리쳤다.
“천한 것, 아바마마에 이어 이제는 왕손까지 건드리려하다니! 네 이놈, 트라이덴! 네가 지금 어떤 짓을 한 것인지는 아느냐!”
“........”
그 노호성에 트라이덴은 몸을 움츠렸다.
“이게 무슨 짓입니까. 아바마마의 동생이지 않습니까! 제 숙부입니다.”
“숙부?”
아스토르가가 되물었다. 그는 허허, 하고 웃었다.
“그 창녀에게서 태어난 놈을 동생으로 둔 적은 없다. 같은 피가 섞인게 불쾌하고 더럽다. 그 얼굴조차 보면 역겨워 참을수가 없다! 저 녀석이 네 목을 노렸을지도 모르는 법이다!”
아스토르가의 뒤에는 평민인 사람들이 있다. 어떻게 평민들 앞에서, 왕족이 뺨을 맞을 수가 있단 말인가. 하지만 체자레는 부축해주려는 트라이덴의 손을 밀어냈다.
“괜찮습니다, 왕손.”
“천한놈이 어찌 그 더러운 손으로 왕손에게 손을 대는것이냐!”
“아바마마!”
“시끄럽다!”
아스토르가가 성큼성큼 다가와 체자레의 목을 틀어쥐었다. 청년의 손아귀에 잡힌 어린 소년은 사정없이 그 손에 이끌려 올라갔다. 아스토르가가 살기어린 얼굴로 그의 목을 더욱 더 세게 잡았다. 목이라도 부러트릴 것 같았다.
“내, 이 자리에서 너를 죽이고 말것이다. 아바마마의 비호를 받아 기고만장했던 네놈은 이제 끝났다.”
“저, 전하. 부디....”
얼굴에 피가몰려 붉게 달아올랐다. 아버지의 악귀같은 모습에 그가 하얗게 얼어 붙어있다가 트라이덴이 아버지에게 달려들었다.
“전하! 그만하십시오!”
소란을 듣고 달려든 왕자비를 보고 아스토르가는 손을 놓았다. 배려없이 손을 놓았기 때문에 체자레는 다시 바닥에 떨어져야 했다.
“폐하의 아드님이십니다! 그렇지 않아도 궁금해 하시는걸, 제가 겨우 말려놓았습니다. 이 사실이 귀에 들어갔다가는, 엄청난 일이 일어날지도 모릅니다!”
왕자비의 말에 아스토르가가 흥, 하고 한숨을 쉬었다.
“저놈을 어서 다시 별궁으로 가둬라. 네놈에게 베풀 자비는 없다. 네놈은 죽을 때 까지 거기서 살거라. 그리고 오늘부터 이 녀석에게 줄 귀한 밥은 필요 없다. 백성들이 천민을 먹이려고 밥을 바치는건 아니니. 앞으로 한끼만 주거라.”
일어나지도 못하는 소년의 양 팔을 호위기사들이 잡아들었다. 그들은 이 작은 소년에 대해 안타까워 하는 듯 했지만, 소년을 죄인처럼 질질 끌고 나갔다. 트라이덴은 이 엄청난 사실을 믿을수가 없었다. 아버지는 역정을 잘내시는 편이었지만, 이렇게 악귀같은 얼굴을 하고 있지는 않았다. 그는 체자레의 몸이 닿은것도 혐오스러운지 시종을 시켜 손을 닦았다. 그리고 트라이덴에게도 며칠동안 금족령이 내려졌다. 트라이덴은 울어도 보고 소리도 질러보았다. 하지만 아버지의 의지는 굳건했고, 그는 울기만 했다.
“천한놈은 천한 행동을 할 것이다. 천한 놈은 이유가 있어 천하다고 부르는 법이다. 저 놈은 언젠가 우리 뒤통수를 칠것이야. 알겠느냐, 트라이덴? 저놈을 믿으면 안된다.”
“...하지만 아버지의 동생이잖습니까! 제겐 숙부란 말입니다!”
트라이덴이 울며 소리치자, 아스토르가가 말했다.
“나는 그 천한놈을 핏줄로 인정하지 않는다. 너는.... 아니다.”
마침내, 금족령이 풀렸을 때, 그가 가장 먼저 했던 일은 바로 할바마마를 찾아가는 것이었다. 누워있지만 대화는 가능했으므로.
“할바마마!”
