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화. 뜨거운 토란 (4)
아무래도 설화는 계획을 수정해야 했다.
이곳 천수장의 일원으로 녹아들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다.
* * *
그날 오후.
집법당 무사들이 한빈의 앞에 섰다.
“가주 대행의 명을 전달합니다.”
한빈은 가주의 명을 전하는 집법당 무사 앞에 포권했다.
“명 받들겠습니다.”
“사 공자 한빈은 이 서찰을 받고 임무를 받을 것인지 아니면 포기할 것인지를 정하시오.”
말을 마친 집법당 무사는 서찰을 전달했다.
서찰을 받은 한빈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한빈은 서찰을 펴 보지도 않은 채 말했다.
“이번 임무를 받겠습니다.”
“헉.”
집법당 무사가 놀랐다.
그들도 이번 임무에 대해서는 대충 알고 있었다.
사실 그들끼리 이곳에 오며 내기를 했었다.
위험도만 높고 실속이 없는 임무였다.
멍청하다면 받을 것이고 조금이라도 사리 분별을 한다면 거부할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서찰을 펴 보지도 않고 임무를 덥석 받은 것이다.
긴 탄성의 끝에 집법당 무사가 다시 물었다.
“서찰을 확인하지 않으셔도 되겠습니까?”
“가문의 명이라면 응당 따라야 하는 것이 도리이거늘, 선택을 한다는 것이 가문에 대한 불충이 아니겠소?”
“가주 대행께서는 사 공자님이 선택하실 수 있는 여지를 주셨습니다. 그에 대한 이유가 있을 터, 서찰을 확인해 보시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한빈이 고개를 저었다.
“이 서찰을 확인할 필요는 없네. 내 준비되는 대로 본가로 건너갈 터이니 가주 대행께는 그리 전하게.”
“네, 알겠습니다.”
집법당 무사가 깊이 포권하며 뒷걸음쳐서 물러났다.
가주 앞에서만 하는 예의였다.
그런데 한빈에게도 똑같이 하고 있는 것이었다
가문을 위해서라면 어떤 위험도 마다하지 않겠다는 한빈의 마음에 감복한 것이었다.
집법당 무사들은 이제까지 못 느꼈던 제왕의 기세를 느꼈다.
집법당 무사들이 물러나자 이 광경을 보고 있던 소대섭이 물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주군?”
“뭐가 괜찮아? 소 대주.”
“서찰 말입니다. 뭔가 심각한 임무 같은데요.”
“아, 이 서찰?”
손에 든 서찰을 바라본 한빈은 아무렇지도 않게 뒤로 던졌다.
“헉.”
소대섭이 놀라 재빨리 서찰을 받았다.
“그거 잘 가지고 있어. 참, 뜯지는 말고.”
손을 흔든 한빈이 사라지자 소대섭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때 웃고 있는 심미호와 눈이 마주쳤다.
“심 부대주,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난 거야?”
“아마 주군이 기다리던 일인 것 같아요.”
“기다리던 일?”
“대주님은 주군이 이제까지 너무 넉넉했다고 생각하지 않나요?”
“주군이 넉넉했다고?”
소대섭은 해답을 찾으려는 듯 눈을 가늘게 떴다.
그 모습에 심미호가 말했다.
“생각해 보세요. 둘째 공자와 셋째 공자에게 어떻게 대했는지요. 모두 용서했잖아요.”
“그건 그렇지. 그런데 그건 주군이 결정 내린 건 아니잖아.”
“그래도 끝까지 물고 늘어졌다면, 삼 공자는 아직도 뇌옥에 갇혀 있을 거잖아요.”
“음, 그건 그러네. 그러니까, 심 부대주 말은 주군이 상대를 봐줬고 거기에는 이유가 있단 말이지?”
“네, 원래 개구리가 뛰기 전에 움츠리는 법이잖아요.”
“흠.”
소대섭은 눈을 가늘게 뜨고 한빈이 사라진 자리를 바라봤다.
그가 생각하기에 주군인 한빈은 움츠린 적이 없었다.
하북 무림을 들썩이게 만든 것이 한빈이었는데 그 행보가 움츠린 것이라면?
소대섭은 고개를 휘휘 저었다.
* * *
며칠 후.
한빈은 하북팽가 가주전으로 들어갔다.
가운데에는 가주 대행인 집법당주 팽대위가 있었고 그 옆으로 원로와 각주가 한빈을 바라보고 있었다.
비록 몇 걸음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마주하고 있었지만, 중간에는 만리장성이라도 놓인 듯 한빈 측과 원로 측은 공기가 달랐다.
원로들의 눈빛은 잘 벼린 칼날처럼 날카롭기 그지없었다.
마치 한빈이 어떤 실수를 하는지 놓치지 않겠다는 표정이었다.
