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화. 빈객 전쟁 (2)
변화란 두 글자는 낚시꾼들이 쓰는 밑밥과도 같아 누가 들어도 혹할 단어였다.
아니나 다를까 서재오의 표정이 바뀌었다.
“변화라…….”
서재오가 호기심이 동한 듯 상체를 기울이자 팽무빈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활짝 웃으며 말을 이었다.
“새로운 소가주 후보가 바로 도객이 아닌 검객입니다.”
“오호라, 팽가의 검객이라. 이거야말로 신선한 바람이군.”
“사숙님, 새로운 바람은 직접 확인해 보시는 것이 어떻습니까?”
“고맙네, 조카. 이런 좋은 정보를 줘서. 빨리 안내해 보게나.”
“그럼 편하신 시간에 제가 막내를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언제든 말씀만 하십시오. 사숙.”
“그럼 지금 가 보지.”
“지금 말씀입니까? 벌써 잠자리에 들었을 시간인데요?”
팽무빈은 손을 내저으면서도 올라가는 입꼬리를 주체할 수 없었다.
서재오의 안하무인인 성격이 만인에게 공평하다는 것은 분명 한빈에게 똥이 될 것이었다.
이렇게라도 해야 어느 정도 분풀이가 되지 않을까?
물론 궁극적으로는 한빈을 집안에서 내치는 게 목표였다.
아니나 다를까. 서재오에게 예상했던 답이 들려왔다.
“사질은 무인에게 밤낮이 있다고 보나?”
조카에서 사질로 호칭이 바뀌었다. 팽무빈은 서재오의 심기가 불편해졌음을 알고 있다.
공적인 관계로 가겠다는 말이었다.
사실 사숙이니 사질이니 하는 호칭도 그리 입에 붙지는 않는다. 자신의 어미인 정화 부인이 한때 화산파의 속가 제자였고, ‘정’자 배와 같은 시기에 입문했으니 사숙과 사질의 관계로 엮는다면 할 수 없이 따라야 하긴 했다.
뭐,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팽무빈은 일단 그의 장단에 맞추기로 했다.
“어르신의 말씀이 맞습니다. 제가 안내하겠습니다.”
“험, 어르신이랑 호칭은 과한 것 같군.”
말과는 다르게 서재오의 얼굴에는 웃음꽃이 피어났다.
서재오가 자리에서 일어나 매화 문양이 선명한 검을 허리에 찼다.
* * *
잠시 후, 한빈의 처소 앞.
팽무빈은 한빈의 처소 문 앞에서 똥 마려운 강아지처럼 어찌할 줄을 몰랐다.
자는 데에 쳐들어와서 한빈의 심기를 건드릴 생각이었지만, 문제는 안에 아무도 없는지 아무리 불러도 대답이 없다는 점이었다.
“사질,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 팽가에서는 손님 대우를 이 모양으로 하는 것인가?”
안하무인의 서재오가 팽무빈에게 화살을 날리기 시작했다.
“아, 아닙니다. 분명히 분명히 팽가 밖으로 나간 적이 없다고 들었습니다.”
팽무빈은 ‘분명히’라는 말을 몇 번이고 강조했다.
“그러면 대체 그 친구는 어디로 사라진 것이냐? 팽가에 개구멍이라도 있단 말이더냐?”
“죄송합니다. 제가 다시 알아보겠습니다.”
팽무빈은 살짝 고개를 숙인 뒤 수하에게 눈짓했다. 한빈의 행방을 알아보라는 신호였다.
“흠.”
서재오는 헛기침하며 못마땅한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달이 떴지만, 서재오와 팽무빈은 한빈의 처소에서 떠날 줄을 몰랐다.
그때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그들을 바라보는 두 쌍의 눈동자가 있었다.
* * *
한빈의 처소에서 조금 떨어진 조그마한 대나무 숲.
그곳에서는 대나무로 만든 흔들의자에서 한빈이 무말랭이를 먹고 있었다.
우물우물 무말랭이를 씹는 한빈의 시선은 자신의 처소에 고정되어 있었다.
그곳을 바라보는 한빈은 재미있다는 듯 입꼬리를 슬며시 올렸다.
그때 검은 그림자가 나타났다.
“주군, 지시하신 정보를 가져왔습니다.”
“심미호 부대주, 엄청 빨라졌네.”
“이 정도는 기본이죠? 그런데 말이에요, 주군…….”
심미호가 말끝을 흐리자 한빈이 아무렇지도 않게 턱짓했다.
“말해 봐, 심 부대주.”
“특근 수당은 챙겨 주실 거죠?”
“흠.”
“주군, 저 삼 주야를 뜬눈으로 새웠어요. 제 얼굴을 보세요. 무슨 바싹 마른 육포도 아니고…….”
