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8화. 팔이 너무 안으로 굽으면? (1)
한빈의 당당한 표정에 황보견우는 잠시 움찔했다.
그것도 잠시 그는 재빨리 표정을 수습하며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이것은 이미 결정이 난 승부.
그가 보기에 한빈은 절대 빠져나올 수 없는 올가미에 걸려들었다.
이 올가미는 황보세가에서 가장 머리가 뛰어나다는 동생 황보영우의 작품이었으니까.
황보견우는 잠시 뒤 한빈이 무릎을 꿇고 비는 모습을 머릿속에 그려 봤다.
피식 웃음을 지은 황보견우가 말했다.
“그건 내가 할 말인데 어떡하지? 지금이 네가 사과할 마지막 기회라고 말해 주고 싶군.”
황보견우도 한빈에게 말을 놨다.
그 모습에 한빈이 고개를 끄덕이며 피식 웃었다.
여유 있는 한빈의 표정에 황보견우가 하찮다는 듯 말했다.
“관을 봐야 눈물을 흘릴 놈이군.”
“그럼 너는 관을 봐도 웃을 놈인 것 같군. 눈치가 그렇게 없는 것을 보면 말이야.”
한빈이 맞받아쳤다.
“흠.”
위기의 상황에서도 한 발짝도 물러서지 않는 한빈의 태도에 황보견우는 자신도 모르게 헛기침을 했다.
그때 지켜보던 황보서현이 매섭게 한빈을 바라봤다.
“이제 말은 다 끝났는가?”
“네, 끝났습니다.”
“그럼 죄를 인정하는가? 하북팽가의 사 공자.”
그녀의 목소리는 가뭄 속 논두렁처럼 감정이 메말라 있었다.
한빈은 시종일관 느긋한 표정을 유지하며 되물었다.
“죄라니요? 저는 결백을 주장합니다.”
“근거는?”
“제가 말하면 믿어 주실는지요?”
“타당하다면 믿는다. 황보세가의 명예를 걸고! 그리고 집법당주로서의 사명까지 걸지.”
“네, 그럼 지금부터 제 결백을 주장해 보겠습니다.”
한빈의 말에 모두는 고개를 갸웃했다.
대체 어떻게 결백을 주장하겠다는 것인가?
황보견우는 코웃음을 쳤다.
반면 적혈맹호대 대원들은 근심 가득한 표정으로 한빈을 바라봤다.
지금은 시체와 증인이 있는 상황.
빠져나갈 방법은 없었다.
이무명은 조용히 한빈의 옆에 붙어 속삭였다.
“사부, 어떻게 하시렵니까?”
“하늘이 무너지면 솟아날 방법은 없지.”
“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솟아날 구멍이 있어야 정상 아닙니까?”
“정상은 무슨 정상? 그건 잘못된 속담이지. 하늘이 무너졌는데 어떻게 피해?”
“그럼 대체?”
“잘 봐 봐, 하늘이 무너졌는지.”
한빈이 하늘을 가리키자 이무명이 고개를 들었다.
청색 도료를 풀어 놓은 것처럼 하늘은 청명하기만 했다.
‘멀쩡한 하늘은 왜?’
이무명이 고개를 갸웃하자 한빈이 다시 말을 이었다.
“하늘이 무너지지 않았으니, 나도 별일 없다는 거지.”
말을 마친 한빈은 휘적휘적 앞으로 걸어갔다.
한빈이 걸음을 멈춘 곳은 시녀가 한빈을 목격했다는 장소였다.
한빈은 아무렇지도 않게 앉아 황보서현과 시녀를 번갈아 바라봤다.
한빈의 시선이 시녀에게 멈췄다.
“여기서 풀과 꽃을 정리하고 있었다고 했죠?”
한빈이 자리를 가리키자 시녀가 답했다.
“네, 맞아요.”
시녀가 고개를 끄덕이자 한빈이 자리에 앉았다.
