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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북팽가 검술천재-77화 (77/621)

77화. 뜻밖의 임무 (3)

혈화의 표정을 본 한빈이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뭐, 규칙은 간단해. 누가 상대방의 목에 먼저 칼을 들이대나 하는 거지. 물론 이곳 송화산을 벗어나면 지는 것으로 하고.”

“…….”

“상대가 승복을 못 한다면 그냥 그어 버리면 승부는 끝나는 것으로 하지.”

혈화가 눈매를 좁혔다.

사람의 목을 긋는다는 말이 너무도 쉽게 나왔기 때문이다.

혈화는 확신했다.

‘저놈은 살수가 분명해!’

혈화는 한참 동안 한빈의 눈을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승복하면?”

“삼 년간 하인이 되는 거지. 목숨을 살려 준 대가로 그 정도는 해야 하지 않겠어?”

“음.”

혈화가 자신의 검과 한빈을 번갈아 바라봤다.

조사한 바로 한빈의 무위는 절정.

계책으로 초절정에 막 입문한 화산파의 제자도 꺾었다 들었다.

상황만 놓고 보면 혈화가 유리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자신의 촉은 내기에 응하지 말라 하고 있었다.

그때 한빈이 갑자기 배를 만지며 불편한 기색을 보였다.

혈화는 그 모습을 놓치지 않았다.

저것은 분명 독에 중독되어 나타나는 현상이었다.

한빈을 바라보던 혈화가 희미한 미소와 함께 시선을 돌렸다.

혈화는 검 끝에 매달린 동냥 그릇을 보며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그 동냥 그릇 안에는 독이 발라져 있었다.

정확히는 철전에도 독이 묻어 있었다.

수집한 정보와 상부의 지시가 모이는 동냥 그릇을 아무 대책 없이 방치해 둘 리 없었다.

만일에 대비해 혈화는 이 동냥 그릇에 조치를 해 두었다.

독의 이름은 일각비초(一刻秘草).

목숨을 빼앗지는 않지만, 일각 만에 오감을 마비시키는 독이었다.

흑천의 살수들은 이 독에 면역이 되어 있지만, 한빈이라면?

사실 진작에 이 독을 떠올려야 했지만, 한빈의 격장지계에 까마득하게 잊고 있었던 것이다.

혈화가 말했다.

“좋다. 네 말대로 하지. 그런데 이 산을 벗어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내 부하들이 이곳을 포위하고 있으니.”

“그건 내가 할 말이야. 나라고 수하들에게 명령을 안 내렸을 것 같아?”

한빈이 씩 웃었다.

물론 이것은 거짓말이었다. 지금 이 시각 맹호사대는 천수장에서 열심히 구르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혈화가 이 사실을 알 수는 없는 법.

혈화가 한빈의 말에 동요한 듯 주변을 둘러봤다.

한 치의 양보도 없는 한빈의 모습에 혈화는 다시 속이 끓기 시작했다.

그때 한빈이 외쳤다.

“지금부터 시작이다!”

말을 마친 한빈은 눈앞에서 희미한 잔상을 남기고 사라졌다.

한빈의 붉은 무복 때문일까?

그가 남긴 잔상은 마치 붉은 노을 같았다.

‘그러고 보니…….’

혈화의 시선이 해가 저물어 가는 쪽 하늘을 향했다.

한빈이 사라진 방향을 본 혈화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일각비초는 경지에 따라 효과가 나타나는 시간이 다르다.

삼류나 이류 무인에게는 일각이지만, 절정 혹은 초절정의 무인에게는 한 시진 이상이 걸릴 수 있다.

효과가 나타난 후에 만 하루 정도는 일각비초의 독성에 시달려야 할 것이었다.

즉, 무리할 필요가 없었다. 한 시진 정도 몸을 숨겼다가 이후에 천천히 몰아가서 잡으면 이번 임무는 끝이었다.

혈화는 얼굴에 화사한 미소를 띤 채 은신을 위해 반대쪽으로 몸을 숨겼다.

그녀는 자신의 감대로 완벽한 승리를 위해 일단 한빈의 범위에서 벗어나기로 한 것이다.

혈화가 공터를 벗어나 소나무가 빽빽한 숲으로 발길을 옮긴 순간이었다.

갑자기 몸이 휘청했다.

푹!

한쪽 발이 구덩이에 빠진 것이다.

“왜, 이런 곳에 구덩이가…….”

혈화는 말을 잇지 못했다.

해답을 찾기도 전에 자신의 목덜미에서 서늘한 검날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혈화는 검날을 타고 시선을 올렸다.

순간 마주친 야수의 눈빛.

그것은 방금 사라졌던 한빈이었다.

혈화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게 무슨 짓이냐?”