심미호는 재잘거리며 자신의 업무에 대한 불평을 늘어놨다. 그녀의 불만은 거짓이 아니었다. 늑대 토벌 임무를 마친 후 심미호는 정화 부인의 주변을 감시하는 임무를 맡았다.
삼 주야를 뜬눈으로 새웠다는 것은 진실.
덕분에 팽무빈과 서재오가 한빈에게 들이닥칠 것도 미리 알고 있었다.
아마 처소에 있었다면?
귀찮은 일을 당했을지도 몰랐다.
심미호를 보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은 한빈이 말했다.
“걱정하지 마, 심 부대주 돈 많잖아.”
“제가 돈이 어디 있어요?”
“내가 심 부대주에게 맡긴 자금 있잖아. 그거 알아서 써.”
“헉!”
심미호가 화들짝 놀라 눈을 크게 떴다.
“왜 그렇게 놀라? 심 부대주.”
“지, 지금 말씀하신 금액은 너무 거금이잖아요.”
“그게 무슨 거금이야. 애들 코 묻은 돈 뜯은 거지.”
“황보세가에서 들어온 돈과 산동 백도문에서 들어올 돈을 제가 맡기셨잖아요. 은전으로 이백 냥이 넘는 돈인데……. 그러고 보니 지금 코 묻은 돈이라고 하셨죠? 황보세가에서 들어오는 돈을 코 묻은 돈이라고 하신 거예요?”
“에이, 왜 그렇게 놀라? 내가 실없는 소리 한 게 한두 번이야? 그건 그렇고 조사한 내용이나 내놔 봐.”
“참, 여기 있어요. 주군.”
심미호가 어느 때보다 공손하게 서찰을 내밀었다.
서찰을 읽어 나가던 한빈의 표정이 시시각각 변했다.
지금 서찰에는 서재오에 대한 정보가 자세히 기록되어 있었다. 화산파의 매화검수이며, 배분은 나이에 비하면 높은 ‘정’자 배였다.
그의 아비는 서안 만금 전장의 장주.
화산파에서 원로들의 신임을 흠뻑 받고 있다지만, 실상은 그저 돈줄에 불과한 인물이었다.
그 줄을 정화 부인이 잡았다는 건데.
급하다 보니 똥을 된장으로 착각한 듯했다.
가장 중요한 것은 한빈의 기억에 서재오란 이름은 없었다.
지금 매화검수인 서재오가 전생 기억에 없다는 이야기는?
이것은 일찌감치 요절할 상이라는 것이다.
서재오와 정화 부인에 관련된 정보를 다 읽고 난 한빈이 슬며시 입꼬리를 올리며 서찰을 심미호에게 다시 건넸다.
“이건 심 부대주가 알아서 태워.”
“왜 그러세요?”
“내가 아직 삼매진화로 서찰을 태울 수준은 아니잖아.”
“풋, 그게 아니라. 정보가 마음에 안 드시나 하고요.”
“이 정도 정보면 훌륭하지, 마음에 들어. 들고말고.”
“그런데 왜 태우라고 하시는 거예요? 보관해 뒀다가 필요할 때 꺼내 보시죠.”
“아, 그건 그렇지…….”
한빈은 말끝을 흐렸다. 심미호와의 대화에서 전생과는 다른 자신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심미호가 전달한 서찰은 비교적 자세했다.
그런데, 그 방대한 분량을 단번에 기억하다니 이건 새로운 능력을 발견한 것 같았다.
상단전이 개방된 것일까? 한빈은 자신도 모르게 머리를 매만졌다.
그 모습에 심미호가 물었다.
“혹시 어디 안 좋으세요?”
“아니 괜찮아. 말린 무말랭이라도 있으면 두고 가.”
“이거 마지막이에요.”
심미호는 품속에서 극양지기를 품은 말린 무말랭이를 꺼냈다.
한빈은 경극을 구경하듯 자신의 처소를 바라봤다.
결론은 간단했다. 굳이 마주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결심한 한빈이 심미호를 바라봤다.
“내일, 다시 천수장에 입소한다.”
“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한 달 정도 여기 머물기로 했잖아요, 주군.”
“계획이 바뀌었다.”
“저놈 때문인가요?”
심미호가 멀리 떨어져 있는 서재오를 가리켰다.
“…….”
한빈은 말없이 웃음만을 띠었다. 이것은 동의한다는 의미. 심미호가 발끈하며 말했다.
“차라리 화산파에서 온 빈객을 죽여 버리죠, 주군.”
“심 부대주?”
“네, 주군.”
