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화. 결자해지(結者解之) (4)
지시를 받은 한빈은 총관과 함께 가주전을 나갔다.
그때 팽강위가 다시 한빈을 불러 세웠다.
“바로 가지 말고 의당에 들르도록.”
“네, 가주님.”
“옷은 반드시 갈아입고.”
팽강위가 다시 당부하며 걸레가 된 한빈의 상의를 가리켰다.
한빈이 고개를 숙였다.
“네, 가주님.”
팽강위가 모두를 보며 말했다.
“오늘 회의는 여기까지!”
동시에 원로와 각주 들이 자리를 떠났다.
모두가 나가자 팽강위가 옆에서 지켜보던 집법당주 팽대위에게 물었다.
“집법당주!”
“네, 형님.”
“그런데 저 아이가 나를 아비라고 부른 적이 있던가?”
가주 팽강위가 가리킨 곳은 방금 나간 한빈이 있던 자리였다.
팽대위가 씩 웃었다.
“제가 알기로는 없습니다.”
“막내가 원래 저랬던가?”
“요즘 변한 것 같습니다, 형님.”
“나는 오늘부터 폐관 수련에 들 테니 동생이 대신 일 좀 맡아 주게.”
“아.”
팽대위의 표정이 왈칵 일그러지자 팽강위는 못 본 척 태사의로 걸어갔다.
* * *
총관과 함께 의당으로 걷던 한빈의 뒤를 소대섭이 급히 쫓았다.
“주군!”
한빈이 힐끔 뒤를 돌아보자 새파랗게 질린 소대섭이 넋을 잃고 서 있었다.
“왜 그래? 소 대주.”
“괘, 괜찮으십니까?”
“괜찮아, 그리고 침 바르면 나을 상처 가지고 호들갑 좀 떨지 마.”
“그게 어떻게 침 바르면 나을 상처입니까?”
“맞아요.”
뒤늦게 달려온 철노도 울먹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한빈이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나 급하니까. 나중에 이야기하자고.”
“참, 주군 이건 어떻게 합니까?”
소대섭이 묵직한 전낭을 들어 보였다.
그것은 방금 비무 비용으로 거둬들인 은전이었다.
한빈이 활짝 웃으며 말했다.
“그건 회식할 때 쓸 거니까 소 대주가 잘 보관해 둬.”
“지금 상황에서 회식이라니…….”
소대섭이 말이 끝나기도 전에 한빈이 이설영 총관을 바라봤다.
“총관님도 회식할 때 오시죠.”
“허허, 제가 참석해도 될까요?”
그리 싫은 눈치는 아니었다. 한빈이 말했다.
“그럼요. 당연하죠.”
소대섭이 둘의 대화에 기가 찬지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을 때였다.
한빈이 진지한 표정으로 옆에 있는 철노를 바라봤다.
“철노. 부탁 하나만 하지.”
“말씀하세요, 공자님.”
오랜만에 나온 부탁이라는 단어에 철노는 어느 때보다 공손하게 답했다.
그 모습에 한빈이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적색(赤色) 무복 좀 준비해 줘.”
“적색 무복이라니요?”
철노가 고개를 갸웃했다.
적색 무복이 있긴 해도 팽가에 무복은 회색 아니면 청색이었다.
아니 명문 정파에서 적색 무복을 입는 이는 없었다.
그때 한빈이 철노의 의문을 안다는 듯 말했다.
“앞으로 피 묻을 일이 많을 것 같아서 그래. 적색이면 별로 표시도 안 나잖아.”
“허, 공자님!”
철노가 귀청이 떨어질 정도로 소리를 질렀지만, 한빈은 아무렇지도 않게 손짓을 하며 총관과 함께 의당으로 향했다.
멀어지는 한빈을 본 철노가 시선을 소대섭에게 돌렸다.
그 눈빛은 이게 정상이냐는 뜻을 담고 있었다.
소대섭도 고개를 흔들었다.
정상이 아니라는 뜻이었다.
소대섭은 오늘 일이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얼마 전까지 피만 보면 기절하던 막내 공자 아니던가.
최근에는 이를 극복했다는 것만 해도 대단하다 생각했다.
그리고 한빈의 행동에 감복해 진정한 주군으로 모시기로 결심했다.
따뜻한 한빈의 마음과 철저한 지략을 믿은 것이지, 한빈의 무공을 믿은 것이 아니었다.
그런데 이 정도라니!
소대섭은 멀어져 가는 한빈의 뒷모습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물론 철노도 마찬가지였다.
* * *
하북팽가 접객당 한쪽에는 날이 선 몇 쌍의 눈동자가 있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번뜩이는 눈동자의 주인공이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대체 언제 오는 거예요? 벌써 두 시진이나 지났는데, 우리 가문을 무시하는 건지.”
“기별을 넣었으니 잠시만 기다리시지요.”
무씨검가의 총관은 무소율을 조심스럽게 달랬다.