털썩.
마치 소풍을 나온 것처럼 풀밭에 편히 앉은 한빈은 앞쪽의 꽃을 바라봤다.
꽃을 보다 고개를 들자 이번에는 정자가 보인다.
시녀가 말한 그대로였다.
모두가 고개를 갸웃하고 있을 때 한빈이 황보서현에게 말했다.
“집법당주님, 제 뒤에 서 보시겠습니까?”
“뭐, 어려울 것 없지. 어차피 사 공자가 이러는 것도 마지막일 테니까.”
황보서현이 조용히 한빈의 뒤에 섰다.
힐끔 황보서현의 위치를 확인한 한빈이 그 옆에 나뭇가지 하나를 주웠다.
그 나뭇가지로 그림자 하나를 툭툭 찍었다.
“시녀의 말대로 여기 그림자가 보이네요.”
한빈이 찍은 것은 황보서현의 그림자.
황보서현이 말했다.
“시녀가 그림자를 보고 사 공자임을 알아챘다는 증언을 다시 확인해 주었군. 스스로 제 무덤을 파다니……. 쯧쯧.”
황보서현이 한빈을 보며 혀를 찼다.
어젯밤에 만난 한빈은 이리 바보스럽지는 않았다.
그런데 계속 자신의 발등을 찍는 한빈의 모습은 애처롭기까지 했다.
황보서현의 비웃음 섞인 목소리에도 한빈은 시녀에게 다시 물었다.
“여기서 그림자를 본 게 확실합니까?”
“네, 확실해요.”
“그리고 고개를 돌리려는 순간, 마혈을 제압당했고요?”
“네, 맞아요.”
“그리고 슬쩍 지나가는 붉은색 무복과 정자 쪽에서 들려오는 소리로 나라는 걸 알아챘고요?”
“네, 분명 공자님이 저 아이를 겁탈하려고 하는 목소리를 들었어요. 저 아이는 안 된다고 거부했고요. 흑흑.”
정자 쪽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던 시녀는 황보서현의 뒤로 숨었다.
순간 여기저기서 탄성이 흘러나왔다.
“허, 하북팽가의 사 공자가 하북 최고의 겁쟁이라는 건 천하가 모두 아는 일이지만, 하북 최고의 호색한일 줄은 몰랐군.”
“자네 말이 맞네. 남의 가문의 시녀를 탐하다 안 되니 죽여?”
“천인공노할 짓을 벌였어. 하북팽가의 가주도 걱정이 많겠군.”
“그렇지. 한 배 속에서 나왔다고 다 같은 자식이 아니지.”
“에이, 그건 잘못된 말일세.”
“뭐가?”
“한 배 속이 아니니까.”
같이 따라온 황보세가의 무사들은 한빈을 손가락질하기에 바빴다.
모두가 한빈의 죄가 명백하다고 생각하는 순간.
황보서현도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이제는 집법당주로서 결정을 해야 할 때였다.
그녀는 조용히 검을 들었다.
슉!
검이 싱그러운 꽃향기를 갈랐다.
그 검은 한빈의 목덜미 바로 한 치 앞에서 멈췄다.
황보서현이 마음만 먹으면 목이 달아날 상황.
한빈은 아무렇지도 않게 꽃 하나를 꺾어 그녀의 그림자 위에 던졌다.
툭!
그 모습에 황보서현이 외쳤다.
“무슨 뜻이냐? 죽여 달라는 뜻이냐?”
“잘 생각해 보십시오. 해가 지기까지 저 꽃이 같은 자리에 머무를 수 있을까요?”
“…….”
“살인이 일어났다고 하던 때는 해가 중천에 뜨기 전이죠. 그때라면 그림자의 방향은 아마도…….”
한빈은 씩 웃으며 꽃을 주워 자신의 뒤쪽으로 던졌다.
툭!