“심 부대주가 호위야, 살수야? 화산파 놈까지 죽이자고 하면 어떻게 해? 내가 타 문파하고 관계에 신경 쓰라고 몇 번이고 말을 했어 안 했어?”
한빈의 호통에 심미호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봤다. 주군인 한빈의 말에 틀린 점은 어디에도 없었다.
다만, 한빈이 다른 문파와의 관계를 돈독히 했냐? 하면 절대 아니라는 데 심미호는 은자 백 냥을 걸 수 있었다.
정의맹 소속의 문파와 세가들의 주머니를 탈탈 턴 것이 바로 얼마 전의 일이니 말이다.
하지만, 한빈은 전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문제는 화산파의 빈객이 아니었다.
한빈이 보기에는 정화 부인이 다른 빈객을 데려올 가능성이 컸다. 정화 부인의 성격상 하남정가에 손을 벌려서라도 힘을 키울 것이었다.
한빈은 번개처럼 하북팽가의 대문을 나섰다.
하북팽가의 경비 무사가 박도를 쥔 채 한빈에게 포권했다.
“사 공자님, 잘 다녀오십시오.”
“흠, 그래. 잘 지내고.”
“감사합니다. 이번 수련에서도 큰 성과를 거두시길 바랍니다. 사 공자님의 앞날에 무한한 행운이 깃들길 바랍니다.”
호위가 연신 고개를 숙였다. 역시 돈이라는 것은 놀라운 위력을 지녔다.
얼마 전까지 한빈을 괄시하던 경비 무사였다. 하지만, 심미호가 약간 기름칠을 해 놓은 덕분인지 경비 무사는 꿀을 발라 놓은 것처럼 아부를 늘어놨다.
“그래, 고맙다.”
“그런데, 공자님.”
경비 무사가 마치 기밀을 전달하듯 조용히 속삭였다.
“왜 그러는데?”
“저기 앞에서 화산파 양반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서재오를 말하는 것 같았다. 안하무인이라는 단점만 있는 줄 알았는데 끈질기기까지 했다.
이건 마치 어린아이가 장난감을 사 달라고 보채는 행동과도 같았다.
“그래, 알았네. 이번에도 고맙네.”
말을 마친 한빈은 뒤쪽을 힐끔 봤다. 눈이 마주친 심미호가 경비 무사의 호주머니에 철전 몇 닢을 슬쩍 밀어 넣었다.
“아이고 감사합니다. 공자님, 부대주님, 만수무강하십시오.”
어찌나 환하게 웃는지 경비 무사의 덥수룩한 수염에 꽃이 필 정도였다.
덜컹.
대문이 열리고 한빈이 하북팽가를 나섰다. 경비 무사의 귀띔대로 그곳에는 서재오와 팽무빈이 기다리고 있었다.
한빈이 그들을 못 본 것처럼 휘적휘적 앞으로 걸어가자 팽무빈이 다급하게 달려왔다.
한빈의 앞을 막아선 팽무빈이 말했다.
“막내야, 어딜 그리 급히 가는 것이냐?”
“…….”
한빈은 말없이 팽무빈을 바라봤다. 팽무빈이 자신을 이렇게 대하는 것이 탐탁지 않았기 때문이다.
얼마 전까지 맹호사대와 자신을 중독시키려는 계략에 앞장선 이가 팽무빈이었다.
행동만 안 할 뿐이지 언제 서로의 목에 칼을 겨눠도 이상하지 않을 관계였다.
게다가 지금은 자숙하고 있을 시기였기에 팽무빈의 행동은 경솔해 보였다.
한빈의 시큰둥한 표정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팽무빈이 말을 이었다.
“막내에게 화산파의 대협을 소개해 주려고 왔네.”
팽무빈이 말을 마치자 약속했다는 듯 화산파의 서재오가 앞으로 나왔다.
“반갑네. 나는 화산파의 매화검수 정명이라고 하네.”
“아, 만금 전장의 서재오 대협이시라고요.”
한빈은 정중하게 포권했다. 하지만, 화산파의 매화검수인 정명 서재오는 눈을 가늘게 뜨며 한빈을 노려봤다.
화산파의 정명이 아닌 만금 전장의 서재오로 부른 것은 일종의 도발이었다.
서재오가 말을 이었다.
“내가 자네를 보기 위해 찾아온 이유는…….”
“잠시만요, 서재오 대협. 제가 갈 길이 바빠서 나중에 따로 인사드리겠습니다.”
“어허, 성질이 급하시군. 내가 자네에게 친히 화산이 검을 가르쳐 주려 하는데, 이런 기회는 흔치 않을 것일세.”
말을 마친 서재오는 슬쩍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자신의 호기심을 채우면서도 뭔가를 바라는 눈빛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