시체처럼 누워있는 노인을 향해 그가 다가갔다. 이제 그의 나이는 100살을 넘겼고, 모두가 살아있는게 기적이라고 말하는 상황이었다.
“아나스타샤?”
그가 물었다. 그는 촛점이 없는 텅 빈 눈으로 이리저리 고개를 돌려 그 아나스타샤라는 이를 찾았다. 할바마마는 어느때에서 부턴지 정상으로 사고하시다가도 전대 성녀인 아나스타샤만을 찾고는 했다.
“할바마마! 저 트라이덴입니다.”
“그렇군, 아나스타샤가 아니군.”
그가 콜록 거리며 기침했다.
“무슨 일이냐. ”
텅 빈 눈동자로 그가 자신의 손자를 보았다.
“숙부가, 체자레 숙부가, 구금되었습니다. 밥도 하루에 한끼밖에 안주신다고 하셨어요. 이러다가 형은 굶어 죽을지도 모릅니다!”
“체자레?”
일순 눈에서 촛점이 돌아오는 듯 했다.
“아바마마좀 말려주십시오. 체자레 숙부를 미워합니다. 제발.”
“....그 아이.”
그의 금색 눈에 눈물이 흘렀다. 그는 눈을 깜빡였다.
“그 아이에게 못할 짓을 했구나.”
왕은 한참동안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그녀에게도........”
왕은 바들바들 손을 들었다. 그러나 손은 들어도 그것은 허망하게 내쳐질 뿐이었다.
“이것도 나의 업보이자 저주겠지. 나이는 먹어가고, 몸은 움직여지지 않는데. 숨은 쉬어진다니 말이야........”
그가 중얼거렸다. 그리고 트라이덴을 바라보며 말했다.
“너는 다정하구나.”
그 말이 체자레와 닮아 있었다. 그 말에 트라이덴이 간절한 얼굴로 할바마마를 보았다.
“걱정 말거라. 그아이를 위해 안배해둔 것이 있으니.......”
그가 기침했다. 그 말에 트라이덴의 얼굴이 환하게 물들었다.
*
그가 체자레를 만났을 때, 그는 새하얀 수의를 입고 있었다. 처음으로 별궁이 아닌 본궁에 있는 그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죽은 자에게 입히는 옷을 입은채, 얼굴 역시 베일로 감쌌다. 체자레의 유모가 울음을 꾹꾹 눌러참는 것이 보였다.
“저게 뭐지?”
그가 아무나 옆에 있는 사람에게 물어보았다. 트라이덴의 옆에 서 있던 교사가 말했다.
“신관이 되는 의식입니다.”
“....왜 옷을 저렇게 입고 있는데? 아니, 지금 왜 저러는건데? 신관이 된다고?”
“왕자 전하 스스로 선택하신 일입니다. 이제는 체자레 왕자 전하께서는 더 이상 왕자가 아닙니다. 그는 왕위 계승권을 스스로 포기했습니다.”
“...그게 무슨.”
할아버지는 병상에 누워있고, 섭정왕인 아스토르가가 옥좌에 의 앞에 체자레는 신관들의 부축을 받아 무릎을 꿇었다 얼굴까지 가리는 베일을 썼으므로 앞이 보이지 않는 듯 했다. 아스토르가는 차가운 금색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저, 체자레 루고(왕족을 뜻하는 미들네임) 켄셀라이그는 오늘 부로 신의 종이 됩니다. 속세의 모든 인연을 끊고, 속세의 모든 권리를 포기합니다.”
오랜만에 듣는 체자레의 목소리에 트라이덴이 뛰쳐나가려고 했다. 하지만 왕자 옆에 서 있는 그들은 미리 언질을 받아서인지 그를 꼭 붇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트라이덴은 모두를 바라보았다. 애정따윈 없는, 별궁에 외로이 고립되어 있는 소년을 향한 시선. 경멸, 혐오가 뒤범벅되는 그 시선. 심지어는 신관들도 꺼려하는 그 얼굴을 보았다. 트라이덴에게 그들은 어떠했던가. 단 한번도 저런 표정을 지어 본 적이 없었다. 할바마마는 뭐하는 것일까. 설마 이게 안배라는 것일까? 아니, 이건 체자레의 선택이라고만 했다. 어른들은 이상하다. 체자레는 누구보다 왕족같은데 천하다고 한다. 체자레는 천하지 않았다. 누구보다 고귀했다. 그 누구보다 따스한 그의 형이다. 숙부이다. 체자레가 얼마나 따뜻하고 다정한 사람인지 알아보려 하지도 않은채, 그저 천한 피라고 매도한다. 트라이덴은 답답했다.
