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74 꽃이 지다 =========================================================================
[후기 꼭 봐주세요!!!]
“앤!”
반가움을 담아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어쩐지 눈물이 차오르는 것도 같았다. 하지만 비올렛은 애써 그 눈물을 삼켰다.
“그냥 가시려고 하셨던 거예요? 서운하게.”
“아니. 나는…….”
앤을 만나려 한다면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다는 것을 비올렛은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어쩐지 앤을 만난다면 어리광을 부리게 될 것 같았다. 앤은 비올렛을 가장 따스하게 챙겨주었던 사람이 아닌가? 애써 기대지 않고 혼자 성장하려 했지만, 앤을 만나면 그 날의 어린 비올렛이 되어버릴 것 같았다.
“어서 들어가 봐요, 자.”
앤이 다정하게 속삭였다. 비올렛은 머뭇거리다 앤이 방문을 열어주자 방으로 들어갔다. 비올렛의 방은 놀랄 정도로 바뀐 것이 없었다. 새하얀 창문 커튼, 그리고 이따금 선잠을 자다 일어났을 때 세었던 커튼에 수놓인 꽃의 개수, 테이블, 책상. 침대 모든 게.
“제가 매일 하는 게 여길 청소하는 거예요, 아가씨에 대해 추억하곤 하죠.”
“……앤도, 앤의 세상에 나만 있는 게 아니잖아. 이제 다른 사람을 모실 수 있을거야.”
과거를 붙잡고 있는 일처럼 쓸모없는 짓은 없다. 이 방에 있던 비올렛은 이미 죽은지 오래였다. 비올렛의 눈에 어렸을때의 자신의 모습이 스쳤다. 그땐 저기 저 책상이 왜 이렇게 높고 자기것이 아닌 것 같아 보였는지, 왜 이렇게 침대가 거대해 보였는지. 창은 왜 그렇게 컸는지. 저 책들은 왜 이렇게 어려워 보였는지.
“처음에 오셨을 때, 아가씨는 참 작았어요.”
“그래? 사실 난 지금도 그대로라 생각해.”
비올렛이 씁쓸하게 웃으며 말했다. 과거에 머물러서, 그렇게 마음에 담았던 사람을 생각하고 포기하지 못한다. 그렇다면 비올렛은 어린날의 그녀, 그대로가 아닌가.
“그럼요, 아가씨는 여전히 아가씨인걸요.”
비올렛은 앤의 얼굴을 보며 따스하게 웃었다.
“아직 어리신 아가씨는 참 순수하고 다정했죠. 저는 아가씨의 그런 점이 너무 좋아요. 그리고 지금 변치않았다는 그 말도 좋아요.”
“…….”
“아무도 원망하지 못하고. 원망하지 못하는 자신을 더 몰아붙이고. 사실 전 주인님께서도 그래서 아가씨를 버리시지 못했던 거예요. 아가씨는 그런 점이 사랑스러운 사람이니까.”
앤이 나긋하게 말하자, 비올렛의 눈시울이 붉게 달아올랐다. 전대 후작에 대해 이야기 하는 것은 별로 하고 싶지 않았다. 끝까지 그는 못된 사람이었으니. 그도, 그 아들인 에셀먼드도 어쩜 그리 비올렛에게 그렇게 잔인했는지.
“아가씨는 생각하지 못했지만, 아가씨가 들어오고 2년동안 후작가는 참으로 반짝거리며 빛이났답니다.”
“나 때문에 빛이 났다고?”
거짓말이겠지. 그렇게 말하는 듯한 비올렛의 물음에 앤이 대답했다.
“그럼요, 아가씨는 사랑스러웠으니까.”
“글쎄, 이곳에서 날 사랑스럽다 말할 수 있었을까.”
그 말에 비올렛이 웃었다. 그랬나. 모든 진실을 알기 전, 비올렛은 후작가에서 퍽 잘 지냈다고 생각했다. 세상은 아름다웠고, 오라버니들은 친절했고, 후작 역시 무뚝뚝하지만 그 나름의 애정을 보였으니 그런 세상이라면, 너무나 두려웠지만 저들을 위해 말룸과 싸우는 것도 나쁘진 않을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그녀가 원망의 늪에 빠진 이후, 그녀는 후작가를, 그리고 그 구성원들을 증오했다.
“그래. 생각해 보니 그때 주변을 돌아보지 않았던 것 같아.”
