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화. 착한 놈, 악한 놈, 더 악한 놈 (1)
멀찌감치 떨어져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심미호와 소대섭도 어느새인가 한빈 옆에 자리했다.
모두가 침을 삼키고 있을 때 강유찬이 명령을 내렸다.
“상자를 열어라.”
“네, 알겠습니다.”
덜컹.
상자가 열리고 황제가 내린 하사품이 정체를 드러냈다.
순간 한빈의 눈이 커졌다.
안에는 두 자루의 단검과 묵직한 황금이 자리 잡고 있었다.
황금은 이해가 가는데 단검이라?
보통 충신에게 하사품을 내린다면 장검(長劍)을 내리기 마련이 아니던가?
찬밥 더운밥 가릴 처지는 아니었지만, 순수한 호기심이 차올랐다.
그 표정을 안다는 듯 강유찬이 말했다.
“이건 천산혈랑의 발톱으로 만든 단검입니다. 이 천산혈랑의 발톱은 서역의 현철이나 북해빙궁의 만년한철보다도 더 단단하더군요. 폐하는 천산혈랑의 발톱으로 호신용 단검을 만들어 왕자님과 공주님들께 한 자루씩 하사하셨습니다. 그리고 남은 두 자루를 팽한빈 공자에게 전할 것을 명하신 겁니다.”
그의 말에 전생 강호 짬밥 이십 년인 한빈은 재빨리 무릎을 꿇었다.
“만세, 만세, 만만세!”
뭐, 대충 이 정도에서 고개를 숙이는 것이 맞았다.
그 모습에 강유찬은 재빨리 한빈을 일으켰다.
“폐하께서는 팽 공자에게 과한 예를 차리지 말라 전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하사품을 받을 만큼 공자님의 공은 지대했다는 것을 모두가 알고 있습니다.”
“과한 칭찬입니다.”
한빈은 재빨리 포권했다.
하지만, 한빈의 눈에는 의문을 한가득 담고 있었다.
공이라니 무슨 공을 세웠다는 것인가?
빈껍데기만 남은 천산혈랑?
아니면 늑대 토벌?
늑대를 토벌해서 민생을 안정시킨 공은 인정하지만, 자신이 한 일은 강호행에서 산적을 썰고 다니는 협객들의 업적과 다를 바 없었다.
만약 모든 협객에게 이런 대우를 하다 보면 황실의 금고는 남아나지 않을 터였다.
한빈이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그런데, 너무 과한 상 같아서 몸 둘 바를 모르겠군요.”
“이건 황실의 비밀이지만, 폐하께서 공자에게는 전하라고 하신 게 있습니다.”
강유찬이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었다.
한빈이 물었다.
“대체 그 말씀은······.”
한빈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강유찬이 은밀한 목소리로 답했다.
“천산혈랑의 내단 때문에 여덟째 공주님이 쾌차하셨습니다.”
“흠.”
한빈은 눈을 가늘게 떴다. 분명 천산혈랑의 내단은 자신이 취했다. 그런데 갑자기 내단이라니?
“그때 내단이 상했던 것으로······.”
“아, 무림인들이 오해하는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마수나 영물의 경우 내단이 하나만 있으리란 법은 없지요.”
한빈의 눈빛이 살짝 떨렸다. 그것도 잠시 한빈은 재빨리 고개를 흔들었다.
“그렇군요.”
한빈은 자신도 모르게 눈물을 글썽였다.
그럴 줄 알았다면 천산혈랑을 바로 바치지는 않았을 것이었다.
무공의 성장을 위해서는 내단은 빼고 주는 게 강호의 도리가 아니던가?
본신 내공과 용혈신공의 내공, 둘 다를 성장시켜야 하는 것을 알게 된 지금이기에 더욱 씁쓸했다.
한빈의 표정을 본 강유찬이 말했다.
“공자의 충성심은 내가 폐하께 보고하겠습니다. 그렇게 기쁨의 눈물을 흘리는 모습은 제 예상 밖입니다. 폐하와 공주님 모두 기뻐하실 겁니다. 그리고······.”
강유찬은 말끝을 흐리며 다급하게 자신의 품을 뒤졌다.
마치 우는 아이에게 줄 사탕이라도 찾는 모습.
한참 동안 품속을 뒤지던 강유찬이 은밀하게 다가왔다.
-듣기만 하게.
‘어라?’
한빈이 깜짝 놀랐다. 갑자기 강유찬이 전음을 전해 왔기 때문이다. 게다가 말투도 변했다.
한빈은 표정을 수습하고 재빨리 고개를 끄덕이자 강유찬이 전음을 이었다.
