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 차 한 잔 더 받으시죠 (3)
화를 풀기 위해 때리는 것은 아니었다.
빡!
한빈은 정확히 황색 빛이 감도는 점을 내려치고 있었다.
한빈이 진한 미소를 피워 냈다.
[용안(龍眼)으로 구결을 확인합니다.]
[용린검법의 기본편 중 속(速)을 획득하셨습니다.]
[속(速), 속(速), 속(速)]
이번에 나온 구결까지 속이 셋이 되었다.
의문도 잠시 한빈의 눈이 한계까지 커졌다.
구결이 들어오자 딱밤의 속도가 빨라졌기 때문이었다.
한빈은 기본편의 의미에 대해 대충 알 것 같았다.
기본편은 그 후 초식을 익힐 수 있는 몸을 만들어 주는 것이 분명했다.
한빈은 딱밤을 멈추지 않았다.
[용린검법의 기본편 중 속(速)을 획득하셨습니다.]
구결을 하나 더 모았다.
[속(速), 속(速), 속(速), 속(速)]
속이 네 개가 겹치자 이제는 어렴풋이 작대기 모양이 완성되었다.
그때 문제가 생겼다.
딱밤을 때리는 것만으로도 체력이 떨어지는 느낌이었다.
이제 딱밤 치는 것을 그만두려 할 때 한빈에게 새로운 황색 점이 보였다.
한빈은 망설이지 않고 점을 향해 손가락을 튕겼다.
딱!
[용린검법의 기본편 중 체(體)를 획득하셨습니다.]
‘어라?’
지친 몸이 회복되는 느낌이었다.
체는 체력을 높여 주는 구결 같았다.
입꼬리가 귀에 걸린 한빈은 딱밤을 멈추지 않았다.
더는 구결이 나오지 않자 한빈은 입맛을 다셨다.
[속(速), 속(速), 속(速), 속(速)]
[체(體), 체(體)]
기본편에는 속도에 체력을 더했다.
한빈은 일단 여기에서 만족하고 쓱 탁자의 건너편을 바라봤다.
이 공자는 기혈이 뒤틀렸는지 기절한 지 오래였다.
눈을 뒤집은 채 거품만 물고 있을 뿐이었다.
용무를 마친 한빈은 확실히 환기를 시킨 후 짐을 챙겨 든 후 태연하게 문을 열었다.
문 앞에는 팽경빈의 호위들이 각을 잡고 서 있었다.
호위 중 하나가 한빈을 위아래로 훑어봤다.
딱 봐도 한빈이 얼마나 쥐어 터졌나를 확인하는 것 같았다.
그들의 눈빛에 한빈은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자네들, 어서 들어가 보게.”
“무슨 일입니까?”
고개만 갸웃하는 호위의 말에 한빈이 고개를 흔들었다.
“둘째 형님이 차를 마시다 탈이 난 모양이야. 뭐든 과하면 탈이 나는 법이지.”
“네?”
팽경빈의 호위들이 깜짝 놀라 안으로 뛰어들었다.
잠시 후, 비명이 다실에서 새어 나왔다.
“악!”
기혈이 뒤틀린 것이었다.
사실 그대로 차 한 잔 마실 시간만 버텼다면 그런 불상사는 없었을 것이다.
아마도 호위 중 하나가 팽경빈에게 내공을 써서 건드린 것 같았다.
한빈의 미소를 본 철노가 물었다.
“공자님, 표정이 왜 그러십니까?”
“오랜만에 좋은 차를 마셔서 그래. 나중에 철노한테도 줄게.”
“무슨 차를 드셨기에······.”
“그건 비밀이야. 그건 그렇고 오늘따라 가슴이 뻥 뚫리네.”
“다행이네요. 공자님.”
그때였다.
이 공자의 호위들이 다급하게 들것을 들고 빠져나왔다.
한빈이 그 모습에 어깨를 으쓱했다.
“아무래도 이 공자님은 차가 몸에 안 맞았던 모양이네.”
“몸에 안 맞는다고 저럽니까?”
철노가 의심의 눈초리로 한빈을 바라봤다.
“주화입마에 든 모양이다.”
“차 조금 마셨다고 주화입마요? 저는 안 먹으렵니다.”
“설마 차 조금 마셨다고 저러겠어? 아마 철노를 괴롭혀서 천벌을 받은 게지.”
한빈의 말에 철노는 고개를 갸웃하다 며칠 전 이 공자 패거리에게 당한 옆구리를 어루만졌다.
그 모습에 한빈이 피식 웃었다.
철노는 몸이 아픈 게 아니라 마음이 아팠던 게 분명했다.
그것도 잠시 철노가 씩 웃더니 말했다.
