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7화. 기호지세 (3)
다시 울리는 함성에 한빈은 다시 고개를 돌렸다.
“와아!”
“이겼다!”
이번에도 적혈맹호대의 목소리였다.
함성이 멈추고 철벽처럼 연무장을 감싸고 있던 적혈맹호대 대원들이 갈라섰다.
그 틈 사이로 누군가가 걸어 나오고 있었다.
아마 이번 비무의 승자일 듯.
한빈은 기분 좋게 승자를 바라봤다.
승자는 다름 아닌 조호였다.
그곳에서는 막 대결을 끝낸 조호가 땀에 전 모습으로 걸어 나오고 있었다.
조호가 연무장 밖으로 나오자 장삼이 달려가 조호의 어깨를 두드리며 웃는다.
“잘했다, 조호.”
“잘하긴요. 아저씨보다 늦게 항복을 받아 냈잖아요.”
“허허, 그게 강호 짬밥이라는 거다.”
“에이, 저도 먹을 만큼 먹었어요.”
“이제 다 컸다고 기어오르네.”
그들은 방금 비무를 끝낸 자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여유가 있었다.
한빈은 그들의 모습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눈 먼 칼에 맞을 확률은 많이 낮아진 것 같은 느낌이었다.
하지만, 아직도 그들의 몸에는 기본편의 구결을 나타내는 점이 나타나지 않았다.
‘조금 더 빡세게 굴려야겠어!’
한빈은 훈련의 강도를 조금 더 높여야겠다 결심했다.
이를 아는지 모르는지 한빈을 본 조호가 한걸음에 달려왔다.
타다닥.
한빈의 앞에 선 조호가 활짝 웃으며 포권했다.
“주군, 이겼습니다.”
“잘했다.”
한빈의 말에 조호의 눈이 반짝였다.
이건 착각이 아니라 살짝 삐져나온 조호의 눈물이 햇빛에 반사된 것.
한빈은 피식 웃었다.
그때 적혈맹호대 모두가 한빈의 주변에 모여들었다.
그들은 동시에 칼을 머리 위로 치켜들었다.
“주군이 오셨다!”
“주군!”
그 함성에 한빈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이무명만은 고개를 갸웃했다.
‘왜 이렇게 빨리 오신 거지?’
겨우 첫 번째 비무와 두 번째 비무가 끝난 상황.
하지만, 시간은 반 시진도 흐르지 않았다.
그때 한빈의 목소리가 이무명의 귓전을 때렸다.
“무명, 준비해!”
“네?”
“하남정가에서보다 상황이 조금 더 안 좋을 수도 있으니 마음의 준비를 하라고. 소 대주한테도 전하고.”
이것은 이무명만 들을 수 있는 작은 목소리.
이무명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하남정가라?
그때를 생각하면 아직도 아찔한 기분이 드는 그였다.
당시의 상황은 언제 목이 달아나도 이상하지 않을 위기의 연속이었다.
그렇다면 이제부터 황보세가라는 칼날 위를 걸어갈 준비를 해야 한다는 말이었다.
이무명은 입술을 살짝 깨물며 한빈의 눈을 바라봤다.
뭐지?
이무명은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그가 보기에 한빈은 지금 이 상황을 즐기고 있었다.
한빈의 표정만 본다면 위험할 수도 있다는 얘기가 자신을 놀리기 위한 것은 아닐까 하고 착각이 들 정도였다.
하지만, 한빈이 이 상황에서 농담할 리는 없는 일.
분명히 이 상황을 즐기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이무명은 한빈이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갑자기 궁금해졌다.
어떤 아수라장을 헤쳐 왔길래 위험을 즐긴다는 말인가?
이무명의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한빈은 적혈맹호대 대원들을 뒤로한 채 어디론가 발걸음을 옮겼다.
그곳에는 황보견우가 턱을 괴고 한빈을 보며 웃고 있었다.
갑자기 마주친 시선에 황보견우가 턱에 괸 손을 허겁지겁 풀고 딴청을 피웠다.
조금은 당황한 모습이었다.
그 모습에 한빈이 재미있다는 듯 그를 바라봤다.
자신의 수하가 연속으로 비무에서 패했는데 저렇게 웃고 있다?
아직은 황보견우의 계획대로 일이 진행되고 있음을 뜻했다.
한빈은 황보견우를 향해 걸어갔다.
터벅터벅!
한빈은 내공을 사용해 진각을 밟듯 한 걸음 한 걸음에 힘을 주었다.
청강석이 부서질 듯한 한빈의 발소리에 모두가 동작을 멈췄다.
응원하기 위해 웅성거리던 무사도.
다음 비무를 위해 연무장에 선 무사도.
모두가 조용히 한빈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한빈이 내디디는 한 걸음마다 그들의 고개도 조금씩 돌아갔다.
처음에는 한빈만 보이던 그들의 눈에 이제는 황보견우의 모습이 같이 들어왔다.
황보견우는 적잖게 놀란 듯 눈을 크게 뜨고 있었다.
한빈이 황보견우에게 물었다.
“대공자, 어떻게 된 일입니까?”
