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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북팽가 검술천재-56화 (56/621)

56화. 이이제이 (4)

잠시 침묵이 이어졌다. 한빈도 굳이 서두를 필요가 없었다.

지금 급한 것은 흑천의 살수들이지 자신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한빈의 혈화의 목덜미를 바라봤다.

연신 마른침을 삼키는 것이 눈에 보인다. 이제 일침을 놓을 때였다.

한빈이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임무를 실패한다는 것은 곧 죽음.”

한빈이 난데없는 말로 짧게 끊자 혈화는 침을 삼켰다.

꼴깍.

마른침을 넘긴 혈화는 한빈의 눈을 바라봤다.

잠시 자신이 살수라는 것을 망각하고 있었다. 한빈의 말대로 임무에 실패한 살수의 끝은 죽음이었다.

잠시 혈화의 눈을 응시한 한빈이 입을 열었다.

“죽음이 무마되는 것은 한 가지 경우뿐이지.”

“흠.”

혈화가 헛기침했다.

한빈이 피식 웃으며 말을 이었다.

“애초에 의뢰가 잘못되었을 경우!”

“아.”

혈화가 자신도 모르게 탄성을 질렀다. 한빈의 말은 그녀에게 한 줄기 희망이었다.

그리고 한빈의 말은 한 치의 거짓도 없었다.

살수가 용서받을 수 있는 것은 애초에 의뢰가 잘못됐을 경우가 맞았다. 의뢰가 잘못되었을 경우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첫째, 관아나 무림 단체에서 살수를 잡기 위해 거짓 의뢰를 할 경우가 이에 속한다.

둘째는 제거 대상에 대한 정보를 거짓으로 흘릴 경우고 말이다.

지금의 경우는 둘째에 속한다.

흑천이 이번에 받은 의뢰는 갑, 을, 병 중 병에 속하는 의뢰였다.

그만큼 난이도가 저 밑바닥이었다.

의뢰자가 제시한 하북팽가 막내 공자의 무력은 하(下).

지략 또한 하. 거기에 세력 또한 하였다.

물론 세가의 자제라는 특수성 때문에 적지 않은 돈을 받긴 했지만, 애초에 잘못된 의뢰가 맞았다.

그렇다면 왜 이런 의뢰를 했을까?

혈화의 의문을 안다는 듯 한빈이 사람 좋은 얼굴로 말했다.

“의뢰자는 내가 죽거나 흑천의 살수가 죽거나 상관없었겠지. 아마 흑천이 의뢰자의 뒤를 캐지 않는다고 착각했을 게 분명하고. 안 그래?”

“그, 그건…….”

혈화는 말문이 막혔다.

흑천이 강북의 최고 살수 조직으로 자리 잡은 것은 익명성 때문이었다.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받아들이는 의뢰는 뒤가 구린 고객들이 안심하고 맡기기에 좋은 조건이었다.

그런데 그들이 모르는 흑천의 비밀이 있었다.

철저하게 의뢰의 익명성을 추구하면서도 흑천은 의뢰자의 뒤를 밟아 그들의 신분을 장부로 만들어 놓고 있었다. 혹시 모를 일에 대한 일종의 안배였다.

그런데 저 막내 공자가 흑천의 비밀을 안다고?

그때 한빈이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그렇게 놀라지 말고, 나라도 그렇게 했을 거라는 뜻에서 한 말이야. 내가 하나 충고할까?”

“…….”

“나라면 의뢰자를 같이 끝장내겠어.”

“같이 끝장내라고?”

“솔직히 내가 의뢰자를 물어봐도 대답해 주지 않을 거잖아. 나는 기다렸다가 주변 인물 중에 박살 나는 쪽이 있으면 거들지.”

“흠.”

혈화가 헛기침하면 고개를 돌렸다.

한빈의 말 한마디, 한마디는 자신의 가려운 곳을 긁어 주고 있었다.

마치 자신을 바라보는 눈은 얼굴이 아닌 마음을 읽고 있는 것 같은 착각마저 들었다.

고개를 돌린 한빈은 단검을 빼 들었다.

혈화는 점점 얼굴 쪽으로 다가오는 한빈의 단검에 순간 움찔했다.

놀람도 잠시 한빈은 그녀의 손을 옭매고 있던 줄을 끊었다.

그리고 나지막이 말했다.

“이 단검은 여기에 놔둘 테니 수하를 데리고 가라. 그리고 여기 지도도 한 장 줄 테니, 나머지 수하도 찾고.”

한빈이 그녀의 옆에 단검과 지도를 놔 줬다.

그 지도는 첫 번째 살수를 만났을 때의 장소를 표시해 둔 것이었다.

“…….”