비올렛이 중얼거리듯 말했다. 그녀가 가진 상처에만 집중해서. 가장 가까이에 있던 앤마저 무시했다. 얼마나 이기적이었던가.
“저 창에서 뛰어내리려 하기도 하고. 생각해보니 앤, 그때 많이 혼났지? 미안해.”
비올렛은 그제야 사과했다. 신전으로 가기 전에도 생각하는 것도 너무나 괴로워 그녀에게 사과하는 것을 잊었다.
“그거야 당연하죠. 아가씨는 너무 괴로웠으니까.”
앤이 자신을 탓하는 비올렛을 보며 대답했다. 그녀의 얼굴은 울음을 참듯 일그러졌는데. 목이 메인 목소리로 대답했다.
“기다렸던 도련님이, 안 오셨었잖아요.”
“…….”
그에 심장이 두근거리며 뛰었다. 앤은 다 알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잠시동안 입술이 말라붙어 있었다. 마치 그녀의 심장을 꺼내 보여준 느낌이었다. 앤의 눈시울이 달아올라 있었다.
“제가 모를 거라 생각했어요?”
“잘 숨겼다고 생각했어.”
비올렛의 대답에 앤이 웃으며 과장되게 말했다.
“제가 아가씨를 얼마나 잘 아는데, 그런 것 하나 모르겠어요, 그러면 아가씨 직속 하녀 실격이죠.”
일부러 명랑하게 말하는 앤의 얼굴을 보며 비올렛은 할 말을 찾지 못했다. 그렇게나 표가 났나. 그렇게나…….
“물론 그걸 아는 건 저 밖에 없었어요. 아가씨는 은밀하게 잘 숨겨 오셨었죠.”
그 말에 비올렛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에셀먼드가 그녀의 마음을 알아주길 바라는 것은 아니었다. 앤의 얼굴은 모든 것을 받아줄 것 같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비올렛은 앤의 앞에서는 거짓말을 할 수 없었다. 앤은 비올렛의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 그랬어.”
비올렛이 말했다.
“참 이상하지? 어떻게 보면 이곳에 딸로서 입양 온 건데 오라버니였던 사람을 마음에 품다니.”
자조적으로 내뱉은 말에 앤이 말했다.
“그게 왜 이상한 일이죠? 어차피 저택에 떠날 거라 예정되어 있는 사람을 딸로 귀애할 수도 있어요, 그러나 친 혈육이 아니라는 것도, 곧 남이 될 거라는 것도 알고 있는 상태에서 어떻게 완벽한 ‘진짜 딸’로서 후작가에 있을 수 있겠어요. 그건 불가능한 거죠. 만약, 그게 가능했다면, 애초에 아가씨는 ‘성녀님’이라고 불리지 않았겠죠.”
앤의 말이 맞았다. 앤을 제외한 모두는 그녀를 성녀님이라 불렀다. 후작 역시도 비올렛의 이름을 단 한 번도 부르지 않았다. 이름이 불리지 않고, 성녀라 불렸다. 이별이 예정된 만남이었고, 알게 모르게 비올렛은 이곳의 일원이 아닌, 잠깐 묵었다 갈 사람으로 취급받았다. 그들을 가족이라 여겼던가, 하면 가족이라 여겼던 것도 같았다. 그러나 비올렛도 그들도 서로가 피 한방울 섞이지 않은 남이라는 것을 강렬하게 자각하고 있었다. 애초에 그 곳을 완벽한 ‘집’이고, 그 구성원들을 가족이라 생각하는 건 불가능 했던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한결 마음이 편해지면서도 씁쓸해졌다.
“이젠 소용없어. 내가 품은 마음도 이젠 끝났어. 내가 이기적이어서 이곳의 첫째 도련님을 빼앗아버렸어. 그래도 돌려줬잖아.”
“………”
“걱정마, 그 바보 같은 사람은 죄책감을 못 잊어 내게 그러는 거야. 바보같이 이젠 다 용서했다 했는데도. 그렇다니까? 사실 일년 정도를 함께 있었는데, 그가 왜 에이든의 형인지 그 이유만 백가지를 넘게 찾아냈어.”
비올렛이 씁쓸하게 웃었다.
“그래도 나, 내 스스로 그를 놓아주었어. 조금 자란걸까?”
그렇게 말하며 앤을 보니, 앤은 얼굴을 찡그리며 비올렛을 보고 있었다. 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알지 못한다.
