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7화. 계가(計家)
갑자기 툭 튀어나온 황보만청을 본 심미호가 눈을 크게 떴다.
누군가가 한빈의 옆에 있으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던 그녀였다.
이번 작전명이 ‘도굴’이었으니 당연히 은밀함은 기본으로 깔고 갔어야 했다.
그런데 ‘도굴’이라 붙은 작전에서 왜 황보세가의 가주가 나온다는 말인가?
도굴을 주인 허락받고 하는 이상한 상황이 되어 버렸다.
심미호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표정을 본 한빈이 재빨리 나섰다.
“이쪽은 적혈맹호대의 부대주입니다.”
한빈이 심미호를 소개하자 황보만청이 사람 좋은 표정으로 말했다.
“그렇군, 나는 황보만청이라 하네.”
황보만청이 사람 좋은 얼굴로 먼저 인사하자 심미호가 재빨리 포권했다.
“가주님, 처음 뵙겠습니다. 저는 적혈맹호대 부대주 심미호라고 해요.”
“대단하군.”
“대단하다니요?”
“지금 벽을 뚫은 기술 말일세. 내 강호 경험이 적지는 않은 터인데, 이렇게 깔끔하게 벽을 뚫는 기술은 처음 보네. 혹시 광부 출신인가?”
“호호, 광부 출신은 아니에요.”
“허허, 그럼 더 대단하군. 이 수법에 대해서 내게 잠깐 귀띔해 줄 수 있겠는가?”
“…….”
심미호는 말없이 한빈을 바라봤다.
왜 이런 오해를 하는지 심미호는 황당했다.
황보만청은 이 통로를 심미호가 뚫었다고 오해하는 것 같았다.
그때 한빈이 슬쩍 눈짓을 한다.
대충 둘러대고 용돈이나 챙기라는 신호였다.
신호를 받은 심미호가 말했다.
“뭐, 나중에 말씀드릴게요. 그냥은 안 되고요.”
심미호가 엄지와 검지를 예쁘게 말아 쥐었다.
그 모습에 황보만청이 헛웃음을 터뜨렸다.
“허허.”
주인이나 수하나 속이 너무 똑같았다.
그 모습에 한빈이 웃었다.
한빈은 왜 이런 오해를 하는지 알고 있었다.
그것은 한빈이 시전한 반박귀진 때문이었다.
용린검법의 반박귀진이 놀라운 것은 평상시의 경지뿐 아니라 무공을 시전할 때의 경지도 철저하게 감춰 준다.
이것이 바로 오늘 알게 된, 반박귀진의 말도 안 되는 장점이었다.
지금 진룡파혼검을 사용했지만, 황보만청은 그 기세를 못 느꼈을 것이었다.
반면 실망스러운 점도 있었다.
바로 진룡파혼검의 활용이었다.
여의주를 문 용이 무쇠 벽 하나를 삭제하는 무시무시한 초식.
하지만, 실전에서 쓰기에는 무리였다.
기를 모을 시간을 기다려 주는 적은 세상에는 없으니까.
한빈은 진룡파혼검의 활용에 대해서는 조금 더 생각해야 했다.
상념을 마친 한빈은 심미호와 황보만청의 대화를 지켜보았다.
대충 보니 황보만청은 심미호에게 황금 한두 냥 정도는 털릴 것 같았다.
“오호, 그렇다는 말이지. 나중에 더 소상히 가르쳐 주게.”
“걱정하지 마세요, 가주님,”
조용히 심미호와 황보만청의 대화를 지켜보던 한빈이 급히 끼어들었다.
“일단 여기서 나가시는 게 먼저인 것 같습니다.”
말을 마친 한빈은 힐끔 황보만청의 등에 업힌 이 공자를 바라봤다.
한빈의 눈짓에 황보만청이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환자를 잊고 있었군. 빨리 안내하게.”
“네, 알겠습니다.”
한빈이 돌아서자 심미호가 재빨리 지도를 건넸다.
“여기 있어요. 주군이 그려 주신 통로에 제가 발견한 통로까지 표시해 뒀어요.”
“괜찮아. 대충 감으로 찾아가면 되니까.”
한빈이 손을 내저으며 앞장섰다.
“그래도 통로가 좀 복잡…….”
“괜찮아. 심 부대주, 내 감 믿지?”
“네, 믿긴 하지만요…….”
심미호가 말끝을 흐리자 한빈이 걸음을 재촉했다.
한빈은 이 통로를 어떻게 알고 있었던 것일까?
이치는 간단했다.
전생의 기억 덕분이다.
물론 귀검대 시절에는 황보세가의 정문을 통해 이곳을 조사하지 않았다.
마교의 흔적을 찾다 보니 우연히 가람산과 연공실이 이어진 통로를 찾았던 것.
심미호에게 그려 준 지도도 그때의 기억에 의한 것이었다.
한빈이 앞장서 통로를 빠져나갈 때 황보만청은 호기심을 억누르지 못하고 계속 심미호를 관찰했다.