호랑이가 아니라 먹이를 앞에 둔 승냥이의 모습이었다.
하지만, 한빈은 웃음을 잃지 않았다.
“제게 중대한 임무를 맡겨 주셔서 감사합니다.”
뜻밖의 말에 원로들이 웅성대기 시작했다.
하지만, 바로 팽대위가 손을 들어 소란을 진정시켰다.
그러고는 한빈을 바라보고 말했다.
“사 공자, 이 임무가 좋아할 일만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지 않느냐?”
“강남 무림의 기둥이시자 하남정가의 가주이신 정무룡 대협의 목숨이 제 어깨에 달렸습니다. 이런 중대한 임무를 맡겨 주셨는데 어찌 좋아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한빈의 말에 여기저기서 헛기침 소리가 튀어나왔다.
“허.”
“그거참.”
하지만, 그들의 헛기침은 한빈의 다음 말에 멈췄다.
“팽가에 그 많은 고수가 이 임무를 맡기 위해…….”
한빈은 말끝을 흐리며 주변을 바라봤다. 그 전까지 한빈을 날카롭게 쏘아보던 원로와 각주들이 시선을 피한다.
그 모습에 한빈이 씩 웃었다.
“나섰다고 들었습니다. 그런데도 이 임무가 제게 왔다는 것은 저를 그만큼 인정해 주시는 것이 아닐는지요.”
“…….”
이번에는 헛기침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그들은 그제야 한빈이 자신들에게 일침을 가한 것이라는 것을 알아챘다.
그때 주작각주 가기군이 포권했다.
“네, 이 일을 맡아 주신 것만으로도 저 가기군은 사 공자님을 지지는 바입니다.”
한빈도 일어나 가기군을 보며 포권했다.
가기군은 전에 비무를 벌였던 다섯 도객 중 하나였다.
그는 정보를 담당하는 주작각의 각주로서 어떤 공자에게도 지지를 보내지 않았다.
그런데 이번에 공식적으로 한빈을 지지한다 표한 것이다.
한빈이 말했다.
“감사합니다, 주작각주님. 그런데 말입니다. 나머지 원로님과 각주님도 같은 의견이라고 봐도 되겠습니까?”
한빈의 물음에 가기군이 작게 웃으며 주변을 둘러봤다.
시선이 마주친 원로와 각주들이 시선을 피한다.
가지고 있기 싫은 뜨거운 토란을 한빈에게 떠넘기고는 지지는 보내기 싫다는 표정이다.
그도 그럴 것이 그들 대부분은 벌써 첫째 공자와 둘째 공자의 뒤에 줄을 섰다.
하지만, 가기군은 모르는 척 답했다.
“아마도요.”
한빈이 원로와 각주에게 가볍게 포권했다.
“여러분들의 지지 감사히 받겠습니다.”
“흠.”
“험.”
여기저기서 튀어나오는 헛기침 소리에 팽대위가 웃음을 참는 듯 수염을 꿈틀댔다.
그것도 잠시, 표정을 바꾼 팽대위가 내공을 실어 외쳤다.
“이제 거기까지!”
서로 각을 세우는 것은 여기까지 허용하고 본론을 말하겠다는 것이다.
장내가 조용해지자 팽대위가 말했다.
“사 공자도 우리 상행이 여러 차례 습격을 받았다는 것은 알고 있을 것이다.”
“네,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번 임무에서는 그 어떤 실수도 용납되지 않는다.”
“네, 그것도 명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제안드릴 것이 있습니다.”
위풍당당한 한빈의 말투에 모두가 고개를 갸웃할 때 팽대위가 말했다.
“어떤 제안인지 말해 보아라.”
“저는 이번에는 임무에 천리 표국의 도움을 받고자 합니다.”
“흠.”
팽대위가 잠시 침음을 삼켰다.
동시에 원로들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나, 사 공자?”
“그렇소! 어떻게 천리 표국의 도움을 받는다는 말인가?”
“나는 귀곡장을 넘겨받을 때부터 천리 표국과 모종의 관계가 있음을 알아봤소.”
“허허, 하북팽가의 위신이 땅에 떨어질 일이야.”
그때였다.
스르릉!
한빈이 검을 뽑은 것이다.
월아는 한빈의 감정을 나타내는 것처럼 냉기를 펄펄 날리며 푸른 검기를 토해 냈다.
그 와중에 팽대위는 팔짱을 끼고 한빈과 원로들의 기 싸움을 지켜봤다.
난데없는 상황에 원로들이 숨을 죽였다.
소란이 진정되자 한빈이 말했다.
“저는 하북팽가에 누가 되는 일이 없다는 것을 이 검에 맹세합니다.”