“이 순간, 저는 체자레 루고 켄셀라이그가 아닌, 신의 종인 견습 사제 체자레입니다.”
“형! 혀엉!”
트라이덴의 목소리에 체자레가 움찔 하는게 보였다. 왕족의 성인 ‘켄셀라이그’라는 성을 포기하고 체자레가 된다고 하였다. 이제 형이라는 인연도 끊어져 버린 것인가. 그가 몸을 틀었다. 몇몇 사람들이 붙잡으려 했지만 트라이덴이 향하는 게 그의 방이라는 것을 알고 붙잡지는 않았다.
복잡한 예식이 끝이나고 체자레가 신관들의 손을 의지하여 한걸음, 한걸음 힘겨운 걸음을 뗄 때였다. 이 하얀 베일은 시야를 완전히 가려 그는 장님이 될 수 밖에 없었다. 속세와의 이별, 죽음을 뜻하는 수의를 산자가 입고 걸어나간다. 완벽한 신의 종이 되기 위해. 그리고 알현실을 나가, 회랑을 지나, 바로 마차를 타지 않고 스스로 걸어서 빠져나와 성문 앞에서 신전으로가는 마차를 타게 된다.
“혹, 혹여 왕손 저하를 보신 분이 계십니까?”
갑작스러운 소란이 일어났다. 방으로 돌아갔다고 생각했던 왕자가 보이지 않는 것이다.
*
트라이덴은 궁을 돌아다니는 것을 좋아했고, 그에게는 자신만이 아는 장소가 있었다. 체자레와 함께 오고 싶었지만, 그들이 만나는 것은 항상 트라이덴의 방이었으므로 못 왔다. 그는 그 누구도 자신을 찾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궁 안에 있는 모두가 꼴보기 싫었다. 심지어 체자레도. 멍청한 기사들은 그가 방에 돌아갔으리라 생각했겠지만, 체자레가 준 성력이 담긴 목걸이에 담긴 신비한 힘은, 창에서 뛰어내려도 그가 다치지 않게 해주었다. 그것을 실제로 쓰게 될지는 몰랐지만 어쨌든, 이 걱정 많은 형이 담아준 힘은 그가 다치지 않게 해주는 것을 기원했고, 트라이덴은 다치지 않았다.
넓게 트여 있는 정원이 있는데 이 정원 안에 틈새를 잘 비집고 들어가면 개구멍이 있다. 그리고 그 나무사이를 들어가 흙을 만지작거리면 그 안에 자그마한 비밀공간이 있다. 비밀 통로로 만들다 만 것인지, 그 곳은 아주 자그마한 방 이었고, 트라이덴은 가끔가다 이곳에 머무르고는 했다. 물론 어쩐지 숨이 막혀와서 자주 있지는 않았지만. 오늘은 끝장을 볼 생각이었다. 모두가 보기 싫었다. 어마마마도, 아바마마도. 그가 그렇게 무릎을 꿇고 있다가 솔솔 잠이 들었는데, 그가 깼던 이유는 후텁지근한 날씨와 습기, 그리고 숨이 막힌다는 것이었다. 아직 어린 트라이덴은 밀폐된 공간이라는게 무엇인지 잘 이해하지 못했고, 공기가 통하지 않으면 숨이 막혀 죽는다는 사실조차 제대로 몰랐다. 갑자기 호흡이 곤란하자 그는 소리쳐서 아무나 불렀는데, 그는 이곳이 비밀공간이라는 것도 잊은채 살려달라 소리치며 울기 시작했다. 무서웠다. 그러나 무엇을 해야할지 몰라서 더욱 무서웠다. 이곳은 깜깜했고, 나갈 공간이 어디있는지 보기도 힘들었다. 그리고 그것은 이 작은 방의 공기를 더욱 더 소모시켰고, 그는 헉, 헉, 하며 땀을 흘리며 아무나 애타게 불렀다. 의식이 희미해지려 할때 그는 자신의 바로 위에있는 입구가 열렸다.
“왕손!”