황보만청이 보기에 심미호는 영락없는 광부였다.
곡괭이를 쥔 모습 또한 그리 자연스러울 수가 없었다.
황보만청은 지금 하나의 결심을 하게 되었다.
황보세가에도 특수한 작전을 펼칠 특작조를 편성해야겠다고 말이다.
* * *
다음 날, 가람산 중턱.
황보만청은 둘째 아들을 장자명에게 맡긴 후, 가문 내 일을 처리하고는 한빈의 요청으로 이곳 산기슭까지 왔다.
둘은 널찍한 바위를 탁자 삼아 차를 즐기고 있었다.
누가 보면 신선 둘이 지상에 내려왔다고 착각할 법한 모습이었다.
찻잔을 든 둘은 서로의 눈을 바라보고 있었다.
차향이 퍼져 나가는 만큼 어색함도 짙어졌다.
생명이 오락가락하던 것이 어제였다.
황보만청은 오대세가의 가주.
한빈은 오대세가 중 한 곳인 하북팽가의 소가주 후보에 불과했다.
신분의 차이는 그야말로 하늘과 땅 차이.
황보만청은 머리에 피도 안 마른 후기지수와 옷을 홀딱 벗고 같이 목욕한 느낌이었다.
이제 다시 평온을 찾자 살짝 어색함이 찾아온 것은 당연한 일일 수도 있었다.
물론 한빈은 어제와 마찬가지로 여유 있게 황보만청을 바라봤다.
잠시의 침묵이 오간 후 먼저 입을 연 것은 한빈이었다.
“이제부터 계가를 시작할까 합니다? 가주님.”
계가란 바둑을 끝내고 승부를 계산하는 과정을 말한다.
한빈의 말에 황보만청이 고개를 기울였다.
“계가라?”
“대국이 끝났으면 당연히 계가를 시작해야지 않을까요?”
“대국이 벌써 끝났는가?”
황보만청은 고개를 살짝 흔들었다.
그 모습에 한빈이 웃었다.
“이제 겨우 첫판이 끝난 것이지요.”
“굳이 계산한 필요가 있을까?”
“계가도 하고 복기도 해야 다음에는 이런 실수를 안 하겠죠.”
“실수라, 자네가 실수한 적이 있던가?”
“네, 마지막에 잡을 수 있는 대마(大魔)를 놓쳤죠.”
“하지만, 대마(大馬)를 살리기도 하지 않았나?”
“제가 힘쓴 게 뭐 있나요? 대마불사라는 바둑 명언 그대로 이루어진 거죠.”
“앞으로는 어떻게 하겠나?”
“대마즉사(大魔卽死)를 위해 힘을 써야겠지요.”
“대마불사와 대마즉사라…….”
황보만청은 하늘을 올려다보며 말끝을 흐렸다.
마치 자신의 어깨에 무거운 짐이라도 올려놓은 듯 부담을 가득 안은 표정이었다.
한빈은 얼굴에 미소를 띤 채 말을 이었다.
“중요한 건 저희가 바둑돌이 되어서는 안 될 것 같습니다.”
“나도 동의하네.”
황보만청이 고개를 끄덕였다.
둘이 주고받는 의미는 간단했다.
바둑판 위의 살아 있는 돌과 죽은 돌이 될 필요가 없이, 자신들이 바둑돌을 놓는 입장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찻잔을 앞에 두고 선문답 같은 계획을 주고받던 황보만청이 뭔가 생각났는지 눈을 빛냈다.
“자네가 연공실에서 한 마지막 말 말일세.”
“마지막 말이라니요?”
“황보세가의 전설이 진짜라고 했던 그 말이 조금 걸리네만…….”
“그러지 않아도 말씀드리려고 했습니다.”
“궁금하니 빨리 말해 주게, 황보세가의 진정한 힘을 그곳에서 봤는가?”
“네, 봤습니다.”
“그게 무엇인가?”
“저희를 위협했던 무쇠 덩이입니다.”
“그럼 기관 장치가 황보세가의 진정한 힘이라는 말인가?”
“혹시 그곳을 조사해 보지 않으셨습니까?”
“그건 자네가 책임지고 조사하기로 하지 않았던가? 자네 말대로 괜히 우리 쪽에서 건드려 봤자 비밀만 새어 나갈 가능성만 크네. 그리고 둘째의 상태를 살피느라 그쪽을 돌아볼 생각도 못 했다네.”
“네, 제가 볼 때는 그 무쇠는 보통 쇳덩이가 아닙니다.”
“보통 쇳덩이가 아니라고?”
황보만청은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그 모습에 한빈이 손을 저었다.
“그리 놀라지는 마시고요. 건강에 안 좋습니다. 그 쇠는 바로 흑철입니다.”
“흑철이면 남해의 보물이라 하는…….”
“네, 맞습니다. 좀 과장을 보태서 같은 크기의 진주만큼 비싸다는 그 흑철이 분명합니다.”
“허허.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가 있는가?”