“아가씨 저…….”
“에이든도 에이든이다 그렇지?”
앤이 무언가를 말하려 했지만, 비올렛은 에셀먼드에 대해 자신의 마음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게 별로 달갑지 않았다. 이야기를 하다 깨달았지만. 어찌되었건 저택 안에 살면서 그를 마음에 품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그를 원했고, 죄책감에 따른 그의 선택을 이용해서 그를 끌어들였다. 죽을 고비도 몇 번 넘기게했고, 실제로 죽일 뻔했다. 비올렛은 에르멘가르트 가문의 이물질이 아니라, 재앙이자 저주였다.
“그래도 내 방을 그대로 두다니 에이든치고 섬세하잖아?”
그럼에도, 그녀가 머물렀던 이 방은 왜 변함없이 그대로 있는 것인지. 쓴웃음이 나왔다.
“에이든 도련님이 섬세하다고요?”
앤의 목소리가 뾰족하게 튀어나왔다. 그것이 못마땅한 기색이었다. 비올렛은 웃으며 말했다.
“봐, 내 방은 하나도 변한 게 없잖아. 그대로 말이야.”
“그건 당연한 거고요.”
앤은 부정할 수 없는 듯 했다. 만일 에이든이 섬세하지 못한 성격이었다면, 비올렛이 떠난 시점에서 저 방은 깨끗하게 비워졌을 터였다. 절대 주인이 돌아오지 않을 방이었기에.
“에이든은 사실 생각해 보면, 꽤 섬세해. 내가 말했던 걸 기억해뒀다 선물로 준 적이 있었거든.”
“선물이요?”
앤이 물었다. 도저히 믿지 못하겠다는 태도에 비올렛은 에이든은 여전히 앤에게 바보취급 받는구나 생각하며 말했다.
“난 이 저택에 어울리지 않다고 생각했어. 그래서 저택 안에 제비꽃이 없는 것도, 그런거라 생각했지. 정원은 언제나 화려한 꽃만이 가득하잖아? 내 이름과 같은 제비꽃은 없어 그게 어쩐지 서글프더라고. 에이든은 그런 날 보고 감수성 많은 소녀라고 놀렸지.”
“…….”
“하지만, 그래도 내 생일이 다가오니까 가을인데 미리 후원에 제비꽃을 심어놨다니까? 그 바보가 그걸 구해내라고 하인들을 얼마나 닦달했겠어? 봄에 피는 제비꽃을, 초가을에 심으라 명령했으니 말이야. 생각해보면 참 그애 다워.”
비올렛이 킥킥거리며 말했다. 에이든과의 추억은, 비올렛이 에이든을 일방적으로 상처 입히긴 했지만 꽤나 즐거웠다. 상처입은 비올렛은 계속 다가오는 에이든이 부담스러웠다. 그 부담스러운 애정을 완벽하게 거부하지 않았던 것은, 그 상처입은 마음이 에이든을 보면 조금은 아물어 간다는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비올렛은 앤의 얼굴을 보았다. 앤의 얼굴이 심각하게 굳어 있었다. 비올렛은 앤의 태도가 의아했다. 그게 그렇게 놀랄만한 일인가? 앤은 할 말을 찾지 못하다 겨우 말했다.
“바보는, 에이든 도련님이 아니라 아가씨였군요.”
그것이 너무나 엉뚱한 말이라 비올렛은 고개를 갸웃했다. 앤이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꽃 말이에요, 사실 많은 의미가 있죠? 그래서 사람들은 꽃말을 만들어 사랑을 고백하곤 하죠. 그 에이든 도련님도 시수일레 아가씨께 꽃을 선물하기 전에는 꽃말에 대해 알아보곤 해요. 혹여나 이별의 의미가 되면 곤란하니까.”
“…….”
비올렛은 왜 갑자기 앤이 꽃말에 대해 말하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것이 비올렛이 ‘바보’라는 것과 무슨 상관이 있는 것일까.
“제비꽃에도 꽃말이 있다는 거 아세요?”
“제비꽃의 꽃말은 겸양이잖아.”
“맞아요, 제비꽃의 꽃말은 겸양이죠.”
꽃말마저 겸양을 상징하다니, 그 꽃말을 본 비올렛은 꽃말마저 비굴하게 고개를 숙이라는 의미로 받아들여 쓴웃음을 지었다.