“다음에는 제가 지켜 드릴게요. 공자님. 이래 봬도 제가 왕년에 날아다녔습니다. 제가 무공만 찾으면······.”
철노의 허풍이 시작되자 한빈이 손을 저으며 그의 말을 끊었다.
“알았으니 그만하자, 철노.”
* * *
며칠 후.
한빈의 처소에서 일어난 작은 사고는 조용히 덮어졌다.
이 공자 팽경빈은 답답한 마음에 애먼 천장만 올려다봤다.
창피한 일이기에 어디에 하소연도 못 할 처지였다.
게다가 자신은 첫째 공자와 함께 가문의 소가주 후보.
이 일을 떠들어 봐야 자신만 손해이기에 팽경빈은 수하들에게 이 일을 철저히 함구하려 지시했다.
며칠 전 일을 떠올리던 팽경빈은 이를 악물다가 고개를 흔들었다.
속이 끓는 것은 사실이었지만, 일단 원인을 분석해야 했다.
‘겁쟁이 한빈이 그런 악독한 수법을 쓴다?’
전혀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었다.
천장을 올려다보던 팽경빈은 뭔가 결심한 듯 눈을 빛냈다.
잠시 후 이 공자 팽경빈이 은밀히 호위조의 우두머리인 심미호를 불렀다.
“심 조장.”
대답한 심미호는 짧은 머리에 가느다란 얼굴의 여인이었다.
까무잡잡한 피부는 묘하게 검은 무복과 조화를 이루었다.
그녀가 답했다.
“네, 공자님.”
“내가 전에 얘기했던 계획.”
“막내 공자 건 말씀이신가요?”
“그래. 일단 수족부터 잘라.”
“존명.”
심미호가 간단하게 포권한 후 나갔다.
밖으로 나간 심미호는 주변을 둘러봤다.
사람이 있나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느껴지는 기척은 어디에도 없었다.
터벅터벅.
그녀는 어디론가 걸어갔다.
그녀가 사라지자 수풀 사이에서 그림자 하나가 튀어나왔다.
“시작한 것인가?”
그림자의 주인은 한빈이었다.
한빈은 야행복(夜行服)을 입은 채 몰래 이 공자의 처소를 감시하고 있었다.
한빈의 판단으로 이 공자는 절대 이대로 물러날 위인이 아니었다.
물러날 것이면 한빈을 건들지도 않았을 것이었다.
역시나 한빈의 예상대로 이 공자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한참을 보던 한빈은 다시 수풀로 사라져 천천히 걸어갔다.
지금은 기척을 굳이 숨길 필요가 없었다.
그만큼 내공은 만들어지지 않은 상태.
이 상태가 은신에 이렇게 도움을 줄 줄은 몰랐다.
* * *
이틀 후.
처소에서 꾸벅꾸벅 조는 한빈을 누군가가 조심스럽게 깨웠다.
“공자님!”
눈을 떠 보니 철노가 비 맞은 강아지처럼 처량하게 서 있었다.
“왜 그래? 철노.”
“지금 이렇게 졸고 계실 때가 아닙니다.”
“그럼 무슨 때인데?”
“이 공자님 쪽에서 이를 갈고 있다는 소문이 자자합니다.”
“왜 이를 갈고 그래? 음식이 잘 안 씹힌대?”
“공자님! 지금 농담하실 때가 아닙니다. 호위 중 몇이라도 불러서 처소를 경비해야 합니다.”
“설마 형님이 날 죽이러 오겠어?”
한빈이 아무렇지 않게 손을 저었다.
요즘 한빈은 밤에 처소에 들어온 적이 없었기에 쳐들어온다고 해도 위험은 없었다.
한빈이 처소에 없는 이유라면?
그것은 간단했다. 이 공자의 오른팔 심미호를 철저히 미행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만약, 자신의 처소를 호위한다면 그것은 스스로 발목을 잡는 것과 같았다.
그때부터 미행은 물 건너간 일이니까.
“공자님, 그럼 아예 호위가 있는 곳에서 함께 주무시는 게 좋습니다.”
“에이, 괜찮아. 철노.”
“괜찮기는요. 밤잠을 설치시는 거 다 압니다.”
한빈이 눈매를 좁히며 철노를 바라봤다.
자신이 야행복을 입고 활동하는 모습을 봤을까 하는 마음에서였다.
한빈이 물었다.
“내가 잠을 설치는 걸 어떻게 알아?”
“눈이 벌게져서 졸고 계시는 걸 보면 뻔합니다. 저한테는 솔직히 말씀해 주셔도 됩니다. 무서우신 거죠?”
“아, 맞아.”
한빈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오해받는 건 씁쓸했지만, 다행히도 자신의 야밤 행적은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은 것 같았다.
그때 철노가 옆에서 접시 몇 개를 꺼내 내밀었다.