-이것은 폐하께서 은밀히 내리는 패라네. 황실의 보물인 적혈석으로 만든 패네. 황제께서는 자네의 성품을 판단하고 이 패를 내리라고 했지. 자네의 표정을 보니 자네가 황실에 얼마나 충성을 다하는지를 알겠네. 이것은 가능하면 다른 이들에게 보이지는 말게. 이건 개인적인 부탁이네.
전음을 마친 강유찬은 싱긋 웃으며 조그마한 가죽 주머니를 내밀었다.
“자, 받으십시오.”
“네, 감사합니다.”
한빈이 가죽 주머니를 받아 확인도 하지 않고 품속에 넣었다.
전음의 내용을 빼고 나면 그들의 행동은 특이한 점이 없었다.
“이제는 그만 가 보겠습니다. 공자, 이제 공적인 엄무가 끝났으니 다음에 만날 때는 내 편히 하대하겠소.”
강유찬이 포권하자 한빈도 깊숙이 마주 예를 갖추었다.
일만 금의위의 수장이 한빈에게 체면을 세워 준 것은 황제의 명을 전하러 왔기 때문이다.
다음에 편하게 대한다는 것은 개인적인 친분을 쌓자는 의미.
뭐, 전음으로는 벌써 말을 놓은 강유찬이 아니던가?
한빈이 마다할 리 없었다.
“네, 편하게 대하십시오.”
“그럼 다음에!”
강유찬이 돌아서려다 고개를 갸웃했다.
“흠.”
헛기침하며 한빈을 살피는 강유찬.
강유찬의 행동에 한빈이 재빨리 물었다.
“대인, 왜 그러십니까?”
“내가 궁금한 게 있어서 그런데, 솔직히 대답해 줄 수 있겠는가?”
말을 편하게 하는 것으로 봐서 이제부터는 사적인 자리라는 뜻.
한빈이 싱긋 웃으며 답했다.
“네, 말씀하시지요.”
“자네 기세를 보면 적어도 절정에 이른 것 같네.”
“네, 맞습니다.”
“그러면 다시 묻겠네. 절정인 자네가 이리 모질게 당했다고?”
“가벼운 비무를 한 판 벌였을 뿐입니다.”
“가벼운 비무라? 용태를 보면 일방적으로 당한 것 같은데 이건 감정이 없이는 있을 수 없는 일일세. 생사결도 아니고 대체 누구와 비무를 한 것인가? 흠······.”
궁금한 것이 많은 것 같지만, 강유찬은 말을 아끼는 모습이었다.
한빈은 이번 비무를 비밀로 할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한빈이 아무렇지도 않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화산파의 서재오 대협과 비무를 펼쳤습니다.”
“음.”
갑자기 튀어나온 신음과 깊어진 그의 눈동자에 한빈이 재빨리 물었다.
“왜, 그러시는지요?”
“서재오는 대체 어디 있는가?”
그의 목소리에서 살짝 노여움이 묻어 나오자 한빈은 눈을 가늘게 떴다.
금의위 수장 강유찬은 화산파와 관계가 있는 것 같았다. 황실을 위해 일을 하는 대문파의 제자가 아예 없는 것도 아니니 한빈의 추측은 무리가 아니었다.
“연무장 옆 그늘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한빈은 상황을 돌려 설명했다. 사실 서재오는 정신을 잃고 장자명에게 치료를 받는 중.
치료를 받고 있는 곳도 그늘이었고 잠이 든 상태나 마찬가지니 휴식을 취하고 있는 것도 맞았다.
강유찬의 눈썹이 꿈틀대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한빈의 짐작이 맞는 것 같았다.
“내 녀석을 만나 보겠네. 생사결도 아닌 비무에서 이십칠수매화검을 쓰다니, 내 당장 따져야겠어. 폐하께서 주목하고 있는 자네에게 살수를 써? 이건 내가 용납이 안 되네.”
강유찬이 흥분한 듯 콧김을 내뿜으며 표정을 굳히자 한빈이 재빨리 손을 흔들며 그를 만류했다.
“저는 괜찮습니다.”
“아니야. 화산파는 내 사문이네.”
한빈의 예상대로 역시나였다. 한빈이 모른 척 물었다.
“화산파가 대인의 사문이시라고요?”
“그렇다네. 서재오라면 나도 아는 녀석일세. 망나니 같은 놈. 기어이 사고를 치다니.”
강유찬이 점점 목소리를 높이자 한빈이 사람 좋은 얼굴로 말했다.
“망나니인 것 맞지만, 너무 나무라지는 마십시오. 비무 중에 이 정도 부상은 비일비재한 것이 강호 아닙니까?”
말을 마친 한빈은 오른팔을 들어 너덜거리는 소맷자락을 보여 줬다.
