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화. 뜻밖의 임무 (1)
물론, 이 비명은 서재오의 비명이었다.
서재오는 요즘 최하층 무사의 삶이 어떤 것인지를 알 수 있었다.
그의 지위는 그리 낮지 않았다.
맹호사대를 가르치는 교관.
하지만 교관이라도 별반 다른 대우를 받는 것은 아니었다.
번번이 걸리는 집합에 새벽잠을 설쳐야 했고 나오는 음식도 입에 맞지 않았다.
두 달이 지나니 화산파 제자이자 만금 전장 장주의 아들인 서재오의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렇다고 매화삼경과 매화 패를 찾기 전까지는 이곳을 탈출할 수도 없었다.
매화삼경은 나중에 하나 더 만들면 되니 매화 패라도 달라고 사정해 봤지만, 사숙을 자처하는 한빈은 냉정하게 거절했다.
여기서 자신의 마음을 알아 주는 이는 장자명밖에 없었다.
지금도 매화 패를 돌려주든지 비무를 해 달라고 했다가 거하게 퇴짜를 맞고 악을 쓰는 중이었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사질, 내 몸이 회복되는 대로 상대해 드리겠습니다.”
“아무리 봐도 팔팔한데. 대체 왜 비무를 피하는 것이냐?”
“에이, 사질은 너무 성격이 모진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사부님을 모셔 와야 할 것 같습니다.”
“헉.”
서재오는 재빨리 입을 닫았다.
그 모습에 한빈은 해맑게 웃으며 뒤돌아섰다.
한빈이 점점 멀어지자 다시 비명이 튀어나왔다.
“아악!”
한빈은 그 비명을 뒤로한 채 천수장을 빠져나와 근처에서 가장 번화한 저잣거리로 향했다.
가끔은 직접 하북 일대를 돌며 정보를 수집하고 민심을 살펴야 하는 법이었다.
물론 이것은 수하들에게 댄 핑계였다.
사실 초식이 완성되지 않자 용린겁법의 구결을 찾기 위해 외출을 한 것이었다.
[응용편]
······
[성(聲), 동(東), 서(西)]
하나만 더 나오면 응용편 구결이 완성되는 상황.
서재오를 아무리 채찍질해도 더는 구결이 나오지 않았다.
한동안 기본편 구결을 줬던 맹호사대 대원들도 이제는 건질 것이 없었다.
한빈이 저잣거리의 입구에 도착했을 때였다.
한빈의 시선이 저잣거리 입구에서 동냥질을 하는 거지에게 향했다.
사람들이 그 거지에게 철전을 떨어뜨리고 간다.
쩔렁.
데구루루.
“가, 감사해요, 대인. 가, 감사해요.”
어눌한 말투로 연신 고맙다고 외치는 거지.
목소리를 들어 봐서는 여자아이였다.
누군가가 또, 철전을 떨어뜨린다.
꾀죄죄한 얼굴에 다리까지 불구로 보였다. 모자를 눌러써서 얼굴 전체가 보이지는 않았지만, 볼에서부터 턱까지 화상 자국이 선명했다.
화상을 입은 여자아이가 성치 않은 다리로 구걸을 하기 때문일까?
사람들은 제법 많은 돈을 거지에게 던져 줬다.
뭐 한빈이 생각해도 불쌍해 보였다.
한빈이 거지를 보고 있는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
물론 홍칠개가 준 매듭 때문도 아니었고 동정심이 일어나서도 아니었다.
거지에게서 묘한 동질감을 느꼈기 때문이다.
“이상하네?”
한가하게 그 거지를 계속 관찰할 수도 없는 일이기에 한빈은 고개를 갸웃하며 그 거지를 지나쳤다.
휘적휘적 걷고 있을 때였다.
한빈의 눈에 처음 보는 가판이 눈에 들어왔다.
전에 없던 당과를 파는 가판대였다.
한빈은 고개를 갸웃했다.
당과를 파는 상인에게서 거지 소녀와 같은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이 묘한 동질감은 분명 어디선가 마주했었다.
어디서 봤지?
한빈은 관자놀이를 톡톡 치다가 얼마 전 기억을 떠올렸다.
한빈이 떠올린 것은 절호곡에서 흑천과 마주했을 때였다.
한빈이 선택한 이이제이의 도구.
지금 그들로부터 정화 부인은 꽤 많은 위협을 받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정화 부인은 하북팽가와 하남정가 양쪽에서 발언권을 잃을 것이 분명했다.
그렇다면 흑천이 정화 부인을 감시하기 위해서 이곳에 온 것일까?
한빈은 고개를 저었다.
이곳은 천수장에서는 멀지 않지만, 하북팽가와는 제법 멀리 떨어져 있는 번화가였다.