“이거라도 드세요.”
“이게 뭐야, 철노?”
“공자님이 좋아하시는 만두입니다. 드시고 힘내십시오. 얼른 강해지셔야 제 마음이 놓입니다.”
“강해질 수 있을까?”
“꼭 강해지실 겁니다. 강해지지 못하시면 공자님도 저도 무사하지 못합니다.”
철노의 말에 한빈이 피식 웃었다.
사실 철노의 말 중에 틀린 점은 없었다.
지금 한빈이 조만간 경을 칠 거라는 소문이 하북팽가에 파다하게 퍼졌다.
거기에는 한빈도 동의한다.
이 공자가 가만히 있을 위인은 전혀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가문 내 암투에서 지금의 한빈을 따라갈 사람은 하북팽가 내에 아무도 없었다.
암투라는 단어만 떠올려도 신물 날 정도로 경험해 봤던 그였다.
한빈이 며칠 동안 모은 정보를 종합하며 미소 짓자 철노가 깜짝 놀라 뒤로 물러섰다.
“공자님, 또 왜 그러십니까?”
“내가 왜?”
“이번에는 실성한 사람처럼 입맛을 다셨잖습니까?”
“그건 만두가 맛있어서.”
한빈은 만두를 한 입 더 물었다.
일주일이 지나도 한빈에게 일어난 변화는 없었다.
다만, 팽가 내부의 시선이 다소 따가울 뿐이었다.
한빈도 이후 섣불리 움직이지 않았다.
그는 천천히 천장을 올려다보며 상념에 빠졌다.
철노는 그런 한빈을 보고는 방을 나갔다.
* * *
혼자 있는 한빈은 앞으로의 계획을 그렸다.
용린검법의 전설은 진짜였다.
하지만, 무림의 일반적인 무공과는 본질이 달랐다.
용린검법의 구결 중 기본편은 신체의 능력 자체를 올려 주었다.
내공이 부족한 한빈의 무공 수위는 일류 중에서도 약간 낮은 수준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구결 때문에 올라간 신체 능력을 계산한다면?
결과는 달라질 것이었다.
게다가 한빈에게는 남은 무기가 두 가지나 더 있었다.
그것은 전생의 지식과 용린검법이었다.
용린검법의 구결은 꾸준히 찾으면 되고 이제 던져 놓은 떡밥이 효력이 있는지를 확인해야 할 때였다.
심미호를 미행한 결과에 따르면 이 공자가 움직일 날이 머지않았다.
그들이 목표로 삼고 있는 것은 한빈이 아닌 자신의 호위인 수호사조라는 것도 미리 알아냈다.
게다가 그들이 던진 미끼가 뭔지도 알아낸 상태.
시간에 맞춰 움직이기만 하면 되었다.
“서서히 움직일 때가 됐는데······.”
한빈이 나지막이 혼잣말을 뱉을 때 철노가 급하게 문을 열고 들어왔다.
덜컹.
“공자님!”
철노가 한걸음에 달려와 한빈의 앞에 섰다.
순간 한빈의 눈이 빛났다.
팽경빈의 호위조인 수호이조에 조금이라도 변화가 생기면 알려 달라 철노에게 부탁했었다.
한빈이 자리에서 일어나 물었다.
“무슨 일야? 철노.”
“수호사조가 서쪽 벽 보수공사에 끌려갔습니다.”
“누가 데려갔지?”
한빈의 표정은 의외로 담담했다.
“이 공자님이 데려갔습니다.”
예상대로였다.
한빈의 입가에 자연스러운 미소가 퍼져 나갔다.
“가자.”
“공자님. 어디를 가시게요?”
“일단 따라와, 철노.”
한빈은 앞장서서 서쪽으로 걸었다.
철노는 보수공사 현장으로 가는가 보다 하며 한빈의 뒤를 따랐다.
서쪽으로 가는 길에는 한빈의 호위조인 수호사조의 숙소도 있었다.
한빈은 그 숙소가 보이는 길에서 발길을 멈췄다.
철노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는 보수공사 현장에 가서 따지려는 줄 알았는데, 갑자기 수호사조의 숙소를 앞두고 멈춘 한빈이 이해가 안 되었다.
철노가 물었다.
“왜 그러십니까? 공자님.”
“다 낡은 건물이라 비가 새지 않을까 걱정이 돼서 그래. 철노, 공방에 가서 옻나무 수액 좀 가져와 줄 수 있어?”
“옻나무 수액이라니요?”
“비가 새는 곳에 쓰려고 해. 그냥 두면 썩어서 무너질 것 같아서 말이지.”
“진짜 비 새는 곳에 쓰시게요?”
철노가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봤다.
그의 표정을 본 한빈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의심하지 말고 그냥 갖다줘. 철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