“그게 무슨 말입니까? 팽 공자.”
“이곳에 사상자가 나왔다고 해서 급히 달려왔습니다.”
“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처음에는 가주가 저를 불렀다고 하고, 그다음에는 이곳에 누가 죽었다고 하니. 이게 어떻게 된 일입니까?”
“저는 모르는 일입니다. 대체 누가 그런 말을 합니까?”
“누구라니요? 대공자의 수하, 송경운 무사가 전한 일입니다.”
“송경운 무사라니요? 저는 모르는 일입니다. 아마 그놈이 실수한 것이겠지요.”
고개를 흔드는 황보견우의 볼살이 살짝 떨린다.
누가 봐도 웃음을 참는 모습이었다.
그 모습에 한빈이 물었다.
“좋은 일이라도 있으신가 봅니다. 아니면 좋은 일이 생길 예정인가요?”
“뭔가 오해하신 것 같습니다. 오랜만에 비무를 보다 보니 기분이 좋아서 그런 겁니다.”
“대공자님은 수하가 비무에 패해도 기분이 좋습니까? 전하고는 많이 달라지셨군요. 소림의 고승이라 해도 믿겠습니다. 하하.”
한빈의 웃음에 황보견우가 어색하게 마주 웃었다.
“뭐, 칭찬으로 알아듣겠습니다.”
“그런데, 혹시 방금 서명하신 계약서의 내용을 알고 좋아하시는 거겠죠?”
“내용이요?”
황보견우가 처음으로 호기심을 드러냈다.
“승리 수당은 별도입니다.”
“…….”
황보견우가 눈을 가늘게 뜨고 자신의 앞에 있는 계약서를 바라봤다.
그의 입술이 점점 벌어졌다.
금액에 놀란 듯싶었다.
그것도 잠시 그는 고개를 들어 한빈을 쏘아봤다.
당황한 기색 없이 자신의 검집을 확인하는 황보견우.
그는 마치 두고 보자는 듯 기세를 피워 냈다.
한빈은 웃음으로 그 기세를 흘리며 검집을 잡았다.
난데없는 상황에 모두는 한빈과 황보견우를 바라봤다.
누군가 검을 뽑게 되면 바로 생사결을 펼칠 듯한 분위기.
한빈은 황보견우의 손을 바라봤다.
과연 저 검을 뽑을까?
한빈은 그가 검을 뽑지 않는다는 데, 철전 다섯 닢을 걸 수 있었다.
한빈은 시선을 올려 황보견우의 눈을 바라봤다.
그는 상대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한빈의 어깨 너머를 보고 있다.
이것은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다는 뜻.
한빈과 황보견우는 그렇게 멈춰 서로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때 한빈이 지루하다는 듯 기지개를 켰다.
거기에 더해 하품까지 하는 한빈.
팽팽했던 긴장의 끈이 한순간에 풀리자 이를 지켜보던 이들은 헛숨을 토해 냈다.
그중 조호는 크게 숨을 내쉬며 속삭였다.
“허, 다행이네.”
“그래, 조호야. 나도 큰일이 나는 줄 알았다.”
장삼도 맞받았다.
“아저씨, 저는 지금 칼부림이라도 벌어질 줄 알았어요.”
그렇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있는 그들의 뒤로 한빈이 돌아왔다.
그 뒤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비무가 이어졌다.
그때 이무명이 물었다.
“설화는 어디에 갔나요?”
“궁금해?”
“네, 궁금합니다. 사부.”
“궁금하면 은자 다섯 닢.”
“설화에겐 철전 다섯 닢이라고 하셨잖아요. 그런데 저한테는 왜 은자를 받으시려고 하는 겁니까?”
“그건 간단하지. 돈의 값어치는 사람마다 다르니까.”
한빈이 씩 웃을 때였다.
다시 함성이 연무장 주변에서 울렸다.
이번에도 적혈맹호대의 승리였다.
한빈은 의자에 몸을 맡긴 채 팔걸이를 톡톡 쳤다.
마치 시간을 계산하는 것처럼.
한빈은 때가 되었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때 어디선가 다급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타다닥.
뒤를 돌아보니 누군가가 먼지를 일으키며 달려왔다.
먼지가 걷히자 그곳에서는 황보세가의 무사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황보견우에게 다가가 속삭였다.
그는 당황했는지 다소 목소리를 높였다.
모두는 무사의 목소리 중 한 가지 단어를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
그것은 바로 살인.
모두가 웅성대는 가운데 황보견우가 한빈에게 다가왔다.
“비무는 잠시 중지해야 할 것 같소.”
“무슨 일입니까? 대공자.”
한빈이 모른 척 묻자 황보견우가 기다렸다는 듯 말했다.
“황보세가 내에 살인 사건이 벌어졌다고 하오.”
“살인 사건이요?”
“지금 집법당주님이 팽 공자와 나를 급히 찾으시니 가 보는 게 좋겠소.”
“흠.”
한빈은 헛기침하며 뒤를 돌아봤다.
적혈맹호대와 이무명은 난데없는 상황에 입을 크게 벌리고 있었다.