그는 무소율이 이곳에서 사고를 안 치고 용건을 해결하기를 기도하고 있었다.
문제의 발단은 동생 무소위가 무소율의 약혼자인 팽한빈에게 맞고 들어오면서 시작되었다.
정당한 비무도 아니고 기습이라 들었다.
그러지 않아도 무씨세가에서는 파혼을 제안하기 위해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그런데, 그 기회를 팽가에서 먼저 준 것이었다.
게다가 여기까지 찾아왔음에도 벌써 두 시진 동안 묵묵부답이었다.
시시각각 찌그러지는 무소율의 표정을 본 무씨검가의 총관이 말했다.
“아가씨. 가주님의 말씀대로 파혼만 통보하고 떠나셔야 합니다.”
말을 마친 그의 표정에는 단 하나의 단어가 드러나 있었다.
‘좌불안석’
이번 일을 세가 간의 분쟁 없이 깔끔하게 끝내는 것이 그의 임무였다.
사실 한빈과 무소율의 혼약은 누가 봐도 무씨검가의 손해이기에 세가 내에 이를 반대하는 이는 없었다.
그의 표정을 본 무소율이 마지못해 말했다.
“네, 알겠어요, 장 총관님. 내가 뭐 뜯어먹을 게 있다고 팽가에서 머물겠어요. 깨끗하게 마무리 짓자마자 떠날 거예요.”
그때 접객당의 문이 열리고 훤칠한 사내가 들어왔다.
눈에 띄어도 너무 띄는 사내.
그것은 적색 무복을 입었기 때문이었다.
하얀 얼굴에 적색 무복.
누가 봐도 기생오라비 같은 분위기였다.
어찌 보면 광대처럼 느껴지기도 하고 말이다.
정체불명의 사내가 등장하자 무씨검가의 총관이 일어나 물었다.
“누구신지…….”
무씨검가 총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사내가 입을 열였다.
“저는 팽한빈이라고 합니다. 저를 찾으시는 손님이 있다고 해서 이렇게 왔습니다.”
한빈의 인사에 무소율이 미간을 좁히며 일어섰다.
표정에서 적의가 느껴질 정도였다.
“공자님께서 왜 오셨죠? 저는 가주님을 뵙기를 청했어요.”
“무씨검가의 가주님이 오셨다면 응당 아버님이 나오셨겠죠. 하지만, 지금 여기에 계신 분은 무씨검가의 가주님이 아니지 않습니까?”
가문 간의 예법에 맞는 말이었기에 무소율은 반박하지 못했다.
대신 한빈을 살펴보다가 코웃음을 쳤다.
“훗, 그런데 왜 늦으신 건가요? 혹시 어디서 맞고 오시느라 늦은 건가요? 대체 그 복장은 뭐고요?”
“면목 없지만 비무를 하는 도중 약간의 상처를 입었습니다.”
무소율이 눈을 흘기며 한빈을 살폈다.
얼굴은 멀쩡하지만 손등과 목 등 여기저기에 상처가 보였다.
무소율이 비릿한 웃음을 지었다.
“조금이 아닌데요. 맞고 다니시나 봐요.”
상처보다도 한빈의 마음에 칼집을 내려는 듯 무소율의 말은 집요했다.
한빈은 씩 웃었다.
다섯 명의 도객과 검을 겨뤘다는 것을 안다면 무소율이 이리 놀리지 못했을 것이다.
그것도 잠시, 한빈은 표정을 지우고 말했다.
“제가 가주님의 전권을 가지고 왔으니 뭐든 제게 말씀하시면 됩니다.”
정중히 용건을 건넨 한빈은 무소율을 바라봤다.
하북 제일의 미라는 항간의 소문답게 외모에서는 빛이 났다.
하지만, 독기와 야망을 함께 품고 있는 여인이었다.
한빈은 그녀의 머리에 꽂혀 있는 비녀를 바라봤다.
곱게 빛은 비단결 머리에 꽂혀 있는 것은 장신구가 아니었다.
전생의 기억에 의하면 그녀는 전투 시에 비녀를 무기로 사용했다.
한빈이 그녀의 비녀를 감상하고 있을 때 무소율이 말했다.
“훗, 가주님의 전권이라고요?”
무소율이 다시 코웃음 치며 한빈의 옆에 있는 하북팽가의 총관 이설영을 바라봤다.
그러고는 거만하게 턱짓했다.
한빈의 말이 맞느냐는 소리였다.
머리가 희끗희끗한 이설영도 안하무인인 무소율의 태도가 맘에 안 들었는지 감정 없이 답했다.
“가주님이 허락하셨습니다. 그에 따른 일을 처리하기 위해 제가 동행했습니다.”
“그렇다는 거죠?”
무소율이 한빈과 총관 이설영을 번갈아 보며 관자놀이를 매만졌다.
그 모습에 한빈이 말했다.
“용무가 있다면 빨리 말씀해 주시지요.”
한빈의 말에 무소율은 눈매를 좁혔다.
