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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북팽가 검술천재-55화 (55/621)

55화. 이이제이 (3)

주군인 한빈을 떠올린 조호가 다시 재촉했다.

“아저씨들, 어서요.”

“그래, 알았다.”

무사들도 조호의 말에 화답하듯 속도를 높였다.

그들의 마음속에도 이제 한빈이 자리 잡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심미호가 전한 쪽지에 나온 길을 따라 달렸다.

한참을 가던 조호가 고개를 갸웃하며 선배 무사에게 물었다.

“그런데, 이 지도 정확한 걸까요?”

“누가 봐도 이 길이 맞잖아.”

“제 얘기는 어떻게 이렇게 정확하게 그릴 수가 있냐는 말이에요. 주군이 나간 건 해가 지고 나서잖아요.”

“허, 그러고 보니…….”

무사가 말끝을 흐리며 지도를 다시 바라봤다.

산자락을 세세하게 묘사해 놓은 지도는 밤에 그렸다고 보기에는 어려운 지도였다.

물론 이것은 한빈이 미리 준비해 놓은 지도였다.

이들이 좀 더 세심하게 지도를 봤다면 지도의 먹물이 바싹 말라 있음을 눈치챘을 것이다.

한빈은 이곳에 미리 방문해서 몇 번이고 머릿속에 그리며 계획을 짰다.

그중 계획에 없던 것은 천산혈랑이라는 마물의 존재였다.

이를 모르는 조호는 더욱 불안감을 느끼며 속도를 높였다.

“헉, 헉.”

속도를 높인 조호는 드디어 한빈이 지도에 표시한 공터에 도착했다.

어찌나 빨리 달려왔는지 일류의 경지에 이른 몸으로도 버티기 힘들었다.

숨을 몰아쉬던 조호가 눈을 크게 떴다.

“이게 대체…….”

조호의 앞에는 피바다가 펼쳐져 있었다.

대부분이 늑대의 사체.

그중 검은 복장의 무사들도 눈에 띄었다.

그들 중 몇은 숨이 붙어 있는지 쓰러진 채로 끙끙대고 있었다.

조호와 맹호사대 무사들은 다시 한빈의 쪽지를 확인했다.

한빈은 검은 복장의 무사들을 안 보이는 곳으로 옮기라 지시했다.

그 후 늑대의 사체는 한곳에 모으라는 지시도 내렸다.

조호는 한빈의 명령에 충실히 따랐다.

한참 동안 늑대와 살수를 옮기던 조호가 고개를 갸웃했다.

“아저씨들, 주군은 어디 있는 거죠?”

“그러게 말이다. 아무리 찾아봐도 안 보이네.”

“혹시…….”

조호는 살수들을 바라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그 모습에 무사 중 하나가 물었다.

“왜 그러니, 조호야?”

“이 새끼들이 주군을 죽인 것 같아요!”

“잠시만 기다려 보거라.”

“아니 이놈들이 죽인 거 맞는 거 같은데…….”

조호는 울컥하며 말을 잇지 못했다. 그것도 잠시 조호는 칼을 빼 들었다.

스릉!

* * *

본의 아니게 한곳에 널브러져 있는 살수 가운데는 흑천의 초특급 살수 혈화도 포함되어 있었다.

혈화는 난데없는 상황에 미칠 것 같았다.

주군이라는 놈이 어느 살수 단체의 우두머리인지, 하북팽가의 막내 공자인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상황은 억울했다.

누가 누굴 죽여!

혈화는 이렇게 외치고 싶었다.

어젯밤 일전에서 피해자는 자신과 수하였다.

말도 안 되는 얍삽한 수법으로 자신을 수렁에 몰아넣은 것도 놈이었다.

혈화는 복면 뒤에서 비릿한 웃음을 짓고 있던 놈의 표정을 잊을 수 없었다.

한마디로 살수보다 더 야비하고 살수보다 더 살수다운 놈이었다.

대체 누굴까? 하며 이를 갈고 있는데 한 무리의 무사가 들어오더니 그중 하나는 저렇게 울부짖고 있었다.

젊은 놈이 혈화의 목을 내리치려고 했을 때 나이가 지긋한 무사가 놈의 팔목을 잡았다.

물론 그는 뒤늦게 합류한 장삼이었다.

“조호야, 진정해라.”

조호의 팔목을 잡은 장삼은 한쪽 손으로 한빈의 쪽지를 내밀었다.

-분리수거 하되, 죽이지는 말 것!

분명 한빈의 필체였다.

“후.”

조호는 숨을 길게 몰아쉬며 살수를 하나하나 살폈다. 그 눈빛이 얼마나 날카로운지 정신이 살짝 들려 한 혈화는 재빨리 눈을 감았다.

잠시 숨을 몰아쉬며 분을 삭인 조호가 말했다.