그렇다면 그들이 여기에 판을 깔아 놓은 이유는?
당연히 한빈을 감시하기 위해서였다.
단지 다른 조직이라면 그 감시를 받아 줄 용의도 있었다.
하지만, 살수 조직이 감시만 할 리가 있겠는가?
살수 조직이 자신을 감시하는 것을 두고 본다면 목에 칼을 댄 채 돌아다니는 것과 같았다.
한빈은 조용히 골목길로 사라졌다.
사사-삭!
구걸십팔보와 본래 지녔던 은신술이 빛을 발하자 한빈은 자취를 감췄다.
한빈이 사라지자 거지가 동냥 그릇을 두드렸다.
그 소리에 맞춰 흑천의 살수들이 은밀히 행동을 바꿨다.
어떤 가게 점원은 화장실에 간다고 사라졌고 당과를 팔던 가판 주인은 옆 상인에게 가게를 맡기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아마도 감시 대상을 놓쳤기에 혼란스러워하는 것 같았다.
어둠 속에서 그들을 지켜보던 한빈은 헛웃음을 토했다.
흑천의 살수가 이렇게 어설프게 행동한다고?
아니, 접근 방식부터가 잘못되었다.
언제부터 흑천이 이렇게 양지에서 대상을 감시했던가?
흑천은 일반 백성으로 위장해서 대상을 감시하는 단체가 아니었다.
한빈처럼 어둠 속에 숨어서 대상을 감시하고 때가 되면 목에 칼을 꽂아 넣는 단체였다.
이렇게 약점을 보인다는 것은 흑천 자체 내에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기분 나쁘네.”
생각을 이어 나가던 한빈은 혼잣말을 뱉었다.
입가에 묘한 웃음을 그린 한빈이 어둠에서 나왔다.
한빈을 바라보던 살수들이 즉시 제자리를 찾아갔다.
한빈은 조용히 걸음을 옮겨 거지 소녀가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한빈은 품 안에서 은전 하나를 꺼내 거지 소녀의 동냥 그릇에 던졌다.
지나가던 행인들이 한빈의 행동을 보고 멈춰 섰다.
“와, 저 사람 누구지? 통이 크네.”
“저 붉은 무복이라면 혹시 혈랑공자 아니야?”
“화산파의 제자에게 승리를 거뒀다는 그 혈랑공자 맞지?”
“말을 바로 해야지, 황궁에 아는 뒷배를 써서 화산파의 제자가 한 수 봐준 거지. 그리고 혈랑공자라고 부르지 마. 괜히 화산파 도인에게 미움받을 수도 있으니까.”
“하긴, 얼마 전까지 하북 제일의 겁쟁이라 불리던 팽가의 막내 공자가 갑자기 변할 리가 없지.”
“그래도 성품은 알아줘야 해. 불쌍한 사람을 보고 지나치지 못하다니. 허.”
그들뿐 아니라 모두가 한빈을 칭찬하기에 바빴다.
그도 그럴 것이 아무리 불쌍하다고 해도 은전 하나를 저렇게 던져 줄 사람은 이 저잣거리에서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거지 소녀는 언제부턴가 이곳의 명물로 자리 잡고 있었다.
동냥 그릇이 다 차면 그녀는 구슬프게 노래를 불렀다.
저잣거리를 지나는 사람들이 듣기에 그녀의 목소리는 천상의 선녀의 노래보다 감미롭게 들렸다.
사람들은 그녀의 얼굴과 다리만 성했다면 하북제일의 기루인 천화루 제일의 예인(藝人)이 되었으리라 생각했다.
그런 이유로 사람들의 동정심은 더욱 깊어졌던 것이다.
거지 소녀는 약간 놀란 눈으로 한빈을 바라봤다.
그때 슬쩍 모자가 흘러내렸다.
동시에 한빈의 눈이 커졌다.
거지 소녀의 정체를 알았기 때문이다.
그녀는 절호곡에서 마주한 초특급 살수였다. 한빈이 변장한 그녀를 어떻게 단번에 알아볼 수 있었을까?
이유는 간단했다.
그녀의 이마에서 구결을 나타내는 점이 반짝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절호곡에서 한빈은 그녀에게 구결을 취하려 칼을 대려다 멈췄다.
소탐대실이라 생각해서였다.
그것은 한빈의 생각이 맞았다. 그녀는 이제까지 정화 부인을 충실히 공격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자신에게 칼을 들이댄 이상 한빈은 그냥 넘어갈 수 없었다.
한빈은 아무렇지 않게 웃으며 은전 하나를 더 꺼내 동냥 그릇에 던졌다.
땡그랑.
은전이 데구루루 구르자 지나가는 사람들은 마치 좋은 구경거리라도 생겼다는 듯 점점 모여들었다.
땡그랑.