동생을 때려 놓고 저렇게 모른 척한다는 것이 그녀의 화를 더 돋웠다.
“진짜 몰라서 하시는 말씀이에요?”
“몰라서 묻는 겁니다.”
“왜 제 동생에게 해를 가했지요?”
“설마 했는데…….”
한빈이 의도적으로 말끝을 흐리자 무소율이 더욱 기고만장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게 무슨 말씀이죠?”
“벼룩도 낯짝이 있으면 그렇게 대놓고 말할 수는 없죠.”
“벼룩이라고요? 그걸 말이라고 하는 건가요!”
무소율의 눈썹이 꿈틀댔다.
한빈이 그녀의 표정은 무시하고 말을 이었다.
“석화교에서 망나니짓을 하다가 정당한 비무에 의해 쓰러진 건 세상이 다 아는 바, 그 망나니짓을 다시 들추겠다는 건 무슨 심보입니까?”
한빈은 ‘정당한’이라는 단어에 유난히 힘을 주었다.
“정당하다고요? 당신이 정당하게 우리 소위를 쓰러뜨렸다고요? 믿을 수 없어요.”
“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하북의 최약체라 불리는 당신이요? 우리 소위를 쓰러뜨려요?”
“사실입니다.”
“증명해 보시지요.”
“어떻게 증명하면 되겠습니까?”
“저와 비무를 해서 증명하시지요. 제가 이긴다면 그 말 믿어 드리죠.”
동시에 두 가문의 총관이 입을 벌렸다.
그리고 서로 눈짓으로 말리자는 표시를 했다.
“저, 아가씨.”
“공자님.”
두 가문의 총관이 동시에 한빈과 무소율을 말렸다.
그 모습에 한빈은 속으로 코웃음 쳤다.
무소율은 무소위가 패한 것에 대해 앙갚음을 하려는 의도가 분명했다.
파혼이야, 제안하면 그만.
그런데 그녀는 한술 더 떠 비무를 청하고 있는 것이다.
외부로 보이는 전력은 무소율의 압승.
즉, 한빈을 두들겨 패겠다는 의도였다.
하북팽가의 총관 이설영은 부뚜막에 앉은 것처럼 안절부절못했다.
급기야 자리에서 일어난 이설영이 손을 보이며 막았다.
“절대 안 됩니다.”
이설영이 안 된다고 한 것은 조금은 다른 의미였다.
조금 전의 비무를 본 이설영 입장에서 승기는 한빈에게 있었다.
하지만, 분명 의당에서는 일주일은 정양해야 한다고 충고했다.
그 상태에서 비무를 한다면?
하북팽가의 총관 이설영은 아무래도 사실을 밝히고 비무를 무산시켜야 할 것 같아 급히 말했다.
“제 말 좀 들어 보십시오. 우리 공자님은…….”
“잠시만요, 총관님.”
한빈이 그의 말을 막았다.
그리고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무소율을 바라봤다.
한빈이 말했다.
“저는 생산성 없는 비무는 질색입니다.”
“생산성이라고요?”
“뭐라도 나와야 몸을 움직일 거 아닙니까?”
한빈의 말에 옆에 있던 총관 이설영이 눈을 크게 떴다.
방금 있었던 다섯 명의 도객과 비무하기 전과 똑같은 상황이기 때문이었다.
총관 이설영은 한빈을 다시 봤다.
따뜻하기만 하다고 생각했던 한빈은 의외로 계산에 밝았다. 한빈의 이마에는 마치 실리주의라는 네 글자가 박혀 있는 것만 같았다.
총관 이설영이 한빈을 재평가하고 있을 때 무소율의 미간에는 깊은 골짜기가 패였다.
“내기를 하자는 건가요?”
“네, 맞습니다.”
“그럼 이긴 사람 마음대로 하는 것이 어때요? 동생에 대한 처리도, 우리 약혼도요. 저는 저보다 약한 남자는 질색이거든요.”
말을 마친 무소율이 머리를 뒤로 쓸어 올리며 한빈을 바라봤다.
한빈이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끊을 건 하루라도 빨리 끊는 게 좋으니 그렇게 하죠. 그럼 연무장으로 안내하겠습니다.”
한빈이 고개를 살짝 끄덕인 후 접객당을 빠져나갔다.
그 뒤를 바로 무소율이 따라가자 두 명의 총관은 하늘이 무너진 것처럼 천장을 바라봤다.
잠시 뒤, 한빈은 제일 비무장에 무소율과 마주했다.
여자치고는 큰 키에 기다란 팔, 그리고 하얀 피부는 그녀의 미모를 돋보이게 했다.
하지만, 그녀의 긴 팔과 다리는 검을 다루는 무소율에게 하나의 무기였다.
게다가 그녀의 무공 수위는 절정 초입.
이 공자 팽경빈의 무위와 비슷하다고 보면 되었다.
정당한 비무에서 이 공자 팽경빈을 이길 수 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