그 모습에 한빈이 한쪽 눈을 살짝 깜빡였다.
그제야 모두는 굳었던 표정을 살짝 풀었다.
한빈이 다시 고개를 돌려 황보견우를 바라보며 말했다.
“일단, 가시죠.”
* * *
한빈과 황보견우는 수하를 대동하고 살인 사건이 벌어진 장소로 이동했다.
황보세가의 집법당 무사의 안내를 받은 한빈은 눈을 가늘게 떴다.
역시나 길이 익숙했기 때문이었다.
지금 걷고 있는 길은 한빈이 갔던 정자가 있던 곳이었다.
그들은 정자가 있는 연못가에 도착했다.
한빈은 멀리 떨어진 정자를 바라봤다.
연못 건너 정자에는 집법당주 황보서현이 먼저 와서 현장을 둘러보고 있었다.
황보서현은 시녀 한 명에게 설명을 듣고 있었다.
그 아래를 보니 누군가 피를 흘리고 쓰러져 있었다.
아까 봤던 시녀 중 하나인 듯했다.
한빈은 대충 황보견우가 파 놓은 함정이 짐작이 갔다.
뭐, 여기까지는 예상한 대로였다.
시녀가 우는 소리가 한빈이 있는 곳까지 들렸다.
잠시 후.
시녀에게 상황을 듣고 난 집법당주 황보서현이 고개를 돌렸다.
그런데 그 시선이 곱지 않았다.
황보서현은 살기등등한 기세를 피우며 연못을 가로지르는 다리를 건너왔다.
적혈맹호대는 그녀의 기세에 고개를 갸웃했다.
아무리 생각해 저런 적의를 보일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무명이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왜 저러는 겁니까?”
“나도 모르지.”
한빈은 마치 자신과는 관계없다는 듯 아무렇지 않게 답했다.
그때 황보서현이 다가왔다.
그녀는 황보견우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고 한빈의 앞에 섰다.
황보서현은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팽 공자. 만약 사실대로 털어놓는다면 오대세가의 협약에 따라 그 죄를 가문 대 가문의 관계에서 해결하겠네. 하지만, 사실을 숨기려 한다면 부득이 황보세가의 가칙으로 다스려야 하니, 잘 말하는 게 좋을 거네.”
“편히 물어보시지요.”
“아까 이곳에 온 것이 맞나?”
“네, 맞습니다.”
“그럼 자네가 저 시녀를 해친 것도 맞나?”
“왜 그렇게 생각하시죠?”
“시녀의 증언이 있었네.”
말을 마친 황보서현은 수하를 보며 말했다.
“용아를 이리 데려오너라.”
“네, 당주님.”
잠시 후. 무사는 살인 사건의 현장을 목격했다는 시녀를 데려왔다.
시녀를 앞에 둔 황보서현이 말했다.
“내게 말한 것을 여기에서도 말해 보아라.”
“네, 당주님. 그러니까…….”
시녀의 이야기는 간단했다.
정자 위에 안주를 차리고 주변의 풀을 정리하고 있는데 누군가가 뒤에서 다가왔다는 것이다.
그리고 돌아보려고 하니 마혈을 제압당해 쓰러졌다는 것이었다.
시녀의 증언이 끝나자 황보서현이 말했다.
“할 말 있는가? 팽공자.”
그녀의 목소리에는 날이 서 있었다.
하지만, 한빈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답했다.
“네, 있습니다. 시녀에게 제가 물어봐도 될는지요?”
“허락한다.”
황보서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한빈은 역시 미리 황보서현과 안면을 터놓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황보서현은 변호할 기회를 주겠다는 것이었다.
전생의 기억대로 법을 집행하는 데 있어서는 공정한 사람이었다.
한빈이 물었다.
“뒤에서 다가왔다고 했는데 어떻게 알았습니까?”
“그림자를 봤어요.”
“어느 방향을 보고 풀을 정리하고 계셨죠.”
“정자 쪽을 보고 있었어요.”
“어디에서요?”
“저쪽에서…….”
시녀는 말끝을 흐리며 다급하게 뒤쪽으로 물러났다.
마치 한빈이 무섭다는 듯 어깨를 떠는 것은 덤이었다.
질문을 마친 한빈은 황보서현을 바라보며 말했다.
“죄송하지만, 황보견우 공자와 잠깐 얘기 좀 하고 와도 될까요?”
“허락한다. 차 한 잔 마실 시간을 주겠다.”
“네, 감사합니다.”
작게 고개를 숙인 한빈이 황보견우에게 다가갔다.
황보견우는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고 있는 듯 입술을 실룩이고 있었다.
그의 앞에선 한빈이 물었다.
“감당할 수 있겠어?”
“무엇을 말인가?”
“뒤끝!”
“그게 무슨 말이냐?”
황보견우가 신경질이 난 듯 미간을 좁히며 물었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쯤이면 잔뜩 주눅 들어 있어야 할 한빈이 도리어 홀가분하다는 표정으로 말까지 놓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빈이 그에게만 들릴 정도의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뒤끝이 조금 있거든. 호랑이 등에서 내릴 수 있는 마지막 기회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