목소리가 들렸다. 그것은 체자레의 목소리였다. 갑작스러운 빛에 시야가 겨우 식별이 되니 그의 엉망인 모습이 보였다. 언제나 깔끔하던 체자레의 모습과는 다르게 그의 머리는 헝클어져 있었다. 그의 새하얗고 깨끗한 옷에 흙이 덕지덕지 묻어있었다. 그의 얼굴을 보자 숨을 쉴 수 있었다.
“어서 손을 잡으십시오, 왕손.”
내밀어진 손을 잡고 올라가자 살 것같았다. 하늘엔 노을이 지고있는 것으로 봐서 그가 온지 다섯시간은 지난 것 같았다.
“괜찮으십니까? 다치신데는 없나요? 다행입니다. 목걸이에 남은 성력이 저를 당신이 있는 쪽으로 인도했으니까요.”
체자레가 그를 보려했지만 위로 넘긴 베일이 자꾸 흘러내려 시야를 가렸고, 체자레는 너무나 쉽게 그 베일을 뒤로 던져버린 채 그에게 다가왔다.
“형...”
그가 눈물을 머금었다. 체자레가 그것을 보며 얼굴을 찡그렸다. 오히려 화를 내야 될 것은 트라이덴이었으나, 정말로 아까까진 죽을 뻔 했던 공포심에, 가장 믿을만한 형이 있다는 사실만으로 안심이 되어 그는 눈물을 뚝뚝 하고 떨어트렸다.
“어찌 이렇게 어리석으십니까!”
“그거야, 형이 간다길래.”
“........”
“형이 작별인사도 하지 않고 쫓겨나듯 간다길래.... 그게 싫어서, 아바마마도 싫고 할바마마도 싫고 어마마마도 싫고, 다 싫어서........”
트라이덴이 훌쩍거렸다. 체자레의 엄한 얼굴이 풀려갔다.
“왜 신관이 되는걸 택한거야! 이제 우린 만날 수 없단 말이야, 형은 교황성에 있을거고, 나는 이곳에 있을거고. 이제 우리 같이 이야기도 못해. 별도 같이 볼수 없고, 책도 읽을 수 없고. 형한테 오늘 일어났던 일도 말 할수 없고, 형의 꿈도 들어줄 수 없단 말이야. 정말 왕위 계승권 때문에 포기한거야? 난 그런것 따윈 필요 없어, 형이 해도 돼, 하지만 형, 제발 날 떠나지 말아주라. 제발.”
그가 엉엉, 하고 울음을 터트리자 체자레가 그를 안았다.
“트라이덴. 약속한거 기억하고 있죠?”
“.........”
아. 이름을 불렸다. 언제나 왕손이라고 불렸던 그다. 하지만, 체자레가 처음으로 그의 이름을 불렀다. 약속, 그래 약속. 그 약속을 왜 물어본단 말인가. 그가 고개를 들어 물어보기도 전에 체자레가 그를 꽉 안았다. 그리고 절규하듯 말을 뱉어냈다.
“나도 싫었습니다. 트라이덴, 나도 싫었어요. 아바마마가 싫고, 형님이 미웠고 날 천민이라 손가락질 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미워 견딜수가 없었습니다. 하루하루가 지옥이었습니다. 나는 모두를 미워하고 그들이 불행하기를 바랐습니다.”
다정한 말, 토닥거리는 손길. 그 부드러운 손길을 이젠 다시는 느낄 수 없다. 트라이덴이 울음을 터트렸다.
“하지만 트라이덴, 당신을 만나 사랑할 수 있었어요. 트라이덴은 나때문에 살아갈 수 있다고 말했나요? 하지만 구원을 받은 건 저였습니다. 태어나서 불행했지만 당신을 만나 너무나 행복했습니다. 신에게 감사드리고, 신의 사랑을 믿었습니다.”
울음을 터트리는 트라이덴을 꼭 안아 볼 수는 없었지만. 트라이덴은 자신의 머리카락 위로 체자레의 뜨거운 눈물이 떨어지고 있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너무도 사랑하고 싶었습니다. 미워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 길을 선택한겁니다. 마음껏 사랑할 수 있게, 나는 이제 아바마마를 용서하고, 형님을 사랑하고, 이렇게 당신의 이름을 부르고, 당신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이젠 형님도 나를 경계하지 않을테고, 혹여나 제가 당신의 앞길에 방해되지 않을테니, 이 선택이 너무도 행복합니다.”