혈화가 아무 말도 못 하고 입만 벌리고 있자 한빈이 말했다.

“아마, 늑대 밥이 안 됐으면 살아 있을 거야. 그러니 몸이 회복되는 대로 서두르라고. 이제 곧 정의맹에서도 들이닥칠 테니 몸조심하고. 정의맹이 살수를 좋게 볼 리가 없잖아. 괜히 험한 꼴 당하지 말고…….”

한빈은 귀찮다는 듯 말을 맺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점점 멀어지던 한빈이 걸음을 멈추고 뒤돌아봤다.

“괜히 기척 내지 말고. 나도 골치 아프니까. 귀식대법 알지? 귀식대법.”

한빈은 엄지를 입술에 갖다 대며 웃었다.

혈화의 눈에 그 모습이 그리 나쁘게 보이지는 않았다. 한빈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혈화의 눈에 분노가 타올랐다.

물론 한빈을 향한 것은 아니었다.

“하남정가와 정화 부인이라? 어딜 먼저 쳐야 하지?”

혼잣말을 뱉은 혈화는 고개를 저었다.

고민할 필요는 없었다. 정화 부인과 관련된 하남정가 인물을 모두 치면 되니까 말이다.

* * *

흑천의 살수와 멀어지자 조호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 사람들 진짜 살수들이에요?”

“아니.”

“아까는 살수라고 하셨잖아요, 주군.”

“소 못 잡는 백정을 백정이라 부르지 못하듯 사람 못 잡는 살수도 살수가 아닌 게지.”

“아, 그럼 살수잖아요. 그런데 저렇게 놔줘도 돼요?”

“조호야, 사람이 허구한 날 쌈박질만 하고 살 수는 없는 법이다.”

“칼 밥 먹는 무사가 쌈박질 빼면 뭐 있나요?”

“때론 머리도 써야지. 너는 이이제이라고 들어 봤니?”

“이이제이요?”

“오랑캐는 오랑캐로 막는다는 전술이지.”

“그럼 오랑캐 하나는 살수고 하나는 어딘가요?”

“글쎄, 그건 오랑캐가 알아서 할 일이지, 내가 신경 쓸 일은 아닌 것 같다.”

한빈이 작게 웃으며 앞서 나가자 조호와 맹호사대 무사들은 뒤쪽으로 떨어져 한빈을 따랐다.

한빈이 오늘따라 유난히 커 보였다. 그 때문에 오늘만큼은 한빈의 그림자조차 밟기 싫었다.

뒤에 조호화 맹호사대를 달고 천천히 걷던 한빈은 늑대들의 사체가 쌓인 곳에 도달했다.

그곳에는 백여 구의 늑대 사체가 가지런히 정렬되어 있었다.

이것은 이번 사냥에 동원된 모든 문파가 기한까지 토벌해도 도달하지 못할 성과였다.

이 정도의 늑대를 토벌했다면?

절호곡 늑대 토벌 임무는 여기에서 종료해도 문제없었다.

한빈이 흐뭇하게 잿빛 늑대의 사체를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저 멀리서 한 무리의 무사가 흙먼지를 내며 달려왔다.

자세히 보니 앞장선 이는 심미호였다.

한빈은 하늘에 뜬 해를 보며 시간을 가늠했다.

심미호가 정확히 시간을 맞춰 온 것 같았다.

흙먼지가 멈추고 무사들이 한빈에게 다가왔다.

한빈이 지금 상황에 대해 막 설명을 시작하려는 찰나 심미호의 뒤에서 시커먼 신형 하나가 불쑥 튀어나왔다.

“대형! 이게 무슨 일입니까? 안 다치셨습니까?”

한빈의 어깨를 잡고 요리조리 살피는 이는 다름 아닌 악비광이었다.

이런 일에는 증인이 확실해야 하는 법이기에 심미호에게 알리라 했었다.

하지만, 이런 호들갑을 기대한 것은 아니었다.

“괜찮아, 그리고 악 공자가 잡은 어깨 말이야.”

“네?”

“지난번에 자네 창에 뚫렸던 곳이잖아.”

“앗, 죄송합니다. 형님, 그런데 이 피는 대체 뭡니까?”

“늑대 피.”

말을 마친 한빈은 주변을 가리켰다.

그곳에는 늑대의 사체가 즐비하게 쌓여 있었다.

“대체 간밤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무슨 일이긴, 보면 몰라?”

“이게 단순한 늑대 사냥이라고요?”

“그럼, 당연하지.”

한빈의 말에 악비광은 천천히 잿빛 늑대의 사체가 쌓인 곳으로 걸어갔다.

늑대의 상처를 본 악비광이 눈을 크게 떴다. 상처마다 쓰인 검법이 모두 달랐다.

