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6화. 실력의 삼 할은 숨겨야 하는 법 (2)
[용안으로 구결을 확인합니다.]
[용린검법의 응용편 중 진(眞)을 획득하셨습니다.]
뭐지?
한빈은 눈을 가늘게 떴다.
화경의 고수 서문무결에게 얻은 구결이 응용편의 일반 구결이라고?
상대의 경지에 따라 구결의 급도 달라지는 것이 아니었던가?
한빈의 머릿속에 의문이 쌓일 때 서문무결의 헛기침 소리가 들려왔다.
“험.”
그 소리에 상념에서 깨어난 한빈이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서는 서문무결이 아쉬운 눈빛으로 한빈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표정은 마치 밥을 먹다 만 아이의 눈빛이었다.
물론 한빈도 마찬가지였다.
서문무결의 몸에는 구결을 나타내는 점이 아직도 남아 있었다.
한빈은 재빨리 포권하며 말을 이었다.
“깨달음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갑작스러운 인사에 서문무결이 눈을 크게 떴다.
“그게 무슨 말…….”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한빈은 활짝 웃으며 말을 이었다.
“어렵게 만나 시작한 비무 아닙니까?”
한빈이 상체를 기울이며 목소리를 낮추자 서문무결도 마주 고개를 숙였다.
“그야 그렇지. 자네는 무얼 말하고 싶은 것인가?”
“동행하며 시간 날 때마다 서로 검을 맞대는 게 어떨까 하고요. 비무를 꼭 한 번만 하라는 법 있습니까? 수련용 목검을 쓴다면야 한 시진 단위로 겨뤄도 상관없지 않을까 생각해서요.”
서문무결은 조용히 한빈을 바라봤다.
그는 화경의 고수 진룡대협과 한빈을 동일시하며 비무에 임했다.
물론 한빈에게 맞춰 공력의 수위를 낮췄다.
그렇게 검을 겨루다 보니 한빈에게서 적룡대협의 진짜 무위를 엿볼 수 있을 것 같았다.
만약 한빈과 자신의 경지가 비슷하다면?
서문무결은 조금 전의 비무를 복기했다.
결과는?
만일 경지가 비슷하다면 도저히 예측할 수 없는 검로였다.
그만큼 한빈 검로는 변화무쌍했다.
서문무결의 눈앞에는 아직도 한빈의 검로가 아른거렸다.
조금만 더 겨루면 적룡대협이라는 정체불명의 고수에 대해서 더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한빈이 이렇게 먼저 제안하자 구미가 당길 수밖에 없었다.
거기에 수련용 목검을 사용한다면 조금 더 편하게 자신의 무위를 펼칠 수 있을 것 같았다.
생각을 마친 서문무결은 자신도 모르게 기분 좋은 웃음을 터뜨렸다.
“허허. 좋네, 좋아. 나도 바라는 바네.”
“감사합니다.”
한빈이 살짝 고개를 숙이자 서문무결이 사람 좋은 얼굴로 다시 웃었다.
비무를 마친 둘이 서로의 얼굴을 보며 웃는 모습은 마치 막 마지막 바둑돌을 놓은 도인들처럼 허허로웠다.
하지만 그 모습을 바라보던 서문수연은 한숨을 쉬며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하늘을 올려다봤다.
“후!”
무공에 미친 것은 자신의 아버지인 서문무결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밖으로 나와 보니 아버지인 서문무결보다 더 심각한 자가 나타난 것이었다.
서로 저렇게 편안히 대화하지만, 서문수연이 보기에 상태가 심각했다.
서문무결의 옷자락 중 몇 군데가 휑했고 한빈은 그보다 더 심했다.
붉은 무복 사이로 비치는 핏물은 이번 비무가 얼마나 치열했는지를 말해 준다.
서문수연은 그나마 서문무결이 봐줬기에 저 정도라 생각했다.
그런데, 또다시 비무를 하자니?
서문수연은 고개를 돌려 서문진경의 표정을 바라봤다.
역시 오라버니도 자신과 마찬가지로 넋 나간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때였다.
갑자기 산이 울리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쿵! 쿵!
고개를 돌려 보니 뒤쪽에서 맹호사대가 칼로 바닥을 찍고 있었다.
옆에 있는 이무명도 검으로 바닥을 찍고 있다.
그들은 마치 출정을 앞둔 병사들처럼 비장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들 중 누군가가 외쳤다.
“역시 주군이시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조호였다.
그 말을 시작으로 여기저기서 함성이 터져 나왔다.
“역시 군자검 대협이시다!”
“앞으로 이런 비무를 계속 볼 수 있다니! 가슴이 뭉클합니다!”
그 함성이 잦아들 때였다.