그 모습을 본 앤이 미소를 지으며 입술을 열었다. 앤의 이야기를 멍하게 듣던 비올렛은 자신도 모르게 방을 박차고 뛰쳐나가버렸다. 엄청난 속도로 계단을 뛰어내려가 저택의 현관을 박차고 나온 비올렛은 잠시동안 호흡을 골랐다. 뛰어서일까, 아니면 앤의 말을 들어서일까 심장이 미친 듯이 두근거렸다.
그녀는 선택할 수 있었다. 지금 당장 대신전으로 돌아가 성도로 내려가는 방법과, ‘확인’하는 방법 이 두 가지를.
어떻게 할까.
심장이 두근거리며 뛰었다. 하지만 묻어두기로 하지 않았던가. 확인해봤자 달라지는 건 없었다. ‘어쩌면’이라는 말 그 뒤를 생각하는 것과 똑같은 행위였다. 비올렛은 자신의 앞에 아름답게 가꿔진 꽃을보았다. 정원은 봄을 맞이해 화려한 봄꽃들이 활짝 피었다. 그 정원을 지나 마차를 타서 대신전으로 돌아간다면 어쩌면 아무 일도 없을지도 모른다.
‘이상하지 않나요? 왜 그 제비꽃은 하필 후원에 심겨져 있는 걸까요, 만약 마음에 드는 꽃이라면 저택 앞 정원에 심으면 되는 거잖아요.’
‘그거야 후작가에 장식하기에 제비꽃이 너무 소박하니까, 숨기려고 그런 거 아니야?’
‘아가씨, 숨기려는 것도 여러 가지가 이유가 있죠. 떳떳하지 못해 숨긴다거나, 부끄러워서 숨긴다거나.’
비올렛은 저택의 뒤를 바라보았다. 정원과 후원, 어디를 가야 하는가?
‘아니면, 혼자서만 독점하고 싶어서 숨긴다거나.’
비올렛은 정원으로 몸을 틀었다. 마음이 약해지려는 것을 다잡았다.
‘그 제비꽃 말이에요, 에셀먼드 도련님이 심으라 시킨 거예요.’
비올렛은 그 말을 믿지 못했다. 귀족 가에 겨우 산에 피는 들풀 꽃을 심다니, 에이든같은 바보가 아니고서야, 말이 안된다고 생각했다. 비올렛은 해를 보았다. 해가 지평선에 깔려 아름답게 지고 있었다.
그때, 바람이 불어오며 짙은 풀내음이 느껴졌다. 그리고 비올렛은 결국 후원으로 뛰어갔다. 확인하고 싶었다. 그 마법같은 말을 듣고, 어떻게 확인하지 않는단 말인가. 그리고 후원에 도착하자 비올렛의 눈에서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후작가의 화려한 정원과는 반대되는, 후원에는 봄을 맞이하여 제비꽃들이 아름답게 피어나 있었다. 이전에는 아주 조그마한 면적이었지만, 후작가의 후원은 전부 다 제비꽃으로 뒤덮여 있었다. 그 아름다운 보라색 물결을 황금색 노을이 물들여가고 있었다. 그것은 마치 비올렛에게 어서 오라고 재촉하는 듯 했다.
‘아가씨는, 제비꽃의 꽃말이 겸양이라 하셨죠. 하지만 달라요.’
비올렛은 신을 벗은 채, 그 화단을 밟았다. 아무렇게나 놓인 신발이 데구르르 굴러갔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예전, 이 후원에 핀 제비꽃을 보며 그랬던 것처럼. 그땐 예상치 못한 선물에 기뻐했었다. 한발자국, 한발자국, 발을 스치는 앙증맞은 꽃잎의 감촉을 느끼며 비올렛은 꽃밭 한복판에 서서 그것들을 쳐다보았다.
‘’보라색‘ 제비꽃의 꽃말은 말이에요…….’
그녀의 눈에서 계속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비올렛의 눈물을 머금은 곳을 주위로 꽃봉오리진 제비꽃이 서서히 피어나기 시작했다. 그 선명한 보라색을 눈으로 보고 또 확인하며 비올렛의 눈에는 계속해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바보같은 사람.”
흐느끼지 않으려 했음에도 눈물이 나왔다.
‘보라색 제비꽃의 꽃말은 <진실한 사랑>이에요…….’
이것은 그가 그녀에게 바치는 고백이었던 것이다.
