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0화. 와불 (3)
사람 좋은 얼굴을 하던 한빈의 표정이 진지하게 바뀌었다.
한빈은 부채를 품속에 넣었다 뺐다.
넣었던 부채는 지도가 그려진 것.
꺼낼 때는 물론 다른 부채였다.
한빈은 은밀히 살을 하나 부러뜨리며 외쳤다.
“어이쿠!”
“왜 그러세요? 공자님.”
설화가 장단을 맞추자 한빈이 말을 이었다.
“부챗살이 부러졌구나.”
“이리 줘 보세요. 저잣거리에 가면 고칠 수 있을 것 같은데…….”
한빈은 말끝을 흐리며 아무렇지도 않게 부채를 버렸다.
휙.
“그냥 둬. 남는 게 부챈데 뭐 하러 고쳐?”
“그래도…….”
“그냥 가자.”
부채를 버린 한빈은 설화와 함께 아무렇지도 않게 조용히 걷기 시작했다.
한빈과 설화가 사라지고 잠시 뒤.
검은 무복의 사내가 소리 없이 그 자리에 나타났다.
그 사내는 한빈이 떨어뜨리고 간 부채를 주워 들었다.
동시에 길가 옆 우뚝 솟은 나무 위에서 하얀 신형이 모습을 드러냈다.
스르륵.
하얀 무복을 입은 여인은 얇디얇은 나뭇가지 위에 다리를 꼬고 앉아 고개를 갸웃했다.
그때 검은 신형이 그녀의 옆에 나타났다.
스르륵.
검은 신형의 정체는 검은 무복을 입은 사내였다.
“뭘 그렇게 보고 있나? 누님.”
“하는 짓이 황당해서 그렇지. 그깟 부채를 왜 주워 온 거지?”
“수상한 놈들이 남기고 간 단서를 그냥 모른 체하라고?”
흑의 무복의 사내가 못마땅한 듯 여인을 바라봤다.
여인은 아무렇지도 않게 한빈이 사라진 곳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건 그렇고, 쟤네들이 눈치챈 것 같지 않아?”
“그건 불가능하지. 딱 보기에 계집년은 한 가닥 하는데, 저 젊은 놈에게는 한 톨의 내공도 느껴지지 않거든. 그런데 어떻게 우리의 기척을 눈치채?”
“그런가? 나는 저 젊은 사내놈이 좀 더 거슬리는데…….”
백색 무복의 여인이 눈매를 좁히자 검은 무복의 사내가 못마땅한 듯 고개를 흔들었다.
“그건 누님이 사내만 보면 눈 돌아가서 그런 걸 거고. 지금은 사고 치지 마. 임무가 먼저니까. 수상해서 따라오긴 했는데, 아무것도 없으니 오늘은 여기까지.”
말을 마친 흑색 무복의 사내는 나뭇가지 위에서 자신이 주워 온 부채를 펼쳤다.
아무렇지도 않게 부채를 펼쳤던 검은 무복의 사내의 손이 살짝 떨렸다.
“정삼품 이한희의 산수화…….”
검은 무복의 사내가 분노한 표정으로 말끝을 흐리자 여인이 다시 물었다.
“뭐라고?”
“이건 분명히 이한희의 그림이 틀림없어. 이걸 버린다고? 정삼품 이한희의 산수화를?”
검은 무복의 사내는 고개를 돌려 한빈이 사라진 방향을 바라봤다.
백색 무복의 여인이 물었다.
“나는 부채에 달린 옥빛 장신구가 마음에 드는데.”
여인의 말에 사내는 아무렇지도 않게 부채에 달린 옥을 떼어 내어 내밀었다.
“이건 누님이 가지슈. 나는 이 그림만 있으면 되니.”
“그 그림이 대단하긴 대단한가 보네.”
“붓 하나로 정삼품의 벼슬에 올랐다고 해서 중원에서는 그를 정삼품으로 부르지. 살아 있는 화가 중에는 천재 중에 천재. 돈으로는 살 수 없는 정삼품의 작품을 버렸다고……. 쓰레기 같은 놈. 저런 놈은 눈여겨볼 필요는 없지. 없어. 아무것도 모르는 부잣집 망나니가 틀림없어.”
사내는 한빈이 사라진 곳을 보며 고개를 흔들었다.
그것도 잠시 사내는 부채를 품속에 고이 집어넣었다.
그 모습에 여인이 말했다.
“얘야, 길거리에 떨어진 거 주워 먹는 거 아니다.”
놀리듯 말하면서도 여인은 부채에서 떼어 낸 옥 장식을 품에 넣었다.
검은 무복의 사내는 여인이 못마땅한 듯 쏘아붙였다.
“지나가다가 젊은 남자라면 아무 때나 손을 뻗치는 누님이 제게 할 소리는 아니지 않습니까? 그리고 이제는 팔선의 체면을 지킬 때도 되지 않았소?”
“내가 언제 체면을 안 지켰다고 그래? 호호.”
손을 흔든 여인은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스르륵.