“하지만 이젠 형이 형이 아니게 되잖아!”
“우리가 형과 동생이라는건, 단순한 혈연으로 인해서가 아닙니다. 신께서 맺어주신 인연이기때문이니까요. 우리가 서로를 숙부와 조카로 여기는것과는 다르지요. 멀리 있어도 당신은 제 사랑하는 동생입니다.”
트라이덴이 고개를 들었다. 체자레의 얼굴이 보였다. 다정한 금빛눈에 어린 사랑이 보인다. 그때처럼 한결같은.
“이젠 천한 신분이 아니게 되었으니, 이름도 불러줄 수 있지 않습니까. 이제 저는 비로소 자유로워진겁니다. 축복해주세요, 트라이덴.”
그 부드러운 미소에 트라이덴이 흐느꼈다. 울음을 참으려 하지만 참을수가 없었다. 어떻게, 축복하겠는가.
“약속을 지키러가는거에요. 언젠가 당신이 다스릴 나라를, 이렇게 서로의 영역에서 지켜볼 수가 있잖아요? 영원히 헤어지는게 아닙니다.”
“........”
“난 사랑할 수 있어서 행복합니다. 이제야 서로 제자리를 찾은 것 같아요. 별이 보고싶다면 우리 같은 하늘을 바라봅시다. 재미있는 책의 이야기나 당신의 일과는 이제 편지를 주고 받아도 돼요. 나중에 제가 대신관이 되어 수도에 거하게 되면 만나볼수도 있을 겁니다. 추기경이 될수도 있겠군요. 그러니 울지말아요.”
트라이덴의 울음이 잦아들자. 그가 손을 들어 트라이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리고 그것은 트라이덴의 가장 슬픈 기억이었다. 그는 체자레라는 자신의 형에 대해 결코 잊을 수 없었다
“사랑합니다.”
그의 마지막 말은 이러했다, 신의 애정은 그것과 닮아있는 것일까. 아바마마는 성녀를 싫어했다. 신전역시 싫어했다. 아나스타샤의 이름을 올리는것도 싫어했다. 할바마마는 이지를 잃었고, 그의 임종이 가까워졌을때, 그의 신학스승이 도착했다. 그리고, 그의 눈 앞에는 익숙한 얼굴이 서 있었다. 자신의 형의 모습이. 반갑다고 말하며 환하게 웃던 그의 얼굴을 기억한다. 그것은 트라이덴에게 가장 기쁜 기억이었다. 할바마마의 붕어 이후로, 그의 유언장에 새로운 성인 ‘티게르난’과 선왕의 사유였던 땅의 지배권을 ‘공작’으로서 체자레에게 몰려준다는 것이 드러나 궁은 발칵 뒤집혔다. 하지만 그것은 상관없었다. 많은 문제 끝에 그가 공작이 되었어도. 그들은 여전히 형과 동생이었으니. 점점 커가면서 그들은 그들 사이에 있는 것들이 아무런 효력도 발휘하지 않는 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체자레가 다시 신전으로 돌아가고, 그가 여행을 떠난 것을 알았을 때도, 그는 걱정하지 않았다. 신전과 마찰이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도 그러했다. 그가 스무살이 되었을 때, 일은 일어났다.
차가운 눈. 무릎꿇은 왕. 그리고 그 앞에 서 있는 추기경. 그는 부들부들 떨었다. 이 상황을 믿을수가 없었다. 힘없이 매달리던 그 연약한 소년을 기억한다. 하지만 그 연약한 소년은 그 누구보다 화려한 옷을 입고, 맨발로 절을 하는 왕의 앞에 묘한 미소를 머금고 서 있었다. 그러나 그의 눈빛은 더없이 싸늘했다.
왜?
이젠 대답해 주지 않는다. 싸늘하고 알 수 없는 시선이 그를 향하는 것이다. 그들은 형제가 아니었나? 하지만 체자레는 대답해 주지 않을 것이다.
“교황께서 들어오라고 하십니다.”
체자레의 앞에 무릎을 꿇은 아스토르가의 얼굴은 창백했다. 어리고 천한 피를 지닌 이복 동생 앞에 무릎을 꿇은 그 굴욕감은 아마 트라이덴이 상상도 못할 것이다. 그의 옆에 있는 에르멘가르트 경이 주먹을 바르르 떨었다. 왕권이 신권에게 패배하는 순간. 그 역사적인 치욕의 순간을 그는 잊지 못한다.