*
어떤 색을 원하냐며, 색 별로 꽃말을 줄줄이 읊어주는 화훼상의 수다스러운 말을 들은 그는 주저 없이 보라색 제비꽃을 후원에 심으라 명령했다. 들풀꽃마저도 꽃말이 있다는 것이 이상할 뿐이었다. 그리고 그 꽃말도.
왜 자신이 이런 짓을 하는 건지 모른다. 그저 그의 동생에게 들었던 말이 마음에 걸렸을 뿐이었다. 화훼상이 가져와 후원에 심은 풀꽃이 피어나는 것을 그는 무심하게 지켜보았다. 그녀의 이름이 제비꽃이라 했더니, 진실로 꽃마저 그 모습을 닮았다. 그 ‘보라색’ 제비꽃이 조그맣게 피어올라왔다. 이따금 새벽에 일어나면 그는 그 작은 꽃이 피어나는 것을 지켜보는 것이 일상이 되었다.
그리고, 후원에 숨겨진 비밀을 발견한 여자의 모습을 지켜보던 남자는 잠시 동안 머리를 맞은 것 같은 충격에 움직일 수 없었다.
그는 처음으로 아름다움이라는 단어가 무엇을 뜻하는지 깨달았다.
여자는 치마를 살짝 걷어 그곳에 발을 내딛었다. 선선히 불어오는 바람에 치마가 부드럽게 나부끼며 조그마한 발과 가느다란 발목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그 발은 한 걸음, 두 걸음 춤추는 사뿐한 걸음걸이로 그 꽃밭 안으로 들어갔다.
여자를 위해 번거롭게 준비한 이것이 어떤 마음에서 기인한 것인지 모른다. 그도 자신의 마음을 모른다. 단지 그것이 그가 형제들을 사랑한 것 같은 가족애가 아님은 알았다. 그가 저지른 죄에 기인한 죄책감인가, 아니면 그의 아비가 말한 대로 성스러운 여인에 대한 그릇된 연모인가.
그 마음의 형태가 무엇이라 명명하던, 중요한 것은 그가 비올렛에게 ‘마음’을 품었다는 사실이었다. 그러나 남자는 그것을 모르고 있었다.
그 순간, 여자가 환하게 미소 지었다. 가지런한 이가 드러나며, 그녀는 여태껏 본 적이 없는 웃음을 지으며 그 꽃들을 보고 있었다. 황혼의 노을빛이 그녀의 머리를 금색으로 물들였다.그 주홍색 노을을 얼굴에 담은 그녀의 눈동자 색깔은, 마치 후원에 피어있는 제비꽃과 같은 보라색으로 보였다. 그것에 범인들이 그렇게 예찬하는 그 여자의 고결한 아름다움은 사라지고, 지극히 세속적이며 평범하디 평범한 여자의 아름다움이 눈에 보였다.
후원에 핀 제비꽃 안에서 그녀는 미소 짓고 있었다. 그 미소가 너무나 아름다워 그는 본능처럼 그것을 영원히 자신의 것으로 소유하고 싶어 발을 내딛었다. 그러나 그가 그것을 붙잡으러 다가간다면 그것이 신기루처럼 사라져버릴 위태로운 것임을 알았기에 그는 발걸음을 멈추어야 했다.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지켜보는 것뿐이었다. 그러나 그 아름다움을 한순간 놓치는 것조차 아까워 그는 눈조차 깜빡일 수 없었다. 그녀가 겨우 수줍게 내보이는 기쁨을, 아름다움을, 그 미칠듯한 사랑스러움을 그저 고스란히, 그러나 타오르듯 갈망하여 눈에 담을 뿐이었다. 그 아름다움에 매료된, 아니, 이미 매료되어있던 그의 마음속이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그는 자신 안에 정열이 없다 생각했다. 그러나 이 불꽃은 예전부터 타오르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의 색깔이 푸르러 그것이 불꽃인 것을 몰랐던 것뿐이었다. 그래, 그랬던 것이다. 왜 그 이유를 몰랐는지 어처구니가 없을 정도였다. 이유는 너무나 간단했다. 그는 저 여자를 갈구하고 욕망했던 것이다.