늑대 하나를 잡는 데 다른 검법을 쓴다라?

이건 거대 문파에서도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초식은 달라도 쓰이는 검로는 일정한 법이었다.

“대체 이건…….”

“내가 칼질을 좀 화려하게 하잖아. 그리고 우리 맹호사대의 도움도 있었고.”

한빈이 조호와 맹호사대를 가리켰다.

조호는 한빈이 자신을 가리키자 머쓱하게 웃었다.

자신이 한 일이라고는 이곳에 와서 늑대 사체를 정리한 것밖에 없었다.

물론 그중 한 마리는 한빈에게 덤비던 늑대이긴 했지만 말이다.

한빈의 변명에 악비광이 고개를 끄덕인다.

“네, 대단하네요. 밤새 이 정도의 늑대를 잡았다니 이제 산에서 내려가도 되겠어요. 그런데 형님…….”

녀석이 말끝을 흐리자 한빈이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왜 그래?”

“유인은 어떻게 했습니까? 혹시 비법이 있으면 제게 슬쩍…….”

역시나 방심 못 할 인물이었다. 커다란 덩치에 비해 속에는 여우 대여섯 마리는 들어가 있는 것 같았다.

한빈이 딱 잘라 말했다.

“그건 영업 비밀이야.”

“아.”

악비광이 아쉬운 듯 탄성을 흘릴 때 멀리서 하북성의 군사들이 나타났다.

군사들의 뒤쪽에서 이번 토벌의 책임자인 정주섭이 나타났다.

“대체 이게 무슨 일입니까?”

“모두는 아니지만, 대부분의 늑대를 토벌했습니다.”

한빈이 늑대를 가리키자 정주섭이 눈을 가늘게 떴다.

“이게 모두 하북팽가에서 토벌한 늑대라는 말씀입니까?”

“물론입니다. 저희 말고 또 누가 있습니까?”

“험, 그런데 단독으로 움직이셨습니까?”

“늑대라는 놈은 말입니다.”

한빈이 잠시 말을 끊자 정주섭이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물었다.

“계속 말씀하시지요, 팽 공자.”

“늑대란 놈은 영악해서 자신보다 강한 무리가 옆에 있으면 도망갑니다. 그래서 최대한 약하게 보이는 게 이 작전의 핵심이었습니다.”

“험, 그런 제게 귀띔이라도 해 주시지요. 지금 하북팽가에도 기별을 넣었으니 집안이 뒤집혔을 수도…….”

“그건 염려하지 마십시오. 그런데 제가 말한 걸 흉내 내시면 안 됩니다.”

“저희는 못 쓰는 작전이라고 하시는 겁니까?”

“약하게 보이는 게 핵심이긴 한데, 진짜 약하면 늑대에게 물려 죽습니다.”

“허허, 꼭 정치판과 흡사…… 아, 아닙니다.”

정주섭이 재빨리 손을 저었다.

뒤쪽에 관병들이 들어서 좋을 이야기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빈을 바라보는 눈빛은 의미심장했다.

한빈을 보고 있자니 마치 정치판에서 십 년 이상 굴러먹은 관료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 눈빛을 받은 한빈이 재빨리 화제를 돌렸다.

“이제 절호곡에서 늑대가 내려오는 일은 없을 겁니다.”

“어허, 어떻게 확신하는지요?”

“제가 그 원인을 알아냈습니다.”

“그 원인이라면요?”

“마수 하나가 절호곡으로 이사를 왔더군요. 그래서 늑대가 밀려 넘어온 것입니다.”

“마수라고요?”

정주섭이 고개를 갸웃할 때였다.

멀리서 함성이 들려왔다.

“와아!”

그 함성 뒤에 고함이 주변에 울려 퍼졌다.

“우리 가문이 잡은 것이다!”

“뭐라고? 이것을 발견한 것은 우리 문파다.”

산자락이 떠나갈 듯한 목소리에 정주섭이 다급히 달려갔다.

천천히 정주섭의 뒤를 따르던 한빈은 눈을 크게 떴다.

지금 눈앞에는 두 문파가 병장기를 맞대고 있었다.

정주섭이 관병을 데리고 오니 지원 나온 문파 중 몇이 따라 나온 것 같았다.

양쪽으로 갈린 무리는 각각 깃발을 들고 있었다.

깃발을 보니 한쪽은 백도문이고 다른 한쪽은 강북 오대세가 중 하나인 황보세가였다.

그들은 왜 칼을 맞대고 있을까?

원인은 간단했다.

그들의 가운데에는 붉은 털의 거대한 늑대가 널브러져 있었다.

그 모습을 한빈은 어이없다는 듯 바라봤고 정주섭은 무림 문파 간의 갈등에 쓴 웃음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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