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화. 적과의 동침 (3)
한빈이 이 둘을 어떻게 쫓아내야 할까를 궁리하며 설명하고 있을 때 바닥에 머리를 박고 있는 산서삼살의 주변에 작은 진동이 생겼다.
덜덜.
그것은 그들이 느끼는 두려움과 분노의 합주였다.
빙혈서생 소경운은 이제 마지막 희망마저 버렸다.
그의 희망은 한빈의 말이 거짓이라는 것이었다.
거짓이라는 것에 대한 근거는 넘치고도 충분했다.
하북팽가의 사 공자는 강호에 나온 적이 없었다. 그렇다면 개방과의 인연도 없을 터.
어떻게 소문을 뿌린다는 말인가?
빙혈서생과 흑의살풍은 서로 전음을 주고받으며 몸을 회복시키고 있었다.
몸이 회복되는 대로 이곳을 벗어날 생각이었다.
하지만, 혹시 모를 위험 때문에 마지막까지 확인하는 중이었다.
그런데, 한빈의 사부가 개방의 홍칠개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었다.
빙혈서생이 첫째 흑의살풍에게 전음을 보냈다.
-형님, 생각보다 거물을 건드린 것 같습니다.
-그러게 말이다. 그래도 도전해 볼 만한 가치는 충분히 있었다. 청명환 한 알이면 우리 세 형제와 가족이 대대손손 편히 먹고살 수 있지 않으냐?
-그런데, 애초에 정보가 잘못되지 않았습니까? 문제는 하오문입니다.
머리를 박고 있는 흑의살풍의 표정이 확 일그러졌다.
콧김을 내뿜은 흑의살풍 막대강이 빙혈서생에게 전음을 보냈다.
-그래, 네 말이 맞다. 돌아가는 대로 하오문을 족치자꾸나.
-형님, 그런데 돌아갈 수 있을까요? 저는 그 물음에 대해 회의적입니다. 저 사 공자란 놈은 악, 그 자체입니다. 사파도 마교도도 저렇게는 행동하지 않습니다.
-흠.
-외통수입니다, 외통수.
빙혈서생의 말 이후로 더는 전음이 이어지지 않았다.
더는 전음을 날릴 내공도 아까웠던 것이다.
그들이 절망의 늪에서 허우적댈 때 한빈의 설명이 끝났다.
“······이렇게 된 것이다.”
“그럼 형님이 저들을 제압하신 겁니까?”
악비광이 놀란 듯 묻자 한빈이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 나는 첫째만 상대했고 나머지는…….”
한빈은 말끝을 흐리며 윤용호를 가리켰다.
물론 이유는 있었다.
천리 표국은 괜찮지만, 산동악가까지 설화에 대해 의심하기 시작하면 골치 아프기 때문이었다.
거대한 덩치 때문에 가려져 있지만, 악비광의 뱃속에 구렁이 서너 마리는 들어가 있다는 것을 한빈은 알고 있었다.
한빈의 시선을 받은 윤용호가 어색하게 웃으며 입을 열려 했다.
표정이 무슨 말이냐는 것 같았다. 그 모습에 한빈이 윤용호에게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이번 웃음에는 그냥 인정하라는 신호가 담겨 있었다.
윤용호도 재빨리 한빈의 표정을 읽었다.
아마도 팽가의 비밀 병기는 사 공자 한빈이고, 한빈의 비밀 병기는 시녀 설화인 것 같았다.
윤용호는 재빨리 꺼내려던 말을 바꿨다.
“어떻게 하다 보니 그렇게 되었습니다, 하하.”
윤용호의 호탕한 웃음이 끝나기도 전에 악비광이 다시 말했다.
“그럼 표사님께서 빙혈서생과 편육랑아를 제압하신 겁니까?”
“어쩌다 보니…….”
“와, 저 둘이 한 번에 달려든다면 저도 감당하기 힘이 들 텐데 강북 무림에 새로운 고수가 등장했군요.”
악비광이 진심이 담긴 말투로 응대하자 윤용호가 허탈하게 웃었다.
“하하, 과한 칭찬이십니다.”
그때 무소율이 끼어들었다.
“그건 그렇고 저도 이번 표행을 돕겠습니다.”
그 말에 한빈이 윤용호에게 눈짓했다.
그 신호를 받은 윤용호가 말했다.
“음, 그러니까. 이 부분은 조금 민감한 부분인데, 지금의 표행은 천리 표국의 행사입니다. 그러니 도움은 필요 없습니다.”
정중한 거절에 무소율이 눈을 가늘게 떴다.
“저희 무씨검가와 천리 표국 사이에 협약을 알고 계실 텐데, 그런 말씀은 너무하신 것 같네요.”