검은 무복의 사내도 함께 사라졌다.
* * *
두 시진 뒤.
해가 붉은 꼬리를 물고 사라질 때 한빈과 설화는 와불이 보이는 저잣거리에 다시 나타났다.
한빈은 세수하듯 얼굴을 쓸어내리며 나지막이 외쳤다.
“휴, 십년감수했네!”
이건 반쯤은 진심이었다.
정체 모를 고수 둘과 대책 없이 맞붙는다?
그것은 한빈이 원하는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미끼를 던져 놓고 자리를 떠난 것이었다.
그 후 기척이 느껴지지 않는 것으로 봐서는 일단 성공한 것이 틀림없었다.
하지만, 반박귀진을 오랜 시간 사용하는 바람에 생긴 피로감은 어쩔 수 없었다.
한빈은 조용히 다루를 바라보며 외쳤다.
“자, 이제 서서히 일할 시간이 됐네!”
“네, 공자님. 먼저 출발하세요.”
말을 마친 설화의 신형이 자리에서 사라졌다.
물론 한빈의 모습도 그 자리에 남아 있지 않았다.
한빈과 설화가 다시 나타난 곳은 다루의 뒤뜰이었다.
설화는 약간 놀란 듯 한빈을 바라봤다.
“아까 우리 뒤를 밟았다는 고수가 여기에 있는 건 아니겠죠?”
“그건 염려 안 해도 된다. 내 느낌은 정확하니까.”
“아, 느낌이요?”
이것은 설화에게도 설명할 수 없는 영업 비밀이었다.
철전에 발라 놓은 향과 떨어뜨린 부채에 묻힌 향은 달랐다.
한빈이 구별할 수 있는 천리추종향은 다섯 개가 한계였다.
이것은 전생에도 강호를 통틀어 한빈이 유일했다.
이젠 사냥개의 본능을 발휘할 때였다.
한빈은 지그시 웃었다.
“일단은 이 일에만 집중하자.”
말을 마친 한빈은 마무리를 위해 분주히 움직이는 사람들을 눈에 담았다.
일부 일꾼들에게서는 일류 정도 되는 기세가 느껴진다.
이곳 다루도 평범한 곳은 아니라는 이야기.
아마도 보물을 지키려는 자의 무리가 운영하는 곳일 것이다.
뭐, 그 보물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한빈은 날이 질 때까지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았다.
설화도 특급 살수답게 기척을 죽이고 그늘에서 일꾼들이 오가는 것을 바라봤다.
뒤뜰이 완전히 어둠에 싸이자 호롱불 하나가 움직였다.
호롱불에 얼핏 비친 모습으로는 점소이였다.
점소이는 호롱불을 한빈이 있는 우물 쪽으로 비춰 봤다.
그러고는 고개를 갸웃하더니 우물 쪽으로 다가왔다.
한빈은 최대한 숨을 죽였다.
제압해야 할까?
한빈은 잠시 망설였다.
그것은 타초경사의 우를 범하는 일이었다.
한빈이 고민하는 순간 조그만 쥐가 한빈의 옆을 지나간다.
찍찍.
그 쥐를 본 점소이가 마음을 놨다는 표정으로 한숨을 쉬었다.
그러고는 주변을 둘러보더니 돌아섰다.
점소이가 향한 것은 우물의 반대쪽 구석에 붙어 있는 창고였다.
한눈에도 허름해 보이는 창고로 점소이는 발소리를 죽여 가며 걸어갔다.
점소이는 다시 주변을 쓱 둘러봤다.
조심성 하나만큼은 고수라 할 수 있었다.
한참 동안 주변을 확인하던 점소이는 창고로 들어갔다.
설화가 바로 그를 쫓으려 하자 한빈이 재빨리 그녀의 소매를 잡았다.
그러고는 검지를 흔들었다.
아직 때가 아니라는 신호였다.
창고 안에 비밀 공간이 있다 한들 저렇게 조심스러운 점소이가 바로 들어갈까?
절대 그렇지 않을 것이었다.
한빈은 최대한 창고 쪽으로 귀를 기울였다.
차 한 잔 마실 시간이 지나자 한빈은 설화를 바라봤다.
창고 안의 변화를 감지한 것이다.
한빈이 설화에게 말했다.
“너는 이곳을 지켜라.”
“저도 같이 갈래요.”
설화가 부탁하듯 말하자 한빈이 손을 흔들었다.
“둘이서 행동하기에는 무리가 있으니, 너는 여기서 더 중요한 일을 맡아 줘.”
한빈의 말에 설화가 눈을 빛냈다.
“어떤 일이요?”
“다섯 시진이 지나서도 내가 안 돌아온다면…….”
한빈이 말끝을 흐리며 잠시 고민하자 설화가 물었다.
“적혈맹호대 대원들에게 알릴까요?”
한빈이 결심한 듯 말했다.
“아니, 사부님께만 알려. 다른 곳에는 절대 말하지 말고.”
“네, 알았어요. 공자님.”
“그럼 부탁할게, 설화야.”