“무슨 짓이라니? 벌써 잊은 거야? 지금 우리 내기하는 중이잖아. 안 그래?”

“…….”

혈화는 아무 말도 못 하고 물끄러미 한빈을 바라봤다.

한빈의 말에는 조금의 어긋남도 없었다. 하지만, 이대로 물러날 수는 없는 일.

혈화가 외쳤다.

“이건 반칙이다. 살수가 언제부터 이렇게 함정을 파 놓는다는 말이냐? 이건 절대 인정 못 해.”

“흠, 살수가 목표를 죽이는데 방법을 가린다라? 언제부터 흑천이 정파 행세를 했지?”

“음.”

혈화가 낮은 신음을 내뱉자 한빈이 말을 이었다.

“할 수 없군.”

“약속대로 그냥 내 목을…….”

한빈은 혈화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검을 휘둘렀다.

휙!

바람 소리에 혈화는 자신도 모르게 눈을 감았다.

서걱!

후두둑!

생경한 소리에 혈화는 눈을 살짝 떴다.

살짝 뜬 그녀의 눈 사이로 허공에서 휘날리는 솔잎이 들어왔다.

뭐지?

혈화의 눈이 커졌다.

눈앞에 휘날리는 솔잎은 붉은색이 아니라 검은색이었다.

“아!”

혈화가 탄성을 질렀다.

지금 허공에 날아다니고 있는 것은 솔잎이 아니라 자신의 머리카락이었다.

죽음을 택했지만, 그녀는 그것이 자신의 진심이 아니라는 것을 지금 깨달았다.

그녀의 가슴 속에 이상한 감정이 파고들었다. 그것은 삶에 대한 의지.

한빈이 지금 벤 것은 혈화가 가지고 있던 살수의 의지였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혈화는 다시 마음의 틈을 닫고 전의를 불태웠다.

딱 반 시진의 시간만 있다면 한빈을 굴복시킬 자신이 있었다.

‘딱 반 시진만!’

혈화가 속으로 반 시진을 외치고 있을 때 한빈이 다시 말을 이었다.

“약속대로 끝내기에는 해가 아직 기네. 조금 더 시간을 주도록 하지.”

사사-삭.

혈화가 풀 밟는 소리에 눈을 떠 보니 한빈은 사라졌다.

“휴.”

한숨을 내쉰 혈화는 조금 더 신중을 기해 주변을 살폈다.

그녀의 목표는 이제 반 시진.

반 시진이 지나면 반격을 시작할 것이었다.

천천히 걷던 그녀의 앞에 토굴 하나가 나타났다.

토굴 앞에 선 혈화는 돌멩이 하나를 집어 안쪽에 굴렸다.

데구루루.

툭.

끝이 막힌 토굴인 듯 돌멩이가 멈췄다.

상황 판단을 끝낸 혈화는 재빨리 토굴 입구에 나뭇가지를 쌓아 위장했다.

준비를 마친 그녀는 토굴 속으로 조심스럽게 들어갔다.

혈화는 토굴에서 편하게 가부좌를 튼 후 시간을 기다렸다.

반 시진 정도가 지나자 혈화는 고개를 갸웃했다.

이상하게 눈이 감겨 오는 것이었다.

자칫하면 목이 달아날 위기의 순간에 왜 잠이 온다는 말인가?

이건 말도 안 되는 상황이었다.

혈화는 가부좌를 풀고 이를 악물었다.

그래도 졸음은 멈추지 않았다.

혈화는 급기야 허벅지를 꼬집었다.

얼마나 세게 꼬집었는지 허벅지에서 살짝 피가 배어 나올 정도였다.

혈화는 고개를 갸웃했다.

뭐지?

지금 허벅지에서 감각이 느껴지지 않았다.

혈화는 눈가를 파르르 떨며 해답을 찾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그것은 헛수고였다.

스르륵.

그녀는 천근의 바위처럼 자신을 덮쳐 온 수마(睡魔)에 완벽하게 굴복했다.

그것도 잠시, 어디에선가 신선한 향기가 퍼져 나왔다.

이것은 꿈일까?

의문도 잠시 그녀는 재빨리 눈을 떴다.

번쩍.

주변을 살피던 혈화는 목덜미에서 차가운 냉기를 느꼈다.

이 느낌은…….

동시에 한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잘 잤어?”

“헉, 비겁하게…….”

“너도 썼잖아.”

“내가 뭘 썼다고 그러는 거지?”

“서로 한 번씩 독을 썼으니 독공(毒功)의 승부에서는 공평하다고 할 있지? 물론 승부에서는 내가 이겼지만.”

“절대 인정 못…….”

혈화는 말을 잇지 못했다.

갑자기 한빈의 검끝이 목덜미를 파고 들어왔기 때문이다.

픽!