“무씨검가라니요?”
윤용호가 고개를 갸웃하며 무소율을 바라봤다.
“저는 무씨검가의 무소율이라고 해요.”
“헉.”
윤용호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무씨검가의 여장부 무소율.
그녀의 이름은 윤용호도 익히 들어 봤었다.
그때 옆에서 악비광이 끼어들었다.
“저는 산동악가의 악비광이라고 합니다.”
“산동악가라고요?”
윤용호가 입을 벌렸다.
정신이 없어 이제야 통성명했는데 그 정체가 강북 무림에서 위세가 당당한 세가의 직계들인 것이다.
악비광이 넉살 좋게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그렇게 놀라지 마십시오.”
“끼어들지 마시죠.”
무소율이 악비광에게 일침을 가했다.
그들의 대화에 한빈이 눈매를 좁혔다. 생각해 보니 무씨검가와 천리 표국의 관계는 우호적이었다.
게다가 한빈이 모르는 모종의 협약이 되어 있는 느낌이었다.
한빈이 고개를 돌려 뒤쪽에 마차를 바라봤다.
“저 마차는 무엇인지요?”
“아, 저기에는 여정에 필요한 물품이 실려 있어요.”
“흠.”
한빈은 관자놀이를 톡톡 치며 계산을 시작했다.
그것도 잠시 한빈이 사람 좋은 얼굴로 말했다.
“그렇다면 이렇게 하시죠.”
“어떻게요?”
“제 계획은 간단합니다. 그러니까…….”
한빈의 설명이 계속되자 듣고 있던 모든 이들의 눈이 커졌다.
한빈의 계획은 간단했다.
산서삼살에게 끌려가는 척하자는 말이었다.
그들이 표물을 노획하고 한빈마저 끌고 가는 모습을 보인다면 일단 사파의 무리에게 습격을 받을 확률이 줄어든다는 말이었다.
정파와 맞닥뜨리면 해명하면 그만이고 말이다.
원래 여기까지는 한빈의 계획에 있던 것이었다.
하지만, 무소율과 악비광이 오면서 인원이 추가된 것이다.
한빈뿐 아니라 악비광과 무소율마저도 산서삼살에게 제압되어 끌려가는 모습을 보여 줘야 한다는 말이었다.
그 계획에 악비광이 고개를 저었다.
“저는 그렇게는 못 하겠습니다. 어찌 천하의 악가가 산서삼살에게 끌려가는 척을 한다는 말입니까.”
순간 무소율이 미간을 좁혔다.
“그럼 빠지시죠. 괜히 귀찮게 쫓아와서는…… 흥.”
이것은 무소율의 진심이었다.
얼마 전 한빈과의 만남이 악연이라 생각했는데, 그것은 바로 인연으로 반전되었다.
사실 무씨검가는 자신의 대에 와서 하북제일검이라는 명맥이 끊길 것으로 봤다.
그 이유는 게으른 천재인 동생 무소위 때문이었다.
개망나니로 불리던 동생 무소위가 지금 한빈 덕분에 확 달라져 가문의 기대를 한 몸에 받는 상태로 변했다.
무소위는 한빈 덕분에 깨달음을 얻은 이후, 하루가 다르게 변하고 있었다.
파혼으로 인해 한빈과의 인연은 끝났지만, 무인으로서 느끼는 호기심은 감출 수 없었다.
그런데, 악비광이 쫓아와 자꾸 방해를 하는 것이었다.
날카로운 무소율의 눈빛에 악비광이 손을 내저었다.
“제가 안 한다는 말씀이 아니지 않습니까? 합니다, 해요. 이게 다 작전이라는 걸 제가 아는데, 왜 안 하겠습니까? 소문은 한순간이고 이번 여정에서 얻을 명성은 영원할 겁니다, 하하.”
악비광의 웃음에 모두가 황당하다는 듯 고개를 돌렸다.
악가를 이끌어 나갈 악비광의 모습치고는 너무 가벼웠다.
게다가 덩치라도 작으면 이해할 텐데 악비광은 기골이 장대한 무사였다.
외모와는 안 어울리는 가벼움.
그것은 무엇 때문일까?
모두는 그것이 무소율 때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무소율의 향한 악비광의 감정은 드러나도 너무 드러났다.
물론 무소율이 한빈에게 보내는 은근한 시선도 설화는 느끼고 있었다.
모두의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고 한빈이 뒤쪽을 보며 말했다.
“너희도 들었지?”
산서삼살에게 하는 말이었다.
“…….”
그들은 말이 없었다. 대화 내용은 들었지만, 뭐라 답해야 할지 몰라서였다.
하지만 한빈은 틈도 주지 않고 말을 이었다.