제비꽃이 없다며 서글퍼했으니. 언제나 굳은 얼굴에, 이젠 다시 자신에게 보여주지 않을 미소가 자리하길 바랐다. 그가 그녀에게 바치는 ‘진실한 사랑’이라는 이름을 가진 꽃 속에 갇혀버린 그 모습을 보기를 욕망했기에. 자신만이 볼 수 있는 후원에 숨겨, 아무에게도 보여주고 싶지 않았기에. 그는 이런 짓을 저질렀던 것이다.
그제야 에셀먼드는 그 마음을 ‘사랑’이라 명명할 수 있었다.
*
비올렛은 그 꽃들을 내려다보았다. 자그마한 제비꽃, 하나하나는 그의 마음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그가 심어놓은 비밀스러우며 은밀한 사랑에 감싸여 있었다.
그가 품은 마음은 너무나 고요했다. 그러나 때로는 내비치는 그것이 너무나 격렬해, 비올렛은 그 간극에 그의 마음을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아무 감정이 없는 것처럼 그녀를 대하다가도 가문을 버리고 그녀를 평생 수호하겠다고 서약했다. 계약을 해지하자는 말에 뒤도 돌아보지 않고 계약을 해지했으나, 결국 그녀의 앞에 죽겠노라 말하며 그녀에게 달려왔다.
그래서 비올렛은 그 감정을 정의하고, 짐작하기 힘들었다. 그에 대한 자신의 마음을 억누르는 것도 힘겨웠는데, ‘어쩌면, 에셀먼드 에르멘가르트가 자신을 사랑할지도 모른다.’라는 사실을 생각하는 것 따윈 할 수 없었다.
이미 그는. 그렇게 몇 번이고 에셀먼드는 자신의 마음을 그녀에게 바쳤던 것이다. 이 후원에 핀 제비꽃을 심음으로써, 가디언의 서약을 함으로써, 죽겠다고 목숨을 바침으로써.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던 비올렛은 인기척을 느꼈다. 제비꽃의 옅은 향기가 갑자기 훅, 하고 짙어졌다. 등뒤를 돌아보자 후원에 심어진 나무 아래, 남자의 모습이 보였다. 남자의 얼굴은 멀어서 잘 보이지 않았다. 다만 확실한 것은 그는 비올렛을 계속해서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두근거리는 심장이 멈추기 직전 최후의 발악인 것처럼 뛰었다. 남자의 모습, 그것이 마치 환영과도 같아, 그녀는 몇 번이고 눈을 깜빡여야만 했다. 무릎을 꿇은 채 울고 있던 그녀는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녀는 지면을 박차고 그에게 뛰었다.
그녀는 처음으로 망설이지 않았다. 처음으로 두려워하지 않았다. 처음으로 자책하지 않았다. 그녀는 그녀가 절대 되고 싶지 않았던 이기적인 모습이 되었다. 에셀먼드는 언제나 억누르려했던 마음을 움켜쥐고 헤집었고, 또다시 비올렛의 마음은 터져 나왔다. 신발을 신지 않은 탓일까, 맨발로 그에게 달려가는 발걸음은, 어째서인지 너무나 달콤하고, 가벼웠다. 그리고 비올렛이 그의 앞에 섰을 때 마치 꽃을 안아들 듯 조심스럽게 허리를 감아드는 단단한 두 팔이 느껴졌다.
“다음엔, 붙잡지 않을 겁니다.”
그가 비올렛의 귓가에 나지막이 속삭였다.
“너는 항상 날 괴롭게 했으니까.”
언제나처럼 서늘한 경고와는 달리 그는 비올렛이 벗어나지 못하게 허리에 감은 팔에 힘을 꽉 주었다. 비올렛은 그를 올려다보았다. 짙은 파란 눈동자가 비올렛을 오롯이 담았다. 그는 평소와 같은 얼굴이었다. 그러나 깨닫고 보니 그 눈동자에는 언제나 비올렛을 향한 열기가 담겨 있었다. 그의 얼굴이 비올렛에게 다가온다. 그리고…….
바람이 불며 향기로운 제비꽃의 내음이 짙게 풍겼건만 비올렛은 그 향기를 맡을 수 없었다.
============================ 작품 후기 ============================
-여러분, 이번 편 코멘이랑 추천수 폭팔하는거 기대해두 대여..? ㅇㅅㅇ???? 이번편 코멘 500추천 2000찍을 수 있나? ?????저기대해두대여..?
안녕하세요, 금잔화꽃입니다. 저 필명 성혜림으로 바꿨어요. 네..출간할때도 이 필명으로 나갈 거예요.