“아저씨들은 마저 일 끝내세요. 저는 주군을 찾아볼게요.”

“그래, 아무래도 네가 체력이 좀 남으니 빨리 주군을 찾아봐라. 주군을 찾으면 이걸 불고.”

무사는 조호에게 뿔피리를 건넸다.

수호사대가 맹호사대란 칭호를 받으면서 가주에게 받은 뿔피리였다.

뿔피리를 받은 조호가 눈을 가늘게 뜨며 흔적을 찾기 시작했다.

차 한 잔 마실 시간이 지났을 때 조호는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산자락에서 한빈을 발견했다.

한빈은 가부좌를 튼 채 앉아 있었다. 문제는 그의 주변에 피 웅덩이였다는 것이다.

붉은 늑대와 한데 얽혀 있는 한빈의 모습 때문에 그 피가 누구의 피인지 감이 안 잡혔다.

조호는 재빨리 달려가 한빈의 완맥을 잡으려 했다.

하지만, 조호는 동작을 멈췄다.

한빈의 몸에 일어난 기이한 현상 때문이다.

“삼화취정? 오기조원?”

조호의 입에서 여러 단어가 튀어나왔다.

그것도 잠시 조호는 고개를 갸웃했다. 자신이 말한 삼화취정이나 오기조원과는 다른 현상이었다.

물론 조호가 삼화취정이나 오기조원을 직접 본 일은 없었다.

그럼에도 한빈의 몸 주변에서 나타나는 현상은 오기조원이나 삼화취정이 아니라는 확신이 들었다.

한빈의 몸 주변을 이상한 기운이 돌고 있었다.

그것은 마치 천자문 같은 느낌이었다.

그 천자문이 한빈의 몸 주변을 돌다가 다시 머릿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빨려 들어간 천자문이 다시 코로 나와 몸 주변을 휘돌고를 반복하는 중이었다.

그때였다.

아우-울!

잿빛 늑대가 나타났다.

자신들을 핍박하던 천산혈랑의 기운이 사라지자 피 냄새를 맡고 모여든 것이다.

하나, 둘…….

잿빛 늑대가 점점 늘어나자 조호는 재빨리 뿔피리를 불었다.

삑!

이제 나머지 대원이 올 때까지 한빈을 지키면 되었다.

아우-울!

포효를 내지른 잿빛 늑대가 조호에게 달려들었다.

서걱!

조호가 희미한 기를 두른 칼로 잿빛 늑대의 앞발을 베어 냈다.

하지만, 그것이 시작이었다.

놈들은 이성을 잃은 듯 으르렁대며 달려들기 시작했다.

한 번에 다섯 마리의 늑대가 달려들자 조호는 눈을 질끈 감았다.

놈들의 공격을 피하면 될 터이지만, 뒤에는 한빈이 가부좌를 틀고 있었다.

여기에서 피한다면 한빈이 위험했기에 조호는 늑대에게 자신의 몸을 내줄 각오로 칼을 세웠다.

그때였다.

흉포한 이빨을 드러내며 달려들던 늑대가 자리에서 멈췄다.

마치 인형이 되어 버린 것처럼 꿈쩍하지 않았다.

조호는 낯선 기운에 뒤를 돌아봤다.

그곳에서는 한빈이 눈을 빛내며 늑대를 보고 있었다.

조호는 늑대와 한빈을 번갈아 가며 바라봤다.

조호는 그제야 늑대가 왜 공격을 멈췄는지를 알았다.

그것은 한빈의 눈빛 때문이었다. 조호는 지금 한빈이 눈빛만으로 늑대를 제어하고 있다고 확신했다.

물론 이것은 조호의 착각이었다.

한빈이 천산혈랑의 내단을 흡수하고 위기에서 벗어난 것은 사실이지만, 눈빛만으로 흉포한 잿빛 늑대를 제어할 경지는 아니었다.

한빈이 은연중 뿜어내는 기운에서 천산혈랑의 기가 섞여 있기에 늑대가 반응하는 것이었다.

한빈이 손을 들자 조호는 움찔하며 한 발짝 뒤로 물러서려 했다. 한빈에 대한 존경심과는 별개로 심어져 있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하지만, 한빈의 손을 부드럽게 조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지켜 줘서 고맙다.”

한빈의 말투는 그 어느 때보다 포근했다.

처음 듣는 한빈의 따스한 말투에 조호가 말을 더듬었다.

“주, 주군.”

조호가 품에 안기려 하자 한빈은 재빨리 뒤로 물러났다.

“내 상처가 아직은 깊다. 얘기는 나중에 하고 대원들이 있는 곳으로 안내해라.”

물론 거짓말이었다. 한빈은 먼지가 잔뜩 묻은 조호가 부담스러웠다. 자신의 상태는 모르기에 한 행동이었다.