“설화야, 지필묵 하나 더 준비해라. 전서구 하나 더 날리자.”
“네, 공자님.”
설화가 가벼운 발걸음으로 달려가자 산서삼살 중 빙혈서생이 재빨리 일어나 말했다.
“대협, 알겠습니다. 명에 따르겠습니다.”
그의 말에 한빈이 흡족하게 웃다가 고개를 갸웃했다.
“내가 언제 일어나라고 했지?”
“아.”
빙혈서생이 멍하니 있다가 다시 바닥으로 머리를 꽂았다.
그 모습에 무소율이 입을 딱 벌렸다.
물론 악비광도 마찬가지였다.
그들과의 대결에서 이겼다는 말을 들었을 뿐, 지금 산서삼살의 반응을 보니 이건 그냥 이긴 것이 아니었다.
바닥에 놓고 자근자근 밟지 않으면 나오지 않을 모습이었다.
그때 한빈이 말했다.
“기상!”
그 소리에 산서삼살은 마치 병사처럼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한빈의 대충 표행의 대열을 정비했다.
앞쪽에는 흑의살풍과 빙혈서생이 표행을 끌고 가는 형태이고 가장 뒤쪽에는 편육랑아가 한빈 일행의 도주를 막는 것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마차에 탄 한빈이 그 광경을 흐뭇하게 바라보자 설화가 물었다.
“남들이 믿을까요?”
“설화는 다른 사람들이 왜 못 믿을 거라고 생각하는 거지?”
“꼭 호위하는 모습이잖아요.”
“아니지, 바꿔 생각하면 철저히 감시하는 모습일 수도 있잖아.”
말을 마친 한빈은 툭 하고 자신이 앉은 자리를 건드렸다.
그러고는 한철 궤 하나를 꺼냈다.
그 모습에 설화가 화들짝 놀라 물었다.
“공자님, 지금 그것도 가짜죠? 좌석 밑에 얼마나 많은 가짜 한철 궤가 있는 거예요?”
“궁금하면 보든가.”
한빈이 옆으로 비켜 좌석을 열었다.
순간 설화의 눈이 커졌다.
“이렇게 많은 한철 궤를 대체…….”
“아, 내가 아는 장인에게 부탁했지.”
“흠, 단시간에 만들기 어려웠겠는데요.”
설화가 턱을 괴며 무수히 많은 한철 궤를 감상했다.
“솜씨가 좋은 분이지.”
한빈은 싱긋 웃으며 정소연의 할아버지 정철민을 떠올렸다.
떠나오기 전 한빈은 몰래 움직이며 이번 여정을 준비했는데 그중 한 가지가 한철 궤였다.
사실 한철 궤 전체가 한철로 만들어진 것은 아니었다.
한철은 얇게 펴서 나무를 감싸는 형태로 만드는 방식이 일반적이다.
얇게 펴면서 강도를 유지하기란 쉽지 않았다.
하지만, 정철민은 단시간에 이 많은 한철 궤를 만들어 냈다.
심미호가 하북팽가에서 빼내 온 것을 복제한 것과 모양만 그럴듯하게 만든 것이 섞여 있었다.
물론 내용물도 알차게 채워 넣은 상태.
한빈이 의미심장한 웃음을 보이자 설화가 물었다.
“그런데, 처음 마차에 타셨을 때 한철 궤를 좌석 밑에 넣었잖아요.”
“눈썰미가 좋군.”
한빈이 칭찬의 말을 건네자 설화가 눈을 초롱초롱하게 뜨며 물었다.
“그럼, 진짜에 표시는 해 두신 거죠?”
“아니.”
“표시를 안 했다고요? 대체 왜 그러신 거예요?”
“적을 속이려면 나부터 속여야 하는 법이지.”
설화는 고개를 갸웃했다.
맞는 말 같기도 하고 모순이 있는 것 같기도 했다.
“그럼 어떻게 찾아요?”
“필요한 사람이 찾을 텐데 뭔 걱정이야.”
“그러다 중간에 도둑맞으면. 진짜를 잃어버린 건지 가짜를 잃어버린 건지 모르잖아요.”
“그야, 운 좋은 놈이 진짜를 뽑아 가면 그걸 어떻게 말려.”
“헐.”
설화는 한빈의 표정을 살폈다. 가볍게 웃는 평상시 모습 그대로였다. 설화가 다시 물었다.
“대체 무슨 계획이죠?”
“그런 비밀이야. 궁금하면 나중에 눈으로 직접 확인해.”
“아.”
설화가 탄성을 흘릴 때 뒤쪽에서 말발굽 소리가 가까워졌다.
열린 창문 사이로 무소율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도 같이 타고 가도 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