네! 드디어 후원에 핀 제비꽃이 왜 후원에 핀 제비꽃인지 나타냈습니다. 이번편 진짜 퇴고 많이했던것같은데 제발 제발 제발 비문없어라 오타없어라 제발...
일단 에드시점의 비올렛을 보는 장면은 제가 정말로 쓰고싶었던 장면중 하나에요!
(연재되어있는거 기준으로 1. 체자레 지하감옥씬 2. 이자카 나오는 장면 다 3. 에드 가디언 맹세씬 4. 전쟁, 체자레가 트라이덴의 이마에 키스하는 씬. 4. 린도 무릎꿇는 씬. 5.바로지금)
뭐 제가 굳이 설명안해도 우리독자님들은 다 이해했을거야. 난 알아. 우리독자님들은 똑똑하거든!
사실 그래서 에드가 욕먹을 때 너무나 마음이 아팠던 것...... 에드는이미 94화에 비올렛에게 몰래 사랑을 고백했는데.. 흑....흐으윽...
네, 제비꽃의꽃말은 총 합치면 이것은 ‘겸양’이 되지만 제비꽃은 색별로 다르답니다.
보라색 제비꽃 – 진실한 사랑
노란색 제비꽃- 농촌의 소박한 기쁨
하얀색 제비꽃 – 겸손이었나? 소박한 어쩌고였나..?
삼색제비꽃 – 사색
이렇게요! 비올렛이 보라색이라는 뜻도 있지만, 에드는 그 꽃말을 듣고 보라색을 선택했던거죠. 의식적인지 무의식적인지도 모르게.
일단 울 독자님들이 그렇게 기다리던 장면을 보여드렸으니
2부의 퇴고와 교정을 위해 또 약 열흘간 휴재를 할까 합니다.
다시돌아오는 날은 15일에서 16일로 넘어가는 날이 될 것 (그때가 2부 최종 마감일임 흑..)
잦은 휴재 죄송해요 제가 지금 교정이랑 소설을 병행하는데 너무 힘들어서 한쪽에만 집중하는게 좋을 것 같아요... 저도 교정이란게 이렇게 힘들줄은 몰랐어요. 흑..세상을 너무 만만하게 봤던 것이다.
일단 책이 나올 일정이 4월달이라는 것을 감안하면, 지금 열심히 달려야죠... 그래도 좊잖아.. 제비꽃이 피는 계절에 후제꽃이 책으로 나오다니.. 그렇게 생각 안해요?!(아무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 독자님들이 서운해하실까봐. 그렇게 드시고 싶다던 우유 잼 이벤트를 준비했어요! !!!!!
이벤트 기간 내가 돌아오는 15일까지.
1, 2, 3등 공동- 우유잼/녹차,초코,얼그레이,커피중 택 1가능(우유잼이랑 섞이는거여요!)
4,5등-제가 심심해서 만들 석고방향제 모양은 아마 부엉이 또는 스마일일 듯.
1. 방법
팬아트,서평,짤방,독후감,패러디를 뜰에 올려주시면 됩니다.
-이때 중요한건 서평같은 경우 서평란에 올리지 말고, 꼭 뜰안에 마련되어있는 곳에 서평해주세요! 혹 진지한 서평을 남기실 분은, 서평란에 남겨줘도 상관은 없습니다만 이벤트가 참여가 안 돼요! 이벤트 성으로 서평을 남기면 넹.. 싫어하더라고요.
즉 서평란에 서평을 남기는건 상관없다! 그러나 이벤트 참여는 안된다! 이벤트를 참여하려면 뜰안에 있는 서평란을 애용해주셔요 ~^0^
2. 주의사항
-당연하겠지만 깨끗한 원료로...(라고하지만 서울우유와 매일 휘핑크림을 씀) 병을 소독해서 드릴건데, 식품인지라 변질의 우려가 있어요!
-이거 유통기한 2주일인데, 10일로 잡고 드세요. 일부러 양 적게 드릴거야!
-드시면 후기 꼭 뜰에 남겨주세요 ^0^!!
**후원쿠폰 주신 네티님, 츠루코님, 아이1004님(두번이나!!) 너무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완결나려면 멀었습니다. 4부 이제 시작입니다.
**돌아올 때 린도랑 샤를 커미션 가져올게요. 이제 이로서 후제꽃의 주요 등장인물은 모두 공식 그림이 생기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