꽃은 그림자에서 한참 벗어난 뒤쪽으로 떨어졌다.
순간 황보서현이 눈매를 좁히며 시녀를 바라봤다.
모든 것이 한빈의 말이 맞았다.
시녀는 한빈의 말이 무슨 뜻인지 모른다는 듯 고개를 갸웃하고 있었다.
순간 황보서현의 검 끝이 시녀의 목으로 향했다.
슉!
난데없는 상황에 시녀가 비명을 질렀다.
“앗! 집법당주님!”
“왜 거짓말을 했느냐?”
“저는 거짓을 고한 적이 없습니다.”
시녀가 다급하게 답하자 황보서현이 살짝 기세를 피워 냈다.
“너는 앞쪽의 꽃을 보고 있는 상태에서 드리워진 그림자를 봤다고 했다. 그런데, 살인이 일어난 시각에 그림자는 분명 이쪽을 비추고 있었다. 모든 게 팽 공자의 말대로다.”
황보서현은 검 끝으로 그림자의 방향을 가리키며 추궁했다.
“아…….”
그제야 자신의 실언을 깨달은 시녀는 머뭇거리며 긴 탄성만을 흘렸다.
그때 황보견우가 다급히 끼어들었다.
“난생처음 살인을 목격한 아이입니다. 당황해서 기억이 오락가락할 수도 있지 않습니까?”
“…….”
황보서현은 잠깐 시녀를 바라봤다.
황보견우의 말이 타당했기 때문이다.
그때 한빈이 슬며시 끼어들었다.
“그렇다면, 기억이 오락가락하는 시녀의 증언을 어떻게 믿습니까?”
순간 주변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들어 보니, 하북팽가의 사 공자 말도 일리 있어.”
“그러게 말이야.”
그렇게 사건이 원점으로 돌아가려는 순간이었다.
황보견우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제가 조금 전 들었던 것인데, 목격자가 한 명 더 있습니다.”
“목격자라고?”
황보서현이 놀란 듯 눈을 크게 뜰 때 황보견우의 뒤쪽에서 송경운이 나타났다.
송경운은 천천히 걸어와 집법당주 황보서현에게 포권했다.
“집법당주님을 뵈옵니다.”
“예는 거두고 본 것을 말해 보아라.”
“네, 그러니까…….”
송경운은 힐끔 한빈을 보더니 진지한 표정으로 진술을 이어 나갔다.
송경운의 설명이 이어지자 사람들의 시선은 한빈에게 집중되었다.
그의 진술은 간단했다.
가주가 한빈을 보자고 한 것은 자신이 잘못 안 것이고 그렇게 정자에 초대된 한빈이 시녀를 욕보이려다가 정자에서 빠져나갔다는 것이었다.
모두의 시선이 한빈에게 모이자 한빈이 어깨를 으쓱하며 송경운에게 다가섰다.
“송 무사, 내가 확실해?”
“확실합니다.”
“저 멀리서 봤다면서 나인 줄은 어떻게 알았지?”
“붉은 무복은 입은 자는 황보세가 내에 딱 한 명뿐입니다.”
송경운이 한빈을 가리키자 한빈이 아무 표정 없이 말을 이었다.
“우리 내기 하나 할까?”
“무슨 내기를 말입니까?”
“송 무사의 말이 틀렸다는 데 내 한쪽 팔을 걸지.”
“네?”
“그러니까, 송 무사도 걸어.”
“그럼 저도 제 한쪽 팔을…….”
한빈은 재빨리 그의 말을 끊었다.
“아니, 송 무사 말고. 송 무사의 주인 팔을 걸어야지. 저울이라는 게 균형이 맞아야 하지 않겠어?”
말을 마친 한빈은 힐끔 황보서현을 바라봤다.
황보서현은 마치 진실을 파악하려는 듯 둘을 번갈아 보고 있었다.
그때 한빈이 말을 이었다.