아바마마를 사랑할 수 있다고 말했잖아, 나도 사랑할 수 있겠다고 했잖아. 미웠으면 차라리 처음부터 미웠다고 했어야지.
트라이덴은 바들바들 떨었다. 하지만 그게 아니라는것은 안다. 언제, 어디서부터 이렇게 일이 이루어진것일까. 체자레는 어쩌면 처음부터, 이러려던 것은 아니었을까? 사랑할 수 있어서 신전으로 들어갔다고? 이런 복수를 하려는 게 아니라? 교황의 탐욕을 위한 앞잡이가 되기 위한게 아니라? 아스토르가의 견제를 피하고 세력을 키워, 그를 무릎꿇리게 하며 자신을 제치고 왕이 되기 위한게 아니라? 교황이 마음만 먹는다면 체자레는 차기 왕이 될 수 있었다. 교황파의 세력은 너무도 강하여, 이제는 통제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천민이라고 손가락질 했던 그들은 이제 다음 보위는 트라이덴이 아니라 체자레가 이어야 할지도 모른다고 한다. 공작 위를 받는 시점에서 그는 반쪽짜리 왕족이었으니 말이다. 그는 공작위가 내려질 것을 알고 신전에 간 것일까? 알았다면 어떻게 알았던 것일까? 정말로 체자레는, 죽은 할바마마를 조종했던 것일까? 알 수 없다.
문득 천민은 이유가 있어 천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천함으로 고귀함을 논한것인가. 언제나 천민들은 사악하여 서로를 속이고 약탈한다는 말들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아아. 당신역시도 그렇다면 천민중에 하나였구나. 귀하고 소중한 마음을 주니, 차가운 배신이 되어 돌아온다. 그리고 저 천한 놈 앞에서, 아버지가 비는 것이다. 다음의 왕은 체자레가 아니라. 자신의 아들이 잇게 해달라고. 그리고 그는 또 교황앞에도 빌어야 할 것이다. 마치 ‘천민’이 왕에게 그러하듯.
트라이덴은 분노하기 시작한다. 천민은 이유가 있어 천한 것이다. 모든 이들은 꿍꿍이가 있을 것이다. 그는 체자레를 혐오한다. 그리고 그가 있는 신전을 혐오했다. 신따윈 없다. 신이 지닌 애정은 없는 것이다. 사랑한다고 했는가? 그토록 허망한 말이 어디있을까. 다정한 척 하던 체자레는, 무슨 조화인지 괴물이 되어 그때의 그 굴욕의 날의 외모에서 더이상 변하지 않았다. 늙어가는 그를 농락하기라도 하는 것 처럼. 그는 체자레를 볼 수록 그에게 더욱 깊은 증오를 품었다. 그러나 체자레는 이제 그의 증오따윈 상관없는 사람처럼 굴었다. 아버지가 미쳐서 피를 토하는 유언을 남기고 죽었고, 그는 선왕의 증오를 이어 받아 신전에게, 그리고 체자레에게 향했다.
그리고 체자레는, 언제나처럼 묘한 미소를 머금으며, 그의 공격을 받아쳐내는 것이다. 그리고 어느 날 마치 그를 농락하듯,‘천민 성녀’가 나타났다.
외전 - 별궁의 붉은 소년 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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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이번에 33키바 넘어쯤... 여러분 추천 부탁드려요~ 추천을 하면은 건강이 좋아져요 세상이 밝아져요! 뿅!!
아 이벤트 참여해주세여!! 참여율 저조합니다 -_-^(그놈은 멋있었다 주인공 이모티콘)
그리고 뜰에 이자카 커미션 스케치왔어요 아직 채색은 안했지만 보시면 침좀흘리실겁니다. 저 몇번이고 아 왜 쟤 주인공 안시켰지 ㅠㅠㅠㅠ
사실 3편에 나눠서 올리려고 했는데 외전주제에 3편이라니 히에에에엑 용서할수없다! 이러고 비축분 없이 상하로 올립니다. 결과 발표 전에 본편 한편으로 돌아올 예정..입니다 예정이요.. 못돌아올 수도 있음
여하튼 이번 외전 굉장히 중요한 외전입니다. 코멘트도 많이 달아주실거라 믿어 의심치 않음
믿음.
믿음
믿
어
요.
하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