순간 드러나는 검상(劍傷)에 강유찬이 눈살을 찌푸렸다.
“자네가 이렇게 이해해 주니 고맙지만, 이건 아닐세. 가벼운 초식으로 가르침을 주면 될 것을 이십칠초매화검을 극성까지 펼치다니. 그래 놓고 쉬고 있다고? 허허.”
“······.”
한빈은 말없이 강유찬을 바라봤다. 강유찬은 이번 비무에서 서재오가 승리했다고 오해하고 있는 것 같았다.
한빈의 표정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강유찬이 말을 이었다.
“나는 반드시 놈에게 책임을 물을 것이야.”
말을 마친 강유찬은 투구를 벗어 수하에게 맡겼다.
이제부터는 사적인 일을 보겠다는 뜻이었다.
터벅터벅.
내공을 실어 걷는 강유찬은 콧김까지 뿜어냈다.
마치 성난 황소처럼 서재오가 있는 쪽으로 다가가는 강유찬을 본 심미호가 고개를 갸웃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요? 꼭 주군이 피해자인 것처럼 확정 짓는 것 같은데요.”
“그러게 말이야. 이번 비무로 둘 다 넝마가 됐잖아. 게다가 마지막에 쓰러진 것은 서재오인데, 왜?”
소대섭도 고개를 갸웃했다.
그들이 수군대는 동안 그늘에 도착한 강유찬은 장자명 앞에서 치료를 받고 있는 서재오를 바라봤다.
장자명이 치료를 끝낸 상태.
서재오는 곤히 자는 모습처럼 보였다.
“음.”
강유찬은 신음을 흘리는 동시에 다시 눈빛이 깊어졌다.
그때 한빈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대인, 서재오 소협을 너무 나무라지 마십시오. ”
이제 한빈은 서재오를 대협이 아닌 소협으로 바꿔 불렀다.
“사람을 때려 놓고 이렇게 한가하게 자고 있다니 아무리 안하무인이라고 해도······.”
강유찬은 말을 잇지 못했다.
자세히 보니 서재오의 상태도 그리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강유찬이 시선을 한빈에게 돌렸다.
“혹시 비무의 승자가 누구인가?”
“전데요.”
“아!”
짧지만 굵은 탄성이 울리며 강유찬의 얼굴에는 오만 가지 잔상이 물결쳤다.
겨우 표정을 수습한 강유찬이 물었다.
“어찌 된 일인지 잠시 물어봐도 되겠는가?”
“그러니까······.”
한빈은 비무의 시작부터 내기를 한 내용, 그리고 어떻게 마무리가 됐는지를 소상히 설명했다.
한빈의 설명에 강유찬의 감정이 다시 요동쳤다.
강유찬이 미간을 좁힌 채 물었다.
“그럼 지금 잠을 자고 있는 게 아니라는 건가?”
“정신을 잃었으니 잠을 자고 있는 것과 같은 거죠.”
“아, 그렇군······.”
강유찬이 슬쩍 하늘을 올려다봤다.
잠시 흐르는 어색한 침묵이 끝나고 강유찬이 진지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내 부탁 하나만 하지.”
“말씀하십시오.”
한빈이 정중히 그의 말을 받자 강유찬이 다소 풀어진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지필묵 좀 가져다주게나.”
“네, 알겠습니다.”
말을 마친 한빈이 옆에 서 있는 철노를 바라보며 턱짓했다.
대화를 듣고 있던 철노가 몇 걸음 떨어진 곳에 있는 보따리를 들고 왔다.
그 모습에 강유찬이 고개를 갸웃하자 철노에게 보따리를 받아 든 한빈이 웃었다.
“여기 지필묵입니다.”
한빈이 보따리를 풀어 종이를 펼치고 벼루와 먹을 놓은 뒤 붓을 공손히 강유찬에게 건넸다.
강유찬이 살짝 놀란 듯 물었다.
“항시 지필묵을 가지고 다니는 것인가?”
“제가 서예를 좋아해서 이렇게 지니고 다닌답니다.”
“허, 문무를 겸비한 인재라니······.”
“과찬의 말씀입니다. 대인.”
한빈이 작게 포권하자 강유찬은 만족스러운 눈빛으로 그를 쓱 훑어봤다.
그들의 대화에 옆에 있던 심미호가 고개를 돌리며 혀를 찼다.
말도 안 되는 모습이었다.
저건 노예 계약서를 쓰기 위해 항상 준비해 놓고 있는 지필묵이 아니던가?
어부가 고기를 잡기 위해 그물을 드는 것.
농부가 밭을 갈기 위에 쟁기를 든 것과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