아쉬운 목소리가 서문수연의 옆에서 들려왔다.
“아, 싸움 구경에는 당과가 있어야 하는데…….”
고개를 돌려 보니 아까 거미를 잡아 줬던 설화가 입맛을 다시고 있었다.
저렇게 어린 여자아이조차 싸움에 열광한다고?
서문수연은 순간 한빈과 그의 일행에 대해서 의문을 품어야 했다.
* * *
같은 시각 서안의 정의맹 본단.
정의맹의 군사 중 한 명인 모용진우는 친우의 갑작스러운 방문에 다급히 접객실로 향했다.
타다닥.
다급한 발걸음 때문인지 단정한 그의 의복이 헝클어졌다.
하지만, 모용진우는 아무렇지도 않게 접객실을 향해 달려갔다.
외모는 서른 중반.
부드러운 턱선은 마치 다른 이에게 자신의 성격이 온화하다고 말하는 것만 같았다.
너그러움과 부드러움.
그것은 정의맹 무사들이 모용진우에게 쏟아 내는 평판 중 하나였다.
하지만, 풀을 먹인 듯한 빳빳한 의복을 보면 바늘 하나 들어갈 것 같지 않은 모습이다.
정의맹에 있는 사람들에게 물어보면 모용진우는 상반된 성격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고 한다.
자신에게는 한없이 엄격하고 남에게는 한없이 너그러운 사람.
그것이 모용진우에 대한 종합적인 평이었다.
그런데 평상시 평정심을 잃지 않던 모용진우가 상기된 표정으로 급하게 달려가는 모습에 모두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뭐지? 지금 모용진우 군사님 맞지?”
“그러게? 무슨 일이기에 저렇게 다급하게 뛰어가시는 거지?”
“그러게 말이야. 모용진우 군사님이 저러는 건 처음 보네.”
“에이, 설마 별일이야 있겠어?”
웅성거림을 뒤로한 채 모용진우는 접객실의 문을 열었다.
덜컹.
급하게 문을 연 모용진우는 상대를 바라봤다.
그곳에서는 모용진우보다 두 뼘은 더 키 큰 사내가 자리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그 사내의 딱 벌어진 어깨 아래로 보이는 팔뚝 근육은 피부를 뚫고 나올 것 같았다.
그의 뒤쪽에는 창만큼 긴 거도가 세워져 있었다.
거도의 검신에는 희미하게 하북(河北)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모용진우가 재빨리 표정을 수습하며 그에게 말했다.
“팽가의 대공자께서 여기까지 무슨 일인가?”
“별일은 아니고 자네 얼굴이 보고 싶어서 왔지.”
꿈틀대는 사내의 근육과 함께 검게 그을린 얼굴이 살짝 일렁였다.
그 모습에 모용진우도 마주 웃었다.
모용진우는 상대의 웃음에서 그 뜻을 찾으려는 눈길을 떼지 않고 상대를 계속 바라봤다.
그의 이름은 팽혁빈.
하북팽가의 대공자이자 가문에서 첫 번째로 소가주 후보로 인정받은 직계였다.
“그렇게 말해 주니 고맙네.”
모용진우는 팔을 활짝 벌려 팽혁빈을 환영했다.
하지만, 경계심이라는 빗장만큼은 풀지 않았다.
둘 사이에는 시답지 않은 이야기가 차가 식을 때까지 이어졌다.
잠시 후.
모용진우가 표정을 바꾸며 입을 열었다.
“이제 이곳에 온 이유를 솔직히 말해 주겠나?”
그의 표정은 뭔가를 기대하는 듯 상기되어 있었다.
그 모습에 팽혁빈이 어깨를 으쓱하며 말을 이었다.
“성질 급한 건 예나 지금이나 여전하군.”
“그건 사돈 남 말 하는 걸 텐데. 급하지 않았다면 해남에서부터 여기까지 찾아왔겠나?”
“오호, 내가 해남에 머물고 있다는 것까지 알고 있다니, 대단한 정보력이야. 여기까지 온 보람이 있군.”
“자네가 해남으로 강호행을 갔다는 건 온 무림이 아는 일이 아닌가? 그것 가지고 정보력이라……. 갑자기 얼굴이 뜨거워지는군.”
“얼굴이 뜨거워지면 이걸로 식히시게.”
말을 마친 팽혁빈은 품 안에서 부채 하나를 꺼냈다.
그러고는 바로 상대에게 던졌다.
슝!
문제는 부채에 어린 강기였다.
내공을 실을 부채가 날아오자 모용진우는 손을 뻗었다.
손에서 투명한 기운이 일렁이며 눈앞에서 부채를 낚아챘다.