한빈은 그 말을 마지막으로 풀잎 밟는 소리만 남기고 사라졌다.
사사삭.
흐려지는 한빈의 그림자를 본 설화는 눈도 깜빡이지 않았다.
조금의 실수도 안 하겠다는 표정으로 창고를 바라봤다.
* * *
한빈이 다시 나타난 곳은 창고 아래 있는 지하 통로였다.
한빈은 기척을 최대한 죽이고 상대의 뒤를 밟았다.
일렁이는 횃불에 한 사내의 뒷모습이 보이자 한빈은 조금 속도를 늦추었다.
한빈은 통로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점소이의 뒤를 밟았다.
다행히도 통로에 별도의 기관 장치는 없었다.
조금 놀라운 것은 통로가 제법 넓다는 점이었다.
마치 군대를 동원해서 만들어 놓은 것처럼 각이 잘 잡혀 마무리되어 있었다.
통로가 무너지지 않게 대 놓은 부목들을 자세히 보면 어찌나 기름칠을 잘해 놨는지 습기에 대한 방비까지 되어 있었다.
즉, 전문가의 솜씨라는 것이었다.
한빈이 가지고 있는 전생의 경험은 제법 양이 많았다.
하지만, 장운현에서 이런 통로가 발견되었다는 이야기는 듣지 못했다.
한빈이 최대한 기감을 끌어올리며 점소이를 추격했다.
얼마나 따라갔을까?
점소이는 넓은 공간이 나오자 발길을 멈췄다.
그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더니 벽 쪽으로 다가갔다.
그러고는 벽 쪽에 달려 있는 줄을 잡아당겼다.
순간 묘한 소리가 벽 쪽에서 울렸다.
팅.
팅.
잠시 동안 소리가 울리자 점소이는 벽 쪽의 한 부분을 손으로 톡 쳤다.
순간 숨겨진 조그만 문이 열렸다.
문을 연 점소이는 그곳에서 자루를 꺼냈다.
그러고는 새로운 자루를 안에 넣어 뒀다.
그 모습을 본 한빈은 자신도 모르게 입맛을 다셨다.
와불의 손바닥에서 동전을 수거하는 방식이 상상을 초월했기 때문이었다.
점소이는 자루를 벽에 붙은 조그만 선반에 풀어놓았다.
그러고는 자루 속에서 철전을 골라내기 시작했다.
골라낸 철전은 다른 철전과는 조금 모양이 달랐다.
한빈이 낮에 본 대로 살짝 훼손된 철전들이었다.
점소이는 그 철전을 조심스럽게 일렬로 늘어놓았다.
한빈은 기척을 죽이고 점소이의 뒤로 다가갔다.
한빈의 동작이 얼마나 은밀한지 점소이는 뒤에 누군가가 왔다는 것을 알아채지 못했다.
점소이는 계속 철전을 순서대로 배열하는 작업을 했다.
점소이는 작업이 끝나자 팔짱을 끼고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그가 왔다고? 그가 왔다니!”
점소이는 대단한 정보를 받았다는 듯 계속 같은 단어를 뱉었다.
한빈은 고개를 갸웃했다.
점소이의 목소리가 달라졌기 때문이다.
점소이는 마치 노름꾼이 패를 수거하듯 철전을 쓸어 담았다.
쓱.
철전을 한 손에 쥔 점소이는 자루에 철전을 다시 넣었다.
사람들이 소원을 빌며 담은 철전과 섞은 것이다.
그 모습을 보던 한빈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물었다.
“오늘은 얼마 벌었어?”
“벌다니 무슨…….”
점소이는 무심코 답하다가 말끝을 흐렸다.
황급히 고개를 돌린 점소이의 눈이 커졌다.
활짝 웃으며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한빈을 발견한 것이다.
점소이가 어깨를 움찔하며 외쳤다.
“누, 누구냐!”
그 목소리에 한빈이 재차 고개를 갸웃했다.
점소이의 목소리가 다시 한번 달라졌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목소리를 숨기고 있는 것이었다.
지금까지의 목소리도 본래의 목소리가 아닐 가능성이 컸다.
물론 지금의 얼굴도 본모습을 아닐 터.
강호에서 변장술의 천재들을 꼽으라면 꽤 많았다.
그중에는 전생의 한빈도 포함된다.
하지만, 변장술을 예술의 경지까지 승화한 것은 중원 역사상 딱 한 명밖에 없었다.
설마?
한빈이 눈을 가늘게 뜨자 점소이는 주춤주춤 뒷걸음쳤다.
한참을 보던 한빈의 눈빛이 바뀌었다.
그 눈빛이 나타내는 감정은 반가움이었다.
그것은 문득 떠오른 인물 때문만은 아니었다.
상대의 어깨 부근에서 일렁이는 점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구결을 나타내는 점을 발견한 한빈은 재빨리 용린검법의 초식을 운용했다.
‘전광석화.’
‘구걸십팔보.’
그와 동시에 점소이가 발을 굴렀다.
쿵.