“그 정도의 흑철이면 강북 무림에 변화를 일으키기에 충분하죠.”
황보만청의 눈가가 살짝 떨렸다.
한빈의 말이 사실이라면 그 파장은 어마어마했다.
자신을 깔아뭉갤 듯 떨어지던 흑철은 전각 하나를 덮고도 남을 양이었다.
세가의 힘을 잴 수 있는 저울이 있다면 가장 많은 영향을 미치는 것이 무엇일까?
이 질문에 강호인이라면 무력을 향상시킬 수 있는 영약과 비급을 꼽을 것이었다.
하지만, 여기에는 약간의 착오가 숨어 있었다.
비급을 보고 당장 내일 강해질 수 있을까?
영약을 먹으면 바로 상대를 압도할 수 있을까?
비급을 익힐 시간.
영약을 충분히 자신의 공력으로 흡수할 시간.
즉, 절대적인 시간이 필요하게 마련이었다.
하지만, 보검이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보검으로 상대의 무기를 반 토막 낸다면?
같은 경지 혹은 한 단계 정도 차이라면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였다.
한 가문의 무위가 비약적으로 상승할 기연이 굴러들어 온 것이다.
쿵. 쿵.
묘한 야망이 황보만청의 가슴을 두드렸다.
그때 한빈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그의 상념을 깨웠다.
“흑철도 반은 제 것이라는 거 아시죠? 어르신.”
“아…….”
황보만청은 옅은 탄성을 뱉어 냈다.
이제야 한빈과 맺은 계약이 떠오른 것이다.
한빈이 다시 한번 확인하려는 듯 말을 이었다.
“남아일언은…….”
“알았네, 중천금이라네. 황보세가의 가주가 두말을 할까?”
“네, 그럼 믿겠습니다.”
“알았네, 그리고 이것을 받게.”
가죽 주머니 하나를 쓱 내밀었다.
한빈이 묵철 바둑알을 담아 황보만청에게 준 주머니보다 몇 배 큰 주머니였다.
한빈은 본능적으로 그 주머니를 받았다.
그러고는 주머니를 슬쩍 열어 봤다.
“이게 뭡니까? 이건 제가 드린 묵철 바둑알이 아닙니까? 그런데 개수가…….”
“내가 가문에 남은 묵철을 갈아 넣었네.”
“그런데 왜 검은 돌뿐입니까?”
“백색 돌은 넉넉하게 만들어 내가 가지고 있다네.”
“한 가지 돌만 가지고 있으면 무용지물 아닌가요?”
“이 백색 돌은 자네와 만나서 둘 때만 사용하겠네.”
황보만청은 활짝 웃으며 자신의 옆에 가죽 주머니 하나를 더 놓고는 끈을 풀었다.
그곳에는 묵철과 은이 섞인 하얀 바둑알이 영롱한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그때였다.
누군가가 다급히 다가왔다.
한빈이 힐끔 고개를 돌려 보니 지금 날렵하게 뛰어오는 사람은 심미호였다.
한빈이 고개를 갸웃하자 옆으로 다가오던 심미호는 슬쩍 황보만청을 바라보고 포권했다.
그러고는 한빈의 귀에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주군, 와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무슨 일이야? 흑철은 천천히 나눠도 된다니까?”
“그게 아니라…….”
심미호는 더욱더 작은 목소리로 속삭이고는 자리를 떠났다.
심미호가 자리를 떠나자 한빈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어르신도 가 보셔야겠습니다.”
“흠. 앞장서게.”
황보만청이 손을 내밀었다.
한빈이 도착한 곳은 황보세가의 담장 너머에서 백 보 정도 떨어진 곳이었다.
그곳에는 물이 마른 우물이 있었다.
한빈은 정체불명의 무인이 이 우물을 통해 빠져나갔다고 생각하고 적혈맹호대에게 조용히 이곳을 수색할 것을 지시했다.
심미호의 안내를 받아 도착한 우물 안에는 여기저기 횃불이 꽂혀 있었다.
한빈이 용린검법의 초식을 운용했다.
‘전광석화.’
‘구걸십팔보.’
한빈이 풀 밟는 소리만 남기고 우물 안으로 사라졌다.
뒤쪽에서 팔짱을 끼고 바라보던 황보만청도 한빈의 뒤를 따랐다.
파박.
한빈의 예상대로 우물은 통로와 이어져 있었다.
몇 걸음 가던 한빈은 걸음을 멈췄다.
그러고는 작게 신음을 토했다.
“음.”
그 소리에 뒤따라 오던 황보만청이 물었다.
“왜 그러는가?”
“저쪽을 보십시오.”
한빈이 막힌 곳을 가리키자 황보만청도 침음을 흘렸다.
“흠.”
황보만청이 놀란 눈으로 바라보는 곳에서는 피가 웅덩이를 만들고 있었다.
하지만, 이미 굳어 가고 있는 상황.
한빈은 천천히 그곳으로 다가가 피 웅덩이를 만든 원인을 가리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