“사람이 죽었는데 한쪽 팔이 대수인가요? 진실을 위해서라면 이 정도는 걸어야 한다고 봅니다.”
황보서현이 잠시 고민에 빠진 듯 검을 검집에 넣었다.
그녀로서는 신중해야 했다.
정의맹의 한 축으로서.
강북 오대세가의 일원으로서.
황보세가의 집법당주로서 합당한 결정을 내려야 했다.
그때 한빈이 다시 말을 이었다.
“자신의 주장에 아무것도 걸지 못하는 자를 과연 황보세가의 무인이라 할 수 있습니까? 자신의 수하 뒤에 숨어 자신의 목소리를 감추는 자가 과연 황보세가의 직계라 할 수 있을까요?”
한빈은 황보세가라는 단어에 유난히 힘을 주었다.
한빈의 말에 적혈맹호대 대원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가장 먼저 목소리를 낸 것은 소대섭이었다.
“옳소!”
한빈을 바라보는 소대섭의 눈에는 아무 걱정이 없었다.
그의 두 눈에는 오직 기대감이 일렁일 뿐이었다.
지금의 장면은 어디에선가 많이 본 장면이었기 때문이다.
예상대로라면 이 내기의 승자는 한빈이 될 것이 분명했다.
소대섭의 뒤를 이어 조호가 목소리를 냈다.
“걸어라!”
“조호의 말이 맞다. 사내라면 한쪽 팔이 아니라 부랄 두 쪽이라도 걸어야 한다고 본다.”
그 말이 씨가 되었을까.
갑자기 모두가 땅에 병장기를 내리찍기 시작했다.
“걸어라!”
“걸어라!”
적혈맹호대의 무사뿐이 아니었다.
주변에 있는 황보세가의 식솔과 무사들도 이구동성으로 하나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그들의 목소리에 한빈은 흡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한참 동안 울리던 외침은 이제 잠잠해졌다.
모두가 집법당주인 황보서현을 바라보고 있다.
황보서현이 검을 치켜들며 외쳤다.
“내 검을 걸고 이 내기의 성립을 인정한다!”
졸지에 성립된 약속.
뒤쪽에서 구경하던 황보견우의 눈이 커졌다.
황보견우가 다급히 끼어들었다.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집법당주님.”
“할 얘기라도 있느냐?”
“제 뜻과는 관계없는 내기입니다.”
“그럼 증언을 철회하겠느냐?”
“…….”
황보견우는 말없이 송경운을 바라봤다.
시녀의 증언이 인정되지 않을 것도 감안한 함정이었다.
여기까지는 완벽하게 황보견우의 계획대로였다.
송경운이 등장하는 순간 한빈이 무릎을 꿇어야 했다.
그런데 갑자기 내기를 제안하다니.
그리고 이 불안감은 과연 뭐란 말인가?
황보견우가 아무 말 없이 쭈뼛대자 황보서현이 눈을 매섭게 떴다.
“인정하지 않는다.”
“당주님!”
“이제 그만!”
황보서현이 검집으로 황보견우를 막았다.
그녀는 집법당주로서 합당한 결정을 내린 것이었다.
송경운의 말이 맞다면 한빈의 한쪽 팔을 거두면서 이 일을 끝내면 되었다.
만약 송경운이 거짓을 고했다면?
그것은 그때 생각하면 그만이었다.
그때 한빈이 손가락을 튕겼다.
딱!
동시에 모두는 고개를 갸웃했다.
모두가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한빈이 시선을 모은 이유를 찾으려고 했지만,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때 한빈의 뒤에서 설화가 나타났다.
붉은색에 초록색 줄이 그어진 예쁜 경장을 입고 나타난 설화에 모습에 한빈을 뺀 나머지 이들은 고개를 갸웃했다.
한빈의 시녀인 설화가 등장했다고 해서 달라질 것은 아무것도 없으리라 생각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