동시에 월아를 감쌌던 검기가 사라졌다.
한빈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말을 이었다.
“여러분께 한 가지를 물을 것이 있습니다.”
“…….”
“곤륜파의 보물이자 하남정가의 가주를 구할 보물인 청명환이 하북팽가를 떠나 남쪽으로 간다는 것을 모르는 강호인이 있을까요?”
“그게 무슨 말이요?”
원로 중 하나가 외치자 한빈이 피식 웃으며 말을 이었다.
“제가 알기로는 소문이 파다합니다. 그 소문을 과연 누가 냈을까요?”
“그야, 사 공자가 떠들면서 다녔을지도 모를 일이지 않소?”
원로의 말에 한빈이 뒤를 바라봤다.
그곳에는 소대섭이 긴장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순간 한빈이 손가락을 튕겼다.
딱!
동시에 소대섭이 번개처럼 달려와서는 한빈 앞에 멈췄다.
소대섭은 품속에서 서찰을 꺼내 한빈에게 공손하게 바쳤다.
한빈이 움켜쥔 서찰을 들어 올렸다.
그 모습에 원로들은 고개를 갸웃했다.
모두의 호기심이 극으로 치달았을 때 한빈이 말을 이었다.
“이것은 이번 임무에 대한 서찰입니다. 이것을 보시면 아시겠지만, 저는 어떤 명령인지도 모르고 이번 임무를 받아들였습니다.”
“집법당 무사들에게 듣긴 했지만, 그게 어떻게 증거가 될 수 있단 말이오. 사 공자.”
원로가 각을 세우자 한빈이 작게 웃었다.
“이 서찰을 확인해 보시죠.”
말을 마친 한빈은 그 서찰을 원로에게 던졌다.
휙!
탁!
서찰을 받아 든 원로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이 서찰이 어떻게 증거가 된다는 말이오?”
“서찰을 자세히 보시죠.”
한빈의 말에 다른 원로와 각주들이 그의 주변에 모여들었다.
한빈이 다시 말을 이었다.
“서찰에 찍힌 봉인을 보시면 제가 한 번도 그것을 뜯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럼 누가 소문을 퍼뜨렸을까요? 아무것도 모르는 저일까요? 아니면 이미 이 임무에 대해 논의를 끝낸 여러분들일까요?”
순간 장내가 정적에 휩싸였다.
“흠.”
“허허.”
여기저기서 헛기침 소리가 흘러나올 때 각을 세우던 원로가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러면, 임무에 대해서는 어떻게 안 것이오? 여기에 올 때부터 알고 있던데 말이오.”
“그건 간단합니다.”
말을 마친 한빈은 품 안에서 매듭 하나를 꺼냈다.
그것은 홍칠개가 전해 준 붉은 매듭이었다.
한빈은 매듭을 살랑살랑 흔들며 말을 이었다.
“제 사부가 누구라는 것은 소문으로 알고 계실 겁니다. 저는 개방을 통해서 누가 막중한 임무에 대해서 소문을 퍼뜨렸는지 수소문하던 중이었습니다. 물론 그 과정에서 어떤 임무인지를 알 수 있었고요.”
한빈이 희미하게 웃으며 주변을 둘러봤다.
그와 눈이 마주친 자 중 몇몇은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아무래도 제 발 저리시는 분이 계시는군요. 제가 천리 표국에게 도움을 청하는 이유는 간단합니다.”
한빈의 말을 팽대위가 받았다.
“사 공자는 소상히 말해 보아라.”
“네, 그 이유를 말씀드리자면…….”
한빈의 설명이 계속되자 원로와 각주들의 눈빛이 살짝 떨렸다.
그만큼 한빈의 생각은 파격적이었다.
간단히 말해 천리 표국에게 의뢰할 임무는 운송이 아니라 한빈에 대한 호위였다.
딱 거기까지만 일을 맡기겠다는 것이었다.
실리는 자신이 챙기고 짐은 천리 표국에게 넘기겠다는 말이었다.
계획을 들은 팽대위가 고개를 기울이며 물었다.
“천리 표국에서는 부탁을 들어준다더냐? 자금에 대해서도 상의를 해 봐야 하거늘…….”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한빈을 바라보던 팽대위는 더욱 의문에 싸였다.
한빈의 미소가 점점 짙어지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전에 이 모습을 봤다면 하룻강아지라 치부했겠지만, 팽대위가 바라보는 지금 한빈의 모습은 새끼 호랑이 정도는 되었다.
팽대위는 한빈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모두가 잠잠한 가운데 문이 열리고 무사가 달려왔다.
덜컹!
다급하게 달려온 무사가 팽대위에게 포권하며 외쳤다.
“천리 표국에서 방문했습니다!”
동시에 모든 시선이 한빈에게 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