상처가 깊지는 않았지만, 목덜미에서 피가 흘러내렸다.

뚝!

대답은 허용하지 않겠다는 한빈의 뜻.

혈화가 이를 악물며 노려보자 한빈이 말했다.

“나는 내 구역에서 살수가 얼쩡거리는 걸 용납할 만큼 자애로운 사람은 아니야.”

“차라리…….”

혈화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한빈이 말했다.

“일단, 마저 듣는 게 좋을 거야.”

한빈의 표정이 살짝 풀린 듯 보이자 혈화는 희망을 찾은 듯 답했다.

“그래, 말해 봐.”

“아까 네가 잠든 사이에 십팔호란 놈이 다녀갔다.”

혈화가 눈을 가늘게 떴다.

십팔호는 자신과 생사의 고비를 여러 번 넘은 수하였다.

혈화가 다급히 물었다.

“혹시 죽였느냐?”

“내가 말했잖아. 다녀갔다고. 죽었다면 네 옆에 나뒹굴고 있겠지.”

“음.”

혈화가 여러 감정을 담은 신음을 토해 냈다.

그 모습에 한빈이 피식 웃었다.

“그놈이 이걸 주고 가더라.”

말을 마친 한빈은 품에서 철전 하나를 꺼내 던졌다.

휙.

철전을 잡은 혈화가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자 한빈이 말했다.

“참, 의심 많은 살수네, 거기에는 한 방울의 독도 안 발라 놨으니 걱정하지 마.”

“흠.”

혈화가 헛기침하며 철전을 자세히 살피기 시작했다.

그곳에는 작은 글귀가 쓰여 있었다.

종(從).

혈화가 눈을 가늘게 떴다. 이것은 분명 흑천이 내리는 명이었다.

‘따르라고?’

혈화는 한빈을 바라봤다. 분명 흑천의 명령은 한빈을 따르라고 했다.

아마도 이 모든 상황을 흑천의 주인은 알고 있는 것 같았다.

혈화가 이를 악물 때 철전의 옆에서 희미한 글자가 보였다.

그것은 입(入)을 나타내는 암어였다.

혈화는 그제야 의미를 알았다.

천수장에 잠입해 한빈의 정체를 알아내라는 새로운 임무였다.

혈화는 조용히 일어나 절도 있게 포권했다.

“약속을 지키겠다.”

그 모습에 한빈은 씩 웃으며 말했다.

“너 말이 좀 짧다. 요즘은 하인이 그렇게 말하나 봐?”

한빈의 비웃음에 혈화가 재빨리 고개를 숙였다.

“아, 그게 그러니까. 죄송해요.”

그녀는 초특급 살수답게 재빨리 태세를 전환했다.

혈화가 고개를 숙일 때 그녀의 배에서 요란한 소리가 울렸다.

꼬르륵.

혈화가 멋쩍은 표정으로 바라보자 한빈이 품속에서 죽통 하나를 내밀었다.

혈화가 황급히 손을 내저었다.

“괜찮아요.”

한빈은 죽통을 내민 채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혈화를 바라봤다.

“먹으라는 거 아니다. 슬쩍 냄새를 맡아라.”

“네?”

혈화가 눈을 크게 뜨고 묻자 한빈이 진지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죽기 싫으면 냄새를 맡아.”

혈화는 죽통의 마개를 열고 냄새를 맡았다.

청아한 향기가 코끝을 간지럽혔다.

방금 깨어날 때 맡았던 향기와는 비슷하면서도 달랐다.

“이제 됐다.”

한빈은 그 죽통을 빼앗았다.

“대체 그게 뭔가요?”

“혹시 칠종칠독(七縱七毒)이라고 들어 봤어?”

혈화의 표정이 단번에 바뀌었다.

“설마…….”

그녀는 말끝을 흐리며 한빈을 바라봤다.

가장 지독한 독은 아니지만, 가장 해독하기 힘들다고 하는 독이 바로 칠종칠독이었다.

한빈은 기다렸다는 듯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맞아, 그 칠종칠독.”

“흠.”

“전해 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제갈량은 맹획을 일곱 번 잡았다가 일곱 번 풀어 줬다지. 이 독은 그 이야기처럼 상대를 언제든 중독시킬 수도, 해독시킬 수도 있지.”

한빈의 설명에 혈화가 표정이 점점 일그러졌다.

“그런 악독한 독을 내게…….”

“사돈 남 말한다고 생각하지 않아?”

“흠.”

혈화도 할 말은 없었다.

“흥분하지 말고 잘 들어. 칠종칠독을 해독하기 위해서는 총 일곱 번 해독을 해야 해.”

“대체 언제 독을 쓴 거죠?”

“네가 가져갔잖아.”

한빈은 턱짓으로 동냥 그릇을 가리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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