한빈의 말에 조호가 소매로 눈물을 훔치며 앞장섰다.

그 모습에 한빈이 피에 젖은 옆구리를 만지며 걸음을 옮겼다.

신기한 일이었다.

지금 한빈의 몸은 잠시나마 금강불괴가 된 느낌이었다.

한빈이 천산혈랑으로부터 받아들인 내공은 이십 년.

내단의 효용으로 원래 있던 십 년의 내공까지 회복이 되었다.

원래 있던 내공에 내단의 기운을 더하니 온전한 반 갑자, 즉 삼십 년의 내공이 단전에 들어선 것이다.

그 내공으로 ‘기사회생’의 기운을 일으켰다.

밖으로는 피에 전 것처럼 보이지만, 안쪽으로는 발톱 자국 외에 멀쩡해졌다.

이것은 누구에게 말 못 할 비밀이었다.

앞서가던 조호가 힐끔 돌아보며 물었다.

“저, 괴물은 그냥 놔두고 가나요? 주군?”

“우리 둘이 끌고 가기에는 아무래도 무리 같구나.”

“네, 알겠습니다. 주군.”

조호가 앞서 나갔다.

한빈이 자리를 떠난 후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천산혈랑의 상처가 점점 아물기 시작한 것이다. 한빈이 운용한 기사회생의 영향을 받은 것.

하지만, 끊어진 숨은 돌아오지 않았다.

기사회생은 구 할을 회복시킬 뿐, 끊어진 숨까지 되돌려 놓는 효용은 없었기 때문이다.

* * *

한빈과 조호는 숨 한 번 참을 시간에 살수를 모아 놓은 곳에 도착했다.

한빈은 오늘 길에 주운 행낭을 펼쳤다.

그 모습에 조호와 맹호사대 무사들은 한빈이 어떤 악랄한 수법으로 이들을 괴롭힐까를 기대하고 있었다.

천수장에서 자신들을 괴롭히던 한빈이라면 죽여도 곱게 죽이지는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분리수거 하되 죽이지는 말라는 문구는 한빈의 장난감을 뺏지 말란 뜻으로 해석하고 있었다.

분리수거란 자체가 이들을 물건 취급하는 것이니 그들이 착각하는 것은 아니었다.

행낭 속에서 한빈이 처음 꺼낸 물건은 은침이었다.

한빈은 은침에 약을 발랐다.

그 모습에 조호가 눈을 올망졸망 뜨며 물었다.

“무슨 독입니까? 주군.”

“독은 무슨 독? 너는 내가 독이나 쓰는 사람으로 보이느냐?”

“그건 아니지만…….”

조호가 말끝을 흐렸다. 사실 한빈이 독을 쓴다 해도 전혀 어색하지 않았다.

조호는 억울하다는 듯 선배 무사들을 바라봤다.

눈이 마주친 선배 무사들이 고개를 끄덕인다.

조호의 의견에 동의한다는 듯한 표정이다.

그때 한빈이 말했다.

“이건 해약이다, 조호야 ”

“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

한빈은 조호의 말에 대꾸도 아니 하고 은침을 혈화의 목덜미에 찔러 넣었다.

그러고는 행낭에서 몇 가지 구급약품을 꺼냈다.

“조호야. 너는 여기 있는 급창약을 발라 줘라.”

“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싸움이 끝났으면 동업자에 대한 대우를 해 줘야지.”

“동업자요?”

“어차피 사람 써는 일을 하니, 동업자가 맞지.”

한빈이 씩 웃었다.

잠시 뒤, 정신을 차린 혈화의 앞에 한빈이 해맑게 웃고 있었다.

복장을 보니 자신에게 마비 독을 바른 은침을 찔러 넣은 놈이 맞았다. 거기에 얼굴을 분명 하북팽가의 막내 공자였고 말이다.

이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 생각한 혈화가 말했다.

“나를 농락하지 말고 인피면구를 벗어라.”

“인피면구?”

“지금 네가 쓰고 있는 인피면구 말이다.”

“이건 내 얼굴 맞고 네가 쓰고 있는 게 인피면구지.”

한빈이 혈화의 얼굴을 가리키자 그녀는 입술을 앙다물었다.

한빈의 지적이 맞았다. 분명 자신은 인피면구를 쓰고 있다. 그런데 그것을 어떻게 알았을까?

혈화의 머릿속에 의문이 쌓여 갈 때 한빈이 말했다.

“그렇게 놀라지 말고 조금 건설적인 대화를 나누자고.”

“무슨 대화를 나눈다는 말이냐?”

혈화는 앙칼진 목소리로 소리 질렀다.

하지만, 그녀의 눈빛은 바람에 사시나무가 떨리듯 떨리고 있었다.

그녀는 내심 한빈의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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