한빈이 은전을 하나 더 던졌다.
은전의 개수만큼 웅성거림이 점점 커졌다.
한빈이 거지 소녀를 보며 씩 웃었다.
물론 사람들은 한빈의 말을 듣지 못했다.
그들은 은전이 계속 떨어지는데, 점점 절망에 쌓여 가는 거지 소녀의 모습이 이해가 안 될 뿐이었다.
모두가 놀라고 있을 때 한빈은 점점 거지 소녀 쪽으로 상체를 기울였다.
한빈이 작게 속삭였다.
“잘 지냈어?”
“대, 대체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절호곡에서 보고 오랜만이잖아. 여기까지 왔으면 그냥 놀러 오지 왜 멀리서 판을 깔고 그래?”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요.”
“그럼 내가 알아듣기 얘기해 줄게.”
한빈은 말이 끝나자마자 용린검법의 기본 초식을 운용했다.
‘전광석화.’
준비가 끝나자 한빈은 재빨리 동냥 그릇을 낚아채며 뒤로 물러섰다.
전광석화와 구걸십팔보의 효용으로 한빈은 거지 소녀에게 열 걸음 이상 떨어진 상태.
한빈이 도망가려고 했다면 거지 소녀의 시야 밖으로 사라졌겠지만, 한빈은 적당한 거리를 뒀다.
구경꾼들이 수군대기 시작했다.
“무슨 일이래?”
“아니, 왜 안 하던 망나니짓이래?”
그들의 눈에 한빈의 보법은 들어오지도 않았다.
오직 한빈의 행동에 분노할 뿐이었다.
누군가는 자신의 남편에게 재촉했다.
“어머, 당신이 나서 봐요. 저런 불한당 같은 놈이 다 있다니. 천벌을 받지. 천벌을 받아.”
“내가 하북팽가의 막내 공자가 무서워서 못 나서는 게 아니야. 괜히 건드렸다가 하북팽가가 보복하면 어쩌라고.”
“그렇지, 당신 나서지 말아요.”
구경꾼들이 공분하고 있을 때였다.
한빈은 동냥 그릇을 보며 피식 웃었다.
흑천의 살수에게 이 동냥 그릇은 어떤 의미일까?
한빈은 아까 은신한 상태에서 그들의 행동을 모두 살폈다.
흑천의 살수들은 자신이 모은 정보를 이 동냥 그릇에 넣고 있었다.
물론 일반 백성의 순수한 철전도 있긴 하지만, 대부분은 정보가 담긴 철전이었다.
암어로 음각된 철전이 지금 동냥 그릇에 가득 담겨 있었다.
이 동냥 그릇을 잃는다는 것은?
아마도 며칠 동안 모았을 정보가 허공으로 날아간다는 것이었다.
거기에 이 철전에는 흑천의 비밀이 숨겨져 있을 수도 있었다.
분노한 거지 소녀의 눈을 본 한빈은 이것을 확신했다.
한빈은 거지 소녀에게 외쳤다.
“억울하면 뺏어 보시지!”
말을 마친 한빈이 구걸십팔보를 펼치기 시작했다.
사사-삭.
무복 끄는 소리만 남긴 채 한빈이 사라지자 행인들의 입에서 욕이 튀어나왔다.
“저런 개망나니.”
“저런 건 죽어서도······.”
하지만, 행인들은 말을 잇지 못하고 눈을 크게 떴다.
앉은뱅이 거지 소녀가 벌떡 일어나 한빈을 쫓기 시작한 것이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행인들의 눈이 점점 커졌다.
“저게 무슨 일이지.”
“저 거지 앉은뱅이 아니었어?”
“맞아, 다리 밑으로 갈 때도 몸을 질질 끌고 가던데.”
“이게 무슨 일이래.”
그때였다.
누군가가 외쳤다.
“기적이다!”
“기적?”
“그럼 이게 기적이 아니고 뭐란 말이야. 기적이 맞지.”
“허, 그러고 보니.”
“그럼 하북팽가의 막내 공자가 앉은뱅이 거지를 일으키기 위해 저런 짓을 했단 말이야?”
“그런 가능성 빼고는 없지.”
그들의 머릿속에 앉은뱅이 거지 소녀가 처음부터 정상이라는 가정은 아예 없었다.
흑천의 초특급 살수인 혈화의 연기가 그만큼 뛰어났다는 이야기였다.
그때 누군가가 외쳤다.
“나도 막내 공자 한번 찾아가 볼까?”
“자네가 왜 하북팽가의 막내 공자를 찾아가?”
“내 팔이 시원찮은 지 벌써 이 년이나 됐잖나.”
“허허, 그럼 한번 찾아가 보시게나.”
저잣거리 사람들이 말도 안 되는 상상을 하고 있을 때 한빈은 산길로 접어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