순식간에 일어난 공격과 방어.
하지만, 모용진우는 미소를 잃지 않고 부채를 폈다.
촤-악!
부채를 편 모용진우가 눈을 가늘게 떴다.
“해남에서 유명한 학자이신, 왕 선생의 필체군.”
“자네에게 주기 위해 어렵게 구한 부채일세.”
“이렇게 소중한 걸 그렇게 무식하게 날리다니? 힘이 남아도나?”
“나는 내 힘을 그렇게 가볍게 받은 자네의 금나수가 놀랍네.”
“뭐, 친구의 선물이라고 생각하고 잘 쓰겠네.”
“선물이 아니라 뇌물일세. 뇌물을 받았으니 내 편히 말하겠네.”
“흠.”
“하남정가에서 일어난 일의 진상부터 알고 싶네.”
“하남정가라? 혹시 하남정가와 정의맹 하남지부와의 거래를 따지려는 건 아니고?”
“그건 또 무슨 소린가?”
“이건 추가 비용이 필요한데…….”
모용진우가 말끝을 흐리자 팽혁빈이 씩 웃었다.
“아까 뇌물로 부족한가? 오랜만에 비무나 한판 하고 얘기하지.”
“아, 아닐세. 하하. 우리 사이에 무슨 비용. 농담이었네.”
모용진우가 손을 내젓자 팽혁빈이 팔짱을 끼며 의자에 몸을 기댔다.
그 모습에 모용진우가 다시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하남정가의 둘째 공자 정휘지가…….”
모용진우가 흥분한 표정으로 설명을 이었다.
하지만, 팽혁빈은 시큰둥한 표정으로 고개만 끄덕였다.
모든 설명이 끝나자 팽혁빈이 물었다.
“그럼 정체불명의 고수가 나타나 하남정가를 구했다는 건가?”
“뭐, 결론은 그렇지.”
“그럼 우리 막내는 정체불명의 고수에게 도움을 받은 것이 전부고?”
“그것도 맞네.”
“그럼 하북팽가의 소식은?”
“그것은 아직 모른다네. 아마도 그쪽도 난리가 났겠지. 아마도 이틀 정도가 지나야 소식이 들어올 것 같네.”
“그럼, 소가주 후보는 나와 막내만 남겠군.”
“뭐, 그렇지. 결국은 자네만 남겠지만 말이야.”
“속단하긴 이르지.”
“아마 강북 오대세가의 소가주 길들이기에서 나가떨어질걸?”
모용진우는 씩 웃었다.
그가 말한 오대세가의 소가주 길들이기는 소가주 후보에게 가주가 내는 간단한 시험이었다.
겉보기에는 쉽지만, 소가주 후보에게는 재앙과도 같은 시험.
대부분의 소가주 후보들은 이 시험에서 자신의 위치를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된다.
모용진우가 보기에는 이것은 겸손의 미덕과 절망을 배우는 시험이었다.
팽혁빈이 마주 웃으며 말했다.
“그러고 보니 원래는 둘째의 차례였는데, 대신 막내가 가겠군.”
“뭐, 그렇겠지. 나나 자네나 모두 겪은 일이 아닌가? 오랜만에 왔으니 차 한 잔으로 끝낼 일은 아닌 것 같고, 어떤가, 한잔?”
“술값도 내가 내겠네. 긴히 부탁할 일도 있고…….”
팽혁빈이 일어나며 뒤에 세워 둔 거도를 잡자 모용진우가 활짝 웃었다.
모용진우의 표정은 진심이었다.
팽혁빈과는 오늘 밤 나눌 이야기가 많았다.
둘은 어찌 보면 앞으로 권력을 나눌 사이였다.
모용진우와 팽혁빈은 강북오룡에 이름을 올린 신진고수.
게다가 강북 오대세가의 소가주 후보라는 공통점까지 가지고 있었다.
한마디로 가주가 되기까지 서로를 밀어주기로 약속한 사이였다.
모용진우는 과연 친우인 팽혁빈이 어떤 제안을 할지 기대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 * *
열흘 뒤, 장하 나루터.
한빈 일행과 서문무결은 장하의 나루터에 내렸다.
내린 이들의 표정은 제각각이었다.
서문진경과 서문수연은 뱃멀미에 정신이 없었고 서문무결은 아쉬운 듯 한빈을 바라봤다.
예정되었던 한빈과의 일정이 모두 끝났기 때문이었다.
서문무결은 더는 적룡대협을 찾지 않기로 했다.
한빈과의 비무에서 적룡대협의 실체를 온몸으로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서문무결이 말했다.
“아쉽군. 조금 더 있고 싶지만, 내게 허락된